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걸레들 노예 조련(2)
* * *
“팀장님 오셨습니까!”
어? 아영사원의 말투가 원래 이랬나?
눈은 피곤해서 풀려있고 옷은 어제 입었던 옷차림 그대로.
분명히 뺀질거리며 피곤하다고 짜증을 내야 하는데, 기합이 제대로 들어가 있다.
“팀장님 어서 오세요.”
미영 사원이 반듯하게 일자로 자른 앞머리를 찰랑거리며 인사를 한다.
“네, 그런데 두 분 피곤해 보이시는데? 어제 집에 안 들어갔어요?”
그때 미영사원이 서랍을 열어서는 수줍게 선물 상자 하나를 나에게 건넨다.
“팀장님. 어제 아영이랑 전라남도 보성에 가서 보성 녹차 구해 왔습니다! 우리 이은우 상무님 통해서 사장님께 전달 부탁드립니다. 팀장님.”
헐.......
씨발, 무서운 미영대리 같으니라고.
진짜 악마는 여기있었구나.
솔직히 어제 퇴근할 때 까지만 해도 그냥 미영대리가 아영사원 군기 잡으려고 해본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진짜로 아영사원을 데리고 전라남도 보성까지 갔다가 왔단 말이야?
그것도 퇴근하고 그 늦은 저녁에?
“아, 예. 그렇게 하지요.”
나는 혀를 내 두르며 미영대리가 건넨 보성녹차 선물상자를 받아들었다.
“팀장님 그 선물상자 안에 카드도 있거든요. 한 번 체크해 보시죠.”
“그래요?”
나는 보성녹차 선물 상자 안에 들어있는 앙증맞은 카드를 꺼내서 열어보았다.
카드 안에는........
[상무님. 저희 개발 사업부 유시현 팀장. 이미영대리. 김동철과장이 직접 전라남도 보성까지 가서 사온 정성이 담긴 보성녹차입니다. 꼭 녹차를 좋아하시는 사장님께 저희 성의의 표시를 전달 부탁드립니다. ps 이은우 상무님께도 감사의 표시로 녹차 선물 한 박스 더 넣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이야........
진짜 대단하다. 이미영 대리.
이제 보니 아부의 달인이었구나.
그런데 일부러 그런 것인지 같이 보성까지 다녀 온 아영사원의 이름은 카드 안에서 쏙 빠져있고 대신 김동철 과장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나는 귓속말로 이미영대리에게 말했다.
“저기, 아무리 그래도 아영 사원도 같이 전라남도 보성까지 갔는데, 이름 정도는 넣어주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팀장님. 괜찮습니다. 제가 어제 버스타고 가면서 잘 알아듣게 교육시켰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이미영 대리가 딱 부러지는 목소리로 아영 사원을 부른다.
“김아영 사원. 지금 당장 팀장님 앞으로!”
미영대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영사원이 후다닥 내 앞으로 달려온다.
이건 뭐야?
어제랑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잖아.
자세히 보니 아영 사원의 머리가 쥐에게 물어 뜯기기라도 한 듯 일부분이 뜯겨나가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뺨에도 붉은 자국이 있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미영대리를 바라보자, 미영대리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아니, 어제 버스타고 가는데. 신입 사원이 미친개처럼 물어뜯고 덤벼서 교육 좀 제대로 시켜줬습니다. 저도 여기 아영 사원한테 긁힌 자국 있습니다.”
미영대리의 손목을 보니 정말 미세하게 긁힌 자국이 있다.
한 마디로 막무가내로 보성으로 끌려가자, 분을 참지 못한 아영사원이 버스에서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그 결말은 무자비한 폭행과 보복이었던 것이다.
달달달 떨고 있는 아영사원을 보며 미영대리가 무심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제 코피는 멎었습니까? 아영 사원?”
“네. 멎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보아하니 밤새도록 군대식 주입 교육을 당한 것 같은데.
에휴........
오늘 김아영 사원 조교는 그냥 미영대리에게 맡겨놓아도 될 것 같다.
여기서 나까지 괴롭히면 정말 사람하나 주님 곁으로 갈 수도 있으니.
“아, 수고했어요. 아영 사원. 가서 일 보세요.”
“넵! 감사합니다. 팀장님!”
비틀비틀 거리며 자리로 돌아간 아영사원이 피곤한지 얼굴을 보조 책상에 푹 처박고 눈을 감는다.
“오늘 몇 시에 회사에 출근한 거예요? 미영대리?”
“네. 팀장님. 원래는 보성에서 자고 올 계획이었는데, 시간도 어중간하고 해서 그냥 녹차만 사서 바로 회사로 왔습니다.”
“네? 그러면 회사에서 잔거예요?”
“네. 팀장님. 아영 사원 좀 교육시키면서 회사에 도착하니까 새벽 5시더라고요. 집에 들어가면 못 일어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아영 사원은 집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 시간이면?”
“아. 예. 또 신입 사원이 정신 못 차리고 눈알 부라리면서 머리채 쥐어뜯길래, 싸대기를 몇 대 갈겨줬더니. 잠잠해 지더라고요. 그리고 원산폭격 한 시간 시키고, PT체조로 조져 주니까 그제야 좀 사람다워지네요. 그런데 우리 신입 사원이 고문관에 싸가지도 없어서 언제 또 기어오를지 모릅니다. 팀장님.”
하아........
