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화 〉 2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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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열흘 동안 길을 걸어서 사테르디아에 도착했다.
프랑카에서 볼르디아로 워프한 뒤에 그곳에서부터 다른 마을이나 도시에 들르는 일없이 계속 야영을 하면서 이동했다.
나는 볼르디아에서 키아라를 위해서 말을 한 마리 사주어서 혼자서 맨발로 걷는 일이 없도록 배려했다.
키아라는 생각지도 않았던 자신만의 말이 생기자 뛸 듯이 기뻐했었다.
그리고 에리카에게서 말을 돌보는 법을 배워서 자신의 말인 나나에게 정성을 들였다.
나나라는 유치한 이름은 키아라가 직접 지어준 것인데, 키아라는 물론이고 이리스까지 귀엽다고 난리였었다.
키아라는 수습기사였기 때문에 이미 말을 탈 줄 알고, 나름 수준급이라서 따로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아직 엘리자베스를 만나지 못해서 마법갑옷을 챙겨줄 수는 없었지만 바디슈트가 제공하는 마법방어막의 성능은 나름 준수한 편이니 일반적인 전투상황이라면 위험할 일이 없었다.
키아라의 호감도는 친한 친구 수준인 3으로 올랐고, 음란도는 저번에 나랑 에리카가 섹스를 하는 것을 목격한 이후로 2까지 올라갔다.
아직은 가볍게 키스하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하는 수준이지만 언젠가 키아라와 열정적으로 섹스를 할 수 있겠지.
사테르디아에서 겪을 일들을 잘 처리하면 호감도를 4이상으로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마리가 어떤 식으로 나오느냐에 따라서 나와 키아라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박살날지도 모른다.
나는 사테르디아의 성문을 지나자마자 흉흉한 소문을 들었다.
사테르디아 기사단의 부단장인 콜린의 가족들과 그의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사용인들까지 모두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당했고, 범인은 잡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콜린이 내게 털어놓았던 정보에 따르면 의문사를 일으킨 범인은 마리가 분명하다.
마리가 대놓고 한 귀족가문을 몰살시킬 수는 없을 테니 연금술로 맹독을 만들거나 생체병기를 제작하여 사람들을 죽였을 것 같다.
“설마 저 모든 일을 마리 아가씨가 저지른 걸까요?”
키아라는 굉장히 불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마리 아가씨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를 믿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나는 무의미한 믿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키아라에게 대놓고 꿈 깨라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으니까 벌써부터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일단 모험가길드에 잠깐 들렀다가 바로 디베르 가문의 농장으로 갈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네, 레베카님. 그런데 모험가길드에는 무슨 일인가요? 의뢰를 맡으실 건가요?”
“아니. 지도를 보러가는 거야. 지도창을 갱신하려면 해당 지역의 지도가 필요하거든.”
“그렇군요.”
키아라는 아직 내 특별한 능력... 정확히는 세레나가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증강현실에 익숙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내가 각종 상태창 같은 것들을 확인하고 있으면 걱정스레 바라보곤 했다.
나는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모험가길드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B급 모험가를 상징하는 은도금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내가 내 사랑들과 키아라를 데리고 모험가길드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동으로 쏠렸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남자들은 우리의 미모와 몸매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난 이제는 그러한 시선들이 익숙하다 못해서 즐길 정도가 되었다.
라우라와 에리카는 아예 무시했지만 이리스와 키아라는 굉장히 부끄러워했다.
우리에게 치근대고 싶어서 다가오는 남자들도 있긴 했지만 라우라가 무섭게 노려보면서 칼자루를 만지작거리자 다들 멋쩍어하는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워도 라우라가 불청객들을 모조리 내쫓아줄테니 마음이 놓인다.
나는 마침 줄이 없는 창구로 가서 표범족 남자 접수원과 마주했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는 접수원은 반갑게 웃으면서 날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사테르디아 지방의 지도를 보고 싶어서요.”
