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 19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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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 마리아에게는 마을에서 일주일 정도 머무른다고 말했었지만 딱 사흘만 마을에서 신세를 졌다.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건 좋지만 할 일이 있어서 마냥 내 사랑들과 놀면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우리는 도로테아와 마르코를 비롯한 마을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정든 마을을 떠났고, 그들이 쓴 편지를 부쳐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나흘이 지나서 도착한 볼르디아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양의 편지를 부치고 점심을 먹은 뒤에 바로 프랑카로 워프했다.
내가 갑자기 프랑카로 간 이유 중 하나는 노화방지스킬이 있다는 던전이 프랑카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저번처럼 괜한 고생을 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경험상 세상 일이 참 호락호락하지 않더란 말이지.
게다가 기계여신이 되어버린 세레나가 나에게 시련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영웅을 만들고 싶어 한다니 분명 이번에도 쉽게 스킬을 손에 넣지 못할 것이다.
내 동생 세레나는 분명 어린 나이에도 나에 대한 배려와 애정이 넘치는 아이였었는데, 지금의 세레나는 어떻게든 날 힘들게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다.
그 모든 게 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니, 뒤틀린 애정이라는 게 참 무섭다.
재회할 일이 생기면 잘 타일러서 무자비한 기계여신이 아니라 자비로운 기계여신이 될 수 있게 도와주어야겠다.
내가 프랑카에 온 또 다른 이유는 아쿨타리 부족 사람들을 위한 의족과 의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다른 도시들은 생산량이 터무니없이 적거나 아예 그런 것들을 만드는 공방이 없었다.
거기다 엘리자베스는 멀리 떨어진 도시로 가버렸으니, 당장 떠오르는 지인인 칼스란과 미나테린 부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었다.
도로테아가 썼던 편지와 함께 속달로 보냈으니 지금쯤이면 이미 다 읽어보고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놓았을 거라고 믿는다.
만약 두 사람도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면 아쿨타리 부족 사람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는 일은 좀 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우리는 익숙한 길을 걸어서 칼스란 부부의 마법무기점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팻말과 함께 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2층의 집에도 아무도 없었다.
설마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걸까? 괜히 걱정된다.
나는 지도창을 열어서 칼스란 부부를 찾아보았다.
두 사람은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기사단 본부에서 베로니카 언니와 함께 있었다.
칼스란 부부는 기사단을 위해서도 일을 하니까 기사단 본부에 있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레베카님, 이제 어떻게 하시겠어요? 바로 기사단 본부로 가실 건가요?”
“그래야겠지. 나도 나름 급한 일이니까. 그리고 마침 베로니카 언니도 같이 있잖아.”
“레베카님은 정말 베로니카님을 좋아하신다니까요. 질투가 날 정도에요.”
라우라는 내가 베로니카 언니의 이름을 입에 담자마자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질투라는 말을 할 때는 단순히 장난이 아니라는 듯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야 베로니카 언니는 정말 멋진 사람인 걸. 나한테 엄청 잘해주기도 하고.”
“저희들도 충분히 멋지고 레베카님에게 엄청나게 잘해드리고 있잖아요.”
“라우라, 너 오늘따라 질투가 심하구나? 귀엽기도 하지.”
나는 라우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라우라는 아예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서 얼굴을 비벼댔다.
그녀의 귀와 꼬리가 처진 것을 보면 오늘 뭔가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니?”
“저 요즘 애정결핍이에요.”
“뭐라고?”
“애정결핍이라고요. 레베카님은 세레나님이 살아있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저희들에게 애정표현을 더 적게 하세요.”
“정말? 내가 정말 너희들을 소홀히 대하고 있는 거야?”
“그건... 소홀하신 것은 아니지만 전에는 사랑한다는 말을 수시로 했었는데 그 뒤로는 하루에 몇 번 해주질 않으세요. 키스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랑 밤에 자기 전에 할 때를 제외하면 거의 하질 않고요.”
라우라는 내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던 변화를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라우라의 말처럼 애정표현이 좀 적어진 것 같기는 하다.
최근에는 세레나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해서 내 사랑들이 나서지 않으면 내 쪽에서 먼저 애정표현을 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이리스와 야외섹스를 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될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애정이 부족하다는 말을 직접 듣고 나니 영 마음이 편치가 않다.
“미안. 가족과 엮인 일이라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자꾸 세레나 걱정만 하게 돼.”
“저희도 가족이잖아요.”
라우라는 내 팔을 꼭 잡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분명 내가 말실수를 한 것이다.
항상 세 사람에게 우린 가족이라고 말하고 다녔던 주제에 급을 나누는 듯한 말을 하다니 말이다.
“방금은 정말 최악의 발언이었지? 진심으로 사과할게. 나는 세레나와 너희들을 별개로 취급하지 않아. 모두 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오해하지는 말아줘.”
