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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261화 (261/271)

〈 261화 〉 260화

* * *

나는 이번 정찰을 통해서 3가지 성과를 냈다고 본다.

우선 엘리자베스가 아무런 탈도 없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아내서 정말 다행이다.

단지 그것만 알았을 뿐인데도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좀 더 주변이 넓게 보였다.

그리고 콜탄구트라가 협상에 진지하게 임하려는 태도도 마음에 든다.

엘리자베스의 목숨으로 내게 흥정을 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직감적으로 파악한 모양이다.

콜탄구트라 입장에선 괜히 객기를 부리다가 자신이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으니 극단적인 방법을 피하는 게 상책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협상이 결렬될 것을 대비하여 도시의 지상과 지하의 구조를 파악하고 엘리자베스를 탈출시킬 루트를 확립하는데 성공했다.

콜탄구트라가 다스리는 도시는 고대의 도시 위에 만들어져있기 때문에 그곳을 통하여 초대형 게르로 침투하여 엘리자베스를 빼낼 수 있다.

이름 모를 고대도시는 온갖 종류의 언데드들이 바글거리기 때문에 그곳에 대해서 알고 있을 콜탄구트라 입장에선 거기로 우리가 침투할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대언데드 결전병기인 에리카가 있어서 아주 간단하게 고대도시를 평정할 수 있으니 콜탄구트라의 허를 찌를 수 있다.

그리고 고대도시까지 땅굴을 뚫어서 촉수군대의 두 번째 주둔지로 확립할 수도 있겠지.

결국 콜탄구트라는 발밑에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셈이 될 것이다.

나는 이걸 협상카드로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향후 콜탄구트라를 내 의도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수단으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콜탄구트라는 단순한 개인의 권력욕이 아니라 자기 종족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 지켜야한다는 사명감이 있는 군주이니 내가 그의 백성들의 목숨을 쥐고 있는 한, 절대로 혼자 도망치지 않을 거다.

우리는 정찰을 끝낸 뒤에 나무에서 내려와 다시 땅굴로 들어갔다.

내 사랑들은 땅굴보다는 보호구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만 나는 아직 여기서 할 일이 남아있었다.

나는 치트가방에서 적절한 조명과 책상, 의자를 꺼내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편지지와 필기구도 꺼내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레베카님, 누구에게 쓰는 편지인가요?”

이리스는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내 허리를 팔로 감싸 안으며 말을 걸었다.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돌려 가볍게 키스를 해준 뒤에 다시 편지에 집중했다.

“엘리자베스에게 안부편지를 쓰고 있어.”

“설마 탈출계획에 대해서 알려주려고요?”

“아니. 인질에게 그런 계획 같은 걸 알려줄 수는 없지. 이건 엘리자베스에게는 단순한 안부편지야. 동시에 콜탄구트라에 대한 경고장이기도 하지.”

나는 마치 못된 음모라도 꾸미는 사람처럼 씩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이리스는 내 음흉한 미소를 보자마자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았다.

아무래도 나한테는 그런 표정이 영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죄, 죄송해요. 뭔가 갑자기 웃겨서... 히힛!”

“억지로 참지 말고 그냥 크게 웃어.”

“안돼요. 애들 깬단 말이에요.”

이리스는 내 팔을 찰싹찰싹 때리면서 애써 웃음을 참다가 겨우 진정했다.

나는 따가운 팔을 어루만지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바디슈트는 왜 이런 건 막아주지 않는 걸까?

공격이 아니라 애정표현이라서 그런 건가?

“흠흠. 죄송해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역시 레베카님은 마음이 넓으세요. 그런데 경고장이라고요?”

“응. 내가 엘리자베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콜탄구트라에게는 언제든지 네 목을 딸 수 있으니 알아서 처신을 잘하라는 경고를 날리는 효과가 있어.”

나는 이번에는 음흉한 미소를 짓지 않고 무표정으로 말했다.

이리스는 내게서 뭔가를 기대하고 있었는지 약간 아쉬워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편지는 어떻게 전달하실 건가요?”

“세르자에게 맡겨서 콜탄구트라가 엘리자베스와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전달할 거야. 내 이름을 새긴 작은 명패를 목에다 걸어주는 건 잊지 말아야겠지.”

“그거 뭔가 귀여울 것 같아요.”

“네가 걸어줄래?”

“네! 꼭 해보고 싶어요.”

이리스는 배시시 웃으면서 신나했다.

그래서 나는 미리 세르자를 소환하여 이리스가 심심하지 않도록 해주었다.

나는 이리스가 세르자를 귀여워해주는 동안 편지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구입한 전서구용 편지통에 편지를 넣고 세르자의 등에 가방처럼 메달아 주었다.

“이리스, 이제 명패를 목에 걸어주렴.”

“네, 레베카님.”

이리스는 내게서 목걸이처럼 생긴 명패를 받아서는 세르자의 목에 걸어서 단단히 고정시켰다.