이건 진짜 나도 모르겠다.
미영대리가 아영사원의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들었는지 사람 하나 제대로 잡고 있다.
“아, 예. 뭐 다 좋은데, 적당히 당근도 주면서 교육시키세요. 너무 빡세게 굴리면, 탈영....... 아니 회사 그만둔다고 할지도 모르니까요. 두 분 어제 보성도 갔다 오시고 피곤하실 텐데, 내가 커버 쳐 줄 테니까, 여기 앞에 사우나에 가서 몸이라도 좀 풀고 오세요. 점심시간 전까지만 들어오시고.”
몸이라도 풀고 오라는 말에 미영대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사실 미영대리도 피곤한 건 아영사원과 마찬가지였을 테니.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팀장님? 이야, 이거 역시 군대는....... 아, 아니 회사는 선임을 잘 만나야 된다더니.”
군대를 말년 제대한 여자라.
나름 정감이 가는 미영대리였다.
나는 소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예. 걱정 마시고 갔다 오세요. 사우나 비는 회사 경비 처리 하시고. 어제 보성 갔다 오느라 돈도 꽤 썼을 텐데.”
“감사합니다. 팀장님. 그럼 아영 이병. 아, 아니. 아영 사원 데리고 잠시 열외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미영대리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데........
멀리서 구수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이거 다들 좋은 아침입니다! 으. 덥다 더워!”
터프하게 와이셔츠를 푸르며 김동철 과장이 나타났다.
그 순간.
미영대리의 작고 예리한 눈이 햇빛에 반사 된 바늘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어머....... 아침부터 저렇게 터프하고 섹시할 수가!”
김동철 과장의 반짝이는 머리와 터프하게 풀어헤친 와이셔츠 사이로 보이는 속살.
미영대리의 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하지만 김동철 과장은 미영대리에게 눈길한 번 주지 않고 자신의 옆자리에서 피곤해서 쓰러져 있는 아영팀장에게만 향한다.
“아니. 아영씨. 이게 무슨 일이야? 고운 얼굴이 하루 만에 다 상했네? 어제 집에 안 들어갔어요?”
피곤에 쩔어서 붉게 충혈 된 눈을 비비며 아영팀장이 고개를 든다.
“아. 예. 과장님 오셨어요. 어제 전라남도 보성까지 출장을 갔다 왔더니 피곤해서요. 잠을 한 숨도 못 잤어요.”
평소라면 온갖 짜증을 냈던 아영사원이지만 지금은 너무 피곤한 탓에 김동철 과장에게 화낼 힘도 없다.
“아유,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 아영씨는 비타민처럼 통통 튀는 게 매력적인데. 아영씨가 힘이 없으니까 안쓰러워 죽겠네.”
사실 아영사원은 비타민처럼 통통 튀는 게 아니라 온 힘을 다해 동철과장에게 화를 내는 거였는데, 착각은 자유니까.
잠시 생각을 하던 동철과장이 품속에서 얼마나 오래되었을지 모르는 피로회복제 레모나C를 꺼내서는 수줍게 아영사원에게 건넨다.
“아영씨. 이거 먹고 힘내요. 내가 피곤할 때 먹으려고 아껴두었던 건데, 우리 아영씨 힘없는 거 보니까 마음이 아파서 안 되겠어. 자. 아~ 해봐요.”
평소라면 경악을 하며 도망쳤을 아영 사원이지만, 오늘은 말도 안 되게 힘이 없다.
귀찮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아기새처럼 입을 아~ 하고 벌렸다.
그러자 레모나C 봉지를 쭈욱 뜯은 김동철과장이 아영 사원의 자그마한 귀여운 입에 톡! 톡! 털어서 레모나C를 먹여준다.
“자, 힘들어도 삼켜요. 아영씨. 그래야 피곤함이 좀 가신다니까.”
아영 사원이 입을 오물오물 거려서 레모나C를 삼키자 동철과장이 아영 사원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준다.
“아유. 잘했네. 우리 아영씨.”
오랜만에 좋아 보이는 동철과장과 김아영 사원.
그런데.........
내 옆에서 마치 화산이 끌어 오르듯 엄청난 열기가 느껴진다.
“후욱....... 흐윽........ 흐으으으으!!!!!!!!!”
어금니를 꽉 깨문 이미영 대리가 빨갛게 달아올라 곧 터질 것 같은 주전자처럼 괴상한 소리를 내고 있다.
아무리 현세계의 남자들처럼 터프하고 담이 큰 나라고 할지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이미영대리에게 뭐라고 말을 걸기가 두려울 정도다.
그런데 오히려 먼저 말을 건 쪽은 이미영대리다.
“팀장님. 아무래도 오늘 사우나는 못 갈 것 같습니다. 배려해 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열불이 나서 제 마음속이 싸우나 지옥탕입니다.”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이미영대리.
“아, 예. 그, 그러세요.”
나도 모르게 이미영 대리의 기세에 눌려서 짧게 대답을 하고는 팀장 자리로 돌아갔다.
지금 이미영 대리에게 괜히 깐죽거리면 마치 시한폭탄이 터질 것 같은 위압감이 느껴진다.
“씨발.......... 여우같은 년. 그렇게 교육시켰는데 분수를 모르고 또 꼬리를 쳐! 꼬리를!!!!!”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미영대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마치 사탄의 인형에 나오는 처키처럼 아영 사원을 노려보며 천천히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