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화 〉 2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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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는 아르카디아에 서식하는 마족 중에서 유일하게 유목을 하는 종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설정했었고, 세레나가 그 설정에 따라서 오크를 창조했다.
하지만 지금 정찰드론으로 관찰하고 있는 보급기지에 주둔하고 있는 오크들은 중앙집권국가의 전열보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방불케 했다.
통일된 제복과 갑옷을 착용하고서 제식훈련을 받은 대로 착착 발을 맞춰 움직이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거기다 고블린이나 오거 같은 다른 마인족들까지 오크와 같은 행동양식을 보이는 것을 보면 콜탄구트라의 카리스마가 마인족들 사이에서는 아주 강력한 모양이다.
특이하게도 녀석들은 다른 종족과 괜한 다툼을 벌이지 않았고, 종족에 따른 서열도 없는 듯 보였다.
저번에 마리를 구해줬던 오거의 부락에선 오거가 지배층이었고, 나머지는 마인족은 노예에 불과했었는데 말이다.
나는 그곳과 이곳이 다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인간과 마수족을 노예로 부리고 있고, 군대식 질서가 철저하게 지켜지고, 종족 별로 다른 보직을 맡고 있으니 서로 충돌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보급기지를 관찰한 결과, 오크는 보병, 오거는 포병을 보직으로 맡았고, 고블린은 나머지 병과에 모두 투입되는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 상급 악마촉수를 시험해볼 때는 고블린들이 대포를 다루고 있었던 것과는 좀 다른 상황이다.
아마도 오거가 없으면 고블린들이 포병보직도 맡는 것 같다.
만약 이 상태로 콜탄구트라의 군대를 방치한다면 결국 인류연합제국은 상당한 영토를 놈들에게 빼앗길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소수정예를 육성하는 군대는 평상시의 소규모 교전에서는 압도적으로 강할지 몰라도 총력전 상황에서는 잘 훈련된 대규모 군대를 당해내기 어려우니 말이다.
아무리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도 도시가 파괴되고 민간인들이 학살당하여 보급이 끊어지면 패배하는 게 전쟁이다.
물론 내가 개입한다면 제국이 피해를 보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제국이 좋아서가 아니라 오직 엘리자베스를 구하기 위해서이지만 말이다.
“이제 충분히 살펴봤으니 싹 쓸어도 되겠지.”
나는 악마촉수를 통제하는 군체의식을 통하여 보급기지 주변의 땅굴에서 대기하고 있는 수많은 병력들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보급기지 안팎으로 커다란 구멍이 뚫리면서 그곳을 통해 보병급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이번 전투에는 보병급만 동원했다.
하급 악마촉수는 이제 막 그것을 기반으로 새롭게 만들어 낸 중보병급으로 대체되고 있는 상황이라서 제외했다.
그리고 작은 기지를 공격하는데 처음부터 중급이나 상급 악마촉수를 보여주면 재미가 없으니 적들의 대응수위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더 강력한 악마촉수를 전장에 투입할 것이다.
보급기지의 병력들은 갑작스러운 적의 습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훈련받은 대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오크들은 부대 별로 각지에 집합하여 전열을 갖췄고, 오거들은 대포를 마치 개인화기처럼 손으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고블린들은 노예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각자 맡은 임무에 따라서 발 빠르게 움직였다.
마족들 주제에 인간과 비슷한 대응을 하니 뭔가 불쾌한 기분이 든다.
기지 내부의 구멍으로 침입한 보병급들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총알세례에 제대로 전진하지도 못했다.
보병급의 방어력은 마력권총탄을 막아내는 수준이라서 그 이상의 위력을 내는 화승총에는 버텨내지 못했다.
마물 수준의 질긴 생명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온 몸이 총알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는 제대로 적을 공격할 수 없었다.
오크들은 3마리씩 조를 짜서 서로 번갈아가면서 총을 쏘고 장전하면서 화력이 비는 순간을 최소화했다.
