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화 〉 2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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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카르디아의 생존자들을 위해서 여러 도시를 돌면서 많은 양의 밀가루를 구입했었다.
하지만 제국군이 직접 나서서 카르디아에 필요한 모든 종류의 지원을 해주면서 돈 낭비를 한 격이 되었다.
그래서 그동안 존재 자체를 까먹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써먹어야겠다.
나는 밀가루포대를 몇 개 꺼내서 습기가 차지 않았는지 살펴보았고, 그러는 사이에 이리스가 곁으로 다가와 관심을 보였다.
“레베카님, 밀가루는 어디에 쓰시게요?”
“분진폭발을 일으켜볼 생각이야.”
“분진폭발이요? 아! 예전에 창고가 갑자기 폭발하는 걸 본적이 있는데 그때 사람들이 분진폭발이라는 말을 했던 것 같아요.”
“맞아. 그거랑 같은 원리로 폭발을 일으킬 건데 솔직히 잘 될지는 모르겠어. 가루를 좀 뿌린다고 무조건 분진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풍압탄을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그러게.”
이리스의 말처럼 풍압탄을 사용하면 괴물이 있는 공간에 밀가루를 골고루 퍼뜨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풍압탄을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굳이 분진폭발을 노리지 않고 화력으로 괴물을 찍어 누를 수 있을 테니 의미 없는 가정이다.
“큰 부채 같은 거라고 있으면... 아, 그래. 키아라, 창을 풍차처럼 돌려서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까?”
“네, 가능해요. 보여드릴게요.”
키아라는 장창을 들고서 빠른 속도로 뱅글뱅글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치 선풍기를 세게 틀어놓은 것 같은 바람이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 정도로 강한 바람이라면 밀가루를 괴물이 있는 방에 그럭저럭 골고루 퍼뜨릴 수 있을 것 같다.
거기에 괴물의 격한 움직임까지 가세한다면 더욱 더 밀가루가 잘 퍼지겠지.
“키아라가 밀가루를 퍼뜨리는 역할을 맡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괴물의 시선을 끌어야겠네요. 그런데 에리카는 위험하지 않을까요? 제 생각엔 빠지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라우라는 우리 중에서 가장 신체적인 능력이 떨어지는 에리카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확실히 원래 몸이 약한 뱀파이어족 여성인 에리카가 마법갑옷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 커다란 괴물을 상대로 시간을 끄는 건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다.
“나, 나도 할 수 있어!”
“에리카, 냉정하게 생각해. 날 널 무시하거나 감싸고돌기 위해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거야.”
“그치만 나 혼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건 싫어.”
“싫어도 어쩔 수 없어. 그리고 그런다고 우리 중에서 널 비난할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에리카는 라우라의 설득에 결국엔 말끝을 흐리며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손을 잡으며 미련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질 뻔했지만 감정적인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다.
“에리카, 네가 우리를 위해서 책임감을 가지는 건 정말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지금은 널 보호하고 싶은 우리의 마음을 헤아려주면 좋겠어.”
“레베카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쩔 수가 없네요. 그럼 전 여기서 모두를 기다리면서 기도를 하고 있을게요.”
“고마워, 에리카.”
나는 우리의 말을 잘 들어주는 에리카에게 키스를 해주었고, 그녀는 키스를 끝내고도 한참동안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난 에리카의 애정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게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녀의 볼에 몇 번이고 뽀뽀를 해주었다.
“그런데 레베카님, 어떤 식으로 불을 붙이실 건가요?”
“우리가 평소에 쓰는 발화제를 쓰려고 해.”
나는 치트가방에서 종이로 포장된 발화제를 꺼내서 키아라에게 보여주었다.
이 발화제는 포장지의 줄을 당기고 약 5초가 지나면 불꽃이 일어나서 불을 피울 때 아주 유용한 도구이다.
“밀가루를 충분히 퍼뜨린 뒤에 다시 이곳으로 도망쳐서 문틈으로 줄을 당긴 발화제를 집어던지고 문을 닫아버리면 끝이야. 간단하지?”
“그렇군요. 일단 출구가 열리는지부터 확인한다고 하셨으니 저 혼자 들어갈까요?”
“혼자서 가능하겠어? 원래 네가 시선을 끌고 나머지 사람들 중에서 기회가 닿는 사람이 출구를 열기로 했었잖아.”
“전력으로 달리면 괴물이 대응하기 전에 출구를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절 믿고 맡겨주세요.”
키아라는 연속된 승리로 인해서 자신감이 최고치에 도달한 상태였다.
어쩌면 자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왠지 이번에도 그녀를 믿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좋아. 대신에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쳐. 알았지?”
“네, 레베카님. 그럼 즉시 가보겠습니다.”
