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얀데레 강세나 (2)
* * *
[강세나 시점]
“자, 세나씨. 이쪽 보세요. 3번 카메라 보시고, 손은 머리 위로 귀여운 토끼처럼!”
으.......
귀여운 토끼라니.
역시 아직까지 그라비아 사진 촬영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
돈을 벌어야 우리 시현오빠 맛있는 것도 사주고, 시현오빠네 집 근처에 아파트도 얻을 수 있다.
역겹더라도 잠시 동안은 토끼가 되어야 한다.
“잘했어요. 세나씨. 자, 이번에는 엉덩이를 보여주시고, 흔들어주세요. 자연스럽게~”
수치스럽다.
다른 여자 앞에서 엉덩이를 흔드는 건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다.
나름 고등학교 때는 애들 사이에서 원펀치 세나로 잘 나가던 나인데, 사회라는 곳은 무섭구나. 원펀치 세나를 바니 걸 세나로 만들어 버리다니.
고등학교 때 같이 놀던 친구 녀석들이 봤으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거다.
시현오빠, 하지만 오빠를 위해서라면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요.
나는 수치스러워서 얼굴이 붉어졌다.
“오! 세나씨. 그 자연스럽게 수치스러워 하는 모습. 아주 좋아요. 연기도 일품이네!”
카메라 감독님.
이거는 진짜 그냥 수치스러워서 나오는 표정인데요.
연기가 아니고요. 흐유.........
나는 카메라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엉덩이를 흔들며, 토끼처럼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자! 잘하고 있어요. 세나씨. 이제 이번 그라비아 영상집의 하이라이트! 그 상태에서 당근을 감싸 쥐고 요염하게 핥는 포즈!”
으아아!
이건 갈수록 더 태산이구나.
도대체 이따위 엉터리 그라비아 영상물을 누가 보느냐!
그건 바로 수줍음이 많아서 여자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히키코모리 남성들!
밖에서는 남자라는 사회적 제약 때문에 조신한척 행동하지만, 안에서는 이런 변태 같은 영상물을 처 보는 본성을 숨긴 일부 이중적인 남성들!
그리고........
“어머, 저 아이가 요즘 그라비아 업계에서 뜨고 있다는 신인 세라인가요? 호오....... 과연 실물도 귀엽고 예쁘네요. 확, 내 애인 만들고 싶다~”
바로 저런 낯 뜨거운 소리를 지껄이는 레즈비언들이 주요 고객이다.
여자와 남자의 비율이 10 대 1.
세상에 여자는 많고 남자는 적다.
거기다가 여자들은 점점 강해지고 쌓여가는 성욕을 주체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생겨난 많은 여자와 여자 커플.
심지어 하룻밤 짧은 만남을 가지고 쿨하게 헤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여자, 여자 커플을 흔히들 백합들이라고 한다.
남자가 적은 사회적 환경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점점 백합문화가 일반화되어가고 있었다.
* * *
“아이고, 서영 PD님. 웬일로 저희 촬영장에는 다 방문해 주셨습니까. 미리 연락주시고 오지 않으시고.”
“아아, 사장님. 오랜만이에요. 이번에 쓸 만한 신인 한 명 발굴하셨다고 들어서요. 구경 좀 하러 왔죠.”
“아, 우리 세나씨 말이에요? 예, 보시다시피, 저런 보물이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났는지 모르겠어요. 아직 유티바에 프롤로그 영상만 올렸을 뿐인데, 반응이 엄청나요! 역시 우리 백합아가씨들 보는 눈은 다 비슷비슷 한 가 봐요. 아직 본편을 찍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예약 구매량이 장난 아니에요.”
서영 PD가 그라비아 영상을 찍고 있는 세나를 음탕한 눈빛으로 자세히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가슴은 35, 허리는 23, 엉덩이는 35. 맞죠?”
그라비아 영상 거유나라 대표 사장인 이은혜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다.
“아니, 그걸 어떻게 한 번에 꿰뚫어 보셨어요? 역시 서영pd님의 안목은 대단하시네요.”
