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화 〉 228화
* * *
아기를 돌본다는 건 내 예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수시로 울고 보채는 바람에 제대로 쉴 틈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두세 시간에 한 번씩 젖을 물려야하는 입장이라서 더욱 피곤했다.
하지만 난 아기를 데려온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울지만 않으면 귀여운데다 다들 죽어나가는 와중에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아기에게 충분히 젖을 물린 뒤에 에리카에게 넘겨주었다.
에리카는 나 대신에 아기가 트림을 할 때까지 등을 토닥여주었고, 나는 그 틈에 조금이라도 더 쉬었다.
내 사랑들은 돌아가면서 아기를 돌봐주었지만 결국엔 고아원에서 아기들을 돌봐준 경험이 있는 에리카가 나서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정말이지 에리카가 없었더라면 다들 아기가 원하는 게 뭔지 알지 못해서 엄청나게 당황했을 것이다.
“에리카, 네 덕분에 살았어.”
“다함께 고생하는 걸요.”
“그래도 네 지식과 경험 덕분에 아기가 힘들어질 일은 없었잖아. 고마워.”
나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에리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 키스를 하면 중간에 아기가 끼어서 답답해할 것 같아서 자제했다.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부부 같지 않나요?”
“후훗, 그러게.”
나는 에리카가 수줍게 말하는 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결혼이나 부부라는 말은 이리스가 제일 많이 입에 담는 편이라서 에리카가 그런 말을 하니 신선하게 느껴졌다.
“만약에 레베카님과 저희들 사이에 아기를 낳을 수 있게 된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아, 물론 지금도 분에 넘칠 정도로 행복하지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난 아이가 없더라도 너희들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어.”
나는 이리스에 이어서 에리카까지 아기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대놓고 드러내자 슬슬 부담감이 느껴졌다.
예전에는 결혼과 출산 모두 나와는 평생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혼은 몰라도 출산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앞으로도 뭐라고 장담을 할 수 없는 일이니 이리스와 에리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결혼 자체도 지금으로선 재창조교단의 위협에 직면해있으니 그럴 여유가 없다.
재창조교단의 본부를 파괴하고 영지개척권을 받아서 나만의 영지를 가지게 된다면, 그땐 결혼할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레베카님, 너무 진지하게 고민하지는 마세요. 그냥 제 개인적인 욕심일 뿐이니까요. 이제 아기는 저한테 맡기고 쉬세요.”
“응. 그런데 키아라가 보이질 않네. 어디로 갔는지 아니?”
“아까 잠깐 바람을 쐬러간다고 했어요.”
“그렇구나. 키아라에게 가봐야겠다. 지금은 혼자 두려니 걱정이야.”
“분명 겉으로는 멀쩡한 척을 해도 마음속으로는 엄청 힘들 거예요.”
“맞아. 믿음을 배신당했으니... 금방 돌아올게.”
나는 에리카의 볼에 입을 맞춘 뒤에 키아라에게로 향했다.
미니맵에 따르면 키아라는 근처에 있는 개울가에 있었다.
보호구역의 천장은 실시간으로 바깥 하늘을 투영하기 때문에 한밤중인 지금은 별빛이 쏟아지는 것만 같은 밤하늘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키아라는 별빛을 반사하는 개울가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자마자 마음이 아팠다.
“키아라?”
나는 키아라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녀의 옆에 앉았다.
하지만 키아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더는 말을 걸지 않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몇 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키아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뭐가?”
“절 부르셨는데도 대답을 해드리지 않아서...”
“괜찮아. 그런 사소한 일은 신경 쓰지 마. 자, 얼굴부터 닦자.”
나는 손수건으로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키아라의 얼굴을 깔끔하게 닦아주었다.
키아라의 눈가는 퉁퉁 부어있었고, 정말로 힘들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키아라, 혼자 이렇게 울고 있으면 어떡하니?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달라고 했잖아.”
“레베카님은 아기를 돌본다고 바쁘신데 저까지 앞에서 힘들어하면 너무 피곤하실 것 같아서 그랬어요.”
“지금은 괜찮으니까 얼마든지 나한테 기대도 돼.”
내가 양팔을 벌리면서 하는 말에 키아라는 조심스레 내 품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더니 내 손을 꼭 잡고서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저 너무 힘들어요. 마리 아가씨에 대한 애증이 자꾸만 절 괴롭게 만들어요. 저를 도구로만 여기고 몸과 기억을 조작한 사람이라서 미운데도 계속 미련이 남아요. 재회했을 때 대화를 제대로 했더라면, 그랬더라면...”
