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 미소년이 살아남는 법-2화 (2/413)

〈 2화 〉 바카스가 아니라 “바껴쓰?”

* * *

2화

바카스가 아니라 “바껴쓰?”

“시현씨. 왜 이렇게 자리를 오래 비워?”

역시나 성현대리 말대로 자리 오래 비웠다고 미영대리의 태클이 들어 왔다.

“죄송해요. 담배 한 대 피고 오느라.”

“몸에도 안 좋은 걸 남자들은 왜 그렇게 피나 몰라.”

썅년아, 너도 점심 먹고 식후땡 하는 거 내가 봤거든. 손에서 담배냄새도 쩔면서, 꼴초 아닌 척 졸라 하네.

역겹다.

꼴초년아.

“아, 됐고. 자기, 잠깐 교대 좀 갔다 와.”

“네? 교대는 왜요?”

“교대역 3번 출구 가면, 우체국 나오거든. 업무 때문에 등기 보낼게 있어서 그래.”

“저 10시부터 회의가 있어서 회의자료 준비해야 하는데요.”

“아, 맞다. 10시부터 회의였지? 그럼 점심시간에 좀 갔다 와. 교대역 금방이잖아.”

아, 씨발.

아무리 잠실에서 교대가 안 멀다고 해도, 점심시간에 갔다 오라고?

밥은 언제 먹고? 개념은 똥구멍으로 쳐드셨나. 진짜.

“저도 밥도 먹어야 하고, 점심시간 끝나고 갔다 올게요.”

“안 돼. 그 때는 업무 많아서. 점심시간 끝나기 전까지 꼭 보내고 와. 자기 믿는다~”

내가 왜 네 년의 자기인데?

꼭 지가 불리 할 때만, 자기라고 부른다.

나름 애교부리는 것 같은데, 그게 더 토 나와 썅년아.

후우........

­툭!

미영 대리가 우편물을 내 책상위에 던져놓고 화장실로 도망쳤다.

내 의견은 또 당연하게 무시당했다.

아, 씨발, 편의점에서 컵라면에 삼각 김밥 먹어야겠네. 내 소중한 점심시간을 통째로 강탈당했다.

나는 열을 삭히며 컴퓨터를 키고 회의 자료를 만들기 위해 업무에 몰두 했다.

그런데, 어째 자리가 점점 더워졌다.

찜통 같았다.

성현 대리도 더운지 땀을 닦으며 주위를 둘러 봤다.

“어? 누가 뒷자리 에어컨 껐지?”

­삐빅!

성현 대리가 에어컨을 켰다.

“아, 대리님. 에어컨 키지 말아요. 추워요.”

직장 동기 유리가 가디건을 두르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아니, 유리씨는 앞자리에서 에어컨 바람나오니까 괜찮아도, 뒷자리인 나랑 시현씨는 덥거든요.”

“아니, 더우면 부채질도 좀 하고 찬 물도 좀 마시고 하면 되잖아요. 오늘 팀장님 예민하신 날 인거 아시면서 배려가 없으시네요. 대리님.”

유리 이 여우같은 썅년이 지 혼자 춥다고 하면 안 통할 것 같으니까, 팀장을 팔았다.

팀장도 들었는지 성현 대리한테 한 마디 했다.

“내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뒷자리 에어컨 끄라고 했어요. 남자가 그 정도 이해심도 없어요?”

“아, 네. 죄송합니다. 팀장님.”

성현 대리도 팀장한테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에어컨 리모컨에 달린 뒷자리 실내 온도를 보니 30도에 가까웠다.

하, 씨발.

내가 회사에서 사우나를 하고 있네.

성현대리도 주르륵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연신 훔친다.

“자, 여기요. 이거 마시면서 일 하세요.”

유리가 찬 물을 두 잔 떠와서는 나와 성현 자리에 놓는다.

이, 미친년아!

냉수 마시고 속 차리라는 거야 뭐야.

성현대리도 열 받았는지 한숨을 푹 푹 내쉰다.

