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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238화 (238/271)

〈 238화 〉 237화

* * *

나는 키아라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갑옷을 벗기고 몸 상태를 살펴보았다.

가벼운 상처는 이미 거의 다 치유되었고, 장창에 꿰뚫린 배도 빠른 속도로 재생되었다.

재생력강화 스킬을 보유하고 있는 에리카에 비하면 느린 속도였지만 구도자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키아라, 아까는 정말 대단했어. 그런데 네 몸을 미끼로 삼아서 싸우는 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 자칫하면 즉사할지도 모르잖아.”

“저는 머리와 심장만 조심하면 즉사하지 않아요.”

“정말?”

“네, 예전에 몸이 반으로 갈린 적도 있었는데...”

“흠흠. 그런 살벌한 예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아무튼 난 네가 다치는 게 마음 아프니까 되도록이면 조심해줘.”

“네, 레베카님.”

키아라는 방긋 웃으며 나를 껴안았다.

그녀의 커다란 유방에 얼굴이 파묻히는 기분은 정말이지 최고다.

이대로 숨이 막혀도 좋으니 계속 이렇게 안겨있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출구를 막고 있는 적이 셋이나 남아있다.

번호 여자 둘에, 괴물 하나를 마저 처리하지 않으면 미로에서 나갈 수가 없다.

방금 전에 목격했던 키아라의 전투력이라면 어렵지 않게 이길 거라는 기대감이 들지만 혹시 모르니 적당히 긴장을 하는 게 좋겠지.

“재정비하고 출구 쪽으로 가보자.”

나는 피와 땀으로 범벅인 키아라의 몸과 갑옷, 무기를 정성스럽게 닦아주었고, 키아라에게 에너지바와 음료수를 제공했다.

키아라는 싸우느라 칼로리 소모가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그 자리에서 에너지바 10개와 음료수 3병을 먹어치웠다.

라우라가 식성이 좋아서 많이 먹는 느낌이라면 키아라는 살기 위해서 꾸역꾸역 먹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키아라가 칼로리 보충을 끝낸 뒤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시 그녀에게 갑옷을 입히고 무기를 쥐어주었다.

키아라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철퇴뿐만 아니라 17번이 사용했던 장창도 챙겼다.

11번이 썼던 대검은 부러져서 쓸모가 없어보였지만 키아라가 혹시 모른다며 그것을 장창과 함께 등에 멨다.

“그럼 가기 전에 기름부터 어떻게 처리해야겠네.”

나는 치트가방에서 모래포대를 꺼내서 출구로 향하는 길에 골고루 뿌리면서 전진했다.

발에 식용유와 섞인 모래가 달라붙는 것은 기분 나빴지만 그래도 효과는 그럭저럭 좋아서 아무도 미끄러지지 않았다.

식용유는 처음엔 효과가 좀 있나 싶었지만 적들의 신체능력은 17번처럼 방심하지 않는 이상에야 11번과 마찬가지로 간단하게 적응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괜히 낭비를 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17번이 꼴사납게 미끄러져서 당황하는 모습은 꽤나 볼만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출구까지 이어지는 길을 계속 걸어가다가 적들이 대기하고 있는 넓은 공간으로 향하는 코너 뒤에서 일단 멈췄다.

그리고 나는 다시 손거울을 꺼내서 조심스럽게 코너 너머로 내밀었다.

거기엔 24번과 32번으로 불렸던 여자들이 문을 지키고 서있었고 그 문 너머에 괴물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도창으로 봤을 때는 모두 한 공간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상황이지만 지도창에 약간의 하자가 있다는 건 썩 좋은 신호가 아닌 것 같다.

“레베카님,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부탁할게. 조심해.”

나는 자신감이 넘치는 키아라의 태도에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아, 어쩜 이리도 멋지고 사랑스러울 수가 있을까?

우리는 넷이서 코너에 머리만 내밀고서 키아라의 싸움을 지켜보기로 했다.

갑작스러운 키아라의 등장에 벽에 기대어 있던 24번과 32번은 즉시 전투태세를 갖췄다.

