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오전 회의 시작. (이세계편)
* * *
43화
오전 회의시간
“뭐야! 무슨 일이에요. 최다정 차장!”
아영팀장이 비명소리를 지른 최다정 차장을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피. 피.......가 회의 자료에.”
아,
나는 그제야 최다정 차장의 회의 자료에 내 손에서 흘러내린 피가 묻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바쁘게 준비하다 보니, 미쳐 확인을 못 한 거다.
“죄송합니다. 제가 회의 자료를 준비하다가 손가락을 베어서요. 피가 회의 자료에 묻었나 봐요.”
최다정 차장이 피가 묻은 회의 자료를 가리키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아니! 시현씨.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회의 자료에 피가 묻었는지 안 묻었는지 확인도 안했어? 아, 진짜 징그러워서. 아! 뭐해요! 빨리 저거 안 가져다 버리고.”
“죄송합니다. 혼자서 너무 바쁘게 자료를 준비하다 보니까.”
아영 팀장이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유리씨도 같이 회의 준비 했잖아. 무슨 시현씨 혼자 회의 준비를 해. 누가 보면 우리가 시현씨만 부려먹는 줄 알겠어.”
유리 씨발년이 또 재빨리 여우처럼 머리를 굴렸다.
“아, 그럼요. 팀장님. 하여간 동기라고 챙겨줘도. 힘든 일은 자기혼자 다하는 척 한다니까요. 아, 진짜. 어째 남자가 저래? 팀장님. 오늘 몸도 안 좋으신 날인데. 사람 속을 아주 그냥 박박 긁어 놓네. 시현씨가.”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현 팀장이 자기 앞에 놓인 회의 자료를 들어서는 나를 향해 집어 던졌다.
파아앗!
회의 자료에 박혀있던 철심이 풀어지면서 A4 용지가 하늘위로 날렸다.
“아, 씨발. 진짜. 신입이라고 오냐오냐 하니까. 아주 그냥 어디까지 기어오르려고 그래! 시현씨. 회사가 만만 해? 어! 회사가 무슨 대학교 조별 과제하러 온 곳인 줄 알아! 씨발. 진짜. 내가 화를 안 내려고 해도 화를 안 낼 수가 없어요! 꼴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 나가라고!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합니다. 신입 사원 하나 때문에 아주 그냥 회사 분위기가 엉망이야. 엉망!”
아현 팀장이 자리에서 확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 말 못하고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나를 차갑게 지나쳐서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서유리 씨발년이 팀장을 쫒아갔다.
“시현씨. 회의실 뒷정리 좀 해줘. 나는 팀장님 달래 드려야 하니까. 시현씨 때문에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아휴. 진짜 내가 또 풀어야지 뭐.”
미영대리도 회의실을 나가며 한 마디 했다.
“아니 시현씨는 겉만 보면 말짱해 보이는데, 하는 일 마다 진짜 왜 그런데? 진짜 정신 좀 차리고 살아요. 네!”
최다정 차장은 아직도 피 묻은 회의자료 때문에 기분이 나쁜지 몸을 부르르 떨며 재빨리 회의실을 나갔다.
김미희 주임은 역시나 불난 집에 불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시현씨는 참. 그렇게 맥아리가 없어서 어디 남자 구실하겠어? 키 작고 가진 것도 없으면 능력이라도 있던 가. 참. 에휴. 딱하다 딱해. 시현씨 부모님은 무슨 죄야? 뭐 내가 걱정 할 일은 아니지.”
씨발년들 진짜.
다 찢어발기고 싶다.
눈물이 났다.
울면 안 되는데.
울면 저 씨발년들한테 지는 건데.
참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흐...흐흑........”
성현대리가 다가와서는 내 어깨를 치며 위로했다.
“진짜 개 씨발년들. 사람이 바쁘게 일하다가 다쳐서 피가 났는데. 걱정이나 위로는 못해 줄 망정. 에이 미친년들. 진짜 저 씨발년들은 죽어도 곱게 못 죽을 거야. 시현씨. 빨리 의료실 가서 손가락 치료 해. 보니까 많이 아팠겠네. 회의실은 내가 정리 할 테니. 걱정 말고. 자. 울지 말고. 빨리. 그거 덧나면 생각보다 오래 가. 나도 입사 초기에 종이에 베인 적 많아서 잘 알거든.”
“대리님. 저 진짜. 그만 두고 싶습니다. 진짜 씨발. 억울하고 답답해서........”
“알아, 시현씨. 내가 시현씨 마음 다 알아. 나도 진짜 씨발놈의 회사 그만두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겠어? 씨발 진짜. 그런데 나도, 시현씨도 회사 그만 못 두는 게 다 각자 이유가 있는 거잖아.”