더위를 참아가며 회의 자료를 만들다 보니, 어느덧 9시50분.

“시현씨. 지금 뭐하는 거야?”

내가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미영대리가 딱 내 뒤에 붙어서 쳐다보고 있다.

와. 씨발. 놀래라. 사탄의 인형 처키가 따로 없네.

“네? 회의 자료 만드는데요. 거의 다 만들었어요.”

“응, 하는 김에 내 것도 좀 해줘라.”

“네? 회의 10분밖에 안 남았는데요?”

“자기는 손이 빨라서 금방 하잖아. 자기 건 내가 좀 쓸게.”

“대리님!”

내가 날카롭게 대꾸하자, 유리가 미영 대리편을 들었다.

“시현씨, 대리님이 부탁하는데 좀 그렇게 해요. 복사 붙여넣기만 하면 되겠는데 그래요.”

그렇게 쉬우면 네 자료를 줘. 이 여우 같은 년아.

미영대리가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재 빨리 내 자료를 가지고 간다.

“고마워. 자기~”

하, 진짜 속에서 열불이 나서 유리가 따라 놓은 물을 마셨다.

“컥!”

나는 물을 마시자마자 이상해서 바로 화장실로 가서 뱉었다.

이 썅년이.

정수기 물을 나두고 엿 먹으라고 수돗물을 따라 놓은 것이다.

저 년은 전생에 나랑 철천지원수였던 게 분명하다.

1.

회의가 끝나고 나니 시간은 이미 11시에 가까웠다.

“시현씨 김미희 주임이 잠깐 로비로 내려오래요.”

카톡을 확인 한 유리가 말했다.

“아, 네.”

김미희 주임은 내 사수다.

그리고 내가 이 회사에서 가장 싫어하는 년 이었다.

외모는 회사 전 직원을 통틀어서 가장 예쁘지만, 싸가지도 가장 없었다.

처음에 나도 외모에 속아서 잘 보이려 노력했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밥맛 떨어지는 년이었다.

­띵똥!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1층을 눌러 로비로 내려갔다.

도도한 외모에 명품으로 치장한 김미희 주임이 보였다.

“시현씨 왔어?”

김미희 주임이 예쁘게 방긋 웃었다.

나도 처음에 저 가증스러운 미소에 속았었지.

“시현씨, 나 저것 좀 들어 줘. 우리 개발사업부로 옮겨야 해.”

미희주임이 손으로 로비에 놓인 커다란 화분들을 가리켰다. 적어도 30~50kg정도는 나가 보였다.

하, 그럼 그렇지.

또 막노동시키기 위해서 나를 부른 거다.

“너무 많은데요.”

“응, 그치? 시현씨 혼자 옮기기는 좀 무리겠다.”

이년이 웬일로? 날 생각해 줘?

뭔가 불안하다.

“아저씨~ 이리 와 봐요.”

미희주임이 자기 할아버지뻘 되는 경비아저씨를 불렀다. 나이 드신 분이 예의도 바르시고, 겸손하셔서 내가 평소 좋아하던 경비아저씨다.

“아? 예~”

경비 아저씨가 모자를 바르게 고쳐 쓰며 걸어 왔다.

“아저씨. 이 화분 좀 저희 직원이랑 같이 옮겨요.”

“네? 이거를 요?”

“왜요? 이게 아저씨들 하는 일 아니야?”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나이가 들어서 힘이 좀 딸려서......”

아니, 이 미친년님.

젊은 장정들도 옮기기 힘든 저 큰 화분을 할아버지뻘 되는 분께 옮기라니.

그것도 버르장머리 없이, 하대하면서.

“아저씨, 괜찮아요. 걱정 마시고, 가서 일보세요. 제가 옮길게요.”

“시현씨는 가만히 있어. 끼어들지 말고.”

아, 이 미친년 또 시작이다.

이게 바로 내가 저년을 가장 또라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아무리 논리적이지 않아도, 절대로 지지 않으려 한다.

어떻게든 말싸움으로 자기가 이겨야만 분이 풀린다.

