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 (2부 시작) 피자걸 예슬이와 데이트(1)
* * *
“전라남도 보성이요?”
아무리 내가 김아영 사원에게 현 세계에서 당한 것이 많다고 해도, 퇴근 후에 전라남도 보성으로 보성 녹차를 사오라고 보낼 정도는 아닌데.
“예. 전라남도 보성. 보성 녹차요! 팀장님 드셔 보셨어요? 진짜 녹차향의 풍미부터가, 시중에서 파는 인스턴트 녹차들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저희 할아버지도 보성 녹차 마시고 무병장수 하셨다니까요. 괜히 보성 녹차가 유명한 게 아니죠.”
아니 녹차가 무슨 100년 묵은 산삼도 아니고 녹차 마시고 무병장수라니.
뻥이 좀 심하긴 하지만........
그래도 미영대리의 말을 듣고 보니, 또 귀가 솔깃하기는 하다.
내가 언제 진품 보성 녹차를 마셔보겠는가?
요즘 인터넷 배송으로 팔기도 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또 산지에서 직접 사온 녹차랑은 퀄이 틀리지.
나는 핸드폰을 꺼내서 서울에서 전라남도 보성까지 승용차로 얼마나 걸리는지 네비를 찍어 보았다.
[서울특별시 > 전라남도 보성: 4시간 30분]
무려 4시간 30분이 걸리는 녹차를 사기 위한 야근 출장이라니.
그것도 당일치기로?
미영대리는 진정 미쳐 버린 것인가?
아영 사원이 잔뜩 불안한 눈으로 나와 미영대리를 바라본다.
그녀도 불안한지 핸드폰을 꺼내서 서울에서 전라남도 보성까지 네비를 찍어본다.
“미, 미영대리님. 미쳤어요? 이미 근무 시간도 다 끝나가고, 제가 왜 녹차를 사러 전라남도 보성까지 가야 하는데요? 씨발.”
아영 사원도 어이가 없는지 자연스럽게 욕이 튀어 나온다.
그런데 미영대리가 이런 반응 예상했다는 듯이, 강한 어조로 나와 아영 사원에게 말한다.
“아영씨. 진짜 팀원들을 위해서 그 정도 희생도 못해요? 매일 하는 업무도 아니고, 오늘 딱 하루 보성에 가서 녹차 좀 사오라는 건데. 그리고 사실 이거 진짜 비밀인데, 우리 회사 사장님이 요즘 녹차에 빠지셔서, 그렇게 매일 보성 녹차. 보성 녹차 타령을 하신 답니다. 좀 있으면 인사개편도 다가오는데, 이럴 때 우리 시원팀장님이 사장님한테 보성 녹차 선물로 딱! 드리면 우리 팀은 인사개편 때 안전빵 아니겠어요!”
사장님이 보성 녹차에 빠지셨다는 말에 아영 사원이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지만 곧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아무리 사장님이 녹차를 좋아하셔도 그렇지. 난 못가요. 씨발. 그렇게 팀원들 생각하시면 미영대리님도 같이 가시던가. 내가 무슨 동내 북이야? 동철과장이 내 설문지 베껴 써서 제출하는 바람에, 업무도 해야 해서 짜증나 죽겠는데. 하여간 동철 과장 머리가 괜히 빠진 게 아니야. 그렇게 공짜로 남이 다 해 놓은 걸 뺏어가니까 벌 받은 거지. 그리고 지금 이 시각에 전라남도 보성을? 진짜 어이가 없네. 어이가 없어.”
사실 아무리 내가 아영 사원을 골려 주고 싶다고 해도, 이건 좀 무리수이긴 하다.
“그래요. 지금 이 시간에 녹차 사려고 전라남도 보성을 가는 건... 좀.......”
그렇게 말하려는데, 미영대리가 처키 같이 씨익 웃으며 아영 사원을 바라본다.
그때 내 뒷골을 망치를 한 대 맞은 거 같은 전율이 느껴진다.
미영대리의 저 웃음!
서, 설마.......
미영대리가!!!!
