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여자는 때려도 되고, 남자는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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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여자는 때려도 되고, 남자는 안 돼?
업무가 많은 날은 시간이 졸라 안 간다.
하지만 오늘같이 널널한 날은 하루가 금방 간다.
“벌써 5시네. 시현씨 오늘도 잘 버텼어.”
“성현 대리님도요. 퇴근하고 2580 호프로 바로 가실 거예요?”
“응, 동철이형도 퇴근하고 2580으로 바로 온다고 했어. 같이 가자.”
“알겠습니다. 충성~!”
6시에 퇴근이니 이제 한 시간만 있으면 퇴근이었다.
오늘 같이 칼 퇴근 하는 날은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오늘은 불금이었다.
이제 한 시간만 있으면 주말까지 쉴 수 있다.
저 미친년들을 이틀이나 안 봐도 되는 것이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시현씨, 뭐 기분 좋은 일 있어? 표정이 좋네?”
빨간 짧은 미니스커트에 검은 망사 스타킹.
최다정 차장이었다.
“아닙니다. 차장님. 출장 가신 줄 알았는데요?”
“어, 갔다가 지금 출근.”
“아, 예.”
최다정 차장이 허리를 숙였다.
C컵은 되어 보이는 큰 가슴이 하얀색 블라우스 속에서 출렁거렸다.
“시현시, 업무보고서 보고 있는 거야? 모르는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고.”
“네, 차장님. 감사합니다.”
최다정 차장이 내 머리를 마치 강아지 만지듯 만졌다.
“아유, 귀여워 가지고. 수고.”
독한 술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아이, 최다정 씨발 년. 내가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
최다정 차장은 남자 직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얼굴도 야하게 생겼지만, 옷을 텐프로 아가씨처럼 꼴리게 입는다.
거기다가 몸매는 농염하다.
남자들도 잘 다룬다.
아니 잘 가지고 논다.
나도 처음에는 최다정 팀장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년의 실체를 알기 전 까지는.
최다정 차장은 한 마디로 박쥐같은 여자였다.
남자들에게 정보를 캐서 여자들에게 전달하는.
입사 초반 최다정 차장과 단 둘이 술자리가 있었다.
나는 최다정 썅년이 나한테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미쳤던 거지.
그 술자리에서 최다정 썅년을 믿고 다른 여직원들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았다.
“회사 생활 힘들지? 괜찮아. 시현씨. 나한테는 다 말해도 돼.”
그 다음날.
나는 다른 여직원들에게 조리돌림 당했다.
쌍욕도 먹었다.
최다정 썅년이 내가 한 말에 조미료를 더해서 나를 아주 죽일 놈으로 만들었다.
하, 개 같은 년.
차라리 아예 처음부터 적대적인 년들이 박쥐보다는 나았다.
그 때부터 최다정 차장을 만나면 바짝 긴장한다.
시간은 흘러 6시20분.
나는 서둘러 퇴근 준비를 했다.
미영대리와 미희주임은 이미 5시 50분에 퇴근했다.
나는 신입이라 눈치 보여서 성현대리가 퇴근 할 때 같이 나갈 생각이었다.
“시현씨, 가자.”
성현대리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네, 대리님.”
나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어머, 시현씨, 가려고? 나 하나만 도와주고 가라.”
최다정 차장이었다.
썅년 타이밍 기가 막히지. 항상.
휴우,
그래도 할 수 있나.
퇴근도 이른데 해주라는 대로 해 줘야지.
“네, 차장님”
나는 성현대리를 보며 말했다.
“대리님 먼저 2580에 가 계세요. 차장님 일만 도와주고 금방 갈게요.”
성현대리가 작게 말했다.
“미친년. 꼭 퇴근하려고 하면 저 지랄이네.”
“네, 대리님도 괜히 잡히실지 모르니까, 빨리 나가세요.”
“어, 미안해. 시현아. 동철이형도 기다릴 테니까. 먼저 갈게.”
“네, 대리님. 충성~!”
성현대리를 보내고 최다정 차장에게 갔다.
“시현씨 정수기 물통 좀 바꿔주세요오~ 물 다 떨어졌엉.”
미친년, 이제 네 년이 애교를 떨어봤자 섹시한 게 아니라 징그럽기만 하다.
