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 192화
* * *
우리는 볼르디아를 떠나고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숨겨진 마을로 돌아왔다.
정확히는 마을까지 이어지는 동굴을 막고 있는 바위 앞에 도착했다.
주변에 있는 돌탑을 움직이면 열린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정확한 방법을 몰라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입구 근처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 마을로 돌아온 주민에게 도움을 받아서 겨우 마을로 들어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마을은 여전히 정이 넘치는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었다.
바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릴 죽이거나 잡아먹고 싶어서 안달이었던 다른 마수족들을 생각해보면 이 마을에서 사는 마수족들은 문명인이라고 할 수 있다.
식인과 살인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과 동등한 수준의 감정을 느끼며 혼종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행복을 추구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 마수족들을 감히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다.
우리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금세 마을 전체로 퍼졌다.
논밭에서 일하고 있던 주민들은 손을 흔들어주었고, 어디서 놀다가 몰려왔는지 모를 아이들은 우릴 격하게 반겨주었다.
그래서 나는 과자를 꺼내서 아이들에게 나눠주었고,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행복감을 느꼈다.
저 순수한 아이들이 자신의 태생 때문에 상처를 받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
우리는 계속 길을 따라가서 도로테아와 마르코의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정작 두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나는 지도창을 열어서 부부의 행방을 찾아보았다.
적대생물추적스킬을 얻은 이후로 지도창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이제 지도창에는 스킬과 관계없이 무해하거나 우호적인 사람이나 지적생명체 혹은 제하트처럼 나와 관계가 있는 가축들이 항상 이름과 함께 표기된다.
그리고 적대생물추적스킬을 활성화하면 위험한 생명체들이 추가적으로 지도창에 뜬다.
여기서 지도창에 있는 이름을 터치하면 종족, 신분, 직업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필터링 기능은 더 세세하게 바뀌어서 특정한 종족이나 생물체만 골라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엘프족 여성만 나타나게 한다든가 오크만 나타나게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맹금족과 맹금족 혼종만 지도창에 나타나게 만들었고, 금방 도로테아 부부를 찾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축사에 있었는데, 맡은 일이 가축을 돌보는 일이니 당연한 일이겠지.
나는 도로테아와 마르코의 위치를 확인하자마자 내 사랑들을 데리고 축사로 향했다.
축사로 이어지는 방목장에는 많은 수의 가축들이 풀을 뜯고 있었고, 새끼동물들이 어미의 주변에서 뛰놀았다.
문득 여기서 테리제나를 처음 발견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땐 가축들이 다들 테리제나가 있는 울타리에서 멀찍이 떨어져있었지만 지금은 천적이 없으니 마음껏 돌아다녔다.
우리는 축사에 도착하자마자 말을 메어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로테아와 마르코는 방목장으로 나가지 않은 가축들에게 여물을 주느라 바빠서 우리가 접근하는 것도 몰랐다.
나는 두 사람이 너무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도로테아, 마르코. 오랜만이야.”
“어라? 레베카 씨? 죄송해요, 오신 줄도 모르고...”
도로테아는 당황스러워하면서 말끝을 흐렸지만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남편인 마르코 역시도 조금 놀랐는지 특유의 새소리를 냈다가도 도로테아처럼 우리에게 반가움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일이 집중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둘 다 잘 지냈어?”
“네, 덕분에 잘 지냈어요. 다들 건강해보이셔서 다행이네요.”
“너희들도 잘 지내서 기뻐. 아까 너희 집에 갔다가 없어서 여기까지 찾아왔어.”
“이 시간은 다함께 일을 하는 시간이라서 어느 집을 가든 비어있을 거예요. 이제 슬슬 점심시간이니 돌아가서 식사를 하면 되겠네요. 여물만 마저 주면 일이 끝나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도와줄까?”
“아, 아니에요. 귀한 손님에게 이런 힘든 일을 시킬 수는 없잖아요.”
도로테아는 내 제안을 마다하고 마르코와 함께 여물을 주는 일에 집중했다.
나는 굳이 고집을 피우지 않고 밖에서 두 사람이 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10~20분 정도가 지나자 두 사람이 축사 밖으로 나왔다.
“다들 배고프시죠? 집에 돌아가면 최대한 빨리 밥을 차려드릴게요.”
“고마워. 아참, 가기 전에 부탁하나해도 될까?”
“네, 뭐든 말씀해보세요.”
“내가 타는 말이 임신을 했는데 혹시 여기서 돌봐줄 수 있을까 싶어서.”
“물론이죠. 얼마든지 맡겨주세요.”
“부탁할게. 이름은 제하트라고 해.”
나는 제하트의 고삐를 도로테아에게 쥐어주면서 말했다.
제하트는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감을 잡고는 가기 싫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는 녀석의 목을 안고서 정성껏 쓰다듬어주었다.
