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미안해 우리가 잘못했어. 제발 가지 마!(1)
* * *
“아영씨! 사용자 이용분석 보고서 작성 다 했어요?”
미영 대리가 날카롭게 아영 사원을 향해 소리친다.
“아, 아니요. 미영대리님. 업무 주신지 10분밖에 안 지났잖아요. 그 걸 어떻게 10분만에 다 해요.”
“뭐라고요? 지금 장난해요? 10분 밖에가 아니라 10분이나 줬는데, 아직도 못했다고요? 씨발. 팀장도 하고 근무 경력 6년차가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 만들어요? 진짜 어이가 없네. 어이가 없어. 그거 이리 줘 봐요.”
미영대리가 아영사원의 자리로 다가와서는 그녀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보고서 파일을 집어 든다.
“아영씨. 이거 내가 5분 안에 다 작성하면 어떡할 건데?”
아영 사원도 지지 않고 미영대리에게 대든다.
“5분 안에 다 하면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줄게요. 대신에 5분 안에 다 못하면.......”
아영 사원이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갈색 서류철을 바라보며 말한다.
“이 서류철로 머리 맞기 어때요?”
“콜! 5분 안에 이용분석 보고서 작성 다하면 아영씨도 서류철로 머리 맞기다. 알겠지?”
마치 용과 호랑이가 으르렁 대며 싸우는 것 같다.
내가 끼어들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다.
잠시 후 이어지는 보고서 작성 대결.
타다닥! 타닥! 투다다다다!
미영 대리의 손가락이 안 보일정도로 빠르게 움직인다.
군대에서 행정병 생활을 했던 내가 봐도 저건 예사솜씨가 아니다.
꼴까닥.
그런 미영 대리의 손놀림을 보며 아영사원이 침을 삼킨다.
3분 50초!
정확하게 4분이되기도 전에 미영 대리가 보고서 작성을 끝마쳤다.
그것도 완벽한 양식으로 작성된 깔끔한 보고서였다.
“자, 이제 머리 딱 대! 아영씨”
아영 사원이 억울한지 큰 눈을 치켜뜨며 날카롭게 말한다.
“알겠으니까 빨리 때려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침까지만 해도 미영 대리에게 끌려만 다니던 아영 사원이 질 수 없다는 눈빛으로 미영대리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흑채로 10년은 젊어진 동철과장.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만면에 띠고 있다.
미영 대리가 갈색 서류철을 들고 아영사원의 귀에 속삭인다.
“눈 감아라. 그래야 덜 아플 테니까.”
“됐거든. 눈 감으면 모서리로 찍으려고 그러지?”
“씨발. 눈치는 빠르네? 여우라서 그런가?”
그리고 가차 없이 서류철을 위로 높이 들어 올려서는 아영 사원의 머리를 강타했다.
빠각!
서류철이 빠개질 정도로 큰 타격음!
아영 사원이 머리를 양 손으로 붙잡고 눈물을 찔끔 거린다.
하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미영대리에게 머리를 들이 밀며 말한다.
“씨발. 다른 내기 해! 이번에는. 지는 쪽이 딱 밤 맞기.”
하아.......
유치해서 미치겠네.
오늘은 아영 사원도 미영대리도 잠을 제대로 못자서 그런지 신경이 날카롭다.
아영 사원의 조교는 내일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이런 날 괜히 조교한다고 건드리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더군다나 내가 아니라 미영대리가 오늘은 아영 사원의 조교를 대신해주고 있으니까.
하암.......
고양이가 기지개를 피듯 양 손을 쭉 뻗으며 하품을 했다.
나른한 오후다.
다음 주에 있을 컨퍼런스 준비를 하며 업무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 덧 시간은 오후 5시.
퇴근 시간이 다 되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팀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다들 퇴근하세요.
“네. 팀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팀원들이 하나 둘 씩 짐을 싸기 시작했다.
* * * * *
유시현 팀장이 퇴근을 하자, 아영 팀장이 남녀가 역전된 세계로 평행이동 한 여사원들에게 카통을 날렸다.
[다들 스탈벅스에서 커피 한 잔 하죠? 제가 쏘겠습니다.]
남녀가 역전이 되기 전 세상처럼 남자 팀원들 뒷다마 까기가 마려운 아영 사원이 여직원 커피타임을 신청한 것이다.
사실 오늘은 남자직원 뒷다마 보다는 다른 목적이 있기는 하지만.
[알겠어요. 스탈벅스에서 10분 후에 봐요.]
김미희 주임, 서유리 사원, 최다정 차장 모두가 동의했다.
그리고 10분 후........
저녁의 스탈벅스는 남자들로 가득 차 있다.
사실 남자들이 스탈벅스에 가는 이유는 꼭 커피 맛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쁘게 사진을 찍어서 인스탈그램에 올리거나 페이스북에 올리기 위해서다.
남녀가 역전된 세계의 남자들은 고상하고 우아한 이미지의 사진을 자신들의 소셜 계정에 올리는 것을 즐긴다.
“하아, 스탈벅스에 남자 진짜 많네. 남자 새끼들 다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네.”
아영사원이 소파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아영씨.”
서유리사원이 맞장구를 친다.
하지만 오늘따라 아영 팀장의 기분이 저기압이다.