“어디 그 뿐이겠어요. 잠시 이리로.......”
이은혜 사장을 가까이 부른 서영PD가 귀에 이은혜 사장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세나씨. 바니바니 옷 사이로 보이는 도끼 자국을 보니, 아직 따먹힌 적이 없는 순수처녀인 것 같은데. 이거 진짜 물건이 굴러들어 왔네요.”
이은혜 사장이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아니........ 그렇게 까지 자세히 알 필요는 없는데.........”
서영PD가 너무 자신만의 흑심을 내 보인 것을 들켜서 무안한지 헛기침을 했다.
허험.....
“그나저나 이제 은혜사장님도 슬슬 양지로 올라오실 때가 되지 않으셨어요? 너무 이 그라비아 시장에만 오래 계시면 영원히 양지로는 못 오십니다.”
이은혜 사장이 바로 굽신굽신 모드로 들어가서 서영PD에게 아부하며 말했다.
“저야, 항상 그러고 싶죠. 그런데 그 양지라는 곳이 서영PD님 같이 대단하신 분의 빽이 없으면 어디 발붙이기가 쉽습니까! 서영PD님 같이 높으신 분이 MBS 단막극이라도 하나 저희 애들 꽂아 주시면........”
사실 서영PD는 보기에는 꾸질꾸질 한 아줌마 같아 보여도, 요즘 MBS 방송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드라마 총괄 PD였다. 가끔 신인들을 발굴한다는 핑계로 그라비아 시장에도 오기는 하지만, 사실 그라비아 시장에서 그녀가 찾는 건, 새로운 연기자가 아니라 레즈비언 바람둥이인 그녀의 만족을 채워 줄 하룻밤 상대였다.
인지도가 낮은 그라비아 아이돌을 데뷔 시키는 건 그만큼 위험부담이 따르기 때문에, 유명스타로 만들어주겠다는 달콤한 말로 유혹해서 한 번 따 먹고는 연락을 끊어버리는 게 그녀의 수법이었다.
그렇게 모진 일을 당한다고 해도, 연예인이 되는 것이 최종 꿈인 그라비아 소녀들은 어떻게든 꿈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성폭행 당했다고 신고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서영PD정도의 위치면 아예 신인이 방송국이나 영화판에 발을 못 붙이게 할 정도의 파워가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사장님. 제가 사실 사장님을 조금 도와 드릴까~ 고민 중입니다. 그동안 사장님이 저한테 잘 해주신 것도 있고. 이제 저도 그럴 위치가 되니까요.”
사실 그라비아 사장 이은혜는 주기적으로 서영PD에게 자기 회사 소속의 잘 나가는 그라비아 아이돌들을 소개시켜 줘 왔다.
명목은 소개였지만, 사실 성상납이나 다름없었다.
연예계라는 곳이 다 그렇듯, 더러운 일도 서슴없이 이루어졌다.
이은혜 사장이 허리를 굽신굽신 거리며, 서영PD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오늘 저녁에 술자리를....... 자세한 얘기는 그 곳에서 하시죠. 여기는 듣는 귀들이 있으니까요. 요즘 저희 회사에서 제일 잘나가는 예나하고, 이번에 일본에서 건너온 특급 그라비아 아이돌 히토리를 데리고 갈까 하는데 괜찮으신지요. PD님?”
서영 PD가 안경을 닦으며 조용히 이은혜 사장에게 말했다.
“그....... 그런 닳아빠진 애들 말고, 좀 신선한 애 있잖아요. 사장님. 에이, 내가 꼭 말로 해야 알아들으시는 분은 아니실 테고.”
그제야 이은혜 사장이 왜 이 능구렁이 PD가 자기 회사에 들렸는지 의도를 이해했다.
이 능구렁이 년이 지금 그라비아 화보를 찍고 있는 순수한 신입 아이돌 세나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PD님. 그런데 그.... 그건 좀 곤란한데요. 아직 정식 직원도 아니고 알바 형식으로 고용한 거라서 저희도 다른 배우들처럼 만남을 강요하기가 쉽지 않아요.”
