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화 〉 2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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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는 새파란 하늘과 눈부신 햇빛이 우리를 반긴다.
거기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니 한결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여긴 적의 영토 한복판이다.
인근에는 적이 없어서 당장 들킬 염려가 없지만 자칫 방심하면 들킬 수 있으니 신중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다.
주변에는 얕은 구릉지와 드넓은 초원이 펼쳐지고, 곳곳에 작은 숲들이 섬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에 있는 높은 산맥에는 만년설이 내려앉은 모습이 보였다.
라우라의 고향이자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노르헤임은 바로 그 산맥 아래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노르헤임으로 가려면 반드시 콜탄구트라의 영역을 지나가야하기 때문에 엘리자베스의 납치와는 별개로 결국엔 놈의 군대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노르헤임에 도달하면 재창조교단의 본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하니 얼른 그 날이 오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은 정찰을 성공적으로 끝내서 추가적인 협상수단을 확보하거나 가능하다면 엘리자베스를 빼내는 일이 중요하다.
만약 오늘 엘리자베스를 구출할 수만 있다면 협상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
“레베카님,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저기 보이는 큰 나무 위로 올라갈 거야.”
나는 라우라의 질문에 근처에 있는 아주 큰 나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둘레는 사람 10명이 감싸야할 정도이고 높이는 거의 10층 건물과 비슷하다.
그리고 나뭇잎이 무성해서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몸을 숨기기에 딱 좋은 곳이다.
마침 우리가 나란히 앉아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가지가 두꺼워서 그게 부러져서 추락하는 불상사는 벌어질 일이 없을 것이다.
“저랑 키아라는 올라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레베카님이나 다른 애들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타바란에게 부탁해야지. 너희들도 괜히 힘쓰지 말고 타바란을 타는 게 어떠니?”
“아니요. 제 힘으로 올라가보고 싶어요. 도전정신이 막 샘솟는 걸요.”
라우라는 언제나처럼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면서 말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오면 내 입장에선 거절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군인들도 아니고 매사 깐깐하게 굴 필요는 없겠지.
“알았어. 그렇게 하도록 해. 키아라, 너도 라우라를 따라갈 거니?”
“음... 네, 저도 스스로 올라가도록 할게요.”
“둘 다 조심해. 그럼 나중에 만나자.”
나는 라우라와 키아라가 특별한 장비도 없이 30미터가 넘는 나무를 거침없이 타고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을 몇 번 정도 했다.
그리고 타바란을 소환하여 이리스와 에리카를 먼저 나무 위로 올려 보내고 그 다음으로 내가 녀석의 등을 타고 올라갔다.
마법추진기를 쓰면 금방 올라가겠지만 나뭇가지가 중량 마법갑옷의 무게를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서 조금 번거로운 방법을 썼다.
먼저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 세 명은 각자 마음에 드는 나뭇가지에 골라 앉거나 비스듬히 누웠다.
“이리스, 넌 동쪽으로 드론을 보내고 에리카는 서쪽으로 보내도록 해. 그리고 난... 북쪽으로 보낼게.”
이리스와 에리카는 내 지시에 따라서 정찰드론을 소환하여 한계까지 고도를 높인 뒤에 콜탄구트라의 본진 상공으로 날려 보냈고 나도 정찰드론을 본진의 북쪽으로 보냈다.
그리고 세르자와 벨쿠레를 소환하여 드론의 뒤를 따르도록 했다.
거리가 9km 정도라서 정찰드론과 새들이 날아가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스킬레벨을 최고레벨까지 올린 뒤로는 소음이 나질 않고, 렌즈나 기타 정찰장비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좋아지고, 높은 고도를 날 수 있기 때문에 대낮에 드론을 날려 보내도 적들에게 들킬 일이 거의 없다.
덕분에 밤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필요하다면 즉시 정찰을 수행할 수 있다.
적의 본진 위로는 대형 익룡이나 와이번들을 탄 고블린이나 오크들이 날아다니고 있지만 정찰드론의 고도한계는 그것들보다 훨씬 높고 놈들은 주로 비슷한 고도나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어서 놈들에게 발각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적군의 본진은 군사기지라기보다는 하나의 도시국가에 가까웠다.
도시는 두터운 성벽으로 보호되고 있고 내부에는 각종 건물들이, 외부에는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천막인 게르들이 즐비했다.
또한 인근의 목초지에는 수천마리의 가축들이 몰려다니며 풀을 뜯고 물을 마셨다.
도시 안에는 병사와 그렇지 않은 개체들이 한데 뒤섞여서 살아가고,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거기다 놀라운 점은 노예 신분인 인간과 마수족들이 마음 놓고 도시를 돌아다니며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여성노예들이 겁탈을 당하거나 씨받이로 사용되지 않고 자유롭게 활보하는 모습은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저 야만적일 것이라 생각했던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물론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온갖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게 분명하다.