그리고 고블린이 장창으로 보병급의 접근을 사전에 차단하여 오크들이 방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했다.
오크와 고블린들은 계속해서 보병급들을 죽여가면서 조금씩 전진했고, 결국 보급기지 내부의 땅굴을 통해서 들어온 적들을 모두 정리하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거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놈들은 성벽으로 급히 뛰어올라가 거기서 응전하고 있는 아군과 합류했다.
성벽 위에 있는 마인족들의 수는 별로 많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오거들이 대포를 쏴서 화력지원을 해준 덕에 아직도 큰 피해 없이 버티고 있었다.
이제는 성벽 위로 대부분의 병력들이 포진한 채로 화승총을 쏘기 시작해서 보병급들의 피해는 갈수록 늘어났다.
하지만 지금까지 입은 피해는 이번에 투입한 병력의 머릿수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었다.
보급기지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은 1천 마리 남짓이지만 내가 이번 전투에 동원한 보병급은 거의 1만 마리에 달한다.
제아무리 잘 훈련된 병력이라도 고립된 상황에서 10배에 달하는 병력차이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보급기지 외부의 땅굴에서 지금까지 봤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보병급들이 몰려들자 성벽 위의 마인족들의 얼굴에서 공포가 드러났다.
나는 정찰드론을 통해서 놈들의 멍청한 얼굴을 웃으면서 감상했다.
어디 한 번 다 죽어보라고.
내 감정에 영향을 받았는지 몰라도 보병급들은 일제히 괴성을 내지르면서 보급기지의 성벽을 향해서 돌진했다.
성벽에서 쏟아지는 총알과 포탄에 앞에 있던 아군의 몸에 구멍이 뚫리거나 갈가리 찢어지며 사방에 피와 살점을 흩뿌려도 보병급들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무감정하게 내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녀석들이니 그 어떠한 감정적인 동요도 없는 것이다.
수많은 보병급들이 죽은 끝에 녀석들은 성벽에 다다랐다.
적들은 이제 성벽에 달라붙어서 기어오르는 보병급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성벽 밑으로 보병급들의 시체가 차곡차곡 쌓였고, 곧 그것이 비스듬한 언덕처럼 변했다.
보병급들은 아군의 시체로 만들어진 오르막길을 따라서 보급기지의 성벽 위로 기어올랐지만 고블린과 오크들이 장창이나 화승총으로 다리를 공격해서 보병급을 떨어드렸고, 오거들이 시체오르막길을 대포로 쏴서 날려버렸다.
“흐음... 생각보다 지휘관들이 유능한 모양이네. 하긴 그러니까 10만이나 되는 군대가 돌아가는 거겠지. 그래봤자 화약이 다 떨어지면 전부 죽어.”
나는 혼잣말을 하면서 씩 웃었고, 보병급들은 더욱 맹렬하게 돌격했다.
벌써 2천 마리가 넘는 보병급이 죽었지만 상관없었다.
그 정도 수는 금방 보충이 가능하고 여차하면 상급 악마촉수를 이 자리에 소환해서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면 된다.
하나를 죽이면 둘이 나타나고, 둘을 죽이면 넷이 나타나는 물량은 결국 적들의 화약을 모두 소진시켰다.
이제 적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지표를 가득 메우는 내 병력과 근접전을 벌이면서 전멸하는 것밖에 없다.
물론 화약이 떨어져도 성벽이 곧바로 돌파 당하지는 않았다.
고블린은 몰라도 오크의 신체능력은 인간보다 뛰어나니 성벽에 서서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많은 수의 보병급을 죽였다.
그리고 오거는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놈들은 방금 전까지 신나게 쏘던 대포를 몽둥이로 삼아서 휘둘렀고, 거기에 맞은 보병급들은 허무하게 쓸려나갔다.
