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화 〉 248화
* * *
나는 엘레아노르와의 대화를 끝낸 뒤로 숙소로 돌아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깥에서 함부로 떠들 일이 아니니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텔레파시로 대화하면 완벽한 보안을 유지할 수 있지만 그것조차 쓰지 않았다.
당분간은 그 누구와도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사랑들은 묻고 싶은 게 많아보였지만 다들 내 눈치를 심하게 보느라 쉽사리 질문을 하지 못했다.
숙소로 돌아와서 화장실의 거울을 보니 내 사랑들이 내 눈치를 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험상궂게 인상을 쓰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얼핏 보아도 괜히 말을 걸었다가는 쌍욕을 듣거나 주먹질을 당할 것처럼 보였다.
나는 얼굴을 마사지하면서 어떻게든 표정을 풀었고, 평소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돌아왔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내 얼굴은 정말 완벽하다.
나는 심호흡을 몇 번하고 손바닥으로 볼을 몇 번 찰싹찰싹 때리며 마음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살짝 미소를 품은 얼굴로 내 사랑들과 마주했다.
“얘들아,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어.”
내가 거실의 소파에 앉으면서 하는 말에 내 사랑들은 양옆으로 놓여있는 다른 소파에 둘씩 짝을 지어서 나란히 앉았다.
내 사랑들은 여전히 내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내가 표정을 풀어서 그런지 긴장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현상금사냥꾼길드에서 대화를 나눴던 사람은 엘레아노르야. 난 엘리자베스를 구하기 위해서 그 여자의 파벌과 협력하기로 했어.”
내가 무덤덤하게 하는 말을 들은 내 사랑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긴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면쟁이와 손을 잡았으니...
다들 재창조교단에게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니 분명 내 선택에 화가 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스스로도 화가 나는데 내 사랑들은 오죽할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라우라가 잔뜩 흥분한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레베카님, 왜 그런 선택을 하신 건가요? 지금까지 그것들이 저지른 짓들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대체 왜?”
“미안해, 라우라.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의 방법이야. 우리 힘만으로는 엘카힘과 콜탄구트라의 10만이 넘는 군대와 마물들을 상대할 수는 없어.”
“그 악마 같은 놈들과 손을 잡아서까지 그 여자를 구해야하나요? 그 여자가 그렇게도 중요한 사람인가요?”
“응. 엘리자베스는 소중한 친구야. 친구가 납치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나는 논리적인 답변을 고민하며 의미 없이 시간을 끄느니 그냥 지극히 단순한 감정적인 이유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라우라는 눈빛이 흔들렸고, 이어지는 내 미소에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라우라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않더니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레베카님은 저보다 훨씬 더 고민해서 힘겹게 내린 결정일 텐데,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따지고 들어서 죄송해요. 저번처럼 제 스스로 벌을...”
“그럴 필요는 없어. 난 네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 너한테 한마디의 말도 없이 내린 결정이잖아. 미안해, 라우라.”
“사과하지 마세요. 이건 다 성격 나쁜 제 잘못이에요.”
“이리오렴.”
내가 라우라에게 손짓을 하자 그녀는 얌전히 내 무릎 위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라우라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턱을 긁어주고 배를 만져주면서 그녀를 한껏 귀여워해주며 위안을 안겨주려고 했다.
이번 기회에 엘카힘을 끝장낼 수만 있다면 분명 라우라에게 큰 위안이 되어주겠지.
“라우라, 네가 정 싫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
“아니에요. 저 때문에 어려운 길로 가지마세요. 제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황녀님을 구해드리지 못하면 큰일이잖아요.”
“고마워, 라우라.”
나는 언제나처럼 결국엔 내 뜻을 받아주는 라우라에게 키스했다.
내가 라우라와 실컷 키스를 하고나자 이리스가 손을 들어서 질문했다.
“레베카님, 엘레아노르와는 어떤 식으로 협조를 하기로 했나요?”
“엘레아노르는 엘리자베스가 납치된 위치와 그 친구를 구출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계속 제공해주기로 했어. 그리고 내 촉수군대를 큰 규모로 양성할 수 있도록 내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는 모체들도 공급해줄 거야.”
내가 모체라는 말을 꺼내자 내 사랑들 사이에서 술렁거리는 듯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다들 노골적인 거부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나에 대한 걱정이 담긴 시선을 보내왔다.
그래, 누구나 그런 말을 들으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겠지.
“그렇군요... 어떤 사람을 모체로 쓰기로 하셨나요?”
“강력범죄자 출신 노예로 한정했어. 아무리 급해도 무고한 사람들마저 모체로 삼을 생각은 전혀 없어. 하지만 사람을 촉수의 모체로 삼는 것 자체가 벌써 인간으로서는 실격인 셈이니 엄청 위선적인 발언처럼 느껴져.”
“그런 말씀마세요. 저는 레베카님이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을 해치지 않겠다는 신념을 지켜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리스, 넌 내 선택이 싫지 않니?”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긴 해요. 하지만 황녀님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네, 저도 레베카님의 선택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고마워, 이리스.”