우리는 방공호에나 어울릴법한 두꺼운 문을 열어서 키아라가 지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키아라는 도끼 한 자루만 쥐고서 괴물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아주세요. 혹시나 촉수가 바깥으로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아, 그렇다고 잠그지는 말아주세요. 헤헤헤.”
“응. 조심해.”
우리는 키아라의 요청에 따라서 문을 닫고 그녀가 일을 끝내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문이 벌컥 열리고 체액으로 범벅이 된 키아라가 돌아왔다.
그녀는 오늘 처음으로 숨을 헐떡이며 벽에 기대었다.
“키아라, 너 괜찮니?”
“네, 하지만 출구가 괴물을 제압해야 열리는 구조로 되어있어요. 그래서 괴물과 한 번 싸워봤는데 재생력이 너무 좋아서 이런 도끼로는 타격을 주기 어려워요. 레베카님의 계획대로 분진폭발을 노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알았어. 일단 충분히 휴식한 뒤에 작전을 시작해보자.”
나는 키아라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며 말했고, 키아라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면서 순식간에 물병을 하나 비워냈다.
그리고 적당히 숨을 돌리고는 이리저리 몸을 풀었다.
“레베카님, 저 준비 끝났어요.”
“우리들도 언제든지 돌입할 준비가 됐어. 그럼 시작해보자. 키아라, 문을 열어줘.”
키아라는 내 명령에 따라서 3명이서 끙끙거리며 열었던 문을 간단하게 열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괴물이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가만히 엎드려있던 괴물은 우리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괴성을 내지르면서 어기적어기적 기어왔다.
“이쪽이다!”
라우라는 크게 소리치면서 괴물을 도발했고, 괴물은 라우라를 향해서 대가리를 돌렸다.
그리고 반대쪽에서 이리스가 소리를 지르자 괴물의 촉수가 그녀를 향해 뻗어졌다.
다행히 라우라와 이리스는 재빨리 몸을 움직이며 괴물의 공격을 피해냈고 계속 소리를 지르며 괴물의 시선을 끌었다.
덕분에 덩치만 큰 멍청한 괴물은 나와 키아라에게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나는 그 사이에 치트가방에서 밀가루포대를 꺼내서 바닥에 내려놓았고 키아라가 포대를 찢은 뒤에 힘껏 위로 던졌다.
그러자 대량의 밀가루가 한꺼번에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키아라는 나와 함께 움직이면서 계속해서 밀가루포대를 던졌고 필요하다면 장창을 풍차처럼 돌려서 더 넓게 퍼뜨렸다.
괴물은 점점 시야가 뿌옇게 변하자 이상을 감지했는지 라우라와 이리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나랑 키아라가 밀가루를 퍼뜨리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이쪽으로 돌진했다.
괴물의 덩치에 비해서 좁은 방인지라 놈이 조금만 꿈틀거리면서 움직여도 금방 끝에서 끝까지 도달해버렸다.
나는 괴물이 돌진하는 방향에 밀가루포대 몇 개를 놓았고, 키아라는 나를 안아들고 훌쩍 뛰어올라서 괴물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촉수로 가득한 놈의 등을 빠른 속도로 뛰어서 방금 있었던 것과 정반대쪽에 나를 내려주었다.
괴물이 밀가루포대를 들이박고 대가리를 마구 흔들자 밀가루는 아주 효과적으로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키아라보다 괴물에게 의존해서 밀가루를 퍼뜨리는 게 더 효율적인 것 같다.
“키아라, 방금했던 거 또 할 수 있지?”
“네, 레베카님.”
“그럼 라우라랑 이리스는 철수시키고 우리 둘이서 일을 계속하자.”
나는 멀찍이 떨어져있는 라우라와 이리스에게 수신호를 보냈고, 두 사람은 즉시 몸을 움직여서 에리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괴물은 밀가루 때문에 시야가 막혀버렸는지 바로 옆에 라우라와 이리스가 지나가도 알아차리질 못했다.
이런 결함투성이의 괴물을 상대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다니 좀 화가 난다.
나는 괴물이 멍청한 짓을 하는 동안 키아라의 도움을 받아서 밀가루포대를 곳곳에 쌓아두었다.
그리고 키아라에게 장창을 괴물에게 던지라고 명령했다.
키아라는 있는 힘껏 장창을 던져서 괴물의 대가리를 꿰뚫었지만 괴물은 죽거나 무력화되지 않고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괴물은 괴성을 내지르면서 우리 쪽으로 돌진했고, 키아라는 나를 등에 업은 채로 옆으로 재빨리 피해냈다.
꽤나 많은 밀가루포대를 터뜨려서 밀가루범벅이 된 괴물은 신경질적으로 몸을 흔들어서 많은 양의 밀가루를 공기 중에 퍼뜨렸다.