“간단하게 신분만 확인하고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접수원은 내 펜던트를 직접 확인한 뒤에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금방 지도를 하나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지도 말고 다른 종이도 쥐어져있었다.
“이건 요청하셨던 사테르디아 지방의 지도입니다. 그리고... 실례지만 본부길드장님 명의로 지정의뢰가 내려왔습니다.”
“거절할 수는 없겠죠?”
“네, 지정의뢰는 1년에 2번은 꼭 수행해야하고 본부길드장님의 명의로 내려온 지정의뢰를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부디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라도 하기 싫어서 해본 말에 열심히 설명을 해준 접수원을 향해 씩 웃었다.
그러자 접수원은 순간적으로 얼굴을 붉히더니 나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질 못했다.
이거 좀 재밌는 걸? 아, 등에 엄청 따가운 시선들이 내리 꼽힌다.
진짜 추파를 던지는 것도 아닌데 이런 장난 정도는 그냥 용납해주면 좋겠단 말이지.
“어디보자... 사테르디아에서 연금술로 만들어진 인공생명체의 실태를 조사하고 배후를 처단하라고?”
의뢰서의 내용은 참 공교롭기 짝이 없었다.
마침 호문쿨루스인 키아라를 데리고 그쪽 전문가인 마리를 만나려는 와중에 이런 의뢰를 주다니 말이다.
영문도 모른 채 황제에게 감시당하고 이용당하니까 너무 불쾌하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나를 영웅처럼... 어? 설마?
나는 순간적으로 세레나가 나에게 원하던 일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황제가 나에게 했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마치 세레나에게서 의뢰를 받고 행동하는 것 같다.
그는 나를 어떻게든 유명하게 만들고 싶어서 내가 명예기사가 된 경위에 대한 소문을 쫙 퍼뜨리고 볼르디아에서는 루카스를 이용해서 내 사랑들까지 유명세를 타게 만들었다.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나에 대한 긍정적인 소문을 열심히 퍼다 날랐다.
황제의 이러한 행동들이 단순히 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레나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와 적대할 일은 없을 것이다.
세레나의 화신이라도 근처에 있다면 내 생각이 진짜인지 물어볼 수 있을 텐데 말이지.
“이 의뢰의 보상은 무엇인가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제가 답변해드리지요.”
나는 갑자기 내 귓가에 들리는 세레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세레나가 아니라 저번에 특수상점에서 만났던 화신이었다.
내가 급히 뒤를 돌아섰고, 나보다 키가 비슷한 성직자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예쁘고 귀여운 외모는 물론이고 신비로운 느낌의 은발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 눈 밑에 찍혀있는 눈물점까지.
모든 외모적 특징이 세레나와 일치했지만 내 기억에 남아있는 중학생 세레나와 달리 외모가 성숙했고, 키도 나랑 비슷했다.
“추기경님께서 이 누추한 곳에 어인 일로...”
“이 분과 긴히 나눌 말이 있어서 온 것이니 걱정 말고 맡은 일에 전념하도록 해라. 자, 귀하께선 저를 따라오시지요.”
무려 추기경이라고 불린 성직자는 당혹스러워하는 종업원을 진정시키고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 내 손목을 잡고 어느 빈 방으로 들어갔다.
내 사랑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텔레파시로 괜찮은 거냐고 물어봤고, 나는 아무 문제없으니 걱정 말라고 답해주었다.
나는 추기경이 문단속을 하는 사이에 그녀에게 분석스킬을 슬쩍 써봤지만 역시나 평범한 사람이 아닌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지? 저번에도 얼굴을 보여주지 그랬어?”
“제 이름은 새턴입니다. 귀하께서 먼저 만나셨던 어스와 다른 사람입니다.”
“그래? 화신이 여러 명 있구나?”
“아닙니다. 창조주님의 화신인 솔라는 저희 자매와는 별개인 강대한 존재입니다.”
