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화 〉 2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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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아라는 아무리 봐도 참 특이한 사람이다.
벌써 몇 번이고 경험하는 일이지만 평소에는 그렇게 겁이 많은 사람이 싸움만 시작하면 완전히 눈빛이 바뀐다.
그녀가 던진 뿔이나 발톱에 맞아죽은 괴물들의 수만 하더라도 벌써 열손가락을 넘어서고 있다.
이쯤 되면 던전의 주인도 좀 당황스럽지 않을까싶다.
어쨌든 키아라의 활약 덕분에 지도에 있는 모든 보물상자를 열어서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각각의 보물상자에는 부위별로 나뉜 갑옷이 들어있었고, 마지막 보물상자에는 보통 사람 힘으로는 들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무거운 철퇴가 하나 들어있었다.
이미 판금갑옷으로 완전무장하고 있는 키아라는 그걸 한손으로 번쩍 들어서는 멀찍이 떨어져서 이리저리 휘두르다가 그걸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튼튼한 바닥이 움푹 파이면서 엄청난 양의 파편과 흙먼지가 위로 솟구쳤다가 후드득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나는 중량 마법갑옷을 입어야 겨우 할 수 있는 일을 맨몸으로 어렵지 않게 하다니 정말 대단하다.
키아라를 적으로 돌리지 않고 내 사랑으로 만들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레베카님, 벽을 한 번 부서 볼까요?”
“불리한 싸움을 앞두고 있으니까 힘을 아끼자.”
“네, 레베카님. 그런데 저 이상하지 않나요?”
“내가 보기에는 괜찮은데 무슨 문제라도 있니?”
“그게 투구가 너무 험악하게 생겼다고나 할까요.”
키아라의 말처럼 그녀가 쓰고 있는 투구는 굉장히 험상궂고 매서운 인상인 남자의 얼굴형상을 하고 있었다.
적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기에는 딱 어울리는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혹시 무서워?”
“네... 아까 처음 발견했을 때도 그렇고 쓰고 나서 거울을 봤을 때도 무서워서...”
키아라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몸을 흔들었다.
평소에는 그게 마냥 귀엽게 느껴지겠지만 지금은 투구를 쓰고 있어서 영 어색했다.
그래서 나는 키아라의 투구를 벗기고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과 마주했다.
“키아라, 이건 그냥 투구일 뿐이니까 무서워할 필요 없어.”
“그래도 자꾸 신경 쓰여요.”
“그럼 이렇게 하자.”
나는 치트가방에서 못 쓰는 화장품들을 꺼내서 투구를 우스꽝스럽게 꾸며버렸다.
볼르디아에서 실컷 봤던 광대들을 모티브로 삼아서 키아라가 더 무서워하는 일이 없도록 해보았다.
그러자 키아라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고, 광대라면 질색을 하는 라우라도 키아라가 웃는 모습에 기꺼이 새로운 디자인의 투구를 받아들였다.
“어때? 이제 하나도 안 무섭지?”
“네! 감사합니다.”
“자, 그럼 문제도 해결했으니 결판을 지으러 가자.”
나는 키아라에게 가볍게 키스를 한 뒤에 모두를 데리고서 미로의 출구로 향했다.
아직 미로에 괴물들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키아라가 완전무장을 한 상태로 앞장을 서고 있으니 그 무엇도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처럼 누군가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해보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라우라를 노예로 들인 이후부터는 책임감 때문에라도 내가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거나 그런 식의 시도를 많이 하려고 했었다.
그게 보람차기도 했지만 정신적으로 피곤할 때도 많았다.
지금도 키아라를 혼자서 싸우게 내보내는 것 자체가 싫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뒷모습이 듬직해서 자꾸만 설레었다.
다음에 그녀와 섹스를 할 때는 내가 주도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밑에 깔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레베카님,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작전이라도 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라우라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뭐든지 작전을 세우는 게 중요하긴 하지.
작전대로 흘러가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야.
“작전이라... 내 생각엔 인질로 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제일 중요할 거야. 키아라의 싸움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 문제는 그 여자들을 상대로 도망을 갈 수가 있을까?”
“키아라만 출구 쪽으로 보내고 우리는 멀찍이 떨어져있는 방법이 있긴 해요. 하지만 그건 의리 없는 행동이라서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그게 유일한 방법이라면...”
나는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적들을 각개 격파할 수 있는 방법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
혹시나 싶어서 천장에 떠있는 안내문을 다시 보았지만 미로를 통과하라는 간단한 말 밖에 적혀있지 않았다.
미로를 통과... 역시 벽을 부수는 게 좋을까?
미로 안에 있는 벽은 몰라도 미로를 둘러싸고 있는 외벽은 엄청나게 두꺼울 수도 있어.
아! 부수는 시늉을 하면 한 두 명 정도는 따로 끌어들일 수 있을 지도 몰라.
나는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출구와 약간 멀리 떨어져있는 외벽으로 내 사랑들을 데리고 갔다.
“키아라, 이 벽을 부숴봐.”
