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화 〉 26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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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셰핑으로 돌아온 나는 협상장에 나가기 전에 몇 가지 준비를 했다.
우선 이미 점령이 끝난 사타카람 남부지역 곳곳에 내 병력들을 대놓고 배치하되, 도시와 일정거리를 유지하면서 과도한 긴장감을 유발하지 않고자 했다.
콜탄구트라의 군대는 모두 수도이자 유일한 도시인 사타카람 주변에 진을 치고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는 것처럼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이번 협상의 결과에 따라서 자신들의 운명이 갈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맨몸으로는 협상에 임할 수는 없으니 일종의 친위대를 구성했다.
친위대는 아직도 2마리에 불과한 상급 악마촉수를 필두로 새로운 중형 악마촉수 변종인 중형전차급으로만 구성되었다.
중형전차급은 아군을 보호하는 것에 치중된 보병전차급과는 달리 자체적인 능력향상에 중점을 두었다.
전체적인 형상은 보병전차급과 비슷하지만 체격을 더 작게 만들고 체형을 좀 더 유선형에 가깝게 다듬은 뒤에 다리를 더 길고 튼튼하게 만들어서 운동능력을 향상시켰다.
그리고 앞다리의 방패를 치우는 대신에 전신의 갑각을 더 두껍게 개조하고 공격촉수의 개수를 몇 개 더 추가했다.
마지막으로 4갈래로 갈라지는 입을 뿔처럼 뾰족한 형태로 바꾸어서 충각돌격을 가능하게끔 했다.
만약 충각을 당하는 상대가 사람이라면 말 그대로 박살이 날 것이다.
아무튼 협상장에 갈 때 친위대와 함께 움직인다면 내가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촉수군대를 이끄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각인시킬 수 있을 거다.
솔직히 이제 10만에 육박하는 괴물들을 이끄는 사람이 혼자서 털레털레 걸어가는 건 영 볼품이 없다.
그리고 친위대를 대동하더라도 일상적인 모습 그대로 협상장에 가면 격이 떨어져 보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위치에 걸맞은 외양을 갖추기로 했다.
복장이야 바디슈트로 재현할 수 있지만 장신구와 화장은 바디슈트가 해결해줄 수 없는 별개의 문제였다.
다행히 엘레아노르가 이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며 나섰고, 갑작스레 그녀와 만날 약속이 잡혔다.
그 문제를 제외하고도 할 이야기가 좀 있었으니 만날 필요가 있긴 했다.
내 사랑들은 내가 엘레아노르를 단 둘이서 만난다는 말을 듣자마자 시기와 질투가 엮인 반응을 표출했었다.
하지만 내가 데이트를 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협상을 위한 도움을 받는 것이라며 열심히 해명하자 겨우 진정하고 나를 보내주었다.
나는 수수한 평상복 차림으로 바디슈트를 변형하고 보호구역을 나와서 코르셰핑 시가지를 걸어갔다.
한 때 활동을 거의 멈췄던 코르셰핑 기사단이 다시 치안유지에 나선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사단에 대한 실망이 컸는지 그들에 의해서 자경단이 해체되는 걸 몹시 아쉽게 여겼다.
지나가면서 듣자하니 자경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충돌이 벌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긴 마법갑옷을 입고 있는 상대에게 객기를 부릴 정도로 무모한 사람은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나는 돌아가는 길에 내 사랑들에게 사줄 것은 없는지 주변을 기웃거리면서 약속장소인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서는 아이들이 애완동물들과 함께 뛰어놀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이 보기 좋아서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몇몇 아이들은 내 시선을 의식하고는 손을 흔들어주거나 짓궂은 표정을 드러냈다.
나는 그늘진 벤치에 앉아서 아이들을 구경하며 엘레아노르를 기다렸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약속시간인 11시가 훌쩍 넘었는데도 엘레아노르가 오지를 않았다.
처음에는 짜증이 났지만 이젠 슬슬 걱정이 되었다.
저번에 통신을 할 때도 목소리가 불안했던 터라 무슨 일이라도 당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도창을 열어서 엘레아노르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고, 그녀가 내가 있는 곳으로 뛰어오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래서 벤치에서 일어나 엘레아노르가 다가오는 쪽으로 향했다.
“미안! 내가 너무 늦었지?”
엘레아노르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손을 흔들면서 외쳤다.
그렇게 뛰어오면 숨이 가쁠 만도 한데 언데드라서 그런지 숨소리가 전혀 나질 않았다.
겉보기에는 보통 사람 같아도 이런 걸 보면 나와 전혀 다른 존재라는 체감이 든다.
엘레아노르는 저번처럼 노출이 많은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민망할 수준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한참 기다렸잖아.”
“미안해. 갑자기 처리할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럼 미리 연락을 줬어야지. 통신기는 장식이 아니잖아.”
“정말 미안해! 그럴 겨를이 없었어.”
엘레아노르는 고개까지 숙여가면서 사과를 했다.
그래서 나는 더는 짜증을 낼 마음이 사라졌다.
“얼마나 급한 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줘.”