“시현 팀장님. 방금 들으셨죠? 아영 사원이 저도 같이 가면 전라남도 보성에 녹차 사러 간데요. 갔다가 내일 아침에 출근할 때 품질 좋은 향긋한 녹차 가져 올게요~”
씨발!
미영 대리 머리 나쁜 줄 알았는데, 사람 갈구는 건 나보다 고단수 아니야!
사실 미영 대리는 보성 녹차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눈에 가시 같은 아영 대리를 이유를 만들어서 24시간 내내 갈구고 싶었던 것 뿐.
한 마디로 아영 사원은 미영 대리의 24시간 빵셔틀이 된 것이다.
아영 사원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돌아버리겠다는 표정이다.
안 그래도 오늘 하루 좆같은 일만 연속으로 생겼다.
지치고 힘들어서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는데, 이제는 악마 같은 처키 미영 대리와 팔자에도 없는 전라남도 보성에 끌려 갈 판이다.
아영 사원이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미영 대리도 같이 간다는 거, 내가 뭘 어쩌겠어.
전라남도 보성.
미영대리 빵셔틀 하면서 갔다 와야지.
하아, 존나 피곤하겠다.
전라남도 보성에 도착하면, 밤 11시는 될 테고.
녹차만 사서 서울에 올라와도 새벽 4~5시.
그리고 바로 출근?
그것도 자기를 눈에 가시로 여기는 상사와 같이.
나라도 미쳐 버릴 것 같은 지옥이다.
나는 아영 사원이 애처로운 눈빛을 피하며 가방을 챙겨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영 사원이 이대로 끌려 갈 수는 없다는 듯이 발악을 한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도 가고 싶은데. 지금 전라남도 보성에 가 봤자 녹차가게 문 닫았어요. 그리고 출장비는! 출장비는 누가 주는데요? 저 아직 해야 할 업무도 남았고....... 진짜. 진짜!!!”
아영 사원의 전라남도 보성에 끌려가지 않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을 미영 대리가 가볍게 눌렀다.
“응. 전라남도 보성이 내 고향이라 잘 아는데, 녹차가게 관광객 많이 와서 새벽 1시에 닫아요. 그리고 팀원들을 위한 일인데 사비로 갔다 와야지. 아영씨는 팀원들을 위해 그 정도도 못 해? 그리고 마침 잘됐네. 아영씨가 왕복차비 내요. 대신에 내가 아영씨 우리 집에서 재워 줄게.”
“미, 미영대리 집이요?”
“왜? 싫어요? 우리 집은 누추해서 싫어요? 잘 됐잖아. 이 기회에 왜 아영씨가 우리 동철과장님한테 그렇게 여우같은 야시시한 눈빛을 보내며, 유혹했는지에 대해서 밤새 토론도 하고.”
아......
미영 대리 진심 무섭다.
알고 보니 우리팀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동철과장도 나도 아닌 미영대리였다.
찍히면 거의 진상의 끝을 보는구나.
나는 가방을 챙겨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그러면 두 분 조심해서 갔다 오세요. 아영씨는 설문지 오늘 다 못 만든 거는 내일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만들어요. 그럼 저는 퇴근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재빨리 사무실에서 빠져 나왔다.
아마도 아영 사원은 개처럼 질질 미영대리의 홈그라운드인 전라남도 보성까지 끌려가서 복날 개 잡듯이 갈굼을 당하고 올 것이 뻔했다.
이제는 살짝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는 아영 사원이었다.
* * * * *
(2부) 피자걸 예슬이와 데이트(1)
“택시!!”
나는 회사를 나와서 택시를 잡아타고는 예슬이를 만나기로 한 만나분식으로 향했다.
퇴근시간이라 길이 좀 막혔지만, 예슬이와의 약속 시간인 저녁 7시 보다는 좀 더 일찍 도착 할 수 있었다.
끼이익. 딸랑~!
만나 분식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만나분식 집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 준다.
다행히 남녀가 역전 된 세상에서도 만나분식은 원래 내가 살던 세상의 아주머니가 여전히 주인이었다.