다행히 세르자는 자신의 몸통과 목에 낯선 물건이 들어와도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준비가 끝난 세르자를 데리고 땅굴 밖으로 나간 뒤에 녀석을 날려 보냈다.

이제 정찰드론을 통해서 콜탄구트라의 움직임을 보고 있다가 엘리자베스에게 방문하면 대기하고 있던 세르자에게 편지를 전달하라는 명령을 내리면 된다.

지금은 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니 당분간은 휴식을 취해야겠다.

“이리스, 넌 안 피곤하니?”

“조금 피곤하긴 한데 레베카님 혼자 깨어있으면 심심하실 것 같아서요.”

“그랬구나. 그럼 내가 잠을 자면 너도 잘 수 있겠네.”

“아마도요.”

“후훗. 이리와, 내가 재워줄게.”

“네? 그건 좀...”

“괜찮아.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나는 수줍어하는 이리스의 손을 잡고서 땅굴 한쪽에 설치된 텐트로 들어갔다.

텐트 안에는 라우라와 에리카, 키아라가 단잠을 자고 있었다.

우리는 에리카가 키아라의 품에 쏙 들어가서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빈자리에 이리스를 먼저 눕히고는 그녀에게 짧게 키스를 해주었다.

큐버스족은 뿔 때문에 옆으로 누워있는 걸 힘들어하기 때문에 이리스와는 누운 상태로 서로 마주보고 무언가를 하는 일이 거의 없다.

나는 이리스의 옆에 누워서는 손을 뻗어서 그녀의 배를 토닥거려주었다.

“레베카님, 저는 아기가 아닌 걸요.”

“아기는 아니지만 아기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괜찮아.”

나는 한껏 부끄러워하는 이리스의 볼에 뽀뽀를 하고는 계속 그녀의 배를 토닥거렸다.

이리스는 처음에는 너무 부끄러운지 몸에서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지만 곧 적응하고는 간단하게 잠들어버렸다.

말은 싫다고 해도 몸은 솔직한... 이건 이 상황에서 쓸 말은 아니네.

아무튼 이리스를 재우고 나니 나도 졸음이 쏟아졌다.

나는 사랑하는 이리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꿈을 여럿 꾸고 난 뒤에 잠에서 깨어나 보니 내 사랑들이 다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크게 하품을 한 뒤에 텐트를 슬쩍 젖혀보니 다들 은은한 조명을 중심으로 둘러앉아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내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조용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들이 너무 귀엽다.

나는 대화에 끼어들기 전에 촉수관리창을 열어서 전황을 파악했다.

콜탄구트라가 다스리는 도시를 중심으로 남서쪽은 촉수군대가 대부분 점령하여 몇몇 요새만 남겨둔 상태였다.

협상을 앞두고서는 너무 많은 위협을 가하면 곤란하니 지금부터는 남동쪽의 경계지역부터 서서히 공격해 들어가는 게 좋겠다.

나는 남동쪽 각지에 있는 땅굴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력들에게 진군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지도창에 있는 수많은 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서 적의 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직 보병전차급이 전력에 포함되지 않아서 피해가 컸지만 적들은 결과적으로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입을 테니 상관없다.

내가 남동쪽을 공격하는 이유는 콜탄구트라에게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시키기 위한 것도 있지만 노르헤임까지 가는 안전하고 편한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여행을 하려면 험준한 산길보다는 평지가 훨씬 좋다.

그나저나 협상을 할 때 뭘 요구하는 게 좋을까?

지금 콜탄구트라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엘리자베스의 자유를 제외하고도 몇 가지 요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노예를 모두 해방하라거나, 화약무기의 제조법을 요구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아예 나에게 복종하라는 요구는 콜탄구트라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릴 테니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그래! 엘카힘 파벌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다 내놓으라고 해야겠다.

여태까지 그것들과 쭉 손을 잡고 있었으니 자세한 행방은 몰라도 어느 정도는 단서를 얻을 수 있겠지.

마침 내가 협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으니 엘레아노르가 통신기로 연락을 해왔다.

나는 물을 몇 모금 마신 뒤에 통신을 받았다.

“레베카, 지금 바빠?”

엘레아노르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꽤나 조심스러웠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걸까?

나는 조금 긴장하면서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아니. 오늘 할 일은 거의 끝냈어. 무슨 일이야?”

“협상날짜와 장소를 협의했어.”

“벌써? 빠르네.”

“지금 너 때문에 그쪽이 엄청 급한 상황이거든. 이러다 아예 멸망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더라.”

나는 내 의도대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어서 씩 웃었다.

어쨌든 나를 짜증나게 만든 상대들이 무서워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내가 잠을 자는 사이에 엘레아노르 측에서 콜탄구트라 측과 협의를 끝낸 게 좀 아쉽다.

만약 그들의 대화를 들었더라면 중요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것들이 협상장에서 헛소리를 한다면 진짜로 그렇게 만들어줄 수도 있어.”