알바 형식이라는 말에 서영PD의 눈빛이 더 날카롭게 빛났다.
“아, 그래요? 그러면 다른 곳에서도 아직 일해 본 적이 없는 진짜 순수한 대학생이겠네요. 흐흐흐.”
변태같이 웃으며 서영PD가 군침을 삼켰다.
이은혜 사장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세나를 바라보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아이고, 세나씨.
큰일이네.
이 변태 능구렁이 아줌마한테 찍혀버렸으니.
우리 회사에서 제일 잘 나가는 청순 그라비아 아이돌로 키워 주려고 했는데.
서영PD 정도의 추잡한 사람한테 찍혔다면 그건 이미 물 건너 간 것 같다.
“그럼 내가 직접 세나씨에게는 얘기 할 테니까, 저녁에 항상 보는 곳에서 보죠. 사장님.”
“아. 예? 예에.........”
이은혜 사장이 고개를 푹 숙이며 90도로 서영PD에게 인사했다.
자기네 회사를 유명하게 만들어 줄 청순 신입 배우를 따 먹으려는 서영PD가 더럽고 치사해도, 그라비아라는 음지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양지로 나가기 위해서는 참아야만했다.
“그럼, 이만.......”
서영PD가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강세나에게 미소를 날리며 천천히 다가갔다.
* * *
[강세나 시점]
“안녕하세요. 세나씨.”
처음 보는 안경 쓴 아줌마가 나에게 다가오자 촬영 스텝들이 일제히 촬영을 중단했다.
분위기로 봐서는 뭔가 대단히 높은 사람 같았다.
회사 사장님과 대화하는 것을 봤을 때, 사장님도 쩔쩔 매는 것 같았으니까.
일단 좋은 인상을 주는 게 낫겠다 싶다.
“네, 안녕하세요.”
나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토끼 바니바니 야한 옷을 입고 머리에는 토끼 머리띠를 한 채로 인사를 하니까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거기다가 저 안경 쓴 아줌마의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뭔가 마음에 안 든다.
끈적끈적한 눈빛으로 내 몸과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는데 이상하게 자꾸 소름이 돋는다.
내가 손으로 가슴을 살짝 가리며 뒤로 물러서자, 그제야 안경 쓴 아줌마가 내 몸을 변태같이 바라보는 것을 그만두고 차분한 말투로 얘기했다.
“아. 세나씨. 미안해요. 이게 직업이 되어가지고서요. 걱정 마세요. 세나씨가 저희 이번에 새로 촬영하는 드라마 배역에 잘 맞나 안 맞나 체크한 것뿐이에요. 우리 세나씨 표정을 보니 저를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저는 MBS방송국에서 일하는 서영PD라고 합니다.”
안경 쓴 아줌마가 꽤나 화려한 명함집에서 명함을 꺼내서 나에게 건넸다.
뭐, MBS PD든, 뭐든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어차피 방송국 같은 곳에는 관심도 없고.
이 일도 우리 시현 오빠를 위해서 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나는 귀찮은 표정으로 서영 PD가 준 명함을 받았다.
안 그래도 바니바니 옷을 입고 있어서, 움직이는 것이 불편한데, 명함까지 들고 있으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자신의 명함을 받고 기뻐할 줄 알았는지, 나름 기대감으로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서영 PD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아, 저 서영PD인데 혹시 저 모르세요?”
“네, 모르는데요.”
“그래도, 이름은 들어보지 않았어요? 별은 니 가슴에, 응답하니 1997, 왕도깨비, 사랑의 불세탁 다 제가 제작한 드라마거든요. 보셨죠? 하하하.”
“아~~~~”
“네, 제가 바로 그 서영PD입니다. 하하하.”
“전혀, 모르겠는데요? 제가 드라마는 잘 안 봐서 가끔 유티버나 보고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저한테 ? 저 빨리 촬영하고 가야하는데요. 약속이 있어서요. 볼 일 없으시면 좀 비켜주세요. 촬영 좀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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