육탄전만으로 수백 마리의 보병급을 더 죽였지만 결국 마인족도 생물이니 점점 지칠 수밖에 없고, 보병급이 몸에 달라붙는 것을 허용하면 그대로 죽은 목숨이었다.
어느 보병급은 고블린 장창병들의 중앙으로 파고들어서 사방에 공격촉수를 휘둘러 놈들의 배를 찢고 내장을 모조리 끄집어냈다.
녀석은 곧 제압당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10마리에 가까운 고블린들을 죽였다.
또 다른 보병급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오크에게 점프를 하더니 놈의 상반신에 달라붙은 채로 얼굴을 씹어 먹고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오크는 사방으로 뇌수와 피를 뿌리면서 죽어버렸고 놈의 갈비뼈와 척추가 뽑혀서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이런 식으로 점점 성벽 위의 방어전선이 밀리기 시작했고, 한 번 뚫린 방어선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상자가 거의 없었던 보급기지의 병력들은 이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죽어나갔다.
고블린들은 종잇장처럼 간단하게 찢겨서 그것을 구성하고 있던 신체부위나 장기들이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그리고 오크들은 피를 튀겨가면서 저항했지만 몸에 들러붙은 보병급에게 산채로 몸이 분해되거나 여러 마리에게 사지를 붙잡힌 채로 뼈와 살이 분리되었다.
하지만 오거는 쉽게 당해주지 않았다.
놈들이 휘두르는 대포는 이미 다 망가졌지만 몽둥이로서는 여전히 뛰어난 성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보병급들이 고블린처럼 간단하게 죽어나갔다.
오거의 강인함은 고블린와 오크들이 전멸당하는 순간까지도 놈들이 살아있게 만들었다.
또한 오거들은 대피했던 노예들을 강제로 끄집어내서 고기방패로 내세웠다.
마수족이야 타고난 신체능력으로 보병급을 어느 정도는 상대할 수 있지만 맨몸의 인간은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적어도 인간노예들은 도망칠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마수족노예들과 함께 미친 듯이 돌격했다.
난 보병급들에게 마수족만 공격하고 인간노예들은 절대로 죽이지 말고 제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마수족은 금방 고깃덩어리로 변했지만 인간노예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조잡한 무기를 보병급들에게 휘두르다가 모두 제압당했다.
인간노예들은 제압당한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헛된 저항을 시도했지만 보병급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오거들을 모두 처치하는 일이다.
나는 인간노예들을 제압하고 있는 보병급을 제외한 모든 보병급들에게 오거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아무리 강력한 오거라도 사방에서 달려드는 보병급을 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오거들은 처음에는 서로 등을 맞대고서 보병급을 학살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노동개체들이 오거들의 발밑으로 땅굴을 파서 지면을 무너뜨리자 놈들은 당황해하면서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보병급들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고 오거들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놈들의 살점을 찢어발겼다.
오거들은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도 필사의 저항을 했지만 하나 둘씩 죽어나갔다.
튼튼한 근육이 보병급의 날카로운 아가리와 공격촉수에 잘려나가고, 얼굴의 피부와 살점이 한꺼번에 벗겨졌다.
몇몇 오거는 그런 상태에서도 저항을 이어나갔지만 몸속으로 파고든 보병급들이 안에서 밖으로 살을 파고 나오자 결국엔 죽어버렸다.
“정말 끈질긴 놈들이야. 그래도 중보병급을 투입하면 지금보다 쉽게 죽일 수 있겠지. 그나저나 돌격만 하는 바보 같은 1만의 병력이 화약무기로 무장한 채로 요새를 지키는 1천의 병력을 상대로 3분의 1정도만 죽은 건 예상보다 좋은 성과네.”
나는 촉수관리창을 열어서 병력의 현황을 살펴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솔직히 나와 내 사랑들이 보급기지를 공격했다면 훨씬 적은 피해로 싹 쓸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전장에 우리들이 투입될 수 없고, 대규모 화력전에서는 우리가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손해를 많이 보거나 패배를 하더라도 계속해서 촉수군대를 사용한 전투경험을 축적해야한다.