24번은 양손에 도끼를 한 자루씩 들었고, 32번은 장검을 뽑아들고 방패를 치켜들었다.

“이봐, 싸우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네가 11번과 17번을 죽였지?”

“그래.”

키아라는 32번이 묻는 말에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그러자 24번이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하아... 내 이럴 줄 알았지. 함정이 분명한데 멍청하게 달려갈 때부터 알아봤어. 기세를 보니까 우리 넷이 한꺼번에 덤벼야 이길까 말까인데 말이야.”

“그럼 포기하고 문을 열어줘.”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어. 주인님께서 내린 명령은 죽어도 지켜야하거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키아라는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 들어가 철퇴를 내리쳤다.

그러자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고, 바닥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서 벽에 마구 부딪혔다.

하지만 24번과 32번은 이미 자리를 벗어난 상태였고, 양 옆에서 키아라를 공격했다.

키아라는 철퇴를 32번에게 휘두르면서 등에 메고 있던 장창을 뽑아 24번에게 찌르고 들어갔다.

32번은 방패로 철퇴공격을 막아냈지만 충격을 모두 흡수하지 못해서 뒤로 날려갔고, 24번은 왼쪽 도끼로 장창을 쳐내면서 오른쪽 도끼로 키아라의 목을 노렸다.

그러자 키아라는 아예 거리를 좁히고 들어가서 어깨로 24번을 강타하여 32번보다 더 멀리 날려 보냈다.

24번은 벽에 처박히나 싶었지만 공중에서 자세를 바로잡더니 벽을 발로 박차면서 빠른 속도로 키아라를 향해 돌진했다.

키아라는 장창을 옆으로 들어서 자신을 향해 내리쳐지는 두 개의 도끼를 막아냈지만 그 충격에 그녀가 밟고 있는 땅이 파여서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었다.

32번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방패를 앞세운 채로 빠르게 돌진하여 키아라를 들이박았다.

키아라는 32번의 돌진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옆으로 날려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모두 놓치고 말았지만 혹시 모른다며 챙겨놓았던 부러진 대검이 아직 남아있었다.

키아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대검을 빼들었고, 24번과 32번은 살벌한 기세로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휘둘러지는 두 개의 도끼와 깊게 찌르고 들어오는 장검 앞에선 키아라는 갑자기 대검의 옆면을 힘껏 바닥에 내리쳤다.

그러자 대검이 산산조각이 났고, 수십 개의 금속파편들이 흙먼지와 돌 파편에 뒤섞인 채로 24번과 32번을 맹렬하게 타격했다.

32번은 방패로 막아냈지만 24번은 그럴 수가 없어서 고스란히 갑옷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공격으로는 판금갑옷을 손상시키기 어려웠지만 시간을 벌기에는 충분했다.

키아라는 아직 적들의 시야가 회복되지 않은 틈을 노리고 들어가서 24번을 발로 세차게 걷어차고 꽉 쥔 주먹으로 32번의 머리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24번은 또 다시 멀찍이 날려갔고, 32번은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키아라는 32번을 밟아 죽일 기세였지만 그녀가 황급히 몸을 옆으로 굴려서 피해냈다.

그러자 키아라는 32번이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나기 전에 바닥에 떨어진 도끼 하나를 들어서 투척했다.

32번은 날아오는 도끼를 방패로 막아내고 즉시 뒤로 물러나 거리를 더욱 벌리려했지만 키아라가 방패를 잡고 패대기를 쳐버렸다.

그 충격으로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32번의 팔이 부러졌고 키아라는 그녀의 어깨를 발로 밟고서 방패 째로 팔을 몸에서 뜯어냈다.

“끄아아악!”

32번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면서도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나 다시 장검을 손에 쥐었다.

이미 찢긴 어깨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데도 포기할 줄을 몰랐다.

32번은 피를 사방에 흩날리면서 키아라에게 달려들어 마구 검을 휘둘렀다.

