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 23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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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모를 여자들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투구를 눌러쓰고 있었지만 그것의 형태를 보면 모두 큐버스족인 것이 분명했다.
후각이 발달한 수인족이 아니라서 참 다행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금방 우리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들켜버렸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목소리만 들어서는 젊은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고, 투구 너머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에는 독기가 잔뜩 서려있었다.
그녀들이 말하는 주인님은 아마도 던전의 제작자 혹은 관리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나는 키아라라면 혼자서 저 여자들을 다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나 총기를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니 섣불리 그녀를 내보내지 않았다.
“야, 야! 11번! 주인님께서는 침입자를 어떻게 처리한다고 하셨지?”
여자들 중에서 가장 키가 작고 장창으로 무장한 사람이 주변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면서 물었다.
그러자 벽에 기대어 대검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던 가장 큰 사람이 대답했다.
지도창에는 버젓이 이름이 적혀있는데 서로를 번호로 부르다니 참 어색하다.
“모두 생포해서 모체로 사용한다고 하셨다. 17번, 넌 대체 아까 뭘 들었던 거냐?”
“까먹을 수도 있지! 그나저나 이번 침입자들은 다 여자인 모양이네?”
“그래. 모두 여자다.”
“아쉽네. 한 명이라도 남자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뭘 하려고?”
“당연히 섹스지! 벌써 한 달 넘게 남자랑 섹스를 못해봤다고.”
17번이라고 불리는 키 작은 사람은 짜증스럽게 대답했고, 11번이라는 호칭의 키 큰 사람은 콧방귀를 뀌면서 무시했다.
그러자 키가 두 번째로 크고 검과 방패를 등에 메고 있는 사람이 당장 끝날 줄 알았던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냥 이야기 좀 그만하고 여길 떠나라고!
“솔직히 우리가 맨날 상대하는 괴물들이 훨씬 기분 좋은데 왜 굳이 남자를 따로 찾아? 그리고 어차피 남자 침입자는 우리가 손댈 틈도 없이 다 괴물로 만들어지잖아.”
“32번, 네 말대로 자극적인 음식이 맛있긴 하지만 가끔은 담백한 음식이 먹고 싶은 법이라고.”
“그럼 저번에 외출허가를 받지 그랬어.”
“그땐 그냥 하루 종일 자고 싶었다고. 난 너처럼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야.”
“맞아. 넌 우리 중에서 제일 게으른 사람이었지. 그런데 24번, 너 지금 뭐해?”
32번으로 불린 여자는 자신보다 조금 더 키가 작은 사람인 24번의 어깨를 잡고 흔들면서 물었다.
24번은 단검을 들고서 벽에다 열심히 표식 같은 것을 남기고 있었다.
“보다시피 한 번 확인한 곳을 표시하고 있지. 괜히 시간 낭비할 필요하고 싶지 않아.”
“왜? 급한 일이라도 있어?”
“빨리 성욕을 해소하고 싶어서.”
“아, 너 오늘은 아직 괴물사육장에 가질 않았구나. 우린 오전에 다 갔다 왔는데.”
“산란장 청소당번이었거든. 모체들은 한창 즐기고 있는데 난 바닥이나 닦고 있었지.”
“그럼 얼른 침입자들을 잡아가자. 너 성욕해소 못하면 완전 까칠하잖아.”
“알면 빨리빨리 움직이자고.”
24번이 재촉하면서 앞장서자 다른 여자들이 그녀를 따라갔다.
딱히 24번이 리더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의 강압적인 태도에도 누구 하나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다.
나는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는 사람들이 지도창에서 멀찍이 사라질 때까지 보물상자 뒤에서 대기했다.
그리고 충분히 멀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나 흔적감지스킬을 사용해서 그 여자들이 남긴 냄새를 확인하고 머릿속에 기억했다.
“우린 무기라곤 없는데 자기들은 치사하게 완전무장을 하고 다닌단 말이지... 그래도 총은 가지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야.”
“레베카님, 다음에 만나면 제가 상대를 할까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부탁할게. 하지만 웬만하면 피해 다닐 생각이야. 만에 하나 방금 그 여자들이 호문쿨루스나 어떤 식으로든 강화된 인간이라면 역습을 당할 수도 있어.”
나는 키아라를 자중시켰다.
키아라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좋지만 지금은 너무 정보가 부족하니 그녀의 등을 쉽사리 떠밀 수는 없었다.
“아참. 키아라, 네 신체능력이면 여기서 점프해서 벽을 넘을 수 있을까?”
“안 될 것 같기는 한데 일단 한 번 해볼게요.”
키아라는 내 제안에 곧장 제자리에서 뛰어올랐지만 손가락 끝도 닿지 않았다.
그래서 키아라는 멀리서부터 뛰어서 도움닫기를 한 뒤에 점프를 해봤는데 이번에는 아슬아슬하게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손으로 받침대를 만들어서 그녀가 조금이라도 높이 떠오를 수 있게 힘을 써봤다.