“진정해. 네 목적은 황녀를 돌려받는 것이지 학살이 아니잖아.”

엘레아노르는 내가 장난스럽게 하는 말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마족을 상대로 학살이라니 영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말을 가면쟁이가 하는 것도 어색하기 짝이 없고.

“너희들에게는 진짜 어울리지 않는 말이네.”

“마음대로 생각해. 아무튼 협상날짜는 다음 주 월요일 오전 10시이고 장소는 사타카람, 그러니까 너희들이 오늘 정찰했던 그 도시야.”

“잠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이상하리만치 내 일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엘레아노르가 몹시 의심스러웠다.

다른 건 몰라도 정찰과 관련해서는 내 사랑들에게만 말해줬었는데...

물론 난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건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야 너희 드론들이 사타카람 상공을 날고 있었으니까. 콜탄구트라의 부하들은 몰라도 우리 눈을 피할 수는 없어.”

“뭐야? 그런 거였어? 난 또 뭐라고...”

나는 엘레아노르의 말을 듣자마자 대놓고 안도하고 말았다.

엘레아노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난 엘레아노르를 진심으로 신뢰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너 방금 겁먹었지?”

“아니거든!”

“킥킥킥! 발끈하기는. 우리가 나름 정보력이 좋기는 하지만 너희들에게서 직접적으로 정보를 얻어낼 방법은 없어. 그리고 네 애인들의 충성심은 웬만한 충신들 뺨을 후려칠 정도라서 회유는 불가능하지.”

“그것 참 반가운 소리네. 그런데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평범한 사람으로 위장한 정보원들이 네 애인들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봤으니깐. 어떤 녀석은 신흥종교에 심취한 광신도와 대화를 나눈 것 같다더라.”

“그 정도는 아닌데... 아무튼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아주 불쾌해. 역시 너희들인 날 돕는 와중에도 뒤가 구린 짓을 하는 구나.”

나는 내 얼굴을 보지도 못하는 엘레아노르를 상대로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가면쟁이 놈들은 결국엔 끝장을 봐야할 존재라는 걸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대목이었다.

“레베카, 우리 파벌은 나의 소유물이 아니야. 나는 널 제대로 도와주고 싶은데 다른 녀석들은 자기들 멋대로 네 뒷조사나 하면서 약점을 잡으려고 하더라고.”

“네 동료들이 날 상대로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 그렇다 치고, 넌 어때? 너도 내 약점을 잡고 싶어?”

“난 애초에 베로니카를 구해준 너에 대한 보답차원에서 널 도왔어. 그래서 널 상대로 수작을 부릴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야. 앞으로도 쭉 그럴 작정이고.”

“그게 진심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말이야.”

“날 믿어달라고 강요하진 않을 게. 네 입장에선 우리 ‘가면쟁이’들은 모두 의심스러운 족속들이니까.”

엘레아노르는 방금 내게 바쁘냐고 물어볼 때처럼 조심스러우면서도 뭔가 회의감이 드는 듯한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아하니 재창조교단 쪽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설마 자기 동료들이 내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걸 알아서 그런 건 아닐 테고.

“네 입으로 가면쟁이라고 부르다니? 너 그 명칭 엄청 싫어하잖아.”

“싫지만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온갖 파벌들이 자기들끼리 다투고 있으니 그 분의 목소리와 이상이 점점 묻히고 있어.”

“잠재적인 적에게 곤란한 내부사정을 말해주는 건 좀 웃기네.”

“몰라. 마음대로 생각해. 아무튼 조만간에 협상장에서 필요한 것들을 직접 전달해줄게. 그때까지 괜한 짓은 하지 않도록 해.”

“네 동료들이 날 건드리지만 않으면 그럴 일 없을 거야.”

“알았어. 최대한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해볼게. 그럼 다음에 또 이야기하자.”

엘레아노르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하며 통신을 중단했다.

나는 그녀가 왠지 걱정스러웠다.

잠깐, 내가 왜 가면쟁이를 걱정하지?

날 좀 도와주고 대화를 몇 번 나누었다고 정이라도 들어버린 건가?

정신 차려, 레베카! 사람이 쉽게 적을 믿으면 안 되는 법이라고.

얼굴이 좀 예쁘다는 이유로 사람에 대한 판단이 흐려지면 안 돼.

나는 잠시 통신기를 만지작거리며 남아있던 미련을 싹 떨쳐내고 여전히 도시의 상공을 날고 있는 정찰드론에게 시야공유를 사용하여 콜탄구트라의 위치를 확인했다.

마침 그는 어느 여자와 함께 엘리자베스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초대형 게르의 지붕 위에 앉아있는 세르자에게 시야공유를 쓴 뒤에 적절한 타이밍에 내부로 들어가서 편지를 전달했다.

나는 엘리자베스가 눈물까지 흘리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며칠 뒤의 협상장에서 반드시 그녀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리라 다짐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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