하아.......
답답하다.
가슴에 응어리가 한 움큼 맺힌 것 같다.
어머니가 내가 첫 월급으로 사드린 싸구려 가방을 받고 그렇게 눈물 흘리실 정도로 행복해 하시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이 어려운 시기에 내가 취업했다고 그렇게 자랑스러워 하지만 않았어도.
진짜. 이 개 씨발 좆같은 회사 그만뒀을 텐데.
그랬을 텐데.....
힘없이 회의실 문을 나가서 터버터벅 의료실을 향해 걸어갔다.
내 의지로 걷는 건지.
다리가 움직이는 데로 내가 끌려가는 건지 나 자신도 알지 못했다.
*
오전 회의시간
*
오전 회의가 낯설게 느껴진다.
고작 저번 주 금요일에 오전에도 했었는데.
내가 낯설게 느껴지는 건 오전 회의가 아니라 바뀐 환경이겠지?
성현대리와 회의실로 들어왔다.
아직 회의실에는 서유리 사원만 열심히 회의 자료를 복사하며 정리하고 있었다.
“유리씨 아직 회의 자료 준비 중이네요? 오전 회의 10시에 시작하죠?”
서유리가 나를 보며 반겼다.
“아, 마침 잘됐다. 시현씨. 저 손이 좀 딸려서 그러는데,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지금 할 일 없잖아요.”
“아, 바쁘시구나.”
씨발년이 자기 똥꼬에 불붙으니까 아주 자연스럽게 도움을 요청한다.
현세계에서 내가 도와주라고 했을 때 나를 개 무시 하던 건 생각 안하고.
그래. 회사 동기가 바쁘다는데 도와줘야지?
“아 그러면, 제가 프로젝트 연결해 드릴 게요. 파일 어디 있어요?”
“아, 진짜요? 그 컴퓨터 옆에 있어요. 안 그래도 프로젝트 연결 하는 법 몰라서 해매고 있었거든요. 시현씨 같은 동기가 있으니까 든든하다 진짜.”
개 같은 년이 남녀가 역전 당해서 위치가 바뀌니까 바로 아부질 시작하는 구나.
다른 건 몰라도 상황 파악은 정말 빠른 년이다.
“아, 그러니까. 이 파일을 프로젝트 빔에 연결시키면 되는 거죠? 간단하네.”
“아, 예. 예.”
서유리가 정신없이 회의 자료를 스테플러로 찍으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서유리 개 씨발년 치밀 한 줄 알았는데, 허당이네?
감히 누구한테 자료를 맡기고 한 눈을 팔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걸 숨길 수 없었다.
먼저 프로젝트의 영상 출력장치와 입력장치를 반대로 연결했다.
그리고 간단하게 서유리 파워포인트 자료를 수정해 주었다.
아?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지 않니?
악마 유시현이 속삭였다.
“유리씨, 나 급한 일이 생각나서, 미안해요. 나머지는 유리씨가 정리해. 대리님 급해요. 빨리. 빨리 나와 봐요.”
“어? 어......”
서유리의 자료 정리를 돕던 성현대리가 멍한 얼굴로 나를 따라 회의실에서 나왔다.
갑자기 일을 도와주던 두 명이 갑자기 나가 버리자, 서유리의 얼굴이 화장실 휴지처럼 일그러졌다.
아주 보기가 좋았다.
씨발년 그 구겨진 얼굴
앞으로 자주 봅시다.
“아, 대리님. 시현씨 도와주던 일은, 마저 도와주고 가셔야죠. 갑자기 그렇게 가 버리시면!!”
“아 몰라요. 지금 급한 일이 생겼다니까요. 나머지는 유리씨가 알아서 해요. 원래 유리씨 일이지 우리 일은 아니잖아요.”
“아니, 지금 대리님 때문에 원래 정리 잘 하던 자료도 다 흐트러지고. 아, 씨발 진짜!!!! 이럴 거면 처음부터 도와준다고 하지를 말지!!!!”
미친년 지 혼자 소리 질러 봤자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개 같은 년 지금쯤 존나 열 받겠지?
원래 도와준다고 설레발만 치고 갑자기 빠지는 게 훨씬 더 열 받는다.
처음부터 나랑 성현대리가 아예 건드리지를 않았으면 아마도 제시간에 회의자료 준비를 끝낼 수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나름 회의 시간에 맞춰서 자료 준비를 하려고 배분한 시간 타이밍도 엉망이 됐다.
자기 마음대로 우리가 회의 자료 준비를 당연히 끝까지 도와줄 거라고 가정한 순간.
이미 그 년은 내 덫에 걸린 거다.
정리하던 회의 자료들은 성현대리가 건드려서 다 흐트러졌다.