워낙에 빨라서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들 정도였지만 키아라는 춤을 추듯이 공격을 모두 피해냈다.

그리고 32번이 과다출혈로 휘청거리자 발을 걸어서 넘어뜨리고는 들고 있던 방패의 모서리로 목을 내리쳐서 참수를 해버렸다.

32번의 몸은 꿈틀거리면서 다량의 피를 쏟아내다가 이내 잠잠해졌고 그녀의 머리는 여전히 투구를 쓴 채로 옆으로 굴러가다가 구덩이에 빠져버렸다.

“젠장!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어?”

24번은 순식간에 32번이 살해한 키아라를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아직 손에 도끼를 쥐고 있기는 했지만 사기가 많이 떨어진 것이 눈에 보였다.

“이제 그만 싸우고 길을 비키는 게 어때요?”

“닥쳐!”

24번은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서 애써 소리를 지르며 키아라에게 달려들었고, 키아라는 32번의 몸뚱이를 24번에게 던졌다.

그러자 24번은 32번의 시체를 도끼로 갈라서 반 토막을 내더니 내장을 뒤집어쓴 채로 돌진했다.

키아라는 제자리에서 높이 점프하여 24번의 공격을 피해냈고 아까 손에서 놓쳤었던 철퇴와 장창을 다시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24번을 향해서 빠른 속도로 접근해서 철퇴를 휘둘렀다.

24번은 빠르게 뒤로 피했지만 이어지는 장창의 찌르기 공격에 허벅지를 관통 당했고, 키아라는 그 상태로 장창을 들어올려 24번을 위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 키아라는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애써 균형을 잡으려는 24번을 향해서 장창을 투척하여 가슴팍을 꿰뚫었다.

24번은 그 상태로 포물선을 그리며 추락했지만 여전히 살아서 몸에 박힌 장창을 신경질적으로 빼내고 자세를 고쳐잡고 안정적으로 착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키아라는 24번의 발바닥이 땅에 닿기도 전에 철퇴로 그녀의 몸을 후려쳤다.

무언가 기분 나쁘게 터지는 소리와 함께 24번의 몸이 갑옷과 함께 찢어발겨졌고, 그녀의 팔다리와 머리를 제외하면 온전하게 남아있는 게 없었다.

“후우, 끝났다. 레베카님! 이제 안전해요!”

키아라는 내게 손을 흔들면서 말했고, 우리는 코너에서 나와 키아라에게 다가갔다.

11번, 17번과 싸웠을 때보다는 지형지물의 파괴가 덜한 편이었지만 적의 상태는 더욱 처참했다.

라우라는 그런 광경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했지만 이리스와 에리카는 내 등만 바라보면서 쫄쫄 따라왔다.

“키아라, 두 번 연속으로 싸우느라 고생이 많아. 그래도 이번엔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까 레베카님께서 저보고 몸을 아끼라고 하셨던 게 기억나서 조심해봤어요.”

“정말? 착하기도 하지. 자, 투구를 벗어봐.”

키아라는 내 명령에 따라서 피로 젖은 투구를 벗었고, 나는 그녀에게 매달리며 곧장 키스를 해주었다.

주변에 끔찍하게 죽은 시체들이 있는 와중에 키스를 하는 건 좀 이상해보일 수도 있지만 난 그것보다 키아라에게 보상을 주는 게 더 중요했다.

키아라는 싸우면서 치솟은 아드레날린 탓인지 몰라도 평소보다 더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내 입술과 혀를 탐했고,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더해지자 내 보지도 촉촉하게 젖어버렸다.

이대로 당장 삽입을 해도 아주 부드럽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키아라에게 자지가 없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아쉬운지 모르겠다.

어라? 잠깐!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내 사랑들에게 삽입을 하는 입장이니 삽입을 당하는 입장이 아니라고!

내 정체성은 이제 더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 아니, 한 마리의 암컷에 가까워지고만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디슈트 너머로 희미하게 빛을 내는 자궁문신이 날로 커져가는 내 음란함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나는 뭔가 정신이 혼란스러워져서 급하게 키스를 끝냈고, 키아라는 살짝 아쉬워하는 기색을 드러냈지만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키스를 끝내자 라우라가 내게 말을 걸었다.