“아저씨가 회사에서 받아가는 월급. 이런 일 하라고 주는 거 아니야? 맞지? 맞잖아.”

아, 진짜 안하무인이다.

이 미친년. 옆에 있는 내가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아, 예. 예. 미안해요. 주임님.”

경비 할아버지가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인다.

씨발. 할아버지뻘 되는 분에게, 진짜 이건 아니지.

이번에는 나도 못 참겠다.

내가 미희 주임한테 한 소리 하려는데, 뒤에서 누가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미희 주임. 아 뭘 그렇게 경비아저씨랑 재미있는 얘기를 하고 있어요. 아침부터.”

뒤를 돌아보니 내가 이 회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이은우 상무님이 서 계셨다.

“아, 상무님. 그게 아니라. 경비 아저씨가 자기 분수도 모르고, 자기 할 일을 안 하잖아요.”

“아, 그래? 아이고 어르신이 그랬어? 그래 무슨 일인데?”

“아니, 저희 개발사업부로 화분 좀 옮겨 달라고 했는데, 나이 들었다고 못 하겠다잖아요. 나이 많은 게 무슨 벼슬이라고, 참 나.”

“아, 그래? 미희씨 저 화분들 말하는 거지? 저거? 큰 것들?”

“네. 상무님.”

이은우 상무님이 경비아저씨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어르신은 가서 업무 보세요. 제가 어르신 일 좀 뺏어야겠네요. 요즘 운동 부족이라, 안 그래도 몸 좀 풀려고 했는데. 허허! 괜찮으시죠?”

“상무님! 그게 아니라!”

“아. 미희씨는 바쁠 텐데, 어서 올라가서 일 봐요. 이거는 나랑 시현씨랑 옮길 테니. 어서요. 우리 미희씨 같은 인재가 이런 하찮은 일에 시간 뺏기면 우리 회사는 누가 지켜요. 안 그래요?”

미희주임이 은근슬쩍 상무님에게 인재라고 칭찬 받자, 기분이 좀 나아졌는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뭐 정 그러시다면. 수고 좀 해주세요. 상무님.”

아, 진짜 개념을 밥 말아 쳐드셨나.

상무님한테 수고 하라니.

자기보다 한 참 높으신 분한테.

“네, 네. 걱정 말고 올라가요. 우리 미희씨 언제 봐도 예뻐요. 눈부셔~”

“어머, 상무님도. 농담도 잘하세요.”

마녀 같은 미희주임이 올라가자 이은우 상무님이 경비 아저씨에게 오만원짜리 지폐를 하나 꺼내서 손에 쥐어 주셨다.

“어르신, 요즘 애들이 참 싸가지가 없어요. 그 참. 예전에는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많이 당황하셨죠. 얼마 안 되지만 손자 손녀들 과자라도 좀 사 주세요. 죄송해요. 어르신.”

“아니. 상무님 뭘 이런 걸 다.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요.”

“아이, 어르신 제가 손이 부끄럽습니다. 어서 넣으세요.”

이은우 상무가 억지로 경비 아저씨의 주머니에 돈을 넣어줬다.

“시현씨. 힘들더라도 힘내서 같이 옮겨 봐요. 허허.”

“아니에요. 상무님. 상무님은 바쁘실 텐데 일 보셔야죠. 저 혼자 충분합니다.”

“아니, 시현씨. 지금 나, 나이 들었다고 무시하는 건가? 내가 시현씨 나이 때는 쌀 한가마니도 번쩍 들었어요. 어서 와서 같이 화분 들어요. 시현씨! 안 그러면 나 혼자 옮긴다!”

나는 혼자 옮겨도 된다고 극구 말렸지만, 이은우상무는 화분을 다 옮길 때 까지 끝까지 도와줬다.

땀에 흠뻑 젖은 양복을 입은 체 상무실로 돌아가는 이은우 상무를 보며 생각 했다.

­아, 씨발. 나도 저런 멋진 행동파 아재가 되고 싶다. 말로만 주접떠는 꼰대 말고.