결국 마족들은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는 인간여성을 씨받이로 만들 필요가 있기 때문에 지금은 얼핏 자유로워보여도 결국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하아, 내가 어쩌자고 그딴 설정을 만들어서 엉망진창인 세상이 만들어지게 했을까?
어느 절대자가 내게 과거로 돌아가서 세계관 설정 중에서 딱 하나를 고칠 수 있게 해준다면 마족과 관련된 설정을 모조리 지워버릴 거다.
“레베카님, 저희들 왔어요.”
“벌써? 엄청 빠르네.”
나는 체감상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꼭대기까지 올라온 라우라와 키아라를 보면서 놀랐다.
하지만 시간을 보니 이미 제법 많은 시간이 지난 뒤였다.
하라는 정찰은 하지 않고 마인족의 도시를 구경했던 내가 잘못한 거네.
“그럼 저도 정찰에 가담할게요.”
“응. 너한테는 남쪽을 맡길게.”
“네, 레베카님.”
라우라는 다른 애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찰드론을 소환하여 고도를 충분히 높인 뒤에 도시의 남쪽으로 보냈다.
이로서 콜탄구트라가 다스리는 도시는 완전히 우리의 손바닥 위에 놓이게 되었다.
“레베카님, 저는 뭘 하면 좋을까요?”
아직 예속퀘스트가 활성화되지 않아서 드론소환을 할 수 없는 키아라는 조금 심심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솔직히 그녀가 할 일이 없기는 하지만 뭐라도 일거리를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망원경을 써서 우리 주변에 적들이 오지 않는지 살펴봐줘.”
“네, 레베카님. 열심히 할게요.”
나는 키아라에게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을 맡겼다.
정찰드론에게 시야공유를 사용하는 동안에도 미니맵은 계속 보이고, 지도창도 열어볼 수 있으니 적의 접근 정도는 간단하게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키아라에게 아무런 일도 주지 않아서 무기력감을 느끼게 만드느니 형식상의 일거리라도 주는 게 낫다.
키아라는 내게서 써본 지가 몇 달은 지난 망원경을 받아들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얼른 키아라의 음란도를 10으로 올려서 예속퀘스트를 활성화해야 하는데 딱 1포인트가 모자라서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아까 전에 날 공유하는 계획표를 짤 때 다른 애들에게 가담한 것을 봐서는 음란도가 10이라도 이상할 게 없는데 말이다.
뭐, 이것도 시간이 자연스럽게 해결해주겠지.
나는 다시 내 정찰드론에게 시야공유를 사용하고 마인족의 도시를 마저 살펴본 뒤에 콜탄구트라가 머무르는 곳으로 추정되는 초대형 게르로 시선을 돌렸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지도창으로는 도시에 있는 사람들과 마족들을 볼 수 없었지만 정찰드론의 마킹기능을 쓰고 거기다 스캔기능을 쓰면 신상정보를 간단하게 파악할 수 있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다.
나는 열화상기능을 써서 초대형 게르의 내부에 있는 마족들을 살펴보다가 콜탄구트라로 추정되는 덩치 큰 오크의 실루엣을 발견하고는 스캔기능을 사용했다.
역시나 그 실루엣은 콜탄구트라였다.
나이는 52살이고 카간, 그러니까 정주국의 황제에 해당되는 자리에 오른 자다.
인류연합제국 측에서는 절대로 인정해주지 않을 테고 나도 딱히 인정해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뒤늦게 도시 상공에 도착하여 주변을 맴돌고 있던 내 새들 중에서 벨쿠레를 초거대 게르 안으로 들여보내서 내부의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했다.
초대형 게르는 말이 좋아 게르이지 날갯짓소리가 나질 않는 부엉이가 들어오면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큰 저택에 가까웠다.
덕분에 나는 여유롭게 벨쿠레를 통해서 콜탄구트라를 육안으로 확인했다.
콜탄구트라는 오크와 오거의 잡종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체격이 좋은 근육덩어리였다.
또한 세상 못생긴 오크들만 보다가 그것들 중에서는 나름 인물이 좋고 가만히 앉아만 잇어도 강자라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래서인지 콜탄구트라보다 더 크고 강할 것이 분명한 오거들조차도 그의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나저나 예의를 차리는 마족이라니? 학자들이 보면 까무러칠 것이다.
콜탄구트라는 여느 군주들처럼 신하들로부터 각종 보고를 받거나 그들과 회의를 나누면서 국정을 살폈다.
아니, 내가 지금 피부색만 초록색인 다른 유사인류를 보고 있는 건가?
그리고 왜들 이렇게 지적이고 똑똑해 보이지?
놈들의 언어는 알아들을 수 없어도 분위기는 확실히 그러했다.
지금까지 내가 봤던 마인족들은 마수족보다는 똑똑해도 결국엔 야만적이고 도구를 쓰는 유인원 수준이었는데 말이다.
실컷 국정을 보던 콜탄구트라는 갑자기 신하들을 모두 물리고는 옥좌에서 일어나 어디론가로 향했다.
나는 얼른 벨쿠레에게 놈의 뒤를 쫓아가도록 명령했다.
