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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221화 (221/271)

〈 221화 〉 220화

* * *

나는 지난 사흘 동안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리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양조장에서 질 좋은 맥주와 값비싼 와인을 마음껏 맛보거나 농사체험을 하면서 맛있는 과일을 얻어먹거나 맑은 물이 흐르는 하천에서 시원하게 물놀이를 하면서 말이다.

너무 재밌어서 지정의뢰를 깜빡할 정도였다.

나는 언제까지고 놀기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내 사랑들과 텔레파시를 주고받으며 마리를 뒷조사할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우선 라우라가 지금까지 저택의 보안체계를 관찰한 결과를 알려주었다.

‘레베카님, 저택은 전체적으로 보안이 굉장히 삼엄해요. 모든 방이 우리 방과 똑같은 잠금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문을 따고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우리 방뿐만 아니라 저택 곳곳에 감시용 마법도구나 경보장치가 촘촘하게 설치되어 있어요.’

‘이게 저택인지 감옥인지 모르겠네. 만약 마리가 실시간으로 감시용 마법도구를 관찰하고 통제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을 거야.’

‘제가 아는 바에 따르면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송하는 마법도구는 없어요. 그게 음성이든 영상이든 항상 사후에 확인을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경보장치가 경보를 울려서 저택 전체를 경계상태로 만드는 건 가능하니 섣불리 움직이기는 힘들 거예요.’

이 세상에서 내가 유리한 부분은 실시간으로 각종 정보를 획득하거나 위협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뛰어난 보안체계를 갖춘 마리도 나처럼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라우라가 말한 것처럼 경보를 울린다면 곧바로 내가 의심을 받게 되고 마리가 경계레벨을 올릴 게 분명하다.

만약 마리가 경계레벨을 끝까지 올린다면 제대로 조사를 해보기도 전에 유혈사태가 벌어질 지도 모른다.

마리가 아예 적이라는 결론이 나오면 몰라도 지금으로서는 함께 추억거리를 만든 그녀와 싸우고 싶지 않다.

‘라우라, 마리의 방이나 연구실 같은 곳에 잠입을 할 수 있겠니?’

‘저번에 마리가 구경을 시켜줬을 때 이리저리 살펴봤는데, 마리와 함께 들어가지 않는 이상에야 무조건 발각될 거예요. 이렇게까지 보안체계를 촘촘하게 만들어 둔 사람은 처음 봐요. 솔직히 잠입에는 엄청 자신이 있는데 이 저택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네요.’

‘네가 어렵다면 정찰드론이나 새는 어떨까?’

‘드론에 대해서 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비행물체의 침입도 고려한 것처럼 경보장치를 설치해서 그 방법도 힘들 것 같아요.’

‘골치가 아프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찰수단이 모조리 봉쇄된 거나 마찬가지잖아.’

‘적어도 이 농장에서 머무르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에요.’

라우라의 말처럼 여기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드론, 새, 사람 모두 활약할 수 없도록 보안체계를 갖춘 사람이라니 정말 골 때린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째서 그토록 허접스러운 공작에 당해서 마인족의 씨받이로 전락할 뻔 했던 걸까?

아마 단순히 방심해서 당한 것은 아닐 거다.

그녀가 상정한 것 이상의 강한 공격을 받았거나 가면쟁이의 개입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뭔가 갈수록 마리에 대한 의구심만 커지는 것 같다.

내가 잠시 조용히 고민을 하는 사이에 이리스가 조심스레 의견을 제시했다.

‘제가 저장탑 위로 올라가서 마안으로 정찰을 실시하는 건 어떨까요? 거기엔 경보장치 같은 게 없더라고요.’

‘밤에 몰래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야 잠입보다는 안전한 방법이겠네. 마침 저장탑들이 저택을 둘러싸는 형태로 드문드문 건설되어 있고 마리의 연구실과 공방이 있는 온실 근처에도 하나 있으니 의심스러운 정황 정도는 찾아낼 수 있을 거야.’

‘그럼 그 방법으로 갈까요?’

‘글쎄...’

나는 이리스가 묻는 말에 쉽게 확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듣기에는 좋은 방법이지만 혹시나 잘못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그러자 나 대신에 라우라가 나섰다.

‘이리스, 미안하지만 낮에는 저장탑 위로 올라가는 것은 보는 눈이 너무 많고 밤에는 네가 창문을 통하든 문을 열고 나가든 간에 경보가 울릴 거야.’

‘그럼 안 되겠네. 그냥 포기해야 하려나.’

‘레베카님께서 불필요한 싸움은 최대한 자제하라고 하셨으니 어쩔 수 없지.’

라우라의 말처럼 내가 전투를 회피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두가 벌써 일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이미 저택과 온실이 불타버렸겠지.