이번엔 키아라가 벽에 매달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벽이 더 높아져버렸다.
키아라는 아쉬워하면서 바닥에 착지했고 우리는 허탈감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역시나 꼼수는 쓸 수 없네. 키아라, 내 괜한 부탁을 들어주느라 고생했어.”
“아니에요. 별 것도 아닌 일이잖아요.”
키아라는 내 옆에 앉으며 말했고, 곧바로 내 볼에 입을 맞추며 소심한 애정표현을 했고, 나와 팔짱을 끼면서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라우라와 이리스, 에리카는 키아라의 풋풋한 모습을 보면서 훈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키아라는 참 귀엽네. 그런데 레베카님, 방금 그 여자들이 우리를 모체로 만든다고 했었잖아요? 설마 우리가 마주쳤던 그 괴물들을 낳게 만드려는 걸까요?”
이리스는 불안감에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녀는 모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정말 싫은 듯 했다.
흐음... 내가 촉수괴물의 모체로 엘리사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나를 향한 의존적인 눈빛이 경멸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숨겨야지.
“그럴 가능성이 높지. 던전의 주인은 던전을 지속적으로 운영한다는 명목 하에 남자는 괴물로 만들고, 여자는 괴물을 낳는 모체로 만드는 짓을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을 거야.”
“레베카님, 아무래도 관련자들을 모두 죽여야 해결될 것 같지 않나요?”
“이리스, 너도 그런 말을 하는 구나. 라우라에게 배웠니?”
내가 장난스럽게 하는 말에 라우라가 볼을 부풀리며 날 흘겨보았다.
“레베카님, 평소에 절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야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내 사랑으로 생각하고 있지.”
“피에 굶주린 사람이 아니고요?”
“난사랑하는 사람을 절대로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단다.”
나는 라우라에게 다짜고짜 키스를 하면서 그녀의 의혹제기를 무마시켰다.
가끔은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고 사실대로 말해버리면 라우라가 단단히 삐쳐버릴 게 분명하다.
다행스럽게도 라우라는 내 적극적인 키스를 받고서는 황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이리스, 평소의 너랑은 좀 다른 태도구나?”
“그치만 우릴 그런 비참한 꼴로 만들겠다고 하니까 너무 화가 나잖아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요. 게다가 에리카에게 그런 짓을... 에리카가 불쌍해죽겠어요.”
이리스는 옆에 앉아있는 에리카를 부둥켜안고서 볼을 비볐다.
에리카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를 억지로 떼어내지는 않았다.
예전 같으면 그만하라고 밀어내거나 자리를 떠버렸을 텐데, 이제는 서로 몸을 섞을 정도로 많이 친해져서 그런지 그냥 묵묵히 이리스의 행동을 받아주었다.
“진정해. 어차피 던전에서 나가려면 던전의 주인과 결판을 내야하잖아. 그러기 위해선 충분한 힘을 갖출 필요가 있고.”
“네, 레베카님. 제가 너무 흥분해버렸네요.”
이리스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난 겉으론 침착하게 말했어도 속으론 그녀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에리카에게 저지른 짓만 하더라도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이젠 나를 비롯해서 내 사랑들을 감히 모체로 만들겠다고?
내가 지금 맹세하는데 기필코 던전의 주인을 잡아다가 엘리사와 같은 꼴로 만들 거다.
“레베카님?”
“아, 미안. 잠시 딴 생각을 했어.”
나는 날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에리카의 부드러운 피부로 덮인 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뱀파이어족에게 있어서 뿔은 민감한 곳이지만 에리카는 언제든지 내가 뿔을 만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뭔가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일단 적들을 피해 다니면서 지도를 완성할 거야. 그 과정에서 가능하다면 무기를 확보할 거야. 정 안 되면 아까 키아라가 죽였던 괴물의 뼈라도 뽑아서 써야겠지. 지도를 완성하면 최대한 교전을 피하면서 출구로 향할 거야.”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간단하면서도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지금으로서는 무작정 힘으로 밀어붙이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여자들이 충분히 멀리 가버렸으니까 우리도 움직이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고 내 사랑들이 나를 따랐다.
우리는 여기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보물상자로 가려다가 하필이면 괴물들이 길을 막아버려서 조금 멀리 떨어져있는 보물상자로 향했다.
그 보물상자에도 지도가 들어있었고, 덕분에 내가 볼 수 있는 시야가 더 넓어졌다.
번호 여자들은 잠시 지도창의 끄트머리에 이름을 슬쩍 드러냈다가 다시 멀어졌다.
아무래도 이 여자들은 누군가를 추적하는 일은 영 적성에 맞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는 느리고 멍청한 괴물들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일에만 집중하면서 보물상자를 닥치는 대로 털었다.
운 좋게도 단지 그런 단순한 행동만으로 미로의 지도가 완성되었고, 출구의 위치와 거기로 향하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을 알아냈다.