“네. 차장님.”
이게 꼭 퇴근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인가?
월요일에 출근해서 해도 되는 데.
하여간, 썅년.
보니까 출장 가서 술 이빠이 마시고, 꼬장 부리는 거다.
물통을 들어서 정수기 위에 있는 빈 물통과 바꿨다.
혼자 하려니 무거웠다.
화분 옮기고, 물통 옮기고.
아이고, 내 허리.
정작 중요한 곳에는 쓰지도 못하고 처량하다.
“시현씨, 운동 좀 하나 봐? 팔에 잔 근육 완전 내 취향.”
요즘에 내가 관심을 안 보였더니, 미친년이 또 낚시 하나 보다.
저 년은 남자한테 관심을 받고 싶어서 사족을 못 쓴다.
관심병자다.
그래서 남자가 넘어오면, 가차 없이 쌩까고 무시한다.
당한 남자 직원이 한 둘이 아니다.
“아니에요. 운동은요. 이제 가 보겠습니다. 차장님.”
벽을 쌓자.
절대 엮이지 말자.
“자기야, 나 하나만 더 도와줘라. 응?”
시바알~~!!!!!
이럴 줄 알았다. 이년은 꼭 이런 식이다.
내가 이년 심기를 건드린 거다.
관심을 안 보이니까.
“이거 우편봉투 풀로 붙이는 건데, 간단 해. 한 십분 이면 다 할 걸? 같이 하자.”
십분? 이 썅년아!!!!!
양을 보니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자기, 싫은 거 아니지?”
우편을 보니 다음 주 목요일 발송이었다.
다음 주에 해도 충분했다.
“차장님. 제가 저녁 약속이 있어서, 다음 주에 하면 안 될까요?”
“무슨 말이야? 시현씨. 벌써 가려고? 팀장님도 안 갔는데?”
미친년아, 아영팀장은 7시에 팀장들 회식 있어서 남은 거고.
주위를 둘러보니, 팀장과 나 차장만 남아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다 갔는데요. 차장님.”
나는 한시라도 빨리 회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최다정 차장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아 몰랑. 무조건 나랑 다 하고 가. 알겠지? 나 신입사원 때는 밤 10시전에 퇴근 한 적도 없는데, 요즘 신입사원들은 아주 회사 편하게 다녀. 진짜.”
썅년이 주위에 사람들 없는 거 보더니 원래 성격으로 돌변했다.
라떼는 말야~ 스킬을 시전하며.
에휴, 여기서 더 반항해 봤자 나만 골치 아프다.
“아, 예. 알겠습니다.”
최다정 차장이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게 내가 애교 부릴 때 잘 받아 주지. 병신아. 왜 고생을 사서 해.]
라는 미소였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최다정 차장의 전화기가 울린다.
“여보세요.”
“$%$#%#$%”
“아, 맞다. 오늘 네일아트 하러 가기로 했었지. 응. 알았어. 깜빡 했네. 금방 갈게~”
전화를 끊은 다정 차장이 급하게 핸드백을 챙기며 일어섰다.
“시현씨. 들었지? 나 급한 약속을 깜빡 했었네. 미안해 시현씨. 나 먼저 갈게. 수고 좀 해~”
미친년 네가 그럼 그렇지.
이젠 놀랍지도 않다.
일만 남기고 재빨리 도망치는 최다정 썅년을 보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참았다.
씨발. 한, 두 번 겪은 일도 아니고 그냥 똥 밟았다 생각하자. 유시현.
시간은 6시50분.
기다리고 있을 성형대리와 김동철 차장을 생각하며 일에 속도를 냈더니 생각보다 빨리 끝나갔다.
“시현씨, 아직도 일해?”
아영 팀장이었다.
“아, 네. 차장님이 맡기고 간 일이 있어서요.”
“아, 그래. 늦게까지 수고가 많네.”
“아니에요. 팀장님.”
“그럼, 나 팀장 회식 간다. 퇴근 할 때 불 끄고.”
“네, 팀장님.”
아영 팀장이 나가려다가 뭐라도 생각난 듯 다시 돌아오며 말했다.
“아, 시현씨. 하는 김에 우리 월요일 아침 회의자료 정리해서 내 책상위에 올려놔줘요. 수고.”
