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동철 과장과 신입사원 김아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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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영 대리의 목소리에서 엄청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김아영 사원을 진심으로 조교해 줄 또 다른 조력자가 나타난 것이다.
“아. 예. 그럼요. 걱정 마시고, 미영 대리님 편하게 김아영 신입사원을 대해 주시면 됩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집니다. 혹시 다음 주 부터 김아영 사원이 다시 팀장이 되어도 걱정 마세요. 불합리한 일을 당하면 이은우 상무님과 이사진 분들이 해결 해 주실 테니까요.”
김아영 사원이 팀장으로 복귀 되어도 불합리한 행동을 하면 이사진들이 해결 해 준다는 말에 미영대리가 눈을 반짝거린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미영대리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사탄의 인형처럼 웃으며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미영대리를 자리로 보내고는 업무지시 사항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 주는 그렇게 바쁜 업무가 없었다.
하지만 팀장이 된 황금 같은 기회를 날려 버릴 수는 없지.
나는 다음 주까지 끝내야하는 프로젝트 중에서 까다로운 프로젝트인 방송품질평가서 프로젝트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신입사원 김아영을 내 자리로 불렀다.
“저기, 아영씨 내 자리로 좀 오세요.”
신입사원 김아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내 자리로 걸어왔다.
내 앞에 서서는 그녀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팀장님?”
오늘 하루 종일 업보 스택 쌓인 것을 두들겨 맞아서인지 나를 보기만 해도 긴장되는가 보다.
“아, 다른 게 아니라. 김아영씨. 우리 방송품질평가서 프로젝트 설문지 정리 하는 거 오늘 오후 4시까지 해 오세요.”
아영 사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네? 그걸 왜 오늘까지 해요? 다음 주 까지 해도 충분한대요.”
나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아영팀장에게 말했다.
“어허! 아영씨. 신입사원이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그냥 팀장이 하라고 하면 하는 거지. KDS국장님이 좀 빨리 결과를 볼 수 있었으면 하시니까. 잔말 말고 오후 4시까지 해 와요.”
아영사원이 억울한지 손을 꽉 쥐며 다시 대꾸한다.
“팀장님. 그거 다 하려면 적어도 반나절은 걸리는데, 무슨 수로 오후 4시까지 그걸 다 해요? 진짜 해도 해도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래요? 그게 그렇게 오래 걸리는 일이었어요? 나는 아영씨가 팀장일 때 항상 나한테 한 시간 안에 설문지 정리 다 해오라고해서 엄청 쉬운 일인지 알았지. 그리고 아영씨가 팀장일 대는 나한테 한 시간 밖에 안 줬잖아. 나는 무려 두 시간이나 주고. 그러니까 잔말 말고 4시 까지 깔끔하게 정리해 와요. 아영씨가 신입사원으로서 얼마나 업무처리 잘 하는지 지켜보겠어요.”
내 논리 정연한 반박에 아영사원이 후우......... 하고 깊게 한숨을 내쉬며 설문지 자료를 받아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이게 다 뿌린 대로 거두는 거다.
이 씨발년아.
내가 진짜, 이세계로 빙의되기 전, 너 이 씨발년이 적어도 반나절은 걸리는 일을 한 시간 안에 정리해오라고 해서 내가 얼마나 개 같이 굴렀는지 알아?
겨우겨우 시간에 맞추어서 보고서 제출하러 가면, 갖은 트집을 다 잡으면서 있는 쪽 없는 쪽 다 줬지?
너는 오늘 지옥의 업무 열차에 탑승 한 거야.
이 개 같은 년아.
자기 자리로 돌아온 아영사원이 방송품질평가서 프로젝트 설문지를 바라보며, 눈알을 굴리기 시작한다.
어떻게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떠 넘길까하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는 거다.
저렇게 잔머리를 굴려서 팀장까지 올라간 년이니까.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팀원들을 바라보다가 마침 적당한 호구가 보였나 보다.
아영팀장이 배를 부여잡고 책상 위에 얼굴을 파묻는다.
“하흑.. 배, 배가 아파. 저, 저기 성현 대리님. 나 생리 때문에 배가 너무 아파서 그러는데, 지금 하는 일 없죠?”
성현대리가 곰처럼 머리를 긁적이며 신입사원 김아영을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예, 지금 급하게 해야 할 일은 없는데. 왜 그래요. 아영씨?”
“그게, 진짜 미안한데. 내가 업무가 너무 많아서 그러는데. 배는 아프고. 제 업무 좀 도와주시면 안돼요?”
성현대리가 김아영 신입사원 책상에 쌓여있는 설문지들을 바라보며 말한다.
“아. 아영씨. 배 많이 아파요? 이거 큰일이네. 좀 줘 보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에휴.......
하여간 성현대리는 착해도 너무 착해서 탈이다.
그리고 김아영 이 씨발년은 너무 악독해서 탈이고.
자신이 가지고 온 설문지의 80프로 정도를 성현대리에게 건네며 엄살을 피운다.
“이 만큼만 도와주세요. 4시까지 끝내야 하는데, 성현대리님 하실 수 있죠?”
성현대리는 좋은 마음에 도와주려다가 오히려 강제 노동을 당하게 생겼다.
이거야 원.
완전 물에 빠진 것 도와줬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는 꼴이잖아.
“아, 그건 너무 많은데요........”
사람 좋은 성현대리가 아영사원의 예의 없는 부탁을 거절하려는데, 아영사원이 갑자기 배를 부여잡고 인상을 쓰며 책상에 엎드린다.