던전의 주인은 침입자가 미로에서 계속 헤매기를 원해서 보물상자마다 지도를 쪼개서 넣었겠지만 지도창을 쓸 수 있는 오히려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완성된 지도창을 확인해보니 출구 앞에는 괴물이 하나 버티고 있었고, 그 여자들은 어느새 거기서 진을 치고 있었다.
자기들 딴에는 열심히 돌아다녀도 우리를 찾지를 못해서 결국 출구에서 기다리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이러면 곤란한데 말이지.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 라우라가 제안을 해왔다.
“레베카님, 남은 보물상자도 다 열어보면 무기나 다른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지금은 그게 최선인 것 같아. 제발 쓸 만한 게 들어있어야 할 텐데...”
나는 다시 지도창을 보면서 아직 열어보지 않은 보물상자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역시나 곳곳에서 괴물들이 어슬렁거렸지만 이제는 놈들을 피해 다니는 게 너무 익숙해져서 약간 번거로운 수준에 불과했다.
아, 내가 자만을 해서 그런 걸까?
지도창에 보이는 괴물들이 일제히 자리를 옮기더니 보물상자 앞을 지키기 시작했다.
절대로 쉽게 보내주지 않겠다는 악랄한 의지가 느껴졌다.
뭐가 들어있을 지도 모를 보물상자를 위해서 키아라를 계속해서 힘들고 위험한 전투로 내몰 필요가 있을까?
“레베카님, 얼른 이쪽으로 와보세요!”
나는 에리카의 다급한 외침에 서둘러 그녀가 있는 갈림길로 향했다.
에리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각종 괴물들이 난도질을 당한 채로 죽어있었다.
과감하게 피부를 만져보니 아직 따뜻했고, 피도 전혀 마르지 않았다.
아주 깔끔하게 잘려있는 단면을 보아하니 이빨이나 발톱이 아니라 예리한 금속에 의한 자상이 분명했다.
단칼에 괴물의 두터운 목을 베어내거나 몸을 두동강내다니 보통 힘이 아니었다.
나는 흔적감지스킬을 써서 남아있는 냄새를 확인했고 내 기억 속에 저장한 냄새와 대조를 해봤다.
그 결과, 여기에 진하게 베여있는 냄새는 모두 그 여자들의 것이었다.
짙은 향수와 화장품 냄새, 미미하게 남아있는 정액 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가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 여자들과 무작정 싸우려들지 않아서 다행이야. 이 괴물들은 모두 그 여자들이 죽였어. 여기에 있는 피는 전부 괴물들의 것이고 그 여자들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어. 전투력만 따지자면 하나하나가 키아라급일지도 몰라.”
“큰일이네요. 한 명만 키아라급이라도 엄청 위험한데 전부 그런 수준이라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물상자를 하나씩 열어보는 수밖에 없겠어.”
“하지만 그러면 키아라가...”
이리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키아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키아라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리스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걱정 마. 난 그 괴물들에게 절대로 지지 않을 테니까.”
“으, 응.”
이리스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말을 더듬었다.
확실히 이리스는 엄청 예쁜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이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이면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없겠지.
뭔가 이리스가 부럽네.
“레베카님, 보물상자 확보는 저에게 맡겨주세요.”
“알았어. 대신에 저 괴물의 뿔이라도 무기로 삼도록 해. 맨손으로도 충분히 싸울 수 있지만 좀 허접스럽더라도 무기가 있다면 훨씬 더 싸우기 편할 거야.”
“네, 레베카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키아라는 괴물들 중에서 내가 지목했던 뿔이 달린 괴물의 시체로 다가가서는 단숨에 뿔을 뽑아버렸다.
그러고는 다른 괴물들의 커다란 발톱이나 가시 같은 것도 뽑아서 어깨에 짊어졌다.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들쳐 메면서 키아라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주었고 나도 길쭉한 발톱을 하나씩 들어올렸다.
치트가방의 기능이 생필품으로 제한된 상태라서 다들 불편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키아라의 뒤를 낑낑거리면서 따라갔다.
영보기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지금 우리의 임무는 키아라를 적극적으로 보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키아라,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괴물이 하나 나와.”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키아라는 손을 들어서 우리를 대기시킨 뒤에 내가 들고 있던 길쭉한 발톱을 가지고 가더니 괴물과 마주했다.
괴물은 전에 죽였던 괴물처럼 죽여 달라고 울부짖으며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키아라에게 달려들었다.
키아라는 침착하게 자신의 키와 비슷한 발톱을 꽉 잡고 투창하는 자세를 잡더니 엄청난 속도로 그것을 괴물에게 던졌다.
머리에 발톱을 맞은 괴물은 그대로 두개골이 관통당하다 못해 터져버렸고, 기괴하게 꿈틀거리다가 죽어버렸다.
“레베카님, 조금 더럽긴 하지만 이제 보물상자를 확인하실 수 있어요.”
“어... 그래. 가, 가서 확인해야지. 아하하...”
나는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키아라가 왠지 무섭게 느껴져서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분명히 손으로 던졌는데 마치 대포가 발사되는 걸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여러모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키아라가 보물상자를 여는 걸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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