“계획을 바꾸신 건가요?”
“그런 셈이지.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이걸 여기로 들어오는 길목의 바닥과 벽에 골고루 뿌리도록 해.”
나는 라우라와 이리스, 에리카의 손에 식용유 통들을 잔뜩 쥐어주었다.
제아무리 신체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굉장히 미끄러운 바닥 위에서는 균형을 잡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속도가 붙어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더 그러하겠지.
운이 좋다면 쭉 미끄러지는 녀석들을 키아라가 골프를 치듯 간단하게 날려버릴 수 있을 거다.
우리는 키아라가 외벽을 계속해서 후려치는 동안 길목마다 열심히 식용유를 뿌려댔다.
마침 바닥이나 벽이나 매끈하게 잘린 돌로 만들어져 있고 조명도 어둑어둑해서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식용유의 미끄러짐 효과가 몇 배로 상승할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럼 이제 기다리면... 우왁!”
나는 뒤로 돌아서서 키아라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다가 그만 미끄러져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언제 발바닥에 식용유가 묻었는지 모르겠지만 아픈 것도 잠시 잊을 정도로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허우적거리면서 다시 일어났지만 이미 전신이 식용유로 범벅이 된 뒤라서 또 넘어지고 말았다.
결국 난 바디슈트를 해제하고 현장을 기어서 벗어난 뒤에 다시 그것을 입어서 몸에 묻어있는 식용유를 모두 제거한 뒤에야 겨우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하아... 내 몸으로 직접 효과를 확인한 걸로 치자.”
나는 혼잣말을 하면서 키아라가 열심히 때리고 있는 외벽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이쪽으로 합류했다.
이곳에서 식용유를 뿌린 곳까지의 거리는 10미터이고 그 지점에서부터 거의 50미터 가량이 식용유로 떡칠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거리를 단번에 뛰어넘는 수준의 신체능력이 아니라면 절대로 미끈거리는 덫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다.
“외벽이 엄청 두껍네요. 한참을 때렸는데도 구멍이 뚫릴 기미가 없어요.”
“어차피 뚫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쉬엄쉬엄하도록 해. 아니다. 이제 그만해도 되겠어. 손님들이 왔거든.”
나는 내가 식용유를 뿌린 길목의 멀찍이서 모습을 드러낸, 그러니까... 대검을 들고 있는 큰 여자는 11번이고 장창을 들고 있는 작은 여자는 17번이라고 했었지.
아무튼 두 사람이 무기를 들고서 우리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 겨우 머리 굴려서 생각한 게 고작 이런 거냐? 벽을 뚫고 도망가려다가 우리한테 붙잡힌 놈들만 거의 1백 명은 될 거다!”
“정확히는 78명이다.”
“시끄러워! 아무튼 너희들도 우리가 붙잡아주마!”
17번은 아주 기세등등하게 우리를 향해서 손가락질을 하더니 곧장 장창을 들고서 돌진해 들어왔다.
그 결과는 당연히 꼴사납게 미끄러지는 꼴이었다.
“이, 이거 뭐야? 씨발!”
17번은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다가 벽에 장창을 박아 넣어서 겨우 멈춰 섰다.
하지만 키아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괴물의 뿔을 17번에게 던졌다.
이래도 17번이 죽어버리면 좋겠지만 그녀는 벽에 박힌 장창을 뽑아서 뿔을 쳐냈다.
뿔은 산산조각이 나면서 흩어졌고, 17번은 뼛가루를 뒤집어 쓴 채로 콜록거렸다.
“야! 11번! 나 좀 어떻게 해봐!”
“17번, 너는 항상 이런 식이지. 상황을 먼저 파악하려고 하지 않고 무작정 돌진만 하면 어쩌자는 거냐?”
“설교는 나중에 하라고! 씨발, 계속 던지고 지랄이야!”
17번은 키아라가 연속해서 던지는 괴물의 뿔과 발톱을 쳐내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는지 입이 더 험해졌다.
결국 보다 못한 11번이 스케이트를 타듯이 미끄러운 길을 건너오더니 씩씩거리는 17번의 등갑을 잡고 우리 쪽으로 내던졌다.
“좋았어!”
17번은 공중에서 자세를 바로 잡더니 우리를 향해서 장창을 내리꽂았다.
키아라가 철퇴로 바닥을 내리쳤을 때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법 많은 양의 흙먼지가 피어오르면서 돌 파편이 우리 몸을 때렸다.
바디슈트를 입고 있어도 마법방어막이 작동하지 않으니 제법 아팠다.
앞에서 키아라가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두 온 몸으로 파편을 뒤집어썼을 것이다.
17번은 여전히 전신에 식용유가 묻어 있어서 계속 미끄러졌지만 방금처럼 꼴사납게 넘어지지 않고 미끄러지는 것을 역이용해 춤을 추듯이 움직이며 키아라를 공격했다.
우리는 키아라가 싸우기 편하도록 신속하게 멀찍이 떨어졌고, 키아라는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철퇴를 힘껏 휘둘렀다.