“레베카님...”
라우라는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며 다시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부디 그녀가 내가 급조한 변명에 가까운 해명을 받아주면 좋겠다.
다행히 라우라는 화를 내거나 실망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내가 사과를 하고 나섰다.
“레베카님,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세레나님을 상대로 추하게 질투해서 죄송해요.”
“네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세레나는 착한 애니까 신전에 가서 참회하면 용서해줄 거야.”
“평소에 신전 욕을 많이 하고 창조신님을 업신여겨서 천벌 받을 지도 몰라요.”
“천벌이라... 간지럽히기 아니면 꼬집기 정도라서 괜찮을 거야.”
나는 이제 와서 걱정하는 라우라의 머리를 볼을 쓰다듬으며 안심시켰다.
세레나는 달에서 사는 기계여신으로 변하기는 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상대로 무지비한 벌을 내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함께 했을 때처럼 웬만하면 장난스럽게 웃고 넘길 것이라 믿는다.
“세레나님은 레베카님과 피가 안 이어진 자매분이시잖아요. 그럼 혹시 우애를 뛰어넘는 사랑 때문에 지금까지 그런 일을...”
“맙소사. 이리스, 세레나는 어디까지나 내 동생이야. 그 애도 나를 오빠 아니, 언니라고만 생각하지 다른 감정을 품을 이유가 없어.”
“그렇겠죠? 죄송해요, 제가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버렸네요.”
“괜찮아. 상상은 자유라고 하잖니. 그리고 만에 하나 세레나가 네 말대로 그런 감정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난 그걸 받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돌아가신 부모님이 날 가만두질 않을 거야.”
“그럼 부모님께서 용인해주시면 받아주실 건가요?”
“뭐? 아, 아니야!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어떻게 동생에게 그럴 수가 있겠어? 어쩜 그런 파렴치한 생각을...”
“상상은 자유라고 하셨잖아요. 히힛! 아, 얼굴 빨개지신 것 좀 봐.”
“이리스!”
나는 날 놀려대는 이리스의 볼을 양손으로 살짝 꼬집고서 이리저리 늘려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귀엽게 웃고 있는 이리스의 얼굴 때문에 금방 손을 놓아주고 말았다.
세레나는 정말 예쁘고, 자상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깜찍한 사람이지만 난 오빠로서 단 한 번도 세레나에게 불순한 감정을 품어본 적이 없다.
피가 통하든 말든,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세레나는 그저 내 소중한 동생일 뿐이다.
“세레나님께서는 항상 레베카님을 보고 계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저희들이랑 섹스를 하는 것도 다 보셨을까요?”
“에리카, 너도 참 곤란한 의문을 가지는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런 것까지 다 지켜보지는 않을 거야. 부모님은 항상 가족끼리도 사생활을 제대로 지켜줘야 한다고 가르쳐주셨거든.”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지금까지 했던 걸 다른 사람이 다 봤다고 생각하면 무서울 정도에요.”
“걱정 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자, 그럼 얼른 기사단 본부로 가보자.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 지도 모르니까.”
나는 내 사랑들과 함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기사단 본부로 향했다.
라우라와 이리스, 에리카는 번갈아가면서 내 곁을 독차지했고, 나는 그녀들에게 애정결핍이라는 말이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심을 쏟아 부었다.
기사단 본부는 오늘따라 입구 쪽이 이상하리만치 한산했다.
민원을 제기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로 항상 붐볐던 곳인데 말이다.
나는 안면이 있는 기사단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베로니카 언니와 칼스란 부부가 있는 창고 앞으로 향했다.
세 사람은 창고 앞에서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그들의 주변에는 기사단원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뭔가를 하고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은 것이 무슨 사건이라도 터진 것 같다.
일단 나는 손을 열심히 흔들면서 베로니카 언니를 반갑게 불러보았다.
“베로니카 언니!”
“레베카! 정말 보고 싶었어.”
세상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베로니카 언니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내게 달려와서 날 안아주었다.
마침 언니가 마법갑옷을 입고 있지 않아서 언니의 따뜻한 체온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서 기분 좋았다.
언니는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내 볼에 뽀뽀까지 해주며 날 반겨주었다.
“그동안 잘 지냈니? 무슨 사건에 휘말리지는 않았고?”
“볼르디아에서는 별 탈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 거기서 열리는 이벤트경기에 내 애인들이 참가했는데 다들 맡은 종목마다 1위를 차지했지.”
“정말? 대단하네. 나도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녹화한 게 있으니까 나중에 보여줄게.”
“응! 정말 기대된다. 라우라, 이리스, 에리카. 늦었지만 우승 축하한다.”
베로니카 언니는 내 사랑들을 한 명씩 안아주며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었다.
