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화 〉 2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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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턴과의 만남을 뒤로 하고 내 사랑들과 키아라를 데리고서 디베르 가문의 농장으로 향했다.
도시의 성벽 밖에 위치한 농장은 드넓은 부지가 별도의 성벽으로 둘러싸여있어서 그럭저럭 안전해보였다.
농장으로 들어가는 성문 앞에는 도시의 성문처럼 검문소가 있었다.
경비병들은 의자에 기대어 앉아서 하품을 하고 있다가 우리가 접근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멈추시오. 무슨 일로 찾아왔소?”
“마리 디베르 아가씨의 초대를 받아서 왔어요.”
“초대장은 있소?”
“아니요. 구두약속이라서 그런 건 없어요.”
“미안하지만 말만으로는 들여보낼 수... 키아라?”
초대장이 없다는 말에 난색을 표하던 경비병은 키아라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하지만 별로 반가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키아라는 예전부터 괴물이라고 멸시를 받으며 살아왔으니 농장에서 일하는 경비병이 달가워하지 않아도 이상할 건 없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시오.”
경비병은 서둘러 검문소로 달려갔고,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성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농부들이 입을 법한 복장을 한 마리가 키아라를 향해 울면서 뛰어왔다.
마리가 달려오다가 넘어지자 키아라가 바로 말에서 내려서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왠지 모르게 질투가 난다.
“마리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키아라, 정말 너 맞지?”
“네, 아가씨. 아가씨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나도 널 다시 만나서 정말 기뻐!”
마리는 키아라를 끌어안고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키아라는 애써 눈물을 참았다.
이렇게 봐서는 마리가 키아라를 권력을 쟁취하는 도구로 삼고 있다는 정보는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콜린의 일관된 증언과 법정에서 사용되는 마법수정구가 콜린이 머릿속을 읽어서 똑같은 결과를 도출했으니 분위기만으로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아가씨께서 고통 받고 있을 때 아무런 도움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나도 네가 억울한 피해를 입었는데도 도와주질 못했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마리는 키아라의 이마에 뽀뽀를 해주고는 다시 한 번 꼭 안아주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눈물을 참았던 키아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리는 키아라를 한껏 달래준 뒤에 내게로 다가왔다.
“저를 구해주신 것도 고마운데 키아라까지 보호해주시다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할 지 모르겠군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마리는 내게 고개를 깊이 숙였고 나는 테리제나에서 내려서 그녀의 몸을 일으켜주었다.
가까이서 보니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건강상태가 훨씬 좋아보였지만 눈동자가 탁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이건 기분 탓일 것이다.
마리를 잔뜩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뭐든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는 것 같다.
“천만에요. 그나저나 그때의 만남이 단순히 우연이 아닌가보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오늘은 날이 더우니 일단 저택으로 가서 마저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마리는 자신의 말에 올라탄 뒤에 앞장서서 농장 한 가운데에 있는 저택으로 우리를 안내해주었다.
농장에는 각종 곡물과 채소를 키우는 논밭과 온갖 종류의 과일나무가 심어진 과수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곡물저장탑과 풍차가 서있고 와인과 맥주를 만드는 양조장도 크게 지어져있었다.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농장내부에 따로 마을이 있을 정도로 많아서 단순한 농장 수준을 넘어서서 거의 장원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마리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인사를 했고, 마리는 그들에게 일일이 손을 흔들어주고 종종 안부를 묻거나 짧은 대화를 하기도 했다.
아까 나올 때는 급하게 나오느라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지 못한 것 같다.
사람들이 마리를 대하는 친근한 태도를 보면 대우를 잘 받는 것으로 보인다.
“레베카님, 우리 가문의 농장을 보신 소감은 어떠세요?”
“정말 크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살면서 직원들이 사는 마을까지 있을 정도로 큰 농장을 보는 건 처음이에요.”
“확실히 크긴 하지요. 원래는 평범한 수준이었는데 조상대대로 주변 땅을 꾸준히 개간하다보니 엄청나게 커져버렸어요.”
“이렇게 좋은 농장에 초대해주셔서 고마워요.”
“후훗, 아직 조금 밖에 못 보셨는데도 굉장히 만족스러우신가 보군요.”
“네, 특히 양조장에 한 번 가보고 싶어요.”
“일단 숙소를 먼저 보여드린 뒤에 안내를 해드릴게요. 아참, 점심식사는 하셨나요?”
“아니요. 아직 못 먹었어요.”
“그럼 양조장에 가시기 전에 식사부터 하시는 건 어떨까요?”
“좋아요.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덧 저택 앞에 도착했고,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하지만 키아라에 대한 눈빛은 썩 좋지 않았다.