물론 키가 더 커지고 더 아름다워지시기는 하셨지만.
“아이고, 이거 우리 잘생긴 시현이 아니야. 오랜만에 오네. 요즘에는 바쁜지 통 안 오더니.”
이세계의 유시현도 이 만나분식집 단골이었는지, 모자와 마스크를 썼음에도 주인아주머니가 단번에 알아보셨다.
말도 편하게 하시는 걸로 봐서는 꽤나 친한 사이였던 것 같다.
“아, 예. 사장님. 요즘에 회사일이 좀 바빠서요.”
“응. 그래그래. 시현이 항상 먹는 걸로 줄까?”
나는 만나분식 안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봤다.
역시 단골손님들만 아는 숨겨진 분식집답게 손님은 나 혼자였다.
“아니에요. 음식은 조금 이따 시킬게요. 오늘 여기서 누구를 만나기로 해서요.”
“아. 그래. 혹시 그.. 고릴라. 아, 아니. 여자답게 터프하게 생긴 아줌마 오는 거야? 그 아줌마도 오는 거면 미리 말해. 음식 더 준비해야 하니까.”
고릴라?
아. 아마 진영이 누나 랑도 시현이가 이 분식집에 자주 왔었나 보다.
하긴 인적이 별로 없는 식당이니까, 유명인이 오기에는 오히려 마음 편하지.
“아니에요. 사장님. 오늘은 다른 친구 기다려요.”
“응. 그래. 알겠어. 시현아. 친구 오면 주문 해. 이모는 주방에서 일 보고 있을게.”
그렇게 말하고는 만나분식 사장님이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10분....
20분.......
약속 시간 7시가 살짝 넘었는데도 예슬이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카통을 보내볼까 했지만, 잠깐 피자걸과 손님으로 만난 것 외에는 처음 만나는 건데 조금 늦는 걸로 재촉하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내 노발피아 소설들을 읽고 있는데, 분식집 문이 열린다.
끼이익. 딸랑~!
그리고........
눈처럼 하얀 피부에 검은색 긴 머리를 가진 인형 같이 생긴 여자가 숨을 헐떡이며 분식집 안으로 들어왔다.
작고 하얀 얼굴에 완벽한 브이라인 얼굴형.
정갈한 눈썹.
귀여우면서 별이라도 쏟아질 것 같이 큰 눈.
작지도 크지도 않은 귀여운 오뚝한 코
루비처럼 빨간 입술.
하얀 얼굴에 루비처럼 빨간 입술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녀는 바로 얼굴에서 빛이 나고 현기증 날 정도로 예쁜 내 완벽한 이상형.
한예슬이었다.
예슬이는 오늘 따라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안 그래도 작은 얼굴이 더 작아 보인다.
예슬이가 나를 발견하고는 숨을 헐떡이며 나에게 걸어온다.
“오빠, 안녕하세요. 미안해요. 늦어서. 빨리 온다고 왔는데, 오늘 안무 연습이 너무 늦게 끝나서요.”
예슬이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사과를 한다.
사실 예슬이 같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소녀라면 20분이 아니라 20시간.
20일도 기다릴 수 있다.
얼굴만 봐도 화가 나다가도 잘못했습니다! 하고 들어가 버릴 정도로 엄청난 미모다.
그런데 나를 보자, 예슬이가 많이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하긴 예슬이도 나와 제대로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니까.
예슬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워낙 짧은 시간이었고, 예슬이는 피자걸 나는 손님이었다.
나는 웃으며 예슬이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저도 방금 왔어요. 그런데, 안무 연습이 늦게 끝났다고요?”
예슬이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작은 손으로 루비 같이 붉은 입술을 가린다.
그리고 그 귀여운 눈을 토끼같이 크게 뜬다.
도자기 같이 깨끗하고 하얀 피부에, 인형같이 동그랗고 큰 눈을 더 크게 뜨니까 정말 실존하는 사람이라는 게 비현실적일 정도로 귀여운 얼굴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