콜탄구트라가 향한 곳은 초대형 게르 한쪽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원래 게르에는 따로 방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콜탄구트라의 게르는 엄청 커서 개별적인 방이 몇 개있었다.
콜탄구트라가 방문에 노크를 하자 누군가 문을 열어주었다.
“엘리자베스?”
나는 문을 열어주는 사람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불과 며칠 전까지는 차가운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여있던 사람이 지금은 유목민들이 입을 법한 옷을 입고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혹시나 콜탄구트라에게 감화된 건 아닐지 걱정이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그대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왔다오.”
콜탄구트라는 굉장히 신사적인 말투와 태도를 보였다.
연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몸짓과 목소리였다.
“그런 건 부하를 보내도 충분하지 않나요?”
“서로 간의 신뢰를 만들기 위해서는 직접 오는 게 좋다고 생각했소. 불편한 것은 없소?”
“이 건물에서 나갈 수 없는 것을 제외하면 딱히 없어요. 편안한 잠자리,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만 있으면 당장 살아가는데 충분하니까요.”
“미안하지만 협상이 이루어질 때까지만 참아주시오.”
“아바마마께서는 나를 버렸는데 대체 누구랑 협상을 한단 말인가요?”
엘리자베스는 세상 슬퍼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방금 전까지 콜탄구트라에게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한 태도를 보였던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우울해보였다.
아무리 평소에 아버지를 좋게 보지 않았어도 막상 가족에게 버림을 받으면 그 충격은 아주 클 것이다.
“그대가 줄곧 짝사랑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람이오.”
“서, 설마 레베카와 협상을 한다는 건가요? 하지만 그 친구는...”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고, 내 병력의 5분의 1을 끝장내버렸소. 지금도 공격이 계속되고는 있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가 보낸 이들과 협상일정을 조율하고 있소.”
“레베카... 이 바보. 흑흑.”
엘리자베스는 내 이름을 애틋하게 부르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는 물론이고 콜탄구트라도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대를 위해 싸우고 있는 전사를 위해서는 눈물이 아니라 응원을 보내야하지 않겠소?”
“그거 당하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 않나요?”
“하하하! 물론 그렇긴 하오. 허나, 종족을 불문하고 강자에 대한 존중은 우리 오크족의 본성이오. 내 평생 이토록 위기의식을 느끼게 만든 건 레베카라는 자가 처음이라오.”
“엘카힘이 아니고요?”
“그 악마는 아버지의 그릇된 유산이었고 언젠가 청산해야할 존재였소. 그대가 험한 꼴을 당하기 전에 그 작자와 손절해서 다행이오.”
콜탄구트라는 엘카힘을 악마라고 칭하며 험한 표정을 지었다.
심약한 사람이라면 오금이 저릴 정도였으나 엘리자베스는 겁먹은 기색이 전혀 없었다.
“엘카힘은 분명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되었는데 왜 갑자기 갈라섰나요? 난 당신이 그 괴물을 죽였을 때는 서로 짜고 치는 연극인 줄 알았다고요.”
“분명 엘카힘은 우리 마인족이 당신들을 씨받이로 삼지 않고도 아이를 만들 수 있는 기술과 시설을 지원해주었소. 덕분에 내가 다스리는 마인족만큼은 타락의 근원에서 떨어질 수 있게 되었소. 하지만 그건 엘카힘이 우릴 멋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라오.”
“확실히 레베카의 군대에게 큰 손실을 입은 것을 보면 당신들을 방패막이로 내세우고 있는 것 같네요.”
“엘카힘과 손절한 계기는 아주 많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그녀의 군대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오. 우리 군대는 갈수록 약해지고 있지만 그녀의 군대는 하루하루 강대해지고 있소. 이대로 두면 내 나라와 내 백성들은 모두 죽을 것이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좀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아바마마보다도 훨씬 군주다운 사람이군요.”
“사람이라... 확실히 이상하긴 하오. 하하하!”
“당신은 인류가 아니니까 사람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괴물이나 흉물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적어도 나를 그대와 동등한 지성체로 봐준다는 것을 알게 되니 참으로 기쁘오.”
“사람 마음은 간사해서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 싶으면 상대방을 필요 이상으로 긍정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긴 하죠.”
“그건 우리 마인족도 마찬가지라오. 지성을 가진 존재는 모두 그러할지도 모르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붙잡아두어서 미안하오.”
“아니요. 저도 마침 심심하던 참이었어요. 그리고 당신의 아내분과 대화를 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괜찮아요.”
“아내를 좋게 봐주어서 고맙소.”
콜탄구트라는 엘리자베스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자리를 떠났다.
나는 엘리자베스가 대우를 잘 받고 있는 것 같아서 안도감이 들었다.
지난 시간동안 엘리자베스가 어떤 험한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졸여왔었는데 무사한 것을 보니 눈가가 촉촉해졌다.
당장 엘리자베스를 구출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콜탄구트라가 협상에 진심이라는 걸 알아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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