음... 그냥 일을 저질러버릴까? 아니야, 그건 너무 극단적이야.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 이리스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레베카님, 저택에서 뭔가를 하는 게 힘들다면 아예 농장에서 나가서 정보를 수집하는 건 어떨까요? 어차피 의뢰내용은 이 농장이 아니라 사테르디아 시 내부의 인공생명체에 대해서 조사하는 거니까 굳이 여기서 뭔가를 찾으려고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마리가 배후인 건 뻔한 일이잖아. 굳이 시가지를 조사할 필요가 있을까?’

‘배후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마리가 대단한 연금술사이고 인공생명체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의뢰와 관계가 있는 걸까요?’

‘콜린의 머리에서 뽑은 정보가 있잖아.’

‘저는 그 정보와 이번 의뢰가 상관관계가 없는 상황도 가정해서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봐요. 마리에게만 너무 집착하면 중요한 것을 놓칠지도 몰라요.’

‘확실히 내가 네 말대로 마리에게 집착하기는 했어. 좀 사적인 감정이 섞인 모양이야.’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마리에 대한 미련 때문에 자꾸만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다.

난 그녀가 나의 좋은 친구로 남아주기를 바라고 있어서 온건책을 고집하려고 들었다.

마리가 사테르디아에 인공생명체를 퍼뜨린 사람이라면 결국 내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제 주제 넘은 주장을 너그럽게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야. 무슨 모욕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의견을 제시한 건데 뭘. 에리카, 네가 중요한 지적을 해줬다고 생각해.’

나는 에리카를 내 품으로 끌어당겨서 내 앞에 앉혀놓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에리카 덕분에 지금이라도 시야가 넓어져서 다행이다.

시가지에서 모은 정보를 바탕으로 마리를 추궁한다면 괜히 잠입을 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진실에 빠르고 안전하게 가까워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결국 내가 마리를 죽이게 된다면 나와 키아라의 관계는 그 날로 끝장이 나버릴지도 모르겠다.

키아라는 여전히 마리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고, 그건 아마도 나에 대한 그녀의 관심보다 훨씬 더 강할 것이다.

나는 의뢰는 실패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키아라를 잃는 건 너무 싫다.

키아라에게 점수를 딸만한 상황이 제한적인 나에 비해서 마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만점을 받고 있으니 정말 불리한 싸움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리에 대한 키아라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는 점이다.

적어도 내가 키아라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상대가 될 가능성은 여전히 크게 열려있다.

그러니 벌써부터 패배감을 가지지 말고 희망을 가지도록 하자.

“레베카님, 안에 계시나요?”

갑자기 키아라의 목소리가 들리자 우리는 모두 텔레파시를 끝내도 아무 일도 없는 척을 했다.

라우라는 소파에 드러누웠고 이리스는 괜히 창가에 서서 밖을 구경했고 에리카는 여전히 내 품에 안겨있었다.

키아라는 내 사랑들을 쓱 훑어보더니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키아라, 어디 갔다 왔니?”

“마리 아가씨를 도와서 온실을 정리하고 왔어요. 혹시 제가 쉬는데 방해를 했나요?”

“아니.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니?”

“잠시 저와 둘이서 대화를 하실 수 있을까 싶어서요.”

키아라가 건네는 말에 내 사랑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마침 잠입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키아라가 나랑 둘이서만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니 다들 불안한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키아라는 단순히 나한테 상담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알았어. 얘들아, 잠깐 나갔다올게.”

나는 내 사랑들에게 가볍게 키스를 해준 뒤에 키아라와 함께 방에서 나왔다.

도중에 마주친 하인들은 역시나 키아라에게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면서 황급히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키아라는 나를 아무도 쓰지 않는 빈방으로 데려갔다.

“여기는 임시창고로 쓰고 있어서 감시용 마법도구 같은 게 없으니 안심하세요.”

“키아라, 당연한 말이겠지만 넌 이미 저택이 감옥처럼 감시가 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겠네.”

“네, 레베카님. 마리 아가씨는 어릴 때부터 목숨을 위협받는 일이 많으셔서 심할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쓰세요.”

“그렇구나. 왜 나랑 둘이서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니?”

내가 묻는 말에 키아라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요즘 다들 저를 소외시키는 기분이 들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가 널 소외시킬 리가 없잖아.”

“하지만 모험가길드에 들른 뒤로 다들 텔레파시로만 대화를 하고 저에게는 별로 말을 걸어주질 않아서 외로웠어요.”

키아라는 급기야 울먹이면서 말했다.

평생 따돌림과 멸시를 당했던 키아라 입장에선 외로움을 느낄 만도 하겠지.

마리 때문에 조심한다는 게 키아라를 상처 입히는 결과를 가져오다니 마음이 아프다.

“그랬구나. 미안해, 의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어.”

“역시 마리 아가씨와 관련된 의뢰인 모양이군요.”

“맞아. 의뢰 내용이 뭐냐면...”

“말씀하지 마세요.”

“왜? 궁금하지 않아?”

“그게 아니라 혹시나 마리 아가씨의 세뇌 때문에 제가 레베카님을 상대로 정보를 캐내고 있을 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너무 자세하게 알면 안 될 것 같아요.”

