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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235화 (235/271)

〈 235화 〉 234화

* * *

던전의 세 번째 방으로 들어선 우리는 사방을 경계하면서 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두 번째 방처럼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또 무슨 해괴한 요구를 해올 지 모르니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레베카님, 안내문이에요.”

“이번엔 이상한 과제를 주지 않으면 좋겠네. 어디보자... 마법이나 스킬을 쓰지 않고 미로를 돌파하라고?”

“지금 당장은 미로가 없는데 어떻게... 꺅!”

이리스는 귀엽게 비명을 지르며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녀가 놀란 이유는 갑자기 땅이 흔들리며 바닥에서 벽이 솟아올라 미로를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로를 구성하는 벽은 굉장히 높아서 사람이 뛰어오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고, 기어오르지 못하게 되어있어서 라우라조차도 쭉 미끄러지기만 할 뿐이었다.

다행히 이번 과제는 우리들을 멀리 떨어뜨려놓지는 않았지만 축구장보다 더 큰 방에 만들어진 복잡한 미로를 맨몸으로 통과하는 건 좀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다.

“음... 역시 소환스킬을 쓸 수가 없네. 마력총이랑 마법갑옷도 작동하지 않고. 가방에서도 생필품을 제외하면 꺼낼 수 없어. 그래도 바디슈트는 마법방어막을 제외하면 정상적으로 작동해서 다행이야.”

“레베카님, 제 마안도 정상적으로 쓸 수 있어요.”

“그래? 타고난 능력은 스킬이라도 사용할 수 있나보네.”

“그런데 정작 마력총을 못 쓰니까 아무런 소용도 없네요. 전 맨손으로는 이길 수 있는 게 거의 없는데 큰일이에요.

이리스는 내 팔을 붙잡고서 불안감을 드러냈다.

특히 미로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정체모를 짐승의 울음소리에 더욱 겁을 먹었다.

제아무리 사냥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무기 없이 짐승과 맞서는 건 두려운 일일 테지.

“저도 힘이 엄청 약해서 걱정이에요. 거기다 언데드정화스킬은 사용할 수가 없어요. 타고난 힘이 아니라서 그런가 봐요.”

불안해하는 건 에리카도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을 당해서 낙담하고 있는데 연달아서 안 좋은 상황이 벌어지니 주눅들어버렸다.

나는 말없이 에리카의 등을 토닥여주면서 그녀를 달래주었다.

“내가 어느 정도는 맞서 싸울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

라우라는 이리스와 에리카의 손을 동시에 잡고서 두 사람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에서도 불안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라우라, 네가 맨손으로 야수족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지금은 마법방어막의 보호를 받지 않으니 너도 몸을 사려. 게다가 오늘은 더 이상 부활할 수 없잖아.”

나는 라우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라우라는 내 첫 번째 노예가 된 이래로 늘 다른 친구들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서 지금도 본인이 나서서 친구들을 지켜주려고 했다.

난 그게 너무 기특해서 라우라를 끌어안고서 한껏 귀여워해주었다.

“레베카님, 실례지만 제안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키아라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면서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키아라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아까보다 조금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힘은 마법 같은 게 아니니까 지금은 제가 앞장서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게 어떨까요? 그리고 전 웬만해선 죽지도 않으니 공격을 받더라도...”

“키아라, 내가 앞으로도 늘 말하겠지만 네 몸을 막 쓰려고 하지는 마. 아무리 잘 죽지 않아도 아픈 건 똑같잖아.”

“죄송합니다.”

“괜찮아. 지금은 네 제안이 최선인 것 같으니까. 대신에 우리랑 너무 떨어져서 걷지 않도록 해.”

“네, 레베카님.”

키아라는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진 것이 기쁜지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나보다 키가 큰 사람이 나보다 훨씬 귀여운 건 좀 반칙인 거 아닐까?

뭐, 내가 귀여움이랑은 거리가 먼 사람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키아라의 괴력도 스킬로 분류되긴 해도 타고난 힘이라서 봉인되지 않아 다행이다.

“라우라, 흑검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니?”

“아니요. 마법술식이 빛을 잃어서 평범한 검이 되어버렸어요. 아, 오리칼쿰으로 만든 거니까 평범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지금으로선 갑옷을 통째로 썰어버리는 못해요.”

“그렇구나. 하다못해 가방에서 대검이라도 꺼낼 수 있으면 키아라에게 쥐어줄 수 있을 텐데...”

“가다보면 무기를 주울 수 있을 지도 모르잖아요. 보통 던전에 있는 미로들은 곳곳에 보물상자를 숨겨두거든요.”

“함정일 수도 있지 않아? 미믹이라든가.”

“제가 함정을 간파하는 건 학습과 경험의 결과이지, 특수한 마법이나 스킬이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그래, 그건 너한테 맡길게. 자, 그럼 다들 출발하자.”

나는 내 사랑들을 데리고서 미로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발을 디딜 때마다 발자국 소리가 미로의 벽에 반사되어서 메아리처럼 퍼져나갔다.