그러자 풍압이 발생하면서 쾅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17번이 납작해졌기를 바랐지만 철퇴가 명중한 벽이 움푹 파인 것에 불과했다.
“뭐, 뭐야? 우리보다 더 힘이 세잖아! 11번! 빨리 와! 나 이러다 죽겠어!”
17번은 방금 전의 기세는 어디로 가고 키아라의 맹렬한 공격을 피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종종 키아라의 공격을 쳐내기도 했지만 키아라가 그 반동을 이용해서 더 강한 공격을 퍼붓자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싸울 땐 입 좀 다물어라.”
어느새 싸움에 합류한 11번은 대검으로 철퇴공격을 막아내고 키아라를 발로 차서 날려버렸다.
키아라는 벽에 부딪히기 전에 자세를 바로 잡고 바닥에 착지했다.
하지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11번과 17번의 공격이 들어왔다.
11번은 옆으로 대검을 휘둘렀고, 17번은 위로 점프하여 장창을 내리찍었다.
키아라는 제자리에서 점프하여 대검을 피함과 동시에 장창의 창날 바로 아래쪽을 잡고 17번에게 철퇴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명중하는가 싶었지만 17번이 장창을 잡은 채로 물구나무를 서서 키아라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해내고 도리어 키아라의 머리를 걷어찼다.
그러나 키아라는 목근육의 힘으로 발차기를 버텨내고 장창을 잡은 손을 휘둘러 17번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11번은 17번이 떨어지자 그녀를 받아줄 생각을 하질 않고 옆으로 피해버렸다.
번호 여자들은 우정이라는 것도 없는 건가?
아니, 그런 감상적인 이유가 아니라 지금은 피하는 게 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라서 그건 거겠지.
동료를 받아주려다 함께 철퇴에 얻어맞을 수도 있으니까.
“빨리 일어나라.”
“닥쳐! 씨발, 더럽게 아프네.”
17번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11번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화풀이를 했다.
이길 자신이 있어서 여유를 부리는 것인지 아니면 너무 충격이 커서 제정신이 아닌 건지는 모르겠다.
이어지는 합동공격을 보면 전자에 가까운 것 같다.
17번은 장창의 길이를 활용하여 키아라에게 거리를 좁히지 못하게 강요했고 11번은 그 사이에 키아라의 뒤로 돌아갔다.
녀석들이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보면 키아라만 처리하면 그 다음은 간단하게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둘이서 키아라와 호각인 것을 봐서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하다.
17번은 장창으로 키아라를 계속해서 뒤로 밀어붙였고 11번은 키아라의 등을 노리고 대검을 내리쳤다.
그러자 키아라는 재빨리 몸을 돌려 팔뚝으로 대검의 넓은 면을 쳐내고 빈틈을 파고드는 장창을 발로 차냈다.
그러고는 11번에게 돌진해서 어깨로 들이 박아서 벽으로 날려버렸다.
11번은 키아라처럼 도중에 균형을 잡지를 못하고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그녀는 여전히 살아있었고, 움직일 수도 있었지만 손에서 무기를 놓치는 바람에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하! 맨날 나한테 잘난 척을 하더니 꼴좋다!”
17번은 11번을 비웃으면서도 키아라에게 계속해서 장창을 찌르거나 휘두르면서 그녀가 11번을 끝장내지 못하게 방해했다.
그 덕에 11번은 다시 대검을 손에 쥘 수 있었고, 17번의 맹공에 가세했다.
아직 키아라가 불리한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불리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괜한 걱정에 불과했다.
키아라는 엉망이 된 땅을 박차고 17번에게 달려갔다.
17번은 장창으로 키아라의 배를 꿰뚫었지만 키아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돌진하더니 17번이 당혹감을 느끼기도 전에 그녀의 머리를 잡고 바닥에 몇 번이고 내리찍었다.
처음에는 금속이 돌에 부딪히면서 불꽃이 튀었고, 곧 투구가 찌그러지더니 펑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양의 피가 사방으로 흩어졌고 위로 솟구친 17번의 눈알이 내 발치로 굴러왔다.
“맙소사.”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며 키아라의 전투를 마져 지켜봤다.
키아라는 배에 꼽힌 장창을 밀어넣어서 몸에서 빼냈다.
그리고 그걸 잡고서 11번에게 던졌다.
11번은 대검으로 장창을 쳐내고 키아라를 공격했지만 키아라가 철퇴로 대검을 후려쳐서 부러뜨렸다.
그리고 키아라는 11번을 발로 걷어찼고, 그녀는 입에서 피를 토해내며 바닥을 수차례 뒹굴었다.
11번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키아라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고, 그녀가 내리치는 철퇴에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철퇴가 11번의 몸을 내리치자 갈비뼈와 척추뼈가 갑옷과 함께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찌그러진 갑옷 사이로 터진 살점과 내장이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별로 강하지는 않네. 레베카님! 제가 이겼어요. 헤헤헤.”
키아라는 내 쪽으로 바라보며 투구를 벗더니 해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키아라는 정말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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