“아영씨? 서유리씨. 정신 똑바로 안 차려요. 제가 사원인 것도 며칠 안 남았어요. 다음 주 부터는 다시 팀장인거 설마 모르는 건 아닐 테고. 씨발. 유시현 개새끼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아. 예. 팀장님. 알죠.......”
사실 아영사원이 신입사원으로 지내는 것도 이번 주 금요일까지다.
그러니까 지금은 비록 신입사원이지만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그나저나 이미영이 씨발년. 진짜. 남녀역전 세계의 여자들은 다 그 년처럼 개진상인가? 피지컬만 믿고 얼마나 나한테 개지랄을 하는지. 하아. 원래 있던 세계에서는 파견직 대라라서 나한테 꼼짝도 못했던 주제에. 어제부터 하루 종일 그년한테 시달린 거 생각하면 진짜 치가 다 떨리네.”
최다정 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친다.
“맞아요. 팀장님. 그 년 왜 그런지 몰라. 뭐 든든한 빽이라도 있나? 다음주부터 팀장님 다시 복귀하면 개피 볼 텐데. 너무 기어오르더라. 진짜.”
“그쵸?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나저나 최다정 차장은 어제는 왜 회사에 안 나왔어요? 몸이라도 아팠어요?”
최다정 차장이 망설이며 대답한다.
“아, 예. 그냥. 가슴이 좀 아파서요. 요즘 예민한 시기라 그런가........”
“어머. 어머. 설마 유방암 이런 건 아니겠죠? 병원에는 가 봤어요?”
“아, 아니에요. 그렇게 심각한 건. 그나저나 김미희 주임은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영 표정이 안 좋네. 나 어제 하루 안 나온 사이에 무슨일 있었던 거야?”
김미희 주임이 아영 사원을 바라보며 입을 삐죽거린다.
“네. 무슨 일이 있었죠. 아영 사원이랑 서유리 사원이 사이좋게 저를 필리핀 빈민가로 보내려고 작당했었거든요.”
“필리핀 빈민가?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필리핀 빈민가라는 말에 아영 사원이 두 손을 모으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미안해. 미희씨. 진짜 나랑 서유리 사원이 잘 못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주라. 응? 내가 이렇게 사과할게.”
“저도. 죄송합니다. 김미희 주임님.”
서유리 사원도 고개를 푹 숙이며 진심어린 사과를 한다.
그제야 김미희 주임도 화가 좀 풀렸는지 피식 웃는다.
“아, 됐어요. 됐어. 사람 부끄럽게. 뭘 그렇게 정중하게 사과를 다하고.”
“미희씨. 이제야 좀 웃네? 미안해. 진짜. 우리 원래 이런 사이 아니잖아. 그치? 사실 이게 다..........”
아영 사원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말을 이어서 한다.
“사실 이게. 전부 그 유시현 그 개새끼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니야. 그 새끼 아니었으면, 김미희 주임이 왜 필리핀 빈민가로 파견근무를 떠나고. 내가 왜 신입사원이 되어서 이 개고생을 하고 있겠어? 다들 안 그래?”
하지만 유시현이라는 말이 나오자, 김미희 주임. 최다정 차장. 서유리 사원.
모두다 일순간 표정이 얼어붙는다.
마치 집단최면에라도 걸린 것 처럼.
그리고는 묘한 표정으로 아영 사원을 바라보며 다들 한 마디씩 하기 시작한다.
“그게 꼭 사실. 유시현씨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아요? 필리핀 빈민가로 파견 나가는 것도 어차피 우리팀에서 한 명은 꼭 가야 하는 것이었고. 사실 유시현씨 아니었으면 저 필리핀 빈민가에서 개고생하면서 몇 년 썩을 뻔 했는데, 그나마 유시현씨 때문에 15일간 자원봉사 하는 걸로 끝났는데요.”
김미희 주임의 말에 최다정 차장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한다.
“그런 일도 있었어요? 내가 어제 회사에 안 나와서 몰랐구나. 그러면....... 우리 시현씨가 나 회사 안 나왔다고 나는 필리핀 빈민가 파견근무 후보에서 제외시켜 준 거예요? 어머....... 역시 시현씨.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내일은 고맙다고 선물이라도 하나 사가야겠네. 뭘 사가야 우리 시현씨가 좋아할라나.”
최다정 차장의 말에 서유리사원이 발끈하며 말한다.
“치. 그런 거 아니거든요. 우리 시현씨가 나를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하는데요. 이거 보이죠? 이거?”
서유리 사원이 발을 살짝 들어서 신고있는 슬리퍼를 모두에게 보여준다.
“어? 그거 뭐에요? 왜, 슬리퍼를 신고 스탈벅스에 와요. 유리씨. 촌스럽게.”
아영 사원이 눈치 없이 말했다.
그러자 곧바로 서유리 사원이 분노한 표정으로 말한다.
“촌스럽다니요! 이게 바로 우리 시현씨가 저에게만 특별히 준 건강지압 슬리퍼거든요. 시현씨가 얼마나 저를 특별하게 생각하면, 저 건강해지라고 지압 슬리퍼까지 선물해 줬겠어요. 이거 아마도 우리 수줍음 많은 시현씨가 저랑 건강하게 100년 10,000년 같이 살자고 선물로 고백한 거 아니겠어요? 진짜. 우리 시현씨도 참 꼭 이렇게까지 안 해도 그 마음 다 아는데........”
서유리 사원이 유시현의 잘생기고 귀여운 얼굴을 떠 올리며 볼을 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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