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267화 (267/271)

〈 267화 〉 266화

* * *

오늘은 콜탄구트라와 협상하는 날이다.

우리는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서 엘레아노르 측과 합류하여 사전준비를 했다.

엘레아노르는 어디서 데려왔는지 모를 사람들에게 화장과 머리세팅을 맡겼다.

그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내가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고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해주자 어느 정도 안심했다.

화장을 끝내고, 머리스타일도 제대로 꾸민 뒤에는 바디슈트를 화려하기 짝이 없는 치렁치렁한 드레스 형태로 변형시켰다.

나는 지금까지 여성귀족들을 제법 많이 봤었지만 이렇게까지 사치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황금색을 베이스로 붉은색과 검은색이 조화롭게 이루어진 드레스는 금실과 각종 보석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내가 바디슈트로 스캔한 원본에는 방어막 형성, 체온유지, 청결유지, 공기정화 기능이 포함되어 있었다.

“엘레아노르, 이 드레스의 원본은 어디서 난 거야?”

“황실에 납품하는 공방에 들어가서 슬쩍했어.”

“너희들 참 간도 크다.”

“완성품을 훔친 게 아니라 재료를 조금씩 훔쳐서 만든 것이니 안심해.”

“전혀 안심이 안 되는 말이네.”

나는 질서의 추종자들의 첩보능력이 황실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까지 닿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과연 이 녀석들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음... 아예 더 깊이 알아서 나와 세레나의 관계와 세레나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차라리 내가 더 편해질 것 같네.

그래봤자 세레나는 내가 죽을 만한 상황에서도 딱히 개입을 한 적이 없으니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너한테 엄청 잘 어울리니까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진짜로 잘 어울려?”

“그럼. 넌 원래 귀티가 나는 사람이라서 황후가 입는 옷 정도는 충분히 어울리고 남지.”

“뭐? 황후?”

“그래. 그건 본래 황후만 입을 수 있는 옷에 일부 변형을 가한 거야. 만약 지금 황제가 여자였다면 황제가 입는 드레스로 준비했겠지.”

엘레아노르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황제의 의복을 나에게 조달해줄 수 있다는 거잖아.

생각해보니 질서의 추종자는 카론의 아이들보다 무력이 약할 뿐이지 나머지 능력은 훨씬 더 뛰어난 게 아닐까 싶다.

“레베카, 긴장되지는 않아?”

“조금.”

“넌 요구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헛소리만 하지 않는다면 무난하게 협상이 완료될 거야. 나머지 실무협상은 우리 쪽에서 해줄 테니까 나중에 보고서를 받아보도록 해.”

“알았어. 콜탄구트라 측에선 준비가 다 끝났을까?”

“방금 녀석의 군대가 협상장 뒤쪽에 포진했고, 실무자들이 현장에서 몇 가지 준비를 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어.”

“내가 할 일은 없고?”

“넌 그냥 내가 나가자고 할 때 나가면 돼. 그러니 얌전히 앉아서 기다려.”

엘레아노르는 나를 의자에 앉히더니 남들 몰래 내 볼에 입을 맞추고는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는 차갑지만 애정이 묻어있는 볼을 쓰다듬으며 엘레아노르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처럼 준비를 다 끝낸 내 사랑들이 내가 있는 천막으로 들어왔다.

내 사랑들은 모두 예쁘장하게 화장을 했고, 평소와 다른 헤어스타일로 멋을 부렸다.

거기다가 멋진 수트차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정말 설레었다.

4명의 믿음직한 경호원들에게 보호를 받는 가련한 공주님... 같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 같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얘들아, 너희들 정말 잘 어울려. 이리와. 우리 기념사진 찍자.”

나는 내 사랑들을 내 주변으로 불러들인 뒤에 스마트폰을 꺼내서 다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는 내 사랑들을 한 명씩 내 곁에 두고 사진을 찍은 뒤에 두 명씩 짝을 지어서 내 양옆에 두고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으로 내 사랑들의 단독사진과 단체사진을 찍은 뒤에야 나는 만족했다.

다들 빼어난 미모와 몸매, 비율 덕분에 사진이 아주 잘 나왔다.

“레베카님, 저희는 나가면 무엇을 하면 되는 건가요?”

“내 뒤에 나란히 서있으면 돼.”

“정말 그거면 충분한가요? 그럴 거라면 차라리 마법갑옷을 입고 완전무장을 하는 게 더 안전하고 좋지 않을까요?”

“협상테이블까지 대동한 수행원에게 무기를 쥐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잖니. 나도, 상대방도 군대를 끌고 오기는 했지만 일정한 거리 너머로는 병력을 밀지 않는 이유도 대화를 할 때불필요한 변수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야.”

“그렇군요. 하지만 적이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걱정이에요. 우리에게는 비무장으로 만나자고 해놓고는 품속에 무기를 숨기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아무래도 상대방은 마족이니까 걱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나와 협상을 하고 싶다고 나오는 것 자체가 일반적인 마족과 다르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만약 사태가 심각해지면 워프로 도망치면 되고.”

