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화 〉 256화
* * *
나는 엘레아노르가 떠난 뒤로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고민에 빠졌다.
방금 그녀가 보여줬던 영상이 과연 진실일까?
정보원이 마침 타이밍 좋게 엘카힘과 콜탄구트라가 갈라서는 모습을 포착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만약 이게 함정이라면 나는 멍청하게 거짓협상에 나섰다가 어이없는 최후를 맞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이제 와서 엘레아노르가 날 배신할 이유가 있을까?
엘레아노르는 파벌싸움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나는 엘리자베스를 구하기 위해서 서로 손을 잡았다.
아직 우리 둘 다 어떠한 이득도 취하지 못했고, 여전히 엘카힘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엘레아노르가 날 배신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또한 애초부터 날 배신할 작정으로 손을 잡았다면 내 촉수군대의 규모를 키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날 이용해서 촉수군대를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나를 제압하지 못한다면 괜히 적을 하나 더 늘리는 결과만 초래할 텐데, 엘카힘 파벌과 척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위험성을 감수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엘카힘과 콜탄구트라가 정보원의 존재를 눈치 채고 일부러 분열된 척 연기를 했을 지도 모른다.
엘카힘은 다른 몸으로 갈아탈 수 있으니 얼마든지 죽어줄 수 있다.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콜탄구트라가 협상을 운운하는 것은 날 끌어들이기 위한 수작에 불과할 것이다.
애초에 마족이 인간과의 협상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이상하기도 하다.
나는 마족을 그런 식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 설정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들의 존재와 일부 변경된 설정도 제법 많이 목격했으니 그런 개방적인 마족이 존재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래서 나는 엘레아노르에게 협상장을 마련해달라고 부탁했었다.
아무튼 엘레아노르의 배신과 엘카힘 패거리의 속임수를 모두 염두에 두고서 대응책을 마련해야겠다.
촉수동굴의 방비를 더 강화해서 엘레아노르 쪽에서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막고 내가 별도로 엘카힘과 콜탄구트라에 대한 정보를 확보해야지.
정찰드론의 중계범위를 생각하면 굳이 콜탄구트라의 본거지 가까이까지 다가갈 필요가 없으니 적당한 위치를 골라서 잠입해야겠다.
가능하다면 내 사랑들을 모두 동원해서 최대한 많은 수의 정찰드론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가야겠다.
잠입위치까지 파놓은 땅굴에서 악마촉수를 타고 달리면 적들에게 들키지 않고 빨리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일단 지도창을 열어서 콜탄구트라의 본거지를 정찰하기 좋은 지점을 찾아보았고, 노동개체들을 많이 동원하여 거기까지 땅굴을 팔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병력들을 동원하여 정찰지점과 정반대쪽에 있으면서 적들의 본진과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있는 군사기지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렇게 하면 적들이 그쪽으로 병력을 집중하느라 내가 점찍은 지점의 보안이 상대적으로 느슨해질 것이다.
그리고 적의 본거지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벌어지는 전투이니 콜탄구트라가 본거지를 옮기거나 녀석이 피신 혹은 직접 전투에 참가할 가능성이 낮을 것이다.
땅굴이 완성되는 대로 내 사랑들을 데리고 촉수동굴로 워프해야겠다.
“레베카님, 저 심심해요.”
“앗! 미안해. 방금 엘레아노르가 준 정보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방안을 세운다고 바빴어.”
“데이트가 아니라 일하러 나온 기분이에요.”
라우라는 살짝 삐친 표정을 짓더니 탁자 위에 엎드려버렸다.
이거 빨리 라우라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야할 것 같네.
“라우라, 가고 싶은 곳 있니?”
“몰라요.”
“그럼 사고 싶은 물건이나 보고 싶은 공연 같은 건?”
“없어요.”
“음... 우리 섹스 할까?”
내가 에라 모르겠다하고 던진 말에 라우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라우라의 귀가 쫑긋거리고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이는 것을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내 추측이지만 라우라는 내심 내 제안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걸로 바로 태도를 바꾸기에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않는 것 같다.
“그것도 싫으면 어쩔 수 없지. 할 일도 많으니 돌아가자.”
“아, 아니에요! 저도 레베카님과 섹스하고 싶어요. 너무너무 하고 싶은데 그래도 다짜고짜 섹스부터 하는 건 좀...”
라우라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내 팔을 붙잡고 애원하듯 말했다.
그녀의 상기된 얼굴과 떨리는 눈빛, 가빠지는 호흡, 비비꼬는 다리를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후훗, 처음부터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잖아. 자, 그럼 다시 한 번 물어볼게. 가고 싶은 곳 있니?”