곳곳에서 이상한 울음소리가 들리고 간혹 벽 너머에서 사람의 것이 아닌 발소리가 들려서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쉿! 앞에 뭐가 있어요.”

우리는 라우라가 하는 말에 모두 숨을 죽인 채로 갈림길 너머에서 보이는 커다란 그림자를 주목했다.

그림자의 주인이 내는 소리는 울음소리라기보다는 킬킬거리는 웃음소리에 가까웠고 발을 질질 끄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면서 우리 쪽으로 접근했다.

라우라는 흑검을 칼자루를 움켜쥐었고, 키아라는 우리를 자신의 등 뒤에 숨겼다.

두 사람이 어찌나 듬직해 보이는지 당장에라도 뽀뽀를 퍼붓고 싶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괴하게 부풀어있는 이족보행을 하는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고, 곧장 우리를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죽... 여줘... 이히히힛!”

괴물은 말로는 죽여 달라고 했지만 정작 광기어린 웃음소리와 함께 살기를 품고서 우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놈의 터질 것처럼 부푼 살은 두꺼비처럼 오돌토돌한 피부로 덮여있었고 한쪽 팔이 기형적으로 커져서는 그걸 바닥에 질질 끌었다.

게다가 놈의 얼굴은 그것이 원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간신히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 뒤틀려있었고 입에서는 키만큼 길쭉한 혀가 튀어나왔다.

난 괴물에게 분석스킬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스킬을 봉인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놈의 정체를 알아낼 수도 없었다.

“다들 뒤로 물러나세요.”

키아라는 다급하게 외쳤고, 우리는 그녀의 말에 따라서 적당히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라우라는 괴물의 키아라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이에 옆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흑검을 빼들었다.

“죽여... 줘... 킬킬킬.”

괴물은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거릴 좁혀들더니 사람보다 큰 팔을 키아라에게 휘둘렀다.

너무나도 빨라서 눈이 따라가질 못했지만 키아라는 침착하게 놈의 주먹을 잡더니 번쩍 들어서 벽에다 패대기를 쳤다.

괴물은 혀를 뻗어서 키아라의 목을 조르려고 했지만 그녀가 힘으로 혀를 찢어버리자 엄청난 양의 피가 솟구쳤다.

키아라는 괴물이 다시 일어나려고 하자 그대로 얼굴을 가슴팍을 발로 걷어차서 다시 벽에 몰아붙였고, 놈이 비틀거리는 사이에 라우라가 재빨리 접근해서 흑검을 휘둘렀다.

마법술식이 작동하지 않아도 오리칼쿰의 예리함은 대단했지만 괴물의 두터운 목을 베어내기에는 라우라의 힘이 부족했다.

괴물은 작은 팔로 라우라를 거칠게 밀쳤지만 키아라가 그녀를 받아주어서 다치지 않았다.

그리고 키아라는 괴물의 목에 박혀있는 흑검의 칼자루를 잡아서 뽑은 뒤에 힘껏 휘둘러서 놈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냈다.

“레베카님! 제가 괴물을 처치했어요!”

“뒤를 봐! 아직 안 죽었어!”

“네? 꺅!”

키아라는 라우라의 다급한 외침에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고, 목이 잘린 괴물이 내지르는 큰 주먹에 얻어맞고 뒤로 날려가 벽에 세게 부딪혔다.

보통 사람 같으면 죽거나 중상을 입을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지만 키아라는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야야... 방심해버렸네. 이번엔 진짜로 처치해야지.”

키아라는 혼잣말을 하더니 다시 괴물에게로 달려갔다.

평소에는 그렇게 겁쟁이인 사람이 어떻게 싸울 때는 저리도 용감한지 모르겠다.

키아라는 다시 자신을 향해 내질러지는 괴물의 주먹의 위력을 힘으로 버텨냈지만 괴물의 잘린 목에서 튀어나온 촉수다발이 그녀의 온 몸을 칭칭 감고서 조여들었다.

보기에는 엄청 위험해보였지만 키아라는 그 상태로 괴물의 주먹을 으스러뜨리고 팔목을 부러뜨렸다.

그런 뒤에 촉수다발을 간단하게 찢어발기고 남아있는 팔의 어깨관절을 정반대로 꺾어서 뽑아버린 것도 모자라 그것을 목의 잘린 단면에 쑤셔 넣었다.

우리는 모두 키아라의 어마어마한 육체능력을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키아라가 성격이 착하고 순진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라우라, 키아라. 둘 다 고생했어. 다친 곳은 없니?”

“멍이 좀 들기는 했지만 괜찮아요.”

“약을 바르면 금방 나을 거야.”

나는 치트가방에서 약을 꺼내서 라우라의 몸 곳곳에 있는 멍 위에 발라주었다.

그러자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멍이 사라졌고 붓기가 착 가라앉았다.

“키아라, 넌 안 다쳤니?”

“완전히 멀쩡해요.”

“다행이네. 피는 바디슈트가 다 씻어줄 테니까 걱정 마. 그리고 정말 잘 싸웠어.”

“네, 레베카님. 앞으로도 맡겨만 주세요.”