괴물은 밀가루 때문에 화가 났는지 촉수들을 주변에 마구 휘둘렀고, 어리석게도 내가 미리 쌓아둔 밀가루포대를 터뜨려서 더욱 더 주변을 뿌옇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키아라, 일단 문 쪽으로 가자.”
“네, 레베카님. 꽉 잡으세요.”
키아라는 시야가 제한된 상황에서도 빠르게 움직여서 순식간에 문 앞에 도달했다.
나는 발화제를 몇 개 꺼내서 동시에 줄을 당겨서 멀찍이 내던지고 키아라와 함께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갔다.
우리는 서둘러서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작동시킨 뒤에 문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그리고 곧 땅이 울리는 느낌과 함께 폭발음이 들렸다.
“일단 폭발은 성공이야. 하지만 괴물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니 긴장을 늦추지 말자.”
나는 미리 축포를 터뜨리지 않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문을 열었다.
열린 틈으로 시커먼 연기가 풀풀 솟아올랐고, 내부에서부터 열기가 방출되었다.
우리는 바디슈트의 헬멧을 작동시켜 열기와 연기로부터 몸을 보호한 뒤에 괴물이 있는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저거 아직 살아있네.”
라우라의 말처럼 괴물은 촉수가 싹 타버리고 피부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채로 진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숨이 붙어있었고 움직이기도 했다.
괴물은 라우라의 목소리에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돌리더니 그 와중에도 우릴 죽이겠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속도는 너무나도 느렸고, 움직일 때마다 살점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슨 해코지를 해보기도 전에 맥없이 쓰러져서는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육체를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된 모양이다.
“정말 징그럽네요. 이제 그만보고 얼른 가요.”
이리스는 내 등을 떠밀면서 재촉했고 에리카도 말없이 그녀를 거들었다.
둘 다 비위가 약한 사람들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와중에 라우라는 괴물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라우라, 그만 구경하고 가자.”
나는 라우라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고, 그녀는 순순히 내 말을 따라주었다.
미로의 출구는 우리가 아까 사용했던 문처럼 엄청 두껍고 무거워서 키아라가 대신 열어주었다.
우리는 서둘러 출구로 빠져나갔고, 그 즉시 봉인되었던 능력들이 다시 돌아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각종 마법도구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이것저것 확인을 마친 나는 내 사랑들을 데리고서 4번째 방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앞으로 남은 방이 2개나 되네... 미로도 진절머리가 났는데 미로보다 더한 과제를 내려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
“레베카님, 저 문은 뭘까요?”
에리카는 벽에 붙어있는 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원래는 벽에 가려져있어야 할 문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니 뭔가 이상했다.
“함정일까?”
“아니요. 그냥 평범한 문이에요. 혹시 그 번호 여자들이 사용하는 문이 아닐까싶어요.”
라우라는 문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말했다.
확실히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특별할 게 전혀 없는 문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굳이 다른 방의 과제를 해결할 필요 없이 바로 던전의 주인에게 갈 수 있겠다. 누군지 몰라도 문단속을 제대로 안 해줘서 고맙네.”
“여기로 들어가면 적들과 마주치지 않을까요?”
“그럴 확률이 아주 높지만 미로처럼 아무런 제약을 받지를 않으니까 문제없을 거야.”
나는 이리스가 걱정스레 하는 말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치트가방에서 각자의 마법갑옷을 꺼내주었다.
다시 입은 마법갑옷이 어찌나 듬직하게 느껴지는지, 어떤 적이 나타나도 거뜬히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이번에도 키아라에게만 마법갑옷을 입혀주지 못하는 건 마음에 걸렸지만 물건복제스킬을 얻으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이니 너무 신경 쓰지 않도록 하자.
나는 앞장서서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보기보다 공간이 좁아서 결국 마법갑옷을 벗었다가 다시 입어야했다.
그래도 내부는 공간이 넓어서 중량 마법갑옷을 입어도 여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온통 돌로만 가득했던 던전과 달리 이 공간은 꽤나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거 아무래도 가면쟁이의 소굴인 것 같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말했고, 내 사랑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의견에 동조했다.
하지만 아직 가면쟁이 놈들과 제대로 접촉한 적이 없는 키아라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걸 어떻게 아시나요?”
“재창조교단의 연구시설은 내부가 항상 이런 식의 디자인이거든. 온통 하얗고 매끄럽지.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도구들이 많이 보이기도 하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괴물을 만든다는 거야. 마침 저기에 괴물들이 보이네.”
나는 미로에서 봤던 괴물들이 갇혀있는 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우리에 갇혀있는 건 완성품이었고, 만들어지는 도중인 괴물들은 집채만 한 배양기 속에 들어있었다.
아직 괴물로 변하지 않은 남자들은 별도의 우리에 갇혀있었는데, 모두 넋이 나간 상태로 헛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당장 그들을 구해주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유혈사태가 나를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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