나는 라우라가 제기하는 우려를 불식시켰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태세가 갖추어져 있으니 불필요하게 상대방을 경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라우라의 표정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라우라, 네 고향을 파괴한 원수가 콜탄구트라라는 사실은 잊지 않고 있어. 이번에는 엘레자베스를 구하기 위해서 협상을 하게 되었지만 다음 기회에는 번거롭게 협상을 할 일은 없을 거야.”

“죄송해요. 저 때문에 신경 쓰게 만들어서...”

“아니야. 오히려 최근에 네 앞에서 콜탄구트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던 내 잘못이 크다고 봐. 피해자 입장에선 가해자를 추켜세우는 말처럼 끔찍한 것도 없는데 말이야. 미안해, 라우라.”

나는 기껏 받은 화장이 지워지지 않도록 라우라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라우라는 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보답해주었다.

이리스는 그걸 부럽게 바라보더니 본인도 내 반지에 입을 맞추고는 내게 말을 걸었다.

“저는 가까이서 있는 것보다는 멀리서 저격할 준비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편이 모두를 더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 거예요.”

“나도 그 생각을 해봤었는데 그것보단 내 곁에 가까이 있는 게 더 좋다고 판단했어. 왜냐면 그 편이 더 멋지잖아.”

“네?”

이리스는 당혹감을 감추질 못했다.

안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멋지니 뭐니 하는 말을 들으면 정말 어이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내 뒤에 나란히 서있으면 뭔가 사천왕처럼 느껴져서 멋지지 않니?”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설마 진심으로 그것 때문에 저를 곁에 두시려는 건가요?”

“진심이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협상테이블에 나 혼자 덜렁 앉아있는 것보다는 경호원이라고 할지라도 상대측과 머릿수를 맞추는 게 더 안정적이라서 그런 것도 있어.”

“콜탄구트라도 4명을 데려오는 건가보네요.”

“응. 최측근들이지. 그래서 나도 최측근들을 데려가고 싶었어.”

“결국 레베카님은 상대방에게 저희들을 자랑하고 싶으신 거 맞죠? 그렇죠?”

“뭐, 그게 핵심적인 이유이긴 해.”

“어쩔 수 없네요. 어울려드릴 수밖에요.”

이리스는 아주 사적인 이유로 내 사랑들을 모두 협상장으로 데려가려는 나를 보면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라우라였다면 내 사적인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조목조목 지적을 했었겠지.

하지만 이리스는 본인이 좋든 싫든 간에 내가 하고 싶어 하면 그냥 하게끔 두었다.

대표적인 것이 내가 애완촉수와 섹스를 하는 것이다.

“레베카님, 저는 그런 곳에 나가기에는 키가 너무 작지 않나요? 지금도 솔직히 성인으로 보이지 않는 걸요.”

에리카는 내가 아니라 거울을 보면서 물어보았다.

그녀는 자꾸만 거울 앞에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거나 옷매무새를 만지작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분명 사진을 찍을 때도 어색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었지.

“종족 특성이 원래 그런데 어쩔 수 없잖아. 그리고 내 눈에 보이는 너는 훌륭한 여성이니 안심해.”

“다들 저를 동생처럼 대우하니까 제가 어른스럽지 않아서 그런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건 네가 귀여워서 그런 것이지 널 만만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잖아.”

“그야 그렇지만...”

“넌 키는 작아도 비율은 좋으니까 걱정할 필요 하나 없어. 아이처럼 보이려면 머리가 크거나 골반이 좁거나 해야 하는데 넌 그렇지 않잖아.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

“네, 레베카님.”

에리카는 감출 수 없는 귀여움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면서 대답했다.

이러니 다들 에리카를 자꾸만 동생처럼 여기면서 귀여워하는 거라니깐.

그래서 나는 에리카를 무릎 위에 앉혀두고 그녀의 턱을 살살 긁어주었다.

방금 전에 어린 애처럼 보이는 것 같아서 싫다던 사람이 내 손길에는 아이처럼 신나하는 모습이 참 재밌다.

“키아라, 넌 불만이나 걱정거리 같은 게 없니?”

“전 괜찮아요. 무슨 일이 생겨도 제가 힘으로 지켜드리면 되니까요.”

키아라는 주먹을 쥐어 보이면서 자신 있게 말했다.

비무장으로 협상장에 나서는 내 입장에선 키아라를 데려가는 것은 비밀리에 무기를 반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키아라의 괴력을 들키더라도 어차피 콜탄구트라가 데려올 수행원들 중에서 오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쪽에서도 할 말은 없을 거다.

아무튼 키아라는 피어싱을 하고, 내게서 반지를 받은 뒤로는 전보다 더 당당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억눌렸던 원래 성격이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키아라, 반지는 어떻게 했니?”

“부서질까봐 보호구역에 두고 왔어요.”

“보통 반지가 부서질 걱정은 하질 않을 텐데.”

“그게... 실은 저번에 반지를 벗어서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재채기를 했는데 그 순간 반지가 조금 찌그러졌어요. 어떻게든 원래상태로 만들기는 했어요. 어쨌든 그래서 이번엔 힘을 써야할 지도 몰라서 빼고 오기로 했어요.”