“응. 다음엔 꼭 연락부터 할게. 그런데...”
엘레아노르는 말을 하다말고 나를 보면서 묘한 눈빛을 보냈다.
이 여자가 왜 이러는 거지?
“다음부터라는 건 또 나랑 이렇게 단둘이 만나줄 생각이 있다는 뜻이지?”
“무, 무슨 소리야? 너랑 내 관계는 단순한 협력관계일 뿐이야. 친구조차 아니라고. 그러니까 쓸데없는 기대는 접어줘.”
“그렇구나. 미안, 괜히 오해해서.”
엘레아노르는 실망한 기색을 애써 숨기면서 말했다.
이거 왠지 내가 엄청 잘못한 느낌이 드는 걸.
아니, 애초에 일시적인 동맹이고 조만간에 다시 적이 될 사이인데 미안하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잖아!
그런데 왜 자꾸 엘레아노르에 대한 이상한 미련이 남는 건지 모르겠다.
엘레아노르는 내가 말없이 계속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약간의 기대감을 드러냈다.
하아, 난 왜 이렇게 사람이 마음이 약한지 모르겠다.
“네가 정 만나고 싶으면 만나줄 수도 있어.”
“정말? 그거 되게 반가운 결정이야. 고마워.”
“고맙기는...”
나는 예상보다 훨씬 기뻐하는 엘레아노르의 반응에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모습을 베로니카 언니가 보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분명 탐탁지 않아하겠지.
“그런데 급하게 처리해야할 일이라는 게 뭐였어?”
“엘카힘이 이번 협상과 관련된 일을 했던 동료들 몇 명을 죽여 버렸어.”
“그럼 너도 위험하잖아.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
“안전을 확인하고 왔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걱정해줘서 고마워.”
엘레아노르는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활짝 웃었다.
생기라곤 전혀 없는 몸인데도 나를 닮은 그녀의 미소를 보고 있으니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듯 했다.
“아니, 그건 걱정이라기 보단 뭐랄까... 아무튼 진짜 안전한 거 맞지?”
“네가 저번에 애인들을 동원해서 엘카힘의 끄나풀들을 싹 제거해준 덕분에 안전해.”
“그렇다면 다행이고.”
“자, 그럼 밥부터 먹자. 나 배고파.”
“너 완전히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왔구나.”
“무슨 소리야? 점심시간이니까 그렇지.”
엘레아노르는 공원에 있는 작은 시계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확실히 시침이 12시에 도달한 상태였다.
아니, 그럼 내가 엘레아노르를 1시간 가까이 기다렸다는 소리잖아!
이거 반드시 보상을 받아내야겠다.
“밥은 네가 사는 거지?”
“엄청 늦었으니까 그 정도는 당연히 해줘야지. 못 먹는 음식 있어?”
“비린내가 많이 나는 건 싫어.”
“알았어. 내가 좋은 식당을 알고 있으니 그쪽으로 안내해줄게.”
엘레아노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앞장서서 공원 밖으로 나갔다.
나는 엘레아노르의 과감한 행동에 조금 놀라고 말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상대방에게 허튼 생각을 하는 건 오히려 나일지도 모르겠다.
엘레아노르가 말한 식당은 도시의 중심가에 위치한 큰 건물 안에 있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니 제법 유명한 식당인 모양이다.
그런데 엘레아노르는 줄도 서지 않고 곧장 나를 식당 안으로 데려갔다.
설마 새치기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미리 예약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별도의 방으로 들어가서 마주보고 앉았다.
“여긴 피자만 파는 식당이구나.”
“맞아.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정말 맛있는 피자를 파는 곳이니 실망하지 않을 거야.”
“기대할게. 맛없으면 네가 책임지고.”
“일부러 맛없다고 하기 없기야.”
엘레아노르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그래도 맛있는 걸 맛없다고 우기지는 않는단 말이지.
“레베카, 협상하는 날은 해가 뜨기 전부터 움직여야할 거야. 이동하거나 이것저것 준비하는 시간이 제법 많이 걸릴 거야.”
“당연히 그래야겠지. 나도 나름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고.”
“그게 뭔데? 미리 말해줘야 협상에 지장이 없을 거야.”
“내 친위대와 함께 사타카람에 모습을 드러내려고 해.”
“괜찮은 생각이네. 협상장에 맨몸으로 가는 건 위험하니까. 하지만 실제로 교전을 벌일 생각은 하지 말아줘.”
“엘리자베스를 돌려받을 때까지는 폭력사태는 없을 거야.”
“그 이후에는...”
“그건 경우에 따라서 달라지겠지. 내 입장에선 마족들을 다 죽인다 하더라도 문제될 게 없으니까.”
“나는 일이 평화롭게 마무리되면 네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
엘레아노르는 나에 대한 신뢰를 드러냈다.
가식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신뢰였다.
하지만 난 그런 그녀의 태도가 전혀 이해되질 않았다.
“엘레아노르, 왜 나를 그렇게 신뢰하는 거야? 나는 지금 네게 도움을 받고 있는 상황인데도 절반 정도만 믿고 있는데 말이야.”