“마리는 완전히 복수에 미친 사람이었어. 그런 사람은 누가 아무리 설득해도 바뀌지 않아. 그러니 네가 마리의 복수나 죽음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미래야.”
“미래요?”
“응. 나랑 같이 행복하게 살아갈 미래 말이야. 너만의 꿈을 찾고 그걸 위해서 노력하는 거지.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내가 전폭적으로 도와줄 수 있어.”
“레베카님은 제가 싫지 않으세요?”
“내가 왜? 난 네가 엄청 좋아.”
키아라는 내가 하는 말에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고, 그녀의 열기가 내 몸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 그러니까 전 마리 아가씨가 만든 괴물인데...”
“넌 그냥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걸로 충분해.”
나는 더 이상 키아라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도록 그녀에게 키스를 해버렸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던 키아라도 결국엔 눈을 감고서 내가 선사하는 진한 키스에 점점 빠져들었다.
키아라는 키스를 하면서도 뜨거운 눈물을 한 방울씩 흘렸다.
나는 손으로 키아라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키스를 이어나갔고, 이윽고 열린 그녀의 입속으로 혀를 집어넣어서 그녀의 혀를 옭아매었다.
키아라는 처음 느껴보는 야릇한 감각에 몸을 살짝 떨었지만 내가 그녀를 꼭 안아주자 떨림이 잦아들었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키아라에게 일방적인 애정을 쏟아 부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키아라는 살짝 아쉬워하는 듯한 숨소리를 내뱉으며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금까지 레베카님과 키스를 몇 번 하기는 했었지만 방금 것에 비하면 뽀뽀 수준이었군요. 정말 기분 좋았어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
“아직은 레베카님에 대한 제 감정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기분 좋은 키스를 계속하다보면 분명 사랑에 푹 빠져버릴 것 같아요.”
“급할 것 없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해. 나는 강제적인 사랑은 원치 않거든. 그건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나 마찬가지라고 봐.”
나는 지금까지 내 사랑들에게 한 번씩은 말했던 말을 키아라에게 해주었다.
난 노예로 하렘을 구성하려는 너무나도 쉽고 뻔뻔한 방법을 선택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큼은 진심을 다하고 싶었다.
그래서 노예에게 사랑을 강요하며 협박하거나 세뇌로 마음을 멋대로 주무르는 짓은 절대로 할 생각이 없다.
만약 여기서 키아라가 나를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녀를 해방시켜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키아라는 내 품에 기대며 나에게 더욱 의존했다.
“레베카님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제가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만난 사람이 레베카님이라서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전 결국엔 누군가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버려지거나 살해당했을 거예요.”
“나도 너를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너처럼 아름답고 착한 사람이 누군가의 더러운 음모에 희생되는 건 생각만 해도 엄청 안타까운 일이야.”
“저는 그냥 겁쟁이일 뿐인 걸요. 마리 아가씨가 가문사람들을 괴물로 만들 때는 무서워서 움직일 수도 없었어요.”
“난 네가 겁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네가 겁쟁이였다면 마리의 명령을 어기고 날 구해주지 못했을 거야. 넌 겁쟁이가 아니라 사람들이 죽는 걸 두려워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스스로를 비하하지 말아줘.”
“네, 레베카님. 그리고 지금까지 위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린 가족이니까 힘들면 위로해주는 게 당연한 일이지. 자, 그럼 돌아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키아라에게 손을 내밀었고, 키아라는 내 손을 잡고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워낙에 많이 울어서 조금 지친 모양이다.
나는 키아라와 팔짱을 끼고서 텐트로 돌아왔고, 아기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움직여서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나는 금방 다시 깨어나서 젖을 물려야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키아라는 한 번도 깨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잠들어서 다행이다.
젖을 물리고 선잠을 자는 행동을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보호구역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해가 뜨니 자동으로 보호구역의 천장에 고스란히 투영되었다.
나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멍한 표정으로 일출을 바라보면서 연신 하품을 해댔다.
“레베카님, 간밤에 고생 많으셨어요.”
어느새 내 곁에 앉은 라우라는 짧게 아침키스를 해주었다.
그러고는 아기의 볼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밝게 웃었다.
처음엔 아기를 데려가는 걸 꺼렸던 라우라도 막상 아기를 마주하니까 귀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래서 수시로 자다 깨는 고통을 겪고도 아기를 향해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 같다.
“이름은 생각해보셨나요?”
“그건 아기를 입양하는 사람들에게 맡기려고 해. 이름을 짓는 건 그 아이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을 진다는 다짐 같은 거라고 생각하거든.”
“그렇군요. 레베케님이라면 이름을 지어주시지 않아도 금전적인 지원은 계속 해주실 것 같은데 말이죠.”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아, 이제 배부른 모양이야.”
