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김아영 팀장(5)
* * *
[현재]
닭갈비 집.
“시현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내 옆에 앉아 있는 성현대리가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그제야 나는 정신이 든다.
“아? 예....... 아무 것도 아니에요. 여기오니까 한 달 전 일이 생각나서요.”
“아, 그 때 그일........ 그 생각 하면 여기 다시 오고 싶지 않지. 닭갈비 먹으로 와서 야채 볶음밥 먹고, 사우나 한 생각하면. 하으.......”
“그러게요. 그런데 또 살다보니, 제 의지로 여기 다시 오는 날이 다 오네요. 그나저나 왜 다들 주문 안하고 있어요?”
성현대리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그게, 알게 모르게. 다들 시현씨가 주문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지금 개발 사업부팀 실세는 아무래도 아영팀장이 아니고 시현씨니까.”
나는 성현대리의 말을 듣고는 팀원들을 한 명, 한 명 씩 쳐다보았다.
먼저 김미희 주임.
김미희 주임의 충성심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여자 팀원들에게 철저하게 배반당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지금은 완전히 내 편이 되어있다.
김미희 주임이 나를 충성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활짝 웃는다.
단순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가장 믿을만한 노예이다.
다음으로는 미영 대리.
내가 바라보자 미영대리가 씨익 웃는다.
오늘 따라 일자로 자른 앞머리가 더 사탄의 인형 처키 같다.
미영대리는 내가 원래 살던 세계에서 넘어 온 페미 걸레도 아니고, 그저 회사에서 안 짤리기 위해 발버둥치는, 나름 열심히 사는 나이든 노처녀일 뿐이다.
그리고 서유리 사원.
서유리 사원이 눈알을 여우처럼 굴리며 곁눈질로 나와 아영팀장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고 있다.
이 년은 조교를 시켜도 충성심이 너무 빨리 떨어진다.
삼국지로 따지면 마치 여포 같다고나 할까.
지금도 나와 아영팀장 사이에서 누구 편에 붙는 게 더 유리할지, 열심힌 잔 머리를 굴리며 각을 재고 있는 것 같다.
그냥 빨리 100프로 조교 시켜서 갱생시켜버리는 것만이 답이다.
마지막으로 매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영팀장.
아영팀장의 눈빛이 어제와는 다르다.
어제는 남녀가 역전된 세계에서 처음 맞는 회사 생활이라서인지, 내가 하는 일에 잘 쫄고, 수동적이었다.
하지만 오늘 부터는 다시 팀장으로서 회사에서의 주도권을 잡고 싶어 하는 듯, 날을 세우고 있다.
상황 파악을 끝낸 나는 메뉴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 오늘은 닭갈비 6인분 어때요? 팀장님. 오늘은 회사 팀비로 점심 먹는 거죠?”
아영팀장이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네. 오늘 팀비로 먹는 거 맞아요. 그런데, 저랑 서유리 사원은 한방 삼계탕 먹기로 이미 얘기했어요. 나머지 분들은 닭갈비를 먹든 뭐를 먹든 인 당 메뉴 5,000원 아래에서 고르면 되요. 그래야 팀비가 맞으니까.”
뭐야?
아영팀장 씨발년이 이제는 만만한 서유리 사원을 끌어들여서 팀비로 자기네들만 비싼 것 먹고 우리는 존나 싼 것만 처먹으라고 하네.
메뉴 판을 보니 5,000원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고작, 일반 닭갈비보다 닭이 3분의 1 수준으로 밖에 안 들어간 철판 닭볶음밥 정도 밖에 없다.
오늘은 푸짐하게 닭갈비를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성현대리의 얼굴이 침울해진다.
먹을 것 앞에서는 참 단순한 성현대리다.
그런데........
미영 대리의 얼굴도 다른 인형들에게 왕따 당한 처키처럼 시무룩하다.
둘 다 음식 앞에서는 참 솔직하구나.
그래, 아영팀장 그리고 서유리 사원.
둘이서 그렇게 개념 없이 나온다면, 나도 다 생각이 있지.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아영팀장에게 말했다.
“그러면, 다른 팀원들은 뭐 선택하고 자시고 할 게 없네요. 철판 닭볶음밥 먹어야지. 제가 주문하고 올게요.”
