〈 160화 〉 미안해 우리가 잘못했어. 제발 가지 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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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코 있던 유리 사원도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한다.
“진짜 다들 너무들 했어요. 우리 시현 오빠가, 미희 주임님이랑, 다정 차장님 때문에 고생한 거 생각하면 진짜 저도 분해서 치가 다 떨릴 정도인데. 시현 오빠는 어땠겠어요? 진짜 차장님이랑 주임님은 시현 오빠 앞에서 대가리 박고 반성 좀 해야 해요.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우리 시현 오빠한테 그렇게 파렴치한 짓을 할 수 있어요?”
유리 사원의 지적질에 미희 주임과 다정 차장이 으르렁 거리며 다들 한 마디씩 한다.
“유리씨! 지금 유리씨가 우리한테 뭐라고 할 처지야? 우리 시현이랑 같은 신입사원이면서 여우처럼 잔머리만 굴리면서 힘든 일은 시현이에게 다 떠 맡겼던 주제에. 누가 누굴 탓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보고 짖는다고. 진짜 유리씨. 부끄러운 줄 알아! 아영 팀장이 유리씨를 예뻐해서 내가 그동안 말을 못했는데, 진짜 세상 그렇게 좆같이 살지 마! 천벌 받는다. 천벌!”
“그래, 이 서유리 썅년아. 나랑 우리 시현씨랑 단 둘이서 술 마실 때, 시현씨가 너 서유리 썅년 때문에 얼마나 힘들다고 했는지 알아? 진짜. 입사 동기가 괜히 입사 동기야? 힘든 일 있을 때는 같이 일하고 위로해 주는 게 입사 동기 아니야? 하여간....... 어떻게든 상사들 눈에 들어서 위로 올라가고 싶어서 눈이 시뻘개가지고. 덕분에 우리 시현씨만........ 시현씨만..... 아, 진짜. 내가 우리 시현씨가 너 서유리 썅년 때문에 고생한 거 생각하면. 내가 주책없이 눈물이 나와서 더 이상 말을 못하겠다. 말을 못 하겠어!”
김미희 주임과 최다정 차장의 지적질에 서유리 사원이 부르르 몸을 떨며 화를 내려다가........ 갑자기 눈물을 왈콱 쏟았다.
그리고는 흐느끼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요. 다 맞는 말이에요. 저 때문에 우리 시현오빠 고생했던 거 생각하면. 진짜 저. 돌로 처 맞아 죽어도 할 말 없어요. 저. 저 요즘 시현오빠가 했던 일. 제가 대신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 때는 진짜 몰랐어요. 우리 시현 오빠가 혼자서 회사를 위해 얼마만큼의 무게를 지고 있었는지. 진짜.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야근을 해도 다 못할 정도의 업무량을 우리 시현 오빠 혼자서 짊어지고 있었어요. 저는 진짜 몰랐어요. 오빠가 왜 주말에도 회사에 나오고. 그렇게 살았는지. 그런 오빠를. 그렇게 힘든 오빠를. 매일 괴롭히고. 못 살게 굴고. 험한 말하고. 진짜........ 제가 죽일 년이에요. 제가..........”
끝내 고개를 푹 숙이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서유리.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인 서유리를 보며 최다정 차장도 휴우...... 하고 한 숨을 쉰다.
사실 서유리의 지적질에 발끈해서 서유리를 까고 보았지만, 이세계의 유시현에게 했던 파렴치한 만행은 최다정 차장이나 김미희 주임. 아영팀장. 누구하나 다르지 않았으니까.
최다정 차장이 풀 죽은 서유리의 어깨를 토닥인다.
“아니야. 유리씨. 시현씨가 회사에서 혼자 짊어졌던 무게. 나도 요즘 느끼고 있는 걸. 시현씨는 10분이던 하던 업무. 내가 하니까 1시간이 넘게 걸리더라. 정말........ 내가 미친년이었나 봐. 혼자서 우리 팀 업무를 도맡다시피 하던 시현씨 가스라이팅이나 해대고. 나 때문에 우리 시현씨 회사라도 그만 두었어 봐. 진짜. 어쩔 뻔 했어? 시현씨 회사 그만뒀으면. 다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시현씨가 하던 그 막대한 업무들을 물려받아서 패닉에 빠졌을 걸. 시현씨가 하던 일 감당 못하고 아마 우리 개발사업부팀 자체가 없어졌을지도 몰라. 내가. 씨발. 그래. 진짜....... 진짜. 나쁜년은 나야. 다들 미안해. 내일 회사에 가면 당장 시현씨 앞에서 무릎 꿇고 싹싹 두 손으로 빌면서 잘못을 빌게. 시현씨한테 용서는 못 받을지라도. 그래야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것..........”
김미희 주임도 최다정 차장의 말을 중간에 말을 끊으며 양손으로 자신의 조막만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감싼다.
“아니야. 유리씨. 다정씨. 다 들 알잖아. 우리 시현이 사수 나였던 거. 내가 미친년이지. 진짜. 씨발. 이 미친년아. 진짜 왜 그런 거야! 김미희!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니!”
스스로를 자책하며 김미희 주임이 흐느끼며 말을 잇는다.