나는 에리카에게 배운 대로 아기의 똑바로 안고서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다행히 아기는 금방 트림을 했고, 곧 잠들어버렸다.
나도 어릴 땐 이런 식으로 부모님이 돌봐주셨겠지?
부모님 생각을 하니 뭔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레베카님, 이제 아기는 제가 돌볼 테니까 가서 아침식사를 하세요. 이리스가 거의 준비를 끝냈더라고요.”
“벌써? 좀 이르지 않아?”
“그렇긴 한데 레베카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 보면 시간을 딱 맞춘 것 같아요.”
“헤헤, 모유수유를 하면 더 배가 빨리 고파지는 걸까나? 그럼 아기를 부탁할게.”
나는 라우라에게 아기를 넘겨주고 맛있는 냄새를 따라서 걸었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아침상을 차려준 이리스를 뒤에서 껴안았다.
“좋은 아침이야, 이리스.”
“네, 레베카님. 좋은 아침이에요.”
이리스는 내 품에 안긴 채로 뒤를 돌아서 내게 아침키스를 해주었다.
그러고는 나를 아침식사가 차려진 식탁 앞에 앉혀주었다.
“늘 아침을 차려줘서 고마워, 이리스.”
“평소에 레베카님이 저한테 해주시는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식기 전에 얼른 드세요.”
“잘 먹겠습니다.”
나는 쌀밥과 콩나물국, 계란말이를 중심으로 잘 차려진 반찬과 함께 아침식사를 즐겼다.
맛있는 음식들로 배를 든든하게 채우니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내 사랑들과 다 같이 둘러앉아서 먹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은 이리스가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음... 배부르다. 이리스, 덕분에 잘 먹었어.”
“저도 레베카님이 잘 드셔주셔서 기뻐요. 그런데 오늘 익룡을 인도받으러 가신다고 하셨죠?”
“응. 지금은 좀 이르니까 9시쯤에 가볼 생각이야.”
“괜히 다른 사람들이 레베카님을 귀찮게 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네요.”
“걱정 마. 이미 위치는 확인했고 최단거리도 알아뒀거든. 그리고 미니맵을 보면서 이동하면 기사단이나 수사하는 사람들과 마주칠 일도 없어.”
“역시 레베카님은 준비성이 좋으시네요.”
“이래놓고도 또 무슨 사건에 휘말릴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내 나름대로 그럴싸한 계획을 짰다고 생각해도 결국엔 임기응변으로 가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이번에도 증거를 가지고 마리를 추궁한다고 계획은 세워놓고 도리어 그녀에게 역공을 당해버렸으니 말이다.
물론 이번 일은 내가 마리에 대한 쓸데없는 미련을 가져서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
저장탑 앞에서 바로 마리에게 증거를 내밀고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괜히 대화를 더 해보고 싶다는 미련 때문에 일이 너무 커져버렸다.
내가 좀 더 나은 선택을 했었더라면 마리가 그런 식으로 죽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하아, 남들에겐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고 충고를 한 주제에 정작 내가 미련을 가지고 있네.
더 이상은 마리를 우호적으로 생각하거나 동정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혹시 모르니까 혼자 가시지 말고 누구 한 명이라도 데려가세요.”
“그럼 이리스, 네가 나랑 같이 갈래?”
“그것도 좋지만 키아라랑 같이 가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지금은 누구보다도 레베카님께 의존하고 있으니까요.”
이리스는 키아라에게 내 곁을 양보했다.
아마도 나와 키아라의 사이가 더욱 더 가까워져서 빨리 연인 사이로 발전하기를 원하는 모양이다.
“알았어. 나중에 일어나면 제안해봐야겠다.”
“그리고 나가시는 김에 육아용품을 구매해주세요. 특히 기저귀는 지금처럼 수건으로 대체하는 건 한계가 있다고 에리카가 말해주더라고요.”
“다른 필요한 건 없니?”
“음... 달콤한 간식거리가 먹고 싶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괜히 저 때문에 너무 늦어지면 아기가 힘들 테니까 시간이 많이 남으시면 부탁드릴게요.”
“걱정 마. 최대한 빨리 다녀올게. 다른 애들한테도 필요한 게 있나 물어봐야겠다. 아참, 설거지는 내가 할 게.”
“아,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레베카님은 가서 쉬세요.”
“난 괜찮은데.”
“그래도 안 돼요! 아무튼 안 되니까 휴식을 취하세요.”
이리스는 내 등을 억지로 떠밀었고, 나는 쫓겨나다시피 텐트로 다시 들어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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