아..........
머리에서 천 불이 난다.
늦게까지 일하는 직원을 더 부려먹는 저 미친년.
휴우.......
딸칵!
불을 다 끄고 드디어 지긋지긋한 회사를 떠났다.
결국 회의 자료까지 정리했더니, 내가 사무실에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직원이 됐다.
아, 대리님이랑 차장님 기다리시겠네.
나는 최대한 빨리 2580호프집으로 갔다.
“얌마~ 왜 이렇게 늦게 와! 자식 빠져가지고 말이야. 하하하!”
“이병! 유시현! 늦어서 죄송합니다! 충떵!”
김동철 차장이 반갑게 맞아줬다.
“아, 동철이 형. 말도 마. 우리 시현이 오늘 팀에서 개고생 했어. 우리 팀에 미친년들이 한 둘이어야 말이지.”
“아, 하긴. 너희 팀 페미들 천국이지. 시현이가 고생이 많겠네.”
“진짜 죽겠지 말입니다.”
56사단 같은 내무실 아버지 군번이었던 동철차장이다.
자연스럽게 동철 차장만 보면 군대 말투가 나왔다.
“새끼, 아직도 군대 말투 쓰냐. 제대 한지가 언젠데.”
“아, 평소에는 안 그래요. 병장님. 아니, 동철 차장님.”
“그래, 임마. 나도 뭐 생각해보면 너랑 군대에서 뺑이 칠 때가 제일 기억에 남더라.”
“저는 병장님 몰래 px에서 맛스타에 뽀글이 먹을 때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아, 이 뺀질이 새끼. 하여간 누가 빠진 군번 아니랄까봐. 너 얼차려 안 받은 지 오래됐지? 오늘 좀 오랜만에 받아 볼 텨?”
“병장님, 자꾸 이런 식으로 사회인 괴롭히시면 소원수리 하지 말입니다.”
“아휴, 이 뺀질이. 진짜. 내가졌다. 졌어.”
오랜만에 군대 선임을 만나서 농담도 하고 노니까 시간이 금방 갔다.
물론 군대를 다시 가라고 하면, 절대 안 간다.
그냥 추억이니까 그리운 거지.
“제가 그때 동철병장님께 킬 패스 했는데, 말입니다. 군기가 빠진 병장님께서 헛발질을 하셔서 저희가 31사단 새끼들한테 발렸지 말입니다.”
“아, 진짜 동철이형, 그래 놓고, 매번 조기축구 선발 안 시켜 준다고 징징 되던 거야? 우리 동철이형 안 되겠네~”
“야, 유시현. 이 뺀질이 새끼.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게 무슨 킬 패스야. 슛 한 게 빗맞아서 나한테 온 거지. 아, 이거 또 세상 억울하네.”
“제대 할 때 되어서 병장님이 군기가 빠져서 그런 겁니다. 저는 분명 킬패스 한 거 맞지 말입니다.”
군대에 갔다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흥분하는 군대에서 축구 한 얘기.
나와 성현대리, 동철차장이 한참 침 튀기며 얘기에 열을 올렸다.
그때,
“아, 진짜. 꼰대들 군대얘기 조온나 시끄럽네. 술집 전세 냈나.”
한 참 떨어진 자리에서 허스키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봐도 우리한테 한 말 이었다.
성현대리가 목소리를 낮추며 얘기했다.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얘기했나보다.”
“그런가? 하긴. 이 뺀질이 새끼 때문에 너무 흥분했나 보다.”
동철차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과를 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조용히 마실게요.”
“아, 예. 조용히 좀 노세요. 다른 사람들도 있잖아요.”
“네, 네. 죄송합니다.”
그 후 우리는 조용히 술을 마시며, 군대 얘기. 회사얘기를 했다.
그런데 아까 우리한테 조용히 하라던 테이블에서 큰 소리가 났다.
“아, 진짜? 네가 조용히 하라니까 꼰대 새끼들이 닥쳤다고?”
“야, 옆자리에 있잖아.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들으면 들으라지 뭐. 지들이 어쩌겠어. 어차피 아무 것도 못해. 병신들이야.”
못 보던 여자 하나가 더 늘어 있었다.
숏 컷 머리를 한, 마른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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