역시 새턴도, 저번에 만났다는 어스도 진짜 화신이 아니었구나.
그래, 마리아는 화신이 웬만해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었지.
나중에 내 사랑들에게 정보를 정정해줘야겠다.
“그렇구나. 그런데 저번에 어스는 왜 날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던 거야?”
“어스는 성행위에 대해서 부끄러움이 많은 개체입니다. 따라서 귀하의 성행위에 너무 강한 자극을 받아서 그런 행동을 벌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뭐, 뭐라고?”
“저희 자매들은 의식의 일부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귀하의 성행위에 대해서는 8명의 자매들이...”
“그만! 이제 그만해! 이러다 부끄러워서 죽어버릴 거라고!”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세레나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애들이 8명이나 있고, 그 애들이 모두 내가 촉수와 섹스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거기다 새턴의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 나를 더욱 더 괴롭게 만들었다.
“귀하의 정신상태가 불안정해졌습니다. 안정을 취하시지요.”
“지금 내가 그럴 상황이 아니라고! 어떻게 이런 사태가... 그에엑.”
나는 목이 따끔거리는 감각과 함께 아무런 말도 하질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그리고 겨우 움직이는 내 눈에 주사기 같은 것이 흐릿하게 보이는 듯 했다.
“극도의 흥분상태를 감지하여 진정제를 투여했습니다. 5분 뒤에 다시 움직이고 말을 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새턴의 말대로 딱 5분 만에 신체의 자유를 되찾았다.
이제 막 진정제를 맞았을 때만 하더라도 움직이게 된다면 바로 항의를 하려고 했었는데 지금은 그럴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방금 그거 몸에 해로운 건 아니지?”
“창조주님께서 현재 귀하의 유전자를 기반으로 하여 맞춤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없습니다.”
“그렇구나.... 맙소사.”
진정제까지 날 위해서 맞춤제작을 했다는 세레나의 사랑이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진다.
내 동생이 어쩌다가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 된 걸까?
이게 다 AFN 때문이다.
그 놈들만 아니었어도 세레나는 우리 가족과 함께 평범하게 살았을 거라고.
“감정적 동요가 다시 한 번 감지됩니다. 진정제가 더 필요하십니까?”
“아, 아니야. 설마 또 그런 게 필요하겠어? 휴우, 그런데 너희들은 리디머의 복제인간 같은 거야? 완전 똑같이 생겼네.”
“외모는 창조주님과 동일한 유전자를 사용했지만 나머지 유전자 구성은 다릅니다. 따라서 저희들이 창조주님과 똑같다는 식의 불경한 발언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알았어. 아, 그렇지. 저번에 날 만나러 왔던 어스라는 애가 이걸 떨어뜨리고 갔어. 어스도 너처럼 성직자야?”
나는 치트가방에서 고위성직자의 휘장을 꺼내서 새턴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새턴은 싱긋 웃더니 휘장을 쓰다듬으면서 답변했다.
“저희 자매들은 기본적으로 저처럼 추기경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휘장을 사용합니다. 그나저나 어스가 휘장을 떨어뜨릴 정도라니 그 당시에 굉장히 당황스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너희들은 다들 이름이 특이하네.”
“저희 자매의 이름은 모두 태양계 행성을 영어식으로 부른 것이며 이름에 따라서 신장과 외견상의 성숙도가 다릅니다.
“그럼 주피터가 제일 크고 성숙한 사람이고 머큐리가 제일 작고 어려 보이겠구나.”
“네, 그렇습니다.”
“나중에 너희 자매들을 한 번에 다 만나보고 싶은데 가능할까?”
“창조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가능합니다. 하지만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고 사료됩니다.”
“어째서?”
“저희들은 창조주님의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가 귀하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어디까지나 창조주님의 명령이라서 가능한 것입니다.”