화분을 옮기느라 흘린 땀을 대충 씻고 나니 어느 덧 점심시간 이었다.

미영대리가 던져 놓은 우편물을 들고 회사를 나섰다.

­먼저, 밥이나 먹자.

아침부터 기운을 썼더니 배고파 죽을 것 같았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에 육개장컵라면으로 대충 때웠다.

­역시, 컵라면은 육개장이지.

만족스러운 식사 후 전철역으로 갔다.

그날따라 2호선이 늦게 왔다.

그래서 전철 안에 사람도 많았다.

나는 재빨리 자리를 탐색했다.

피곤해서 앉아서 가고 싶었다.

마침 운 좋게 내 앞에 앉은 아저씨가 종합운동장에서 내렸다.

나는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할머니가 지팡이를 짓고 서 계셨다.

에휴, 피곤해도 양보해야지.

불편하신 할머니를 보고도 자리에 모른 척 앉아있을 만큼 철면피는 아니었다.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내가 자리를 양보하며 일어서는데, 내 앞에 있던 뚱뚱한 여자가 털썩 내 자리에 앉았다.

화가 났다.

“아줌마? 지금 뭐하는 거예요. 할머니한테 자리 양보한 거잖아요. 일어나요.”

“아저씨. 저 지금 임신한 거 안 보여요?”

나는 내 자리를 철면피처럼 차지한 여자를 봤다.

임신하게 아니다.

아무리 봐도 그냥 뚱뚱한 거다.

자세히 보니 나이도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으로 어려 보였다.

그냥 못생기고 뚱뚱해서 아줌마로 착각했던 거다.

하, 씨발.

그런데 좆같은 게 아무리 임신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걸 말할 순 없다.

너는 배가 튀어 나온 게, 임심해서가 아니라 뚱뚱해서 그런 것 같은데? 라고 말하는 순간.

지랄, 지랄 개지랄은 다 떨면서 고소미 먹인다고 협박 할게 뻔하다.

나는 열불이 나는 걸 꾹 참으며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죄송해요.”

할머니가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유, 괜찮아요. 총각. 그런데 총각 내가 보여?”

“네?”

“으음. 아니야.”

나는 할머니 옆에 나란히 섰다.

할머니는 다리도 불편하신 데 짐도 들고 있었다.

“할머니 제가 들어드릴게요.”

“아니, 안 그래도 되는데, 안 무거워요. 괜찮아요. 괜찮아”

“할머니 어디까지 가시는 데요?”

“응? 나 그냥 정처 없이 이 곳 저 곳 다니지.”

요즘은 나이 드신 분들은 지하철이 무료다.

그래서 지하철 타고 목적지 없이 시간을 때우시는 분들도 많다고 한다.

이 할머니도 그런 분인 것 같았다.

“이리 주세요. 할머니. 교대까지만 들어 드릴게요. 저도 거기서 내려야 해서.”

나는 억지로 할머니의 짐을 뺏어 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아유, 할머니 이게 다 뭐에요?”

할머니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응? 그걸 들 수 있어? 나도 보이고?”

할머니가 나이가 드셔서 노망이 드셨나 보네.

우리 부모님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시는데 걱정이 됐다.

나는 할머니의 짐 안에 든 걸 살짝 봤다.

비타민제 같아 보였다.

이름이 “바껴쓰” 였다.

이건 뭐야? 바카스도 아니고.

요즘 노인분들 상대로 엉터리 약을 파는 사기꾼들이 있다더니.

할머니도 당하신 것 같았다.

­이번 역은 교대! 교대!

“할머니 먼저 내릴게요. 짐이 무겁던데 조심하시고요.”

내가 내리려는데 할머니가 내 손을 잡으며 “바껴쓰” 한 병을 꺼내서 건넸다.

“총각. 이거 집에 가서 마셔. 피곤해 보여.”

비록 엉터리 피로회복제 일지라도 할머니의 호의를 거절하는 건 아니지.

“네, 할머니. 감사합니다.”

나는 공손하게 “바껴쓰”를 챙겨서 주머니에 넣었다.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