“아 몰라요. 성현대리가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책임 져요. 아으윽. 배, 배야.”
성현대리에게 아예 자기 업무를 거의 다 떠넘겨버린 아영사원이 이제는 나 몰라라 전법을 쓰고 있다.
썅년도 저런 썅년이 있나!
후우........
내가 나서서 성현대리를 도와주고 싶지만, 팀장이 되어서 너무 한쪽만 싸고돌아도 공정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성현대리 스스로 어떻게든 거절하거나, 다른 팀원이 아영사원을 저격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그렇게 답답해하며 속을 끓이고 있는데, 의외의 저격수가 나타났다.
“아니, 아영씨! 신입사원 주제에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 자기 할 일을 왜 성현대리님에게 다 미루는 건데? 아영씨 일은 아영씨가 해야지. 막내가 되어가지고 말이야. 내 참 어이가 없어서.”
다 된 밥이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하는 눈빛으로 신입사원 김아영이 자기를 저격하고 나선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질투에 눈이 먼 이미영 대리였다.
“아, 미영대리. 왜 흥분을 하고 그래요. 자기 일도 아니면서. 그리고 미영대리도 여자면 이해하잖아. 생리 날 여자가 얼마나 힘든지. 성현대리가 자진해서 도와주겠다는데 왜 미영대리가 지랄이에요.”
공개적으로 저격당한 신입사원 김아영이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눈에 가시처럼 보이는 김아영에 대한 미움이 큰 이미영 대리는 전혀 움츠려 들지 않는다.
“야! 김아영이. 너 미쳤어? 신입사원 주제에 누가 대리님들한테 반말하래? 정신 똑바로 안 차려? 회사가 무슨 대학교 동아리야? 제대로 호칭 써라. 김아영 신입사원. 그리고 진짜 내가 아까부터 한 마디 하려다가 말았는데. 씨발. 생리는 너 혼자 하세요? 생리가 무슨 벼슬도 아니고. 나도 오늘 생리하는 날이거든. 누가 요즘에 생리 좀 한다고 그렇게 티를 팍팍 내면서 아픈 척을 하나. 아픈 척을!”
그렇게 말한 이미영 대리가 터벅터벅 걸어서는 성현대리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성현대리 책상 위에 쌓여있는 설문지들을 들어서는 아영사원의 책상위로 던져 버렸다.
쿵!!!!
요란 소리를 내며 두꺼운 설문지 뭉치가 여기저기 아영 사원의 책상 위로 흩어졌다.
이미영 대리의 카리스마 있고 박력 있는 행동에 속이 다 뻥 뚫리는 것 같다.
씨발. 여우같은 년.
잔 머리 굴리다가 진짜 제대로 한 방 얻어맞았네!
아영 사원도 미영 대리의 이런 카리스마 있는 반응은 의외였는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기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설문지들만 바라본다.
“아, 아니. 이미영대리. 아니 대리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었잖아요.”
이미영대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영사원과 동철 과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한다.
“신입 사원 주제에 여우같이 행동하면서 남자 홀리는 게 재수 없어서 그런다. 왜! 하여간, 자기 할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세요.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 볼 테니까!”
말을 마친 이미영 대리가 터벅터벅 자기자리로 돌아가서는 자리에 앉았다.
아영 사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미, 미친 거 아니야. 내가 무슨 남자를 홀려. 홀리긴. 씨발........”
그런 아영 사원을 향해 이미영 대리가 터억! 뒤돌아보며 손가락을 두 개 들어서 자신의 눈을 가리켜다가, 다시 아영 사원의 눈을 찌르듯이 손짓한다.
자기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동철 과장 꼬시지 말고 얌전히 일이나 하라는 강력한 제스처였다.
물론 아영 사원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지만.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그리고 드디어 약속된 시간 4시가 되었다.
나는 기지개를 쫘악 피며 신입사원 김아영을 바라본다.
팀장이라는 게 참 할 일도 없고 편한 자리였구나.
이제 보니 그저 업무를 받아서 다른 팀원들에게 시키기만 하면 되는, 놀고먹는 자리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영 사원이 더 괘씸해 보인다.
자기는 매일 이렇게 놀고먹었으면서 나를 그렇게 괴롭혔다니.
씨발, 개 같은 년.
나는 손을 들어서 아영 사원을 불렀다.
“아영씨. 김아영씨. 방송품질평가서 프로젝트 설문지 정리 다 되었으면 가지고 와 보세요.”
씩 씩 거리면서 거칠게 숨을 쉬며 열심히 키보드 타이핑을 하던 신입사원 김아영이 나를 향해 말한다.
“팀장님. 거의 다 되어가요. 10분 만 더 기다려 주세요.”
“10분? 허어. 아영씨. 회사가 장난이야? 마감 시간을 주었으면 그 시간까지 끝내야지. 어디서 10분 타령이야. 당장 가지고 와요!”
내 성화에 아영 사원이 할 수 없이 usb에 설문지를 정리한 파일을 담아서 나에게 가지고 온다.
“어디 보자........ 우리 신입 사원 김아영. 아니지 사실은 중고 사원이지. 하여간 일 잘했나 한 번 봅시다.”
나에게 USB 파일을 넘겨주는 아영 사원의 손이 불안감에 덜덜 떨린다.
사실 업무를 끝내고 상사에게 제출 할 때만큼 불안하고 떨리는 순간이 없다.
나는 김아영 사원이 건네 준 파일을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살펴본다.
그리고........
마침내 아영 사원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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