그러자 내 사랑들도 다들 언니의 축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레베카, 소문에는 그 경기는 노예가 참가하고 우승을 하면 신분이 해방된다고 들었는데 사실이니?”
“정확히는 꾸준히 명성을 쌓고 은퇴하면 해방된다고 들었어. 얘들은 내가 평민으로 만들어줬고.”
“드디어 노예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구나. 다들 또 한 번 축하해.”
베로니카 언니는 내 사랑들을 또 한 명씩 안아주며 두 번째 축하를 해주었다.
원래부터 노예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내 사랑들에겐 친절한 사람인지라 예전과 크게 달라질 건 없었지만 말투가 더 부드럽게 바뀐 것 같다.
나는 베로니카 언니가 내 사랑들을 귀여워해주는 동안 칼스란과 미나테린에게 악수를 청했다.
칼스란은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언제나 무뚝뚝한 미나테린도 씩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두 분 다 오랜만이에요.”
“네, 이렇게 다시 만나서 참으로 반갑습니다. 덕분에 편지도 잘 받았습니다.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군요.”
“맞아요. 정말 좋은 마을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편지에 써서 보낸 의뢰는 어떻게 하시기로 했나요?”
“아, 그게... 일단 필요한 수량의 절반을 확보해서 이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다른 물건들과 함께 통째로 사라졌지 뭡니까.”
“뭐라고요? 기사단 본부를 털어가는 간 큰 도둑이 다 있단 말이에요?”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기사단 본부에 위치한 창고를 싹 털어가는 작자가 있을 줄이야.
과장 좀 보태서 저택만큼 큰 창고에 있는 물건을 모조리 훔쳐간 것을 보면 아마도 나처럼 치트가방을 소유한 사람이 아닐까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허무하게 다 털려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서 부단장님께서 이번 사건을 직접 해결해주시겠다고 말씀해주시던 참이었습니다.”
“그렇군요. 걱정 마세요. 제가 베로니카 언니를 도와서 반드시 범인을 잡을게요.”
나는 이번 기회에 흔적감지스킬을 실전에 사용하기로 했다.
이 스킬이라면 분명 도둑을 잡아서 심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일단 담당자에게 허락을 받고 움직여야겠지.
“베로니카 언니, 수사에 진전은 있어?”
“수사? 아, 도둑 말이구나. 일단은 증거를 확보하고 목격자를 찾는 일에 집중하고 있어.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고 목격자는 한 명도 확보하지 못했어.”
“대체 언제 사건이 일어난 거야?”
“오늘 오전에. 내가 분명히 어제 창고의 현황에 대해서 보고를 받고 아침에 출근해서 직접 창고를 확인했을 때만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 그런데 집무실에 앉아서 서류를 펼쳐보려는 와중에 사건이 발생한 거야. 고작 30분 만에 내 기사인생 최대의 위기가 발생한 거란다.”
베로니카 언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결국 이번 사건의 총책임자는 베로니카 언니이니 자칫하면 언니가 부단장 자리에서 내려오거나 아예 기사자격을 박탈당할지도 모른다.
문득 평민으로 강등되어 평생을 기사단을 위해 허드렛일을 하게 된 노먼이 떠오른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언니가 그런 취급을 당하는 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30분 만에 창고를 지키는 단원들의 눈을 모조리 속이고 물건들을 싹 털어갔다니 대단하네. 그런데 창고에 뭐가 있었기에 언니가 그렇게 신경을 썼던 거야?”
“기밀이야.”
“기밀? 제국과 관련된 그런 거야?”
“말 못해줘.”
“언니, 난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인데 그렇게 나오기야?”
“널 보호하려면 어쩔 수 없어. 그런데 이제 막 도착한 네가 희망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니? 잠깐, 너 혹시 뭐라도 알고 있는 거니?”
베로니카 언니는 양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 흔들면서 말했다.
언니가 이렇게 침착하지 못하고 다급해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나한테 특정한 사람의 흔적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어. 그 능력을 활용하면 병력을 대규모로 동원할 필요 없이 간단하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정말?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지? 그렇지?”
“당연하지! 내가 언니를 그런 식으로 골탕 먹일 사람으로 보여?”
“미안. 내가 너무 흥분해버렸네. 일단 남들이 없는 곳으로 가서 대화하자.”
베로니카 언니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내 손을 잡고서 어디론가 급하게 향했다.
나는 얌전히 언니의 뒤를 따라서 어느 비어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고, 언니는 바깥을 열심히 두리번거리다가 문을 굳게 닫았다.
“자, 언니. 얼른 나한테 진실을 말해주라.”
“절대로 다른 곳에 이야기를 하면 안 돼. 나랑 약속해.”
“맹세컨대 언니를 실망시키거나 위험하게 만드는 일은 없을 거야.”
나는 언니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고, 언니는 그제야 안심을 하고 내게 비밀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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