키아라는 미소로 화답하더니 바닥에 떨어져있는 흑검을 주워서 피를 털어낸 뒤에 라우라 앞에 놓아주었다.

나는 치트가방에서 물수건을 꺼내서 칼자루를 깨끗하게 닦아냈고, 저번에 라우라에게 배운 대로 기름 먹인 헝겊으로 칼날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덕분에 괴물의 피와 지방으로 더럽혀졌던 흑검이 금방 깔끔해졌다.

“그나저나 미로에 뭐 이런 흉측한 괴물을 풀어놓다니 던전의 주인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나마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힘이 더 강해진 것 같아요.”

“아, 그건 내가 네 힘을 한 단계 더 높이 끌어올려서 그런 거야. 원리는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지만 아무튼 그런 거라고 생각해줘.”

“감사합니다. 레베카님이 주신 힘으로 모두를 안전하게 지켜드릴게요.”

“응. 대신에 무리하면 안 돼.”

“네, 걱정 마세요.”

“그래. 일단 여기를 벗어나도록 하자. 괴물들이 피 냄새를 맡고 이쪽으로 올지도 몰라. 휴식은 주변에서 괴물의 소리가 가까이 들리지 않는 곳에서 취하도록 하자.”

나는 내 사랑들에게 방침을 내리고 다함께 해당 지역을 벗어났다.

혹시나 싶어서 흔적감지스킬을 써봤는데, 이건 또 제대로 작동했다.

덕분에 나는 눈에 보이는 괴물의 흔적을 최대한 피하는 방향으로 모두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미 괴물이 지나가면서 남긴 흔적을 보면서 피해 다닐 수는 있어도 놈들이 아무런 흔적도 없는 곳에서 새로 접근하는 걸 미리 알 수는 없었다.

그 부분은 라우라가 뛰어난 청각과 후각으로 보완해주었고, 함정 역시 라우라가 처리해주었다.

그러다 우리는 막다른 길에서 보물상자를 하나 발견했다.

보물상자는 허리높이였지만 너비는 짐마차수준이라서 괜히 사람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라우라, 어때? 안전해?”

“음... 네, 단순한 보물상자예요. 제가 열어볼게요.”

라우라는 보물상자의 뚜껑을 열어보려고 낑낑거리면서 안간힘을 썼지만 보물상자는 꿈쩍도 하질 않았다.

그러자 이리스와 에리카가 가세했지만 역시나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키아라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가 다들 지쳐서 나가떨어지자 그제야 앞으로 나서서 보물상자를 간단하게 열어버렸다.

세 사람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키아라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쑥스러워했다.

그런데 보물상자 안에는 보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이거 완전 사기잖아!

“레베카님, 안에 지도가 들어있어요.”

“지도? 텅 비어있는 줄 알았는데 뭔가 있긴 했구나. 나 좀 보여줘.”

나는 키아라에게서 작은 지도를 받아서 내용을 살펴보았다.

지도는 미로의 일부가 그려져 있었고, 현재의 위치와 다른 보물상자의 위치까지 표기되어 있었다.

이것만으로는 미로를 탈출할 수는 없지만 다른 보물상자들을 열어보다보면 지도를 완성해서 미로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지도를 습득한 덕분인지 다시 미니맵과 지도창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당연하게도 지도에 있는 정보만이 업데이트되었다.

이제 적어도 지도창에 밝혀진 공간에서는 우리가 있는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적을 나타내는 빨간 이름들도 나타났는데, 모두 사람의 이름인 것으로 봐서는 역시 그 괴물들은 원래 인간이었나 보다.

“지도의 상태는 어떤가요?”

“괜찮은 편이야. 그리고 지도창이 업데이트되어서 계속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어. 그럼 다음 보물상자가 있는 곳으로 가보자.”

나는 미니맵과 지도창을 동시에 열어놓고 적을 피해가면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보물상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보물상자에도 지도가 들어있었고, 지도창이 업데이트되어 보다 넓은 공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적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내가 확인한 것만 10마리가 넘는데,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괴물들을 풀어놓은 것 같다.

그래도 괴물들이 정해진 구역에서만 움직이고 지능도 딱히 높지 않아서 다행이다.

‘뭐야 이거?’

나는 넷이서 뭉쳐 다니는 빨간 이름들이 우리 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내 사랑들에게 손짓으로 보물상자 뒤에 숨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기는 막다른 길이고 지금 도망쳐도 적들에게 들킬 상황이라서 숨는 게 최선이었다.

우리는 숨을 죽인 채로 적들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

싸울 수도 없고 마법방어막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텔레파시라도 쓸 수 있으면 서로 대화라도 조용히 주고받으면서 대응책을 논의할 수 있을 텐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니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적들은 보물상자 근처로 다가오더니 바로 멈춰 섰다.

“뭐야? 아무 것도 없잖아? 주인님께서 분명히 여기 어딘가에 침입자들이 있다고 했었는데 말이지...”

나는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레 손거울을 내밀자 냉병기와 갑옷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젊은 여자들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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