“레베카님, 이 문을 열면 바로 괴물이 나오나요?”

“아, 응. 지도창에는 그렇게 나와 있어. 그 녀석만 돌파하면 미로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수문장 역할을 하는 괴물이니 지금까지 키아라가 싸웠던 적들보다 훨씬 강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러게. 일단 미로에서 나가기 위해서 수문장을 쓰러뜨리라는 조건은 없으니까 수문장을 쓰러뜨리지 않아도 출구로 나갈 수 있을 지도 몰라.”

“레베카님 말씀대로 되면 좋겠지만 왠지 던전의 주인이 그렇게 간단하게 내보내주지는 않을 것 같아요.”

나는 라우라가 하는 말을 듣고 나니 긍정적인 전망을 하기 어려워졌다.

던전의 주인은 번호 여자들이 했던 말을 종합해보자면 던전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의 목숨을 벌레 다루듯이 하는 놈이다.

특히 우리를 괴물의 모체로 쓰고 싶어 하는 것으로 봐서는 수문장 역할을 하는 괴물은 포획에 특화된 개체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공격력이 좀 약한 대신에 마비독처럼 생화학적인 공격을 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할 것 같다.

나는 치트가방에서 예전에 모험가길드 건물에서 샀던 방독면을 꺼내서 내 사랑들에게 건네주었고, 특수상점에서 판매하는 만능해독제도 챙겨주었다.

그러고는 문을 슬쩍 열고 손거울을 내밀어서 안쪽을 살펴보았다.

괴물은 고작 손거울로는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마치 불어터진 물고기처럼 생겨서는 덩치에 비해서 좁고 폐쇄된 공간을 애벌레처럼 바닥을 꿈틀거리며 이리저리 기어 다녔다.

게다가 등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촉수들이 자라나있고, 그 밑으로는 반투명한 막으로 둘러싸인 혹 같은 것들이 있었다.

촉수의 형태를 봐서는 무언가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처럼 생겼고 혹 안에는 사람으로 추정되는 실루엣이 보이는 듯 했다.

보아하니 촉수로 사람을 꿀꺽 삼켜서 혹에 집어넣어버리는 것으로 보인다.

내 예상대로 수문장은 포획을 위해서 배치된 것이 확실하다.

나는 다시 문을 닫고는 내 사랑들에게로 돌아왔다.

“괴물은 포획에 중점을 둔 거대한 개체야. 촉수에 잡히면 그대로 끝장인 셈이지.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가면 키아라가 괴물의 시선을 끌어주고 그 사이에 나머지 사람들은 기회를 봐서 출구로 달려가도록 하자. 만약 그대로 출구가 열린다면 최선의 상황이야.”

나는 숯을 들고서 바닥에 그림을 그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내 사랑들은 다들 내 주변으로 모여들어서 그림에 시선을 고정했다.

“출구가 열리지 않는다면 결국엔 괴물을 쓰러뜨려야할 텐데, 지금까지 키아라가 싸웠던 괴물들보다 움직임은 느리지만 덩치가 워낙 커서 작은 움직임도 위협적이고 등에 촉수가 굉장히 많아서 빈틈을 노리는 게 쉽지 않을 거야.”

나는 어설프게 짝이 없는 그림실력으로 괴물의 형태를 그렸다.

그걸 본 내 사랑들은 애써 웃음을 참다가 결국엔 다들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은 늘 보기 좋지만 지금은 부끄러운 감정이 더 컸다.

“아무튼 키아라가 혼자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서 나름의 작전을 짜도록 하자. 웬만하면 내 가방에 들어있는 물건들로 해결이 되면 좋겠네.”

나는 치트가방에서 꺼낼 수 있는 물건들 중에서 괴물에게 충분히 위협이 될 수 있을 만한 것들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우리가 쓰기에는 아주 많은 양의 밀가루포대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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