“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너와 만난 시간은 짧고, 딱히 친분을 쌓을 일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자꾸 마음이 가는 거 있지. 아! 착각하지는 마. 너한테 반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
내가 딱 잘라서 말하자 엘레아노르의 눈빛에서 서운함이 느껴졌다. 어째서?
그나저나 내가 처음 캐릭터를 만들었을 때 넣었던 사람들에게 호감을 준다는 외모설정이 엘레아노르에게도 적용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유도 모른 채 자꾸만 나에게 신뢰를 보이거나 호감을 느끼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엘레아노르와 깊은 관계로 발전할 생각이 전혀 없다.
기껏해야 지인 정도가 한계다.
“엘카힘이 이번 협상을 방해할 가능성은 어때?”
“비교적 높은 수준이라고 볼 수 있어. 앞서 말했듯이 협상과 관련된 동료들이 그 여자에게 살해당했고, 사타카람 북쪽에서 엘카힘이 통제하는 마물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도 올라왔지만 확실하지가 않아.”
“그러면 내 정찰부대를 그쪽으로 보내서 상황을 파악해볼게.”
나는 말이 나온 김에 촉수관리창을 열어서 일부 병력을 사타카람의 북쪽으로 보냈다.
이미 사타카람을 포위하듯이 땅굴을 파놓은 상태라서 금방 병력이 배치되었다.
“덕분에 우리 쪽에 좀 더 여유가 생기겠네. 그렇지 않아도 지금 파벌들끼리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거든.”
“너희들 어쩌다가 그 지경이 된 거야? 방식은 달라도 어쨌든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달리던 놈들이었잖아.”
“얼마 전에 갑자기 그 분께서 자취를 감추셨어. 그래서 지도부가 혼란에 빠졌고, 그 늙다리들을 대신하겠다며 파벌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지.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칼을 빼든 건 카론의 아이들이었어.”
엘레아노르는 자기네들의 민감한 내부사정을 스스럼없이 내게 말해주기 시작했다.
나는 이 정도로 자세히 알려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말이다.
“놈들은 엘카힘의 명령에 따라서 지도부를 숙청했고, 엘카힘은 스스로 새로운 교주의 자리에 오르려고 했지만 다른 파벌들이 힘을 합쳐서 공격하는 바람에 코르셰핑 지방으로 물러나게 되었지.”
“너희 교단 입장에선 엘카힘은 반역자잖아.”
“그렇긴 한데 사실 지도부에 반기를 든 건 우리 파벌도 마찬가지라서... 아무튼 지금 우리 조직은 겨우 형태만 남아있는 수준에 불과해.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온갖 신생 조직으로 다 찢어지겠지.”
“이미 그런 것 같은데.”
“아니. 아직은 그렇지 않아. 그 분께서 자취를 감추셨어도 그 분의 영향력은 여전히 남아있어. 내가 그 분의 이름을 언급하지 못하거나 조직의 목적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게 그것 때문이야. 그래서 처음에는 자신 있게 나섰던 파벌들도 그 분께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며 선을 넘지 않고 있어.”
“그러면 엘카힘 파벌만 선을 넘었다는 거지?”
“응. 실은 난 이번 기회에 우리 파벌을 독립시키고 있었어. 그래서 너랑 협력관계를 더욱 강화하려고 했어. 하지만 결국 난 소수파에 불과했고, 이번 일이 끝나면 더는 네게 협조하지 않을 거야.”
엘레아노르는 꽤나 슬퍼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파벌의 독립을 위해서 내 힘을 빌리고 싶어 했다고는 말했지만 분위기만 봐서는 나와의 우호적인 관계가 끝나는 것 자체가 싫은 모양이었다.
“정 나랑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아예 교단에서 나와 버려. 어차피 난 너희 교단을 싹 쓸어버릴 작정이고 저항하는 것들은 모두 제거할 거야. 만약 네가 날 막아선다면 너도 죽겠지. 그러니 교단을 버리라고.”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그 분의 허락이 없이는 나갈 수가 없어. 그리고 난 이미 조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그 분의 이상을 이룩하기 위해서 온갖 나쁜 짓은 다 했어. 너는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나도 여느 가면쟁이들이나 마찬가지란 말이야. 그러니 그냥 너에게 살해당하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들어.”
“그게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줄게. 하지만 난 너에게 한 번은 기회를 주고 싶어. 베로니카 언니를 위해서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봐.”
“넌 정말 웃기는 사람이야. 가면쟁이라면 질색을 하면서도 나 같은 살아있는 척을 하는 시체에게는 자비를 베풀다니.”
“네가 베로니카 언니의 옛 친구라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도록 해.”
나는 더는 그녀가 몸담고 있는 조직에 대해서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교주의 영향력이 남아있어서 핵심적인 정보를 얻지 못하는 마당에 더 물어봤자 속 시끄러운 정치적인 이야기만 쭉 늘어놓을 것 같아서다.
엘레아노르는 그것과 관련해서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종업원이 따끈따끈한 피자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피자는 분명 맛있었지만, 대화가 오가지 않는 식사시간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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