나는 아무리 힘을 줘도 변함없는 반지를 그렇게 쉽게 찌그러뜨린 것도 모자라서 힘으로 그걸 다시 폈다는 말을 들으니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키아라가 나와 섹스를 할 때 얼마나 큰 자제력을 발휘하는데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다.

만약 키아라가 힘조절을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무서워서라도 섹스를 하질 못했겠지.

순간의 쾌락을 즐기려다가 허리가 부러지는 일은 사양하고 싶거든.

아무튼 키아라가 재채기를 할 때 그녀와 손을 잡고 있는 일은 없도록 하자.

“많이 놀랐겠네.”

“네, 거의 울 뻔 했어요.”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생기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일단 나에게 말해. 이 반지를 만든 사람은 내 지인인데 실력이 좋아서 금방 고쳐줄 수 있어.”

“네, 레베카님. 그래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반지를 목걸이처럼 걸고 다니는 건 어떠니?”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 아, 정작 제 반지는 보호구역에 있네요. 지금 바로 레베카님의 제안대로 하면 좋을 텐데 아쉬워요.”

“아까도 말했지만 일단 나한테 먼저 상담하도록 해. 지금처럼 간단하게 방법을 찾을 수도 있잖아.”

“네, 다음부터는 꼭 그럴게요.”

키아라는 내 손을 하나 잡고서는 무심코 자신의 볼에다 올리려다가 화장을 했다는 걸 깨닫고는 그냥 손을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렇게 내 사랑들과 차례대로 대화를 주고 받으니 엘레아노르가 돌아왔다.

“콜탄구트라가 현장에 도착해서 병사들을 사열하고 있어. 우리도 출발하자.”

“알았어. 얘들아, 가자.”

우리는 엘레아노르의 뒤를 따라서 천막을 나가서 미리 준비된 커다란 마차에 올라탔다.

이 마차는 원래 8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이지만 지금은 베타급 4마리가 말을 대신했다.

마차가 가는 길에는 큼지막한 땅굴 2개가 뚫려있는데, 마차가 지나가는 타이밍에 맞춰서 내 친위대가 땅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친위대는 마차를 양옆으로 에워싸고서 규칙적인 발걸음을 척척 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나는 상급 악마촉수 2마리를 소환하여 우리가 탑승한 마차의 옆에서 속도를 맞춰서 움직이도록 명령했다.

“이야, 저거 가까이에서 보니까 정말 크네. 저런 거랑 싸우고 싶지는 않네.”

“너는 이번에 줄을 잘 섰어.”

“그러게. 빨리 엘카힘이 저 녀석에게 혼쭐이 나면 좋겠다.”

“엘카힘은 라우라 몫이야.”

“그래? 아무튼 행운을 빌게. 나도 엘카힘이 정말 싫거든.”

“넌 그런 것 치고는 그 여자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더라.”

“최측근이라는 녀석도 잘 모르는데 난 오죽하겠어. 우리 정보원들은 분명 유능하지만 에카힘에 대해서는 알아낸 게 거의 없어. 그나마 쓸 만한 정보라면 엘카힘이 황족일지도 모른다는 거야.”

“황족이라기엔 품위가 영 없던데. 뿔이나 꼬리도 없고.”

“확실히 품위라곤 없는 미친년이긴 해. 그리고 내 언데드 선배들이 그러는데 옛날에는 용인족의 특성이 있었다고 해. 그러다 갈아탈 육체에 대해서 연구하더니 지금은 제멋대로 수많은 육체를 써먹고 있지.”

“엘카힘을 확실하게 잡을 방법은 없어?”

“육체전이기술은 오직 엘카힘만 알고 이용하는 기술이라서 카론의 아이들의 구성원들조차도 감을 잡질 못하고 있어. 엘루체만 살아있었다면 정보를 캐낼 수 있었을 텐데 너도 알다시피 사실상 자살을 해버렸으니...”

“마리 디베르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

나는 엘레아노르의 입에서 마리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마자 바로 대화를 중단했다.

왜 아직도 마리에 대한 일을 들으면 기분이 영 좋지 않은지 모르겠다.

마리는 명백한 악인이었고, 죽어 마땅한 죄악을 저지른 사람이었다.

그런 주제에 무책임하게 카르멘을 나에게 떠넘기고 세상 편하게 죽어버렸다.

나는 결국 그 여자의 뒤치다꺼리만 하게 되었는데도 왜 자꾸 미련이 남을까?

믿음을 배신당한 충격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걸까?

“엘카힘에 대해서 쓸 만한 정보를 얻으면 너한테 알려줄게.”

“이번 일이 끝나면 더는 나랑 협력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잖아.”

“개인적인 호의라고 생각해줘.”

“고마워.”

나는 엘레아노르의 창백한 손을 잡으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엘레아노르는 활짝 웃으려다가 내 사랑들의 눈치를 보고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내 사랑들은 딴청을 피우는 엘레아노르에 이어서 나에게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나는 이미 익숙하지만 여전히 무서운 시선집중에 침을 꿀꺽 삼키며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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