프로젝티빔은?
왜 빔에서 영상이 출력 안 되는지 오류를 찾는 데 한참 걸리겠지?
그 씨발년은 무려 100번이 넘는 오전 회의가 있었음에도 프로젝트 빔을 건드려 본적이 없었으니까.
항상 그런 잡일은 내 몫이었다.
“시현아, 급한 일이 무슨 일이야?”
성현대리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아, 대리님. 우리 커피 한 잔 하고 회의 들어가야죠, 그 미친년들 얼굴을 무려 한 시간이나 봐야 하는데, 멀쩡한 정신으로 버티려면 카페인이 땡기지 안 땡기겠어요? 그것 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있다고요.”
성현대리가 혀를 내둘렀다.
“야, 이 악마 같은 자식. 너 일부러 유리 씨발년 골탕 먹이려고 그런 거지?”
“아, 대리님.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커피가 마시고 싶은 거라니까요. 자자, 얼른 마시고 10시전에는 회의실로 들어가요. 회의에 늦으면 생리하는 아영팀장 썅년이 또 회의자료 내 얼굴에 던질지 누가 알아요?”
“알겠다. 알겠어. 커피는 시현씨가 사는 거지?”
“아, 재벌가문의 형수님을 두신 우리 성현대리님께서 왜 이러실까요. 커피 한 잔에 쪼잔 하시게. 진짜 가오 떨어지신다.”
성현대리가 눈치를 보며 재빨리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야, 임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으휴. 그런 말 안 해도 내가 산다, 사. 그냥 장난이나 한 번 처 본거지. 내가 시현씨한테 사라고 하겠어.”
두리번거리며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소리를 죽여 말했다.
“아, 그런데. 대리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대리님은 왜 이 미친년들 사이에서 회사를 다니시는 거예요. 형수님 빽이면 높은 자리로 이직도 하실 수 있으시잖아요.”
“야, 그거야. 다 이유가 있지. 이유가 없으면 내가 미쳤다고 이 미친년들 사이에서 회사를 3년이나 다녔겠냐.”
“대리님, 아직 회의시간까지 시간 조금 있는데, 말씀 해 주시면 안 돼요? 진짜 궁금해서 그래요. 저는 진짜 이해가 안 가거든요.”
성현대리가 동전을 넣어서 믹스커피를 두 잔 뽑았다.
한 잔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게 말이다. 실은 내가 우리 와이프한테 청혼 할 때. 장인어르신께 약조했거든. 내가 우리 와이프는 장인어르신의 도움 없이 꼭 내 손으로 먹여 살리겠다고. .지금이야 장인어르신, 장모님도 나를 사위로 인정해 주시지만 처음에는 장인, 장모의 반대가 얼마나 심했는지 아냐? 사실 와이프가 나 같은 놈 뭐에 홀렸는지, 홀딱 빠져서 결혼한 거지. 아니면 나 같은 평범한 놈이 어떻게 그런 미인 재벌집 딸을 와이프로 얻겠냐.”
사실 성현대리의 말을 듣고 보니 이해가 갔다.
절대로 어떤 도움도 안 받겠다고 약조해서 결혼을 승낙 받았다.
그래 놓고 지금에 와서 장인 어르신과 사이가 좋아졌다고 아버님 회사에 낙하산으로 좋은 자리 하나 주세요! 하는 건 내가 아는 성현대리라면 절대 용납할 사람이 아니다.
“거, 참. 대리님도. 자신감 좀 가지세요. 제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대리님 보다 더 책임감 있고 멋있는 남자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대리님 아니었으면 제가 어떻게 저 미친년들을 버티고 아직까지 회사를 다녔겠습니까? 제가 여자였어도 대리님한테 푹 빠졌을 겁니다. 형수님처럼.”
성현 대리가 사람 좋게 웃으며 장난을 쳤다.
“야! 너 이씨. 옛날 그 꽤 재재한 유시현이면 모르겠는데, 계집애 같이 예쁘장하게 생긴 시현씨가 그런 말 하니까 좀 징그럽다. 아, 시현씨. 그래서 자꾸 나한테 달라붙던 거야? 나 와이프 하나로 힘들거든. 이제부터 접근 금지다. 시현씨.”
“아, 진짜! 대리님.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저도 여자가 좋거든요. 무슨 말을 못 하겠습니다. 진짜.”
“아, 장난이야. 장난. 그 것보다 시현씨 이제 회의실 들어가자.”
“예, 예. 재벌집 사위 대리님. 형수님만 손 될 수 있는 고귀하신 몸에 닿을까봐 좀 떨어져서 걷겠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미친 씨발년들과의 첫 번째 전투.
오전 회의 시간이 시작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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