키아라는 그런 시선에 익숙한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내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레베카님, 전 괜찮으니 걱정마세요. 저 사람들도 나름 이유가 있어서 저러는 거니까요.”
“이유? 그냥 네가 평범하지 않아서 그런 거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키아라, 그건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구나.”
마리는 키아라의 말을 도중에 끊어버렸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에서는 평소의 온화함과는 거리가 먼 차가움이 느껴졌다.
혹시 저게 마리의 본성에 더 가까운 걸지도 모르겠다.
마리의 태도변화에 하인들도 바짝 긴장한 태도를 보이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마리는 금방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 레베카님. 자잘한 일은 하인들에게 맡기시고 안으로 들어가요.”
먼저 말에서 내린 마리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서 테리제나의 등에서 내렸다.
그리고 몇몇 하인들이 우리가 타고 온 테리제나와 말들의 고삐를 잡고서 마구간으로 데려갔다.
나는 마리의 뒤를 따라서 저택의 정문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갔고, 내 사랑들과 키아라가 뒤를 따랐다.
저택은 층수는 3층이라서 다른 귀족들의 저택에 비하면 낮은 편이었지만 옆으로 넓어서 전혀 작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부에는 일을 하느라 바쁜 하인들이 많이 보였고 종종 다른 손님들이 돌아다니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어디에도 디베르 가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가족 분들은 다른 저택에서 지내나요?”
“사실 가주이신 아버지의 생신처럼 특별한 날이 아니면 다들 각자의 집에서 지내는 편이라서 농장의 저택은 주로 손님들을 위한 숙소로 제공되고 있어요. 저는 농장의 온실 때문에라도 여기서 살아야하고요.”
“온실도 있어요?”
“그럼요. 제가 연금술사가 되도록 영향을 끼친 장소이기도 하고요. 숙소로 올라가시면 온실의 일부가 보일 거예요.”
마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3층까지 우릴 데려갔다.
3층은 다른 층과는 달리 몇몇 하인들만 보일 뿐 한산했다.
“3층에 있는 큰 숙소들은 귀빈들만을 위해서 제공되는 곳이랍니다. 레베카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시니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방을 준비했어요. 부디 마음에 드시기를 바랍니다.”
마리가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문에 다가가서 벽에 박혀있는 수정구에 손을 갖다 대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내부가 굉장히 넓고 창이 커서 시야가 탁 트였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전망도 좋았다.
그리고 마리가 했던 말처럼 온실처럼 보이는 건물이 약간 보였다.
방에는 온갖 화려한 가구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온갖 마법도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떠세요? 마음에 드시나요?”
“제가 지금까지 좋은 숙소를 제법 이용해봤지만 여기만큼 좋은 곳은 없었던 것 같아요. 특히 시야가 넓어서 좋아요.”
“레베카님이 좋아해주시니 기뻐요. 참고로 유리는 제가 직접 개발한 방탄유리랍니다. 마력소총탄도 거뜬히 막아낼 수 있어요.”
“방탄유리라고요?”
“네, 제가 그 사고를 당하기 직전에 개발을 끝냈고 이제 양산을 앞두고 있어요.”
“혹시 나중에 견본에 총을 쏴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나중에 제 연구실과 공방도 보여드릴게요. 원하신다면 연구논문도 조금 보여드릴 수 있어요.”
나는 마리가 내 요구는 무조건 다 들어주는 게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분명 나에게 숨기고 있는 게 많은 사람인데 자신이 연구한 성과를 그냥 나한테 보여주겠다니 이상하다.
무언가 다른 의도를 숨기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의외로 여기까지는 순수하게 내게 은혜를 입은 대가를 지불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레베카님, 들어가시기 전에 이 보안장치에 손바닥을 등록해주세요.”
“이렇게 하면 되나요?”
“네, 잠시만 그렇게 계세요.”
나는 마리의 요구에 따라서 그녀가 문을 열 때 사용했던 수정구 위에 손을 올렸다.
그 상태에서 마리가 수정구를 조작하자 거기서 밝은 빛과 함께 특이한 소리가 나더니 곧 잠잠해졌다.
“이제 제가 없어도 레베카님이 원하시는 대로 문을 열 수 있게 되었어요. 필요하다면 다른 분들도 등록해드릴게요.”
“부탁드려요.”
마리는 내 사랑들의 손바닥도 차례대로 수정구에 등록해주었다.
하지만 키아라의 손바닥은 등록하지 않았다.
“키아라는 이미 다 등록이 되어있나요?”