“옷가게에 가고 싶어요.”
“알았어. 마침 내가 평소에 몇 군데 봐둔 곳이 있어.”
나는 라우라를 데리고서 카페를 나와 코르셰핑에서 유명한 옷가게로 향했다.
우리는 바디슈트를 얻은 뒤로 옷을 사는데 돈을 들이지 않았다.
그냥 옷가게를 훑어보면서 마음에 드는 옷을 스캔하면 언제든지 바디슈트를 그 옷의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들 옷가게를 가서 직접 옷을 입어본 뒤에 스캔하는 걸 선호해서 종종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레베카님! 여기 옷이 엄청나게 많네요?”
“응. 코르셰핑에서 제일 큰 옷가게거든. 난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입어봐.”
“레베카님도 같이 입어 봐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하렴.”
나는 사방에 걸린 옷을 보고서 잔뜩 흥분한 라우라에게 끌려 다니다시피 하면서 온갖 옷을 다 입어봤다.
라우라는 자기 옷보다 내 옷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고, 내가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박수까지 쳐가면서 열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얼른 입고 있는 옷을 스캔하라며 아우성을 친 게 몇 번인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우리가 실컷 갈아입기만 하고 단 한 벌의 옷도 사지를 않으니 가게주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나는 뭐 사줄 게 없나 싶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액세서리 코너에 눈길이 갔다.
바디슈트는 액세서리는 스캔할 수 없으니 그건 무조건 돈을 주고 살 수밖에 없다.
“라우라, 가지고 싶은 액세서리는 없니?”
“글쎄요? 저는 커플링만 있어도 충분한 걸요.”
“우리 저쪽에 가보자.”
난 나한테 입히고 싶은 옷을 잔뜩 들고 있는 라우라를 데리고 다짜고짜 액세서리 코너로 향했다.
멀리서 봤을 때는 몰랐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전부 귀금속과 보석으로 만든 값비싼 액세서리들이었다.
평민들이 보면 질겁하고 도망칠 정도로 비싼 것들 밖에 없었지만 내 눈에는 그냥 적당한 가격이었다.
“라우라, 네 마음대로 골라봐.”
“정말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지.”
“하지만 다른 애들한테 미안해서...”
“괜찮아. 걔네들은 내가 따로 사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골라.”
“네, 레베카님.”
라우라는 싱긋 웃더니 두근두근 거리는 표정으로 조심스레 액세서리를 살펴보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라우라는 목걸이 하나를 목에 조심스레 걸어보더니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어디보자... 정말 잘 어울려!”
“진짜요?”
“그럼. 절대로 빈말이 아니야. 네 아름다운 눈처럼 새파란 사파이어와 네 머리카락처럼 은빛이 나는 줄이 네 분위기와 잘 어우러지고 있어.”
“제 분위기요?”
“응. 나는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네게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느끼고 있어. 특히나 네가 아침햇살을 받고 있으면 네 몸 전체가 반짝반짝 거리는 것 같아서 아름다워.”
“후훗. 그런 표현은 에리카에게 배우셨나요?”
“아니.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거야.”
“헤헤헤. 절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조금 부끄럽네요. 그럼 저 이거 살게요.”
“좋은 선택이야. 계산하고 올 테니까 잠시만 벗어볼래?”
나는 라우라에게서 목걸이를 받아들고서 계산대로 향했다.
그리고 거금을 지불한 뒤에 목걸이를 멋들어진 작은 상자에 담았다.
바로 라우라에게 걸어줄 생각이지만 그래도 보관함이 하나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라우라, 내가 걸어줄게.”
“네, 레베카님.”
나는 헤실헤실 웃고 있는 라우라에게 다가가 상자를 열어 보인 뒤에 목걸이를 그녀에게 걸어주었다.
그러자 라우라는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입맞춤을 하고는 나를 꼭 끌어안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좋은 선물을 주셔서 고마워요. 사랑해요.”
“나도 널 많이 사랑해.”
나는 씩 웃으며 라우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라우라는 내 품에서 훌쩍이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한참 뒤에나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가가 살짝 붉은 것을 봐서는 기쁨의 눈물을 흘린 모양이다.
나는 라우라에게 굳이 울었냐고 물어보는 대신에 날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그녀를 데리고서 옷가게를 나섰다.
“레베카님, 이제 우리 연극을 보러가지 않을래요?”
“연극?”
“네! 길거리연극도 재밌지만 기왕이면 제대로 된 극장에서 하는 걸 보고 싶어요. 아, 혹시 연극 싫어하세요?”
“아니. 여태까지 그쪽으론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뿐이야.”