나는 이리스에게 내 곁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고, 그녀는 사뿐사뿐 걸어서 내게 먼저 키스를 해주었다.
그리고 이리스는 소파의 팔걸이에 걸터앉아서 나와 팔짱을 꼈다.
“에리카, 넌 내 선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만약 레베카님이 엘카힘의 파벌처럼 과격파와 손을 잡으셨다면 정말 우려스럽겠지만 엘레아노르의 파벌은 아쿨타리 마을사람들을 보호해줬을 정도로 온건파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봐요.”
에리카는 엘레아노르를 그렇게 싫어하지 않는 모양이다.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동족들을 구해줬으니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겠지.
“모체를 확보하는 일은?”
“그건... 냉정하게 말해서 레베카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노예들은 이미 다른 사람들을 해쳤으니 그들을 희생시킨다 하더라도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에리카는 앞서 두 사람보다 훨씬 더 내 선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아까 모체에 대해서 언급했을 때 내게 걱정스런 시선을 보낸 것과는 별개로 감정을 절제하고 현 상황을 바라보는 것 같다.
“레베카님, 지금은 사소한 걱정은 접어두시고 황녀님을 구출하는 일에만 신경 쓰세요. 레베카님이 그 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항상 미소를 지으시는 거 아세요? 전 그 미소를 잃는 일이 없으면 좋겠어요.”
에리카는 내가 고맙다는 말을 하거나 그녀에게 오라고 부르기도 전에 나에게 다가와서는 키스를 해주었다.
그러고는 이리스의 맞은편에 걸터앉아서 내 손을 잡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키아라다.
키아라는 악마촉수들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호감도가 깎였던 적이 있어서 이번 일로도 충분히 호감도가 깎일 수 있다는 우려가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키아라의 호감도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만큼 나에 대한 신뢰도가 예전보다 더 높아진 결과일 것이다.
“키아라, 너도 할 말이 있으면 하도록 해.”
“저는 레베카님이 어떤 선택을 내리든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런데 엘레아노르라는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요? 갑자기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게 너무 수상해요.”
“엘레아노르는 다른 가면쟁이들과는 좀 다른 녀석이야. 그리고 내게 진 빚을 갚겠다면서 파벌의 방침까지 수정했다고 해.”
“빚이요?”
“응. 엘레아노르는 원래 베로니카 언니의 소중한 친구였고 아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래서 내가 베로니카 언니의 목숨을 구해준 빚을 갚고 싶어 하더라고. 내 앞에서 가면까지 벗으면서 그런 말을 했으니 이번만큼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게 전부 연기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레베카님을 이용하려는 걸지도 모르잖아요.”
키아라는 날 몹시 걱정하며 말했다.
아마도 목적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 저질렀던 마리가 떠올라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난 마리가 아니다.
목적에 매몰되어서 신념을 버리거나 다른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마리처럼 극단적인 일을 겪지 않아서 가능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걸 감안하고 엘레아노르와 손을 잡았어. 엘레아노르의 파벌은 이번 기회에 날 도와주면 엘카힘의 파벌을 꺾어버리고 우위에 설 수 있을 거야. 가면쟁이들 세력 싸움에 이용당하는 건 질색이지만 자존심 좀 챙기려고 엘리자베스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제가 도와드릴 건 없나요?”
“음... 마음은 고맙지만 지금 당장은 없어. 악마촉수로 군대를 꾸리는 건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럼 레베카님께서 힘들면 언제든지 기댈 수 있도록 쭉 곁에 있어드릴게요.”
키아라도 에리카처럼 내가 신호를 보내기 전에 나에게 다가와서 키스를 해주었다.
내 사랑들이 각자의 속마음이야 어떻든 나를 지지해주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는 엘리자베스를 구하는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들 고마워. 너희들이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아, 그렇지.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면 우리 데이트하러 가자. 어때?”
내 제안에 내 사랑들은 다들 박수까지 쳐가면서 환영했다.
어차피 노르헤임에 가려면 콜탄구트라의 군세를 돌파하고 주변 정리를 해야 하니 엘리자베스를 구하기만 하면 분명 한가롭게 여유를 부릴 시간이 생길 것이다.
내 사랑들은 각자 가고 싶은 곳이나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벌써부터 기대감에 부풀었다.
저 기대감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라도 이번 일을 최대한 신속하게 마무리 지어야겠다.
“얘들아, 당분간은 내가 혼자서 움직이는 일이 잦아질 거야. 대신에 언제든지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 테니 걱정하지 마.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너희들에게 손을 내밀게.”
“네, 레베카님!”
내 사랑들은 동시에 대답하면서 나에 대한 복종심을 드러냈다.
나는 그게 너무 기특하게 느껴져서 순서대로 키스를 해주고 뽀뽀를 퍼부으면서 한껏 애정표현을 해주었다.