“어. 그래 줄래요? 오면서 물도 떠오고 반찬도 좀 가져 오고요. 평소에 하던 것처럼.”
아영팀장이 건방지게도 원래 있던 유시현에게 하던 것처럼 나한테 심부름을 시키고 있다.
팀장으로서 남녀역전 세계에 넘어오면서 흐려진 팀원들의 군기를 잡으려는 것이다.
“아, 예. 그러죠 뭐.”
나는 살짝 건방진 말투로 대답하면서 서유리사원을 바라보았다.
서유리 사원이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데, 아영팀장이 서유리 사원의 팔을 붙잡는다.
“서유리씨는 여기 있어. 시현씨가 알아서 하게.”
서유리 사원이 나와 아영팀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머리를 굴리다가 자리에 다시 앉는다.
그래, 서유리 씨발년아.
지금 주인님 대신 아영팀장을 선택했다 이거지.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닭갈비집 주인아저씨.........
가 아니고 아주머니네?
역시 남녀역전 세계로 넘어오면서 닭갈비집 사장미도 바뀐 것이다.
홀에는 비리비리 힘없어 보이던 닭갈비집 아저씨 사장님 대신에, 소도 때려잡을 것 같이 험악해 보이는 주인아주머니가 있었다.
나는 닭갈비 집 사장 아주머니에게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기 주문 좀 하려고 하는데요.”
닭갈비 집 사장 아주머니가 나를 보더니, 인자하게 활짝 웃으며 말한다.
처음 봤을 때는 소도둑 같이 생겨서 무서웠는데, 또 인자하게 웃으니 정감이 가는 얼굴이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시현씨 아니에요. 오랜만에 왔네. 우리 잘생긴 시현씨. 주문하려고? 테이블로 부르지 않고 내가 갈 텐데.”
음.
아주머니의 반응을 보니 이세계 유시현이 닭갈비를 좋아했는지, 이 닭갈비집에 자주 왔던 것 같다.
“아, 예. 제가 좀 사장님께 주문하면서 이것저것 부탁 좀 드리려고요. 그러니까, 오늘 메뉴는 한방 삼계탕 한 개에, 철판 닭볶음밥 5인분인데요.......”
나는 주문을 하며 닭갈비집 사장님께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기 시작했다.
내 얘기를 다 들은 닭갈비집 사장님이 살짝 곤란한 얼굴을 했지만, 곧 자비롭게 웃으며 말했다.
“좀 귀찮긴 하지만, 우리 잘생긴 시현씨 부탁이니까. 내가 해 줘야지. 앞으로 우리 식당에 자주 좀 와줘요. 시현씨 오면 내가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다 부르다니까.”
닭갈비집 사장님이 눈에서 꿀이라도 뚝뚝 흐를 것처럼 애정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윽.........
이건 좀 너무 부담 되는데.
왜 이세계 유시현이 요즘에는 닭갈비집에 자주 안 왔는지 알 것 같다.
납치라도 당해 버릴 것 같은 눈빛이다.
닭갈비집 사장님에게 주문을 끝내고 반찬을 담기 시작하는데, 은근슬쩍 성현대리가 와서 나를 도와주며 작게 말한다.
“시현씨. 아영팀장이 팀 분위기 잡는다고 좀 오버하는 것 같은데. 그냥 둘 거야?”
“걱정 마세요. 대리님. 제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래요.”
“알겠어. 시현씨. 저번처럼 설마 또 닭 냄새만 스며든 야채 볶음밥 먹을까봐 불안해서 그러지.”
“에이, 절대 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대리님. 닭고기 팍팍 든 맛있는 점심 먹게 해 드릴게요.”
“알겠어. 시현씨. 시현씨만 믿어!”
성현대리가 안심이 되는 듯 곰 같이 미소 지으며 반찬을 퍼서는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물통과 컵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와서 앉았다.
“제대로 주문 잘 했어요?”
아영팀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가 주문 한 것을 재확인한다.
나는 아영팀장의 매서운 눈빛을 유연하게 받아 넘기며 말한다.
“아. 예. 팀장님. 팀장님하고 서유리 사원은 한방 삼계탕, 나머지 사원들은 철판 닭볶음밥 맞죠?”