“네, 키아라 같은 경우엔 모든 방에 손바닥이 등록되어 있답니다. 원래는 그러면 안 되지만 저택의 보안체계를 만들고 총괄하는 사람은 저라서 남들 몰래 슬쩍 조치를 취했지요.”
흠... 마리가 하는 말을 듣고 나니 그녀가 키아라를 이용해서 승계에 방해가 되는 형제자매와 일가친척들을 모두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말이 신빙성이 들었다.
앞서 마리가 말했던 것처럼 가족행사가 있으면 대부분 이 저택에 모일 테고 키아라가 새벽에 방마다 돌면서 자고 있는 사람의 목을 꺾으면 자동으로 계획이 완수될 것이다.
그런데도 나에게 태연하게 말하는 이유는 내가 알아봤자 막을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곧 점심식사를 준비해드릴 테니 여기서 쉬고 계세요.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저나 하인들에게 부탁해주시고요.”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럼 잠시 후에 다시 뵐게요.”
마리는 우리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방에서 나갔다.
나는 내 사랑들이 방을 살펴보는 사이에 미니맵으로 마리가 움직임을 확인했다.
그녀는 복도에서 의심스러운 수작을 부리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라우라가 내게 직접 말을 하는 대신에 텔레파시로 의사를 전달했다.
‘레베카님, 방 곳곳에 감시용 마법도구들이 깔려있어요.’
‘역시 단순히 손님으로 우릴 받아들인 게 아니었네. 제거할 수 있니?’
‘가능은 하지만 지금은 무해한 척을 하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마리가 방탄유리와 보안체계에 대해서 언급한 건 단순히 수다를 떨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고를 날린 것이라고 봐야겠지.’
나는 마리가 방심해서 자신의 중요한 정보를 우리에게 흘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원하는 건 어쨌든 생명의 은인인 내가 자신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놀다가 떠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난 지정의뢰 때문에라도 마리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가 없다.
마리가 평범하게 권력을 노리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인공생명체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연금술사이니 말이다.
차라리 마리처럼 적인이 아닌지 당장 결론을 내리기 애매한 사람 대신에 명확하게 가면쟁이가 적이라면 좋겠다.
나 참,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면쟁이를 그리워하게 될 줄이야.
‘만약 마리가 우릴 적대할 작정이고 키아라를 이용해서 우릴 공격하면 어쩌지요?’
‘이리스, 만약 처음부터 우리에게 그럴 생각이었다면 우리 손바닥을 등록해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방에 밀어놓고 가두었을 거야. 그리고 키아라는 예속각인이 새겨진 상태니까 우릴 공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키아라한테 미안한데 자꾸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쩔 수 없지. 콜린이 했던 말이 사실이라면 키아라는 일찌감치 마리에게 세뇌당한 상태니까. 그래도 난 키아라를 믿어. 키아라는 친구를 해치지 않을 거야.’
나는 불안해하는 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이리스는 나를 와락 끌어안더니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에리카, 넌 괜찮니?’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레베카님처럼 저도 키아라를 믿어요. 키아라와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함께할 때면 항상 즐거웠거든요.’
에리카는 자신의 옆에 다소곳이 서있는 키아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텔레파시를 들을 수 없는 키아라는 우리끼리 마주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상황을 어색해하고 있었는데 마침 에리카가 손을 잡아주어서 한결 표정이 편해졌다.
에리카는 내 사랑들 중에서 가장 키아라에게 관심이 많았고 잘 챙겨주었다.
그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 버려져서 외롭게 살았던 키아라에게 동질감을 느끼곤 했다.
‘만에 하나 키아라가 세뇌 때문에 저희들을 공격하게 되더라도 저는 끝까지 키아라를 정신 차리게 만들어줄 거예요.’
‘그건 모두 같은 생각일 거야.’
내가 하는 말에 라우라와 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이면 냉정한 판단을 중시하면 라우라와 방금 한껏 걱정했었던 이리스가 키아라를 쉽게 포기하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이자 에리카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나는 텔레파시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고 심심해보이는 키아라에게 말을 걸었다.
“키아라, 마리 씨를 다시 만나니까 어때?”
“너무너무 기뻐요! 이게 다 레베카님 덕분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마리 씨를 따라가지 않아도 되겠니?”
“마리 아가씨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전 레베카님의 노예니까 레베카님을 더 우선시해야한다고 생각해요.”
“난 괜찮으니까 여기에서 머무르는 동안 마리 씨랑 같이 시간을 많이 보내도록 해.”
“정말요? 감사합니다!”
나는 키아라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면서 말했고, 키아라는 어린 아이처럼 기뻐했다.
난 그저 키아라를 통해서 마리의 진심을 떠볼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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