“다행이다. 제가 극장까지 안내해드릴게요.”
라우라는 내 손을 잡고서 앞장섰다.
우리는 극장으로 가는 길에 인근의 노점에서 길거리음식을 사먹었다.
평소 같으면 라우라가 노점을 모두 섭렵했을 텐데 오늘은 자제를 하는 듯 보였다.
다이어트라도 하는 걸까? 괜히 걱정된다.
“아! 바로 저기에요.”
“생각보다 크네.”
나는 라우라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극장을 보면서 말했다.
극장은 높이가 5층 건물과 비슷하고 너비는 대략적으로 주변의 신전과 비슷해보였다.
라우라는 공연시간표를 확인하더니 표를 2개 끊었다.
“레베카님, 마침 10분 뒤에 시작하는 연극이 있어요. 자리는 그렇게 좋지 않지만요.”
“괜찮아. 너랑 같이 보는 게 중요하니까.”
“히힛. 고마워요. 자, 우리 극장으로 들어가요.”
라우라는 나를 극장 안으로 데려갔다.
거기엔 복수의 공연장이 있어서 한꺼번에 여러 개의 연극이 진행될 수 있는 구조였다.
라우라가 고른 연극은 어느 별난 가족의 일상에 개그를 섞은 내용이었다.
개그 자체는 그녀의 평소 이미지와는 거리가 좀 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족의 일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라우라가 이 연극을 고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우라는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내 옆에서 재잘재잘 이야기를 했지만 연극이 시작된 뒤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집중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유치하다는 생각이 크게 들었지만 라우라는 눈물까지 훔쳐가면서 감정을 이입했다.
그래서 연극이 끝날 때까지 라우라의 손을 잡아주거나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거나 했다.
결국 나는 라우라에게 신경을 쓰느라 연극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연극이 끝나자 관객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고, 라우라는 그 중에서도 가장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라우라는 관객들이 극장을 떠나는 와중에도 자리에 앉아서 여운에 잠겼다.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마지막에 가족들이 극적으로 화해하고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는 부분이 너무 좋더라고요.”
“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내용도 모르는 주제에 아는 척을 했다.
라우라는 눈치를 챈 것 같았지만 그냥 모른 척 넘어가주었다.
“레베카님, 우리 다음에는 다른 애들도 극장에 데려와요. 다 같이 보면 분명 더 재밌을 거예요.”
“그래. 엘리자베스를 구출하고 나면 다함께 즐겁게 놀아보자.”
“벌써부터 기대돼요. 그런데 레베카님,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라우라는 갑자기 새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레베카님, 요즘 저희들에게 숨기는 거 없으신가요?”
“딱히 없어. 내가 일정을 너희들에게 세세하게 말해주지는 않지만 굳이 숨기고 있는 것도 없어. 무슨 일이라도 있니?”
“그게... 매일 저희들을 보호구역에 두고서 혼자만 밖에 나가시니까 걱정이 돼서 그래요. 저 말고도 다른 애들도 다들 레베카님이 홀로 힘든 짐을 지고 계신 것은 아닌지 우려하고 있고요.”
라우라는 나를 꼭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다들 말을 하질 않아서 그렇지 나에 대한 걱정이 많은 모양이다.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내 사랑들에 대한 관심을 덜 준 것 같아서 미안해진다.
“솔직히 힘든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야. 혼자서 군대를 다루는 건 신경 쓸 게 많거든. 너한테 미안한 일이지만 너랑 데이트를 하는 동안에도 조금씩 시간을 들여서 관리를 하고 있고. 하지만 그게 엄청나게 힘들거나 부담감이 너무 강하지도 않아. 그러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이번 일은 저희들이 레베카님께 아무런 도움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니야. 너희들이 미안할 게 뭐가 있니? 그리고 조만간에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길 거야. 그러니까 그런 부채의식은 느낄 필요 없어.”
“레베카님은 항상 저희들에게 좋은 말만 해주셔서 고마워요.”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 당연하지. 다른 고민은 없니?”
“네, 레베카님. 괜히 신경 쓰이는 말을 해서 죄송해요.”
“아니야. 오히려 그런 말을 해주질 않는 게 문제지.”
나는 그 말과 함께 라우라에게 진하게 키스를 해주었다.
아무도 없고, 조명도 비추지 않은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홀로 빛나던 라우라의 새파란 눈이 스르륵 감겼고, 나는 그녀의 고운 얼굴을 쓰다듬으며 애정을 쏟아 부었다.
우리는 정말 진득하게 키스를 주고받다가 극장직원에게 들켜서 도망치듯이 극장에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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