“응. 맞네. 시현씨 요즘 들어 일 잘하네. 예전에는 매일 병신같이 실수만 하더니.”
씨발. 아영팀장.
이제 슬슬 숨겨두었던 발톱을 드러내는 구나.
지금의 나에겐 흠 잡을 것이 없으니까, 과거 일을 꺼내며 내 신경을 긁고 있다.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맞받아친다.
“아, 그래요? 아마 그 전에는 일시키는 사람이 병신이여서 그랬나 보죠. 일을 좆같이 주면 좆같이 밖에 못하잖아요. 안 그래요? 팀장님?”
내 신경을 긁으려다가 오히려, 병신 같은 상사가 된 아영팀장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 소리친다.
“뭐야! 지금 내가 일을 좆 같이 주는 병신 같은 상사라는 거야?”
나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영팀장을 바라본다.
“아니, 팀장님? 제가 언제 팀장님이 일을 좆같이 시키는 병신 같은 년이라고 했어요? 뭐 찔리는 거 있으시나. 괜히 발끈하고 그러시네.”
아영팀장이 당장이라도 식당을 뒤 엎을 것처럼 거친 숨을 내쉬며 씩씩 거린다.
뭐, 이건 고릴라도 아니고.
성현대리는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이 나를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김미희 주임도 오전 회의 시간에 배신당한 일이 생각나는지 한 마디 거든다.
“아, 진짜. 열심히 몸 바쳐서 뒷바라지 해주고, 커버 해주면 뭐해. 정작 곤란할 때 뒤통수 때리는 씨발년이 상사면 일 할 맛 안 나지.”
아영팀장이 빨개진 얼굴로 나와 미희대리를 바라본다.
그리고 중간에 낀 서유리사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일촉즉발의 상황.
“주문하신 닭이 많이 들어간 철판 닭볶음밥 나왔습니다. 손님.”
닭갈비집 사장 아주머니가 당면과 치즈, 떡볶이사리까지 푸짐하게 든 철판 닭볶음밥을 가지고 와서 우리 자리에 올려놓았다.
지글지글지글.
철판 위에서 닭갈비와 치즈가 맛있는 소리를 내며 익어가고 있다.
푸짐한 철판 닭볶음밥을 보며 성현대리가 소리 없이 표정으로 감탄을 하고 있다.
미영대리도 눈이 생기 있게 반짝반짝 거린다.
김미희 주임이 손뼉을 짝 치며 말한다.
“어머, 시현씨. 시현씨가 주문해서 스페셜하게 아주머니께서 해 오셨나봐. 완전 맛있어 보인다. 닭고기 들은 것 봐. 이거 인당 9,000원 짜리 닭갈비보다 닭고기가 더 많이들은 것 같아.”
“아이 뭘요. 스페셜하게까지야. 다 돈 내는 만큼 나오는 거죠. 자 어서 드세요.”
성현대리와 미영대리 그리고 김미희 주임이 각자 자기 그릇에 철판 닭볶음밥을 퍼 서는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우물우물우물
냠냠냠.
미영대리가 먹으면서 감탄사를 연발한다.
“오늘따라 닭갈비가 왜 이렇게 많이 들었데요? 치즈도 쫀득쫀득하고 너무 맛있다.”
성현대리도 크게 한입 퍼서 우물거리며 말한다.
“심지어 양도 많아. 오늘은 진짜 배불리 먹을 수 있겠다.”
맛도 중요하지만 양이 더 중요한 성현대리였다.
“진짜 이 정도로만 나오면 돈이 안 아깝지. 너무 맛있다.”
김미희 주임도 예쁘고 작은 입술을 벌려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음식을 먹는다.
우리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아영팀장이 짜증을 낸다.
“시현씨, 우리가 주문한 한방 삼계탕은 언제 나온 데요?”
나는 음식을 먹으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한, 30분 쯤 걸릴걸요?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귀찮게. 배고프시면 직접 식당 사장님께 물어 보시던가요.”
“아니. 씨발. 시현씨. 오늘 진짜 자꾸 성질 건들 거야? 말하는 싸가지가 애미, 애비 없는 새끼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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