“조만간에 중보병급이 하급 악마촉수를 모두 대체하면 좀 더 큰 기지를 공격해봐야겠다. 베타급도 더 생산하고.”
베타급은 중보병급과 마찬가지로 하급 악마촉수를 기반으로 제작한 노동개체다.
알파급보다 덩치가 더 크고 힘이 세다는 것을 제외하면 큰 차이는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알파급만으로는 하기 힘든 일도 척척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중급 악마촉수를 노동에 동원할 일이 없어졌다.
나는 노동개체들에게 보병급들이 다져놓은 ‘고기’를 수거할 것을 명령했고, 타바란을 타고서 제압된 인간노예들을 향해서 날아갔다.
타바란은 피바다가 된 보급기지에 착륙하고 싶지 않아하는 눈치였지만 내 명령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인간노예들에게 분석스킬을 사용하니 마법으로 세뇌를 당한 상태였다.
나는 이런 마법을 다룰 줄 모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제정신으로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전부 죽이자니 내 양심이 허락해주지 않았다.
“레베카, 너 지금 꽤나 곤란한 상황이구나? 우리가 도와줄까?”
나는 갑자기 통신기를 통해서 들리는 엘레아노르의 목소리에 절로 인상이 써졌다.
그녀가 어떻게 내가 여기서 전투를 벌인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모르겠다.
여긴 코르셰핑 시에서 3일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콜탄구트라의 점령지인데 말이다.
“너희들이 노예의 세뇌를 풀어준다는 건 반갑지만 그 다음엔 이 사람들을 실험에 써먹을 건가?”
“아니. 우리도 마물을 연구하고 여기저기 써먹기는 하지만 적어도 사람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하지 않아.”
“그럼 어떻게 처리할 건데?”
“마침 우리 파벌에 일손이 부족하거든. 그래서 세뇌를 풀면 우리를 위해서 일하게할 거야. 물론 강제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
“아, 그래? 솔직히 절반 정도는 못 믿겠지만 나로서는 세뇌를 풀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네.”
“잘 생각했어. 그리고... 어쨌든 우린 지금 협력관계니까 조금은 더 신뢰해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난 너희들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사람이야.”
“그럼 날 믿어주면 안 될까? 적어도 난 지금까지 너한테 별로 손해를 끼친 적이 없잖아.”
엘레아노르는 섭섭해 하는 듯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했다.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러지?
나는 뭔가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엘레아노르의 말이 딱히 틀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생각해볼게.”
“고마워! 아참, 네 벌레들의 시체는 잘 치워놓는 게 좋을 거야. 카론의 아이들은 연금술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했기 때문에 네 벌레들을 복제할 수 있을 지도 몰라.”
“알았어. 어차피 죽은 것들도 다 식량자원이니까 버리고 갈 생각 없었어.”
나는 그 말과 함께 노동개체들에게 죽은 악마촉수들도 모두 수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솔직히 엘레아노르가 아니었다면 그냥 다 버리고 갔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네 애인들 말이야. 당분간은 밖에 나오는 일이 없도록 해. 엘카힘이 무슨 짓을 할 지 몰라. 얼마 전에도 우리가 엘카힘의 부하들이 네 애인들에게 접근하는 걸 사전에 차단했어.”
“엘카힘이 아주 죽여 달라고 난리를 피우네.”
“그러게 말이야. 아무튼 이제 시작에 불과하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최대한 몸을 사리도록 해. 괜히 지금처럼 전장에 직접 나서지 말고.”
“웬만하면 네 조언에 따르도록 할 게. 그럼 노예들은 여기에 가둬두고 갈 테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해.”
나는 엘레아노르와의 통신을 일방적으로 끊고는 모든 병력을 이끌고 현장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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