나중엔 입술이 얼얼하고 혀가 아플 지경이었지만 내가 얻는 행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럼 잠시 나갔다 올게. 마법갑옷은 쓸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혹시 모르니 여기에 두고 갈게. 그리고 되도록이면 외출은 하지 않도록 해.”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텔레파시로 연락을 드릴게요.”
“그래. 라우라, 네가 애들을 잘 이끌도록 해. 혹시 제0기사단에서 접촉해오면 알아서 대응하고.”
“네, 레베카님. 맡겨만 주세요.”
나는 자신감과 책임감을 동시에 드러내는 라우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에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숙소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호텔에서 나오는 즉시 타바란을 소환하여 내 사랑들과 대화를 하는 사이에 상급 악마촉수들이 발견한 커다란 동굴을 향해서 날아갔다.
그 동굴은 코르셰핑에서 북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깊은 숲 속에 위치해있었다.
인근에 마을이나 군사시설이 없고, 깊고 험준한 협곡 아래쪽에 입구가 위치해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될 위험성이 낮은 곳이다.
나는 동굴에 도착하자마자 정찰드론을 들여보내 내부를 탐사하여 안전을 확인했다.
그런 뒤에 동굴 안으로 들어가 적당한 위치에 촉수번식장을 소환하여 뿌리를 박아 넣게 만들어 이곳을 새로운 주둔지로 설정했다.
촉수번식장으로 시선을 향하니 번식방의 반투명한 덮개 너머로 엘리사와 엘티나의 모습이 어렴풋이 비쳐보였다.
내가 번식방의 덮개를 걷어내도록 명령하자 두 사람이 촉수에게 철저하게 능욕당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엘티나, 기분이 어때?”
“흐에에에?”
엘티나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고 흐릿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만 보았다.
나는 꼴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절로 비웃음이 나왔다.
“앞으로도 쭉 기분 좋게 지낼 수 있을 거야. 네가 한계를 맞이한다면 촉수의 양분이 되어버리겠지만 말이야. 킥킥킥.”
나는 악당에게 어울릴법한 웃음소리를 내며 번식방에게 다시 덮개를 닫으라고 명령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덮개가 완전히 닫히기 직전에 엘티나가 절망하는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본 것 같다.
나는 제르디아의 촉수동굴에 남아있는 중급 악마촉수들을 주변으로 소환했고, 촉수관리창을 열어서 나머지 하급 악마촉수들에게는 자멸명령을 내렸다.
촉수소환스킬의 한계 때문에 녀석들을 모두 소환할 수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
나는 하급 악마촉수들이 모두 죽은 것을 확인한 뒤에 촉수번식장에게 한도까지 하급 악마촉수들을 생산하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번식방 안에서 약간 격렬한 움직임이 발생했고, 모체들의 야릇한 교성이 끊임없이 새어나왔다.
“그럼 이제 엘레아노르에게 연락을 해줘야겠네.”
나는 혼잣말을 하며 엘레아노르가 준 귀걸이처럼 생긴 통신기를 귀에 착용했다.
통신기는 내가 착용하자마자 알아서 활성화 상태에 들어갔다.
“엘레아노르, 내 말 들려?”
“아주 잘 들려. 무슨 일이야?”
“새로운 주둔지를 확보했어. 위치는...”
나는 지도창의 방위와 주변 지형지물을 엘레아노르에게 알려주었다.
지도창에 나오는 방위는 일반적인 지도와 어느 정도 비슷하기 때문에 지형지물까지 알고 있는 상태에선 웬만하면 찾아올 수 있을 거다.
“아, 그 협곡의 동굴이라면 어딘지 알고 있어. 예전에 지하시설 후보지로 선정되었던 곳이야.”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네. 모체는 언제부터 공급할 수 있어?”
“당장 오늘부터 가능하지. 매일 밤 10시에 네 동굴로 모체후보자들을 보낼게.”
“좋아. 그런데 네 동료들은 다들 네 의견을 받아들인 거야?”
“응. 몇몇이 불만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널 돕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카론의 아이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어서 그런 거 맞지?”
“맞아. 하지만 이건 내가 주도하는 일이기 때문에 너한테 피해를 줄 일은 없어.”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 너한테 뒤통수를 맞으면 완전히 미쳐버릴 것 같거든.”
“걱정 마. 이번 일에 한해서는 절대로 그럴 일 없으니까.”
“이번 일에 한해서라... 결국은 너랑 적대하는 날이 오겠네.”
“넌 우리 교단을 파멸시키는 게 목적이잖아. 어쩔 수 없지. 아무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지금은 서로 잘 협조해서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자.”
“그래. 변동사항이 있으면 다시 연락할게.”
“잠깐! 내가 아까 말을 하지 않은 게 있는데 통신기는 항상 켜놓도록 해.”
“알았어.”
나는 엘레아노르와의 통신을 종료하고는 심란한 마음을 품고서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오늘 밤을 기대하며 타바란을 타고서 다시 코르셰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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