키아라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내놓았다.

마리라면 껌뻑 죽는 사람이 날 위해서 마리를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다니 말이다.

혹시 이것 자체가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순수함으로 가득한 키아라의 눈동자를 보다보니 그런 의심은 사라졌다.

“키아라, 이 저택에서 머무르는 동안은 우리가 텔레파시로 대화하는 일이 많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감시가 삼엄하잖아.”

“저도 텔레파시를 사용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쉬워요.”

“그건... 조건이 따로 있어서 어쩔 수 없어.”

“조건이 뭔지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네가 날 진심으로 사랑하고 우리 둘이서 충분히 몸을 섞어야 해.”

나는 호감도와 음란도 시스템을 대놓고 설명할 수 없어서 추상적인 답변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키아라는 굉장히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아직 갈 길이 뭐네요. 조금 무섭기도 하고요.”

“무섭다고?”

“네, 그게 제 몸에 레베카님의 그... 그... 아무튼 그게 제 몸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까 무섭고 부끄러워요.”

키아라는 얼굴을 완전히 빨갛게 물들이면서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저번에 내가 에리카와 섹스를 하는 모습을 대놓고 보여준 게 나름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상식적으로 여자의 몸에 자지가 달려있고, 거기서 나온 비정상적으로 많은 정액으로 배가 부풀어 오른 모습이나 은밀한 곳에 피어싱을 착용한 모습은 그런 쪽으로 내성이 약한 키아라가 감당하기엔 과도한 자극이었을 것이다.

“아, 그럴 만도 하지. 어떻게 보면 좀 징그럽잖아. 그런데 꼭 그걸 사용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니야. 그리고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강제로 섹스를 요구하지 않아.”

“저도 그건 알고 있지만...”

“키아라, 그건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생각해도 충분하니까 너무 신경 쓰지는 마.”

나는 키아라를 포옹하면서 그녀에게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키아라는 입을 쓰다듬으면서 부끄러워하는 와중에도 미소가 살짝 지어졌다.

아무래도 슬슬 키스의 즐거움을 배워가는 것 같다.

“그런데 마리 씨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니?”

“특별한 은인으로 생각하고 계세요. 이곳에서 머무르는 동안 최대한 배려를 해주고 싶어 하시고요.”

“그런 사람치고는 우릴 너무 감시하는 것 같네.”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원래 경계심이 많으신 분이신데 얼마 전에 기껏믿었던 콜린에게 배신을 당하시는 바람에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무조건 믿지 못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레베카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하셨어요.”

키아라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콜린의 배신은 마리에게 있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로 보인다.

콜린에 대한 잘못된 신뢰가 영주의 딸인 마리가 어이없게 마인족 부락에 잡혀갔던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마리 씨가 너도 의심하고 있니?”

“아니요. 세상에 맹목적으로 믿을 사람은 저밖에 없고 우리 사이가 변할 일도 없다고 하셨어요.”

“너를 진심으로 신뢰하는 모양이네.”

“마리 아가씨는 가끔은 제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저를 아껴주시는 분이세요. 저랑 2살 차이인 언니인데도 저를 딸처럼 여기신다고 하시더라고요.”

“딸이라...”

나는 키아라가 가볍게 하는 말을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키아라를 이용해서 영주가 되는데 방해가 되는 혈육들을 모두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다른 사람들이 키아라를 업신여기는 것을 방치하는 사람이 키아라를 딸처럼 여긴다니, 영 앞뒤가 맞지 않다.

게다가 결혼을 하지도, 아이도 없는 사람이 고작 2살 어린 사람에게 딸을 대하는 것과 같은 감정을 느끼다니 것 자체도 이상하다.

키아라의 평범하지 않은 신체적 특징과 콜린에게서 얻은 정보, 키아라에 대한 마리의 태도를 종합해보면 마리가 키아라를 제작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베로니카 언니의 말에 따르면 제국에서는 호문쿨루스라는 것 자체가 낯선 개념이니 마리가 외부의 도움을 받아서 키아라를 제작했거나 아예 납품을 받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봐야할 것 같다.

“레베카님?”

“아, 미안. 대화를 하다가 혼자 딴 생각을 해버렸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나요?”

“마리 씨가 널 엄청나게 아낀다는 것치고는 네가 처한 상황을 외면하는 것 같아서.”

“그건... 제 스스로 극복할 일이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전 겁쟁이라서 그럴 수가 없었어요. 저는 도와달라고 했지만 마리 아가씨는 외면하셨어요. 저를 아끼기 때문에 채찍도 들 수있는 것이라고 하시지만 전 채찍이 아니라 칼에 찔리는 것처럼 아파요.”

키아라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었던 애증이 담긴 눈빛을 품으며 말했다.

그녀는 분명 마리를 소중히 여기고 있지만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알아서 극복하라는 마리에 대한 원망 또한 품고 있었다.

키아라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녀를 내 여자로 만드는데 그녀가 품고 있는 단 하나의 원망을 이용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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