“사수라는 주제에, 업무는 가르쳐주지도 않고 알아서 하라고 하면서 시현이 힘든 일만 다 시키고. 꼴에 자존심만 쎄 가지고. 시현씨가 아무리 알아듣게 설명해 줘도 빡빡 우기기나 하고. 진짜 우리 시현이가 이해심 넓고 총명한 남자가 아니었으면 나 같은 벌레 같은 년 때문에 괜히 우리 시현이만 회사 그만 뒀을 거 아니야. 그랬으면, 만약 그렇게 됐으면. 나 진짜 회사 어떻게 다녔을까? 아무리 후회하고 붙잡아도 시현이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현이가 회사를 떠난다.
시현이가 회사에 없다.
시현이를 볼 수 없다.
그 상상만으로도 김미희 주임, 서유리 사원, 최다정 차장은 오한이 들 정도로 간담이 써늘하고 심장이 아려왔다.
이제 그녀들은 유시현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시현이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한 번 자신들이 유시현에게 저질렀던 과거의 파렴치한 만행들을 생각하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혹시, 시현씨가 우리의 과거 잘 못 때문에 갑자기 회사를 떠난다고 하면 어떡하지?”
최다정 차장이 붉은색으로 섹시하게 매니큐어 된 손톱을 깨물며 불안해한다.
“서, 설마요. 그럴 리가 없어요. 적어도 내 얼굴을 봐서라도 시현오빠가 그렇게 갑자기 회사를 그만 둘리 없어요!”
서유리가 다른 팀원들을 바라보며 힘겹게 말을 꺼낸다.
“그런데 차장님, 주임님. 팀장님. 요즘 시현오빠 행동이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마치 회사 따위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 어떻게든 악착같이 회사를 다니려던 예전의 시현오빠와는 너무 다르지 않아요?”
사실 서유리는 유시현이 자신을 어떻게 노예로서 길들였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시현이 자신에게 한 짓은 너무 도박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유시현의 계획에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었다면, 아직 유시현에게 길들여지지 않았던 서유리에 의해 유시현은 회사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을 거다.
서유리 사원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서 한다.
“거기다가 회의 준비라던가. 리서치 샘플 관리라던가 하는 원래 시현오빠가 하던 업무를 인수인계 해 주는 것도 이상하고요.”
김미희 주임도 불안한지 양손을 깍지 낀 체 초조한 눈빛으로 다른 팀원들을 바라보며 말한다.
“맞아. 나도 요즘 시현이한테 업무를 인수인계 받고 있는데. 그 업무양이 장난 아니더라고. 마치, 마치......... 자신이 맡고 있던 업무를 다 알려주려는 것 같았어.”
최다정 차장도 김미희 주임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저도, 요즘. 시현씨가 해 오던 업무 인수인계 받고 있는데요.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서 한 번에 다 이해는 못하지만, 시현씨가 자세하게 문서파일까지 만들어서 설명해주는지라 머리 나쁜 나도 천천히는 이해가 가더라고요.”
지금은 사원이지만, 곧 있으면 팀장으로 돌아갈 아영팀장도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게. 나를 팀장에서 사원으로 일주일 동안 강등시킨 건 괘씸하지만. 팀장 업무는 꽤나 적극적으로 하고 있던 걸. 팀원들 관리 분서 매뉴얼이라던가. 해외업무 매뉴얼이라던가. 따로 불러서 작성법도 알려주고. 마치 회사를 곧 떠날 것처럼.”
회사를 곧 떠날 것처럼.
이라는 말이 비수처럼 팀원들의 가슴에 박혀온다.
김미희 주임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팀 이번 인사개편 때. 한 명은 나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거 시현씨가 가장 큰 권한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아는데. 설마........ 설마. 시현이가. 모든 짐을 짊어지고 우리를 위해서..........”
그 다음 말은 굳이 김미희 주임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책임감이 강하고 팀에서 항상 힘든 일을 도맡아 하던 유시현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시현씨가. 우리한테 아무런 예고도 없이 회사를 떠날 사람이 아니잖아.”
최다정 차장이 아름답고 윤기가 흐르는 그녀의 검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부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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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맞아. 아니야. 시현 오빠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회사를 떠나다니.
그건 정말 말도 안 돼!
책임감이 강한 평소의 유시현을 생각 할 때 예고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스스로 퇴사를 할 리가 없어!
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시현이가 자신에게 준 슬리퍼를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서유리.
그렇게 유시현이 준 선물을 누군가를 그리워하듯 바라보다, 머리를 스치는 불길한 예감.
서유리의 깊고 아름다운 검은색 동공이 갑자기 크게 커졌다.
그리고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
서유리의 붉은 입술도 덜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김미희 주임과 최다정 차장이 서유리를 바라본다.
고개를 흔들며 부정해 보는 서유리 사원.
하지만 한 번 스치듯 생각난 불길한 예감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천천히 그녀가 최다정 차장, 김미희 주임을 바라보며 힘들게 입술을 떼기 시작한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현실이 될 것 같아 꺼내기 쉽지 않은 말이었지만.
그 생각을 혼자 감당하기는 서유리에겐 너무 버거웠다.
“호, 혹시.........”
서유리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부정해 본다.
“정말그냥....... 갑자기 생각난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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