새턴은 자신들이 처한 어두운 현실을 말하면서도 전혀 슬프거나 불쾌해보이지 않았다.
그러한 현실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넘어서서 겸허히 받아들이는 모양새였다.
뭔가 내 마음 어딘가에서 불편함이 느껴졌다.
“리디머가 그걸 원한다니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날 여기로 데려온 이유가 뭐야?”
내 질문에 새턴은 싱긋 웃더니 내 바로 곁에 앉아서 화려한 인장이 찍힌 서류를 몇 장 꺼내들었다.
최첨단 기술로 태어난 일명 행성자매의 일원이 이 세상의 수준에 맞춰서 살아가는 건 좀 웃긴 것 같다.
“일반인들이 알아서는 안 될 보상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황제는 귀하께 이번 일의 보상으로 영지개척권을 하사할 예정입니다.”
“나보고 알아서 영주가 되라는 거야? 영지제도를 없앴다는 사람이 나한테 그런 권한을 주겠다니 좀 이상하네.”
“영지제도가 폐지되면 정착지개척권 혹은 식민지개척권으로 바뀔 것입니다.”
“겨우 조사 한 번에 이런 권한을 주는 이유는?”
“창조주님께서 귀하께 마음 놓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그 공간에서 군대를 양성하거나 세력을 키우셔서 영웅 혹은 마왕이 될 수 있는 기초를 확실하게 다지는 것을 원하십니다.”
“새턴, 세레나를 만날 일이 있으면 내 말을 똑바로 전하도록 해. 오빠는 세레나, 네 장난감이 아니니까 멋대로 내 앞길을 정하지 말라고 말이야.”
나는 저번에 어스가 세레나의 이름을 대놓고 부르는 것은 불경하다고 정색을 하기에 이번에도 처음엔 꼬박꼬박 리디머라고 불렀었다.
하지만 세레나의 일방적인 태도에 화가 나서는 그냥 대놓고 세레나라고 부르기로 했다.
내가 내 동생을 뭐라고 부르든 남들이 무슨 상관이람.
“앞으로 너희 자매들 중에서 누가 날 찾아오든 간에 너희들이 소위 불경하다고 말하는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그리고 세레나가 어떤 사람이 되었든 간에 결국은 내 동생이고 나는 오빠로서 할 말과 해야 할 행동을 모두 할 거야. 알아들었어?”
“네, 귀하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새턴은 내게 고개를 숙여서 사과를 했는데, 그녀의 목소리와 몸이 모두 떨리는 것을 봐서는 내가 기분 나빠하면 세레나에게 벌이라도 받는 모양이다.
세레나, 이럴 거면 네가 직접 와서 이야기를 하면 되잖아.
“너한테 화가 난 것은 아니니까 안심해. 그리고 내가 배째라면서 이 의뢰를 거부하면 네 처지가 난감해지니까 일단은 받아들일게.”
“감사합니다. 귀하는 정말 좋은 분이시군요.”
“내가? 글쎄... 촉수랑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좋아 보여?”
“성적취향에 대해서는 웬만해선 존중하는 편이라서...”
새턴이 말꼬리를 흐리는 것을 봐서는 그렇게 폭넓게 존중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하긴 상상도 아니고 현실에서 그러는 사람을 마냥 존중해주기는 좀 힘들겠지.
“의뢰를 완수하면 어디다 보고하면 돼?”
“사테르디아 대신전으로 오셔서 저를 찾으시면 바로 응대해드리겠습니다.”
“그래. 최대한 빨리 끝내줄게. 그리고 이미 늦어버리긴 했지만 귀하라고 하지 말고 그냥 레베카라고 불러.”
내가 가볍게 하는 제안에 새턴은 엄청 감동을 받은 표정을 짓더니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는 도망치듯 방에서 나가버렸다.
고작 이름을 부르라고 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기쁜 건가?
나는 사소한 의문은 뒤로 하고 일행에게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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