“제하트, 이건 너와 네 새끼를 위해서야. 네가 새끼를 낳을 때까지만 헤어지는 거니까 안심해. 도로테아는 좋은 사람이니까 너에게 정말 잘해줄 거야. 그동안 날 태워줘서 고마워.”
나는 부드러운 말투로 제하트를 달래주었고, 그제야 녀석은 도로테아를 따라서 비어있는 축사로 들어갔다.
고삐를 푼 제하트는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뭔가 아쉬워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제하트가 자꾸 내게 미련을 보이자 나도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하지만 임신한 녀석을 계속 타고 다닐 수도 없으니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녀석과 헤어져야 한다.
내 사랑들은 말들의 고삐를 풀어서 방목장에 자유롭게 놓아주었는데 드라쿠스는 방목장이 아니라 축사 안으로 들어가 제하트에게로 향했다.
그러고는 제하트와 함께 여물을 먹거나 서로 교감을 나누면서 잠시도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도로테아, 혹시 황금가면을 쓴 사람은 돌아왔어?”
“네, 지금은 잠시 외출하셨어요.”
“언제쯤 돌아올까?”
“음... 마을 주변을 순찰하러 가셨으니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 일도 해주는구나.”
“네, 저희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건 그 분이 주기적으로 마을 주변을 정리해주시신 덕분이에요.”
“책임은 확실히 지는 사람이네.”
나는 오늘 안에 황금가면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들었다.
만약 그 여자가 나를 적대한다면 아마도 이 마을에 다시는 발을 들일 수 없겠지.
우릴 데리고 들어온 도로테아와 마르코의 입장도 굉장히 곤란해질 테고 말이다.
웬만하면 내 쪽에서 먼저 일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하자.
“도로테아, 네가 맡겼던 편지는 볼르디아에서 우편으로 보냈어. 겸사겸사 내 편지도 동봉했지. 속달로 보냈으니까 네 부모님이 벌써 다 읽어보셨을 거야.”
“감사합니다. 속달은 요금이 너무 비싸서 엄두도 낼 수 없었어요.”
도로테아는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 세상의 속달은 가축으로 길들일 수 있는 초식성 와이번으로 배송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아주 빨리 도착한다.
대신에 그만큼 가격이 비싸서 일반적인 평민들은 이용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나에겐 푼돈에 불과하니 부담될 게 전혀 없었다.
나는 편지를 보내는 김에 칼스란 부부 뿐만 아니라 베로니카 언니와 엘레나, 아이리스, 가르탱, 엘리자베스에게도 편지를 썼다.
편지는 초등학교를 다닐 때 몇 번 쓴 게 전부라서 조금 부끄럽지만 내 사랑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나는 세상을 떠난 가족들에게도 편지를 썼었는데, 결국엔 그냥 불태우고 말았다.
어차피 보낼 수도 없고, 보내지도 못할 걸 보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내 사랑들은 그걸 몹시 아까워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보내고 싶은 편지가 있으면 또 나한테 맡겨줘.”
“그럼 떠나시기 전에 한 통 부탁드릴게요.”
“알았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해봐.”
“네, 대부분 가족을 그리워하니까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나는 도로테아가 하는 말을 듣고 나니 길을 가다 지나치는 마을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지금은 다들 밝은 표정으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다들 끔찍한 경험을 하고 가족과 생이별을 한 사람들이니 말이다.
하다못해 편지를 써서 살아있다는 것만 알려주더라도 다들 마음이 편해질 것이라 믿는다.
물론 가족의 손에 팔려버리는 바람에 몹쓸 짓을 당한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편지를 쓰라는 말 자체가 고통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역시 섣불리 내가 물어보고 다니느니 마을의 사정을 잘 아는 도로테아에게 여론수렴을 맡기를 잘한 것 같다.
내가 잠시 편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동안 우리는 도로테아 부부의 집에 도착했다.
전형적인 한적한 시골집 그 자체인 두 사람의 집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졌다.
“여러분, 최대한 빨리 식사를 준비해드릴게요.”
“도로테아 씨, 저도 도와드릴게요. 둘이서만 준비하시는 것보다 훨씬 빨리 끝날 거예요.”
“고마워요, 이리스 씨.”
도로테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이리스는 도로테아와 마르코를 돕기 위해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내 도움은 완곡히 거절해도 이리스의 도움은 흔쾌히 받아들이는구나.
혹시 내가 좀 부담스러운가?
뭐, 덕분에 난 몸이 편하니 나쁠 건 없겠지.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나는 시원한 나무그늘이 드리워진 평상 위에 드러누워서 여유를 즐겼다.
정신사납기 짝이 없는 볼르디아에 있다가 한적한 시골에서 누워있으니 마음이 절로 평온해졌다.
나중에 여행을 마무리 짓고 나면 으리으리한 별장을 짓고 사는 것보다 이렇게 소박한 생활을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 손으로 농사를 짓고 집안일을 하다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다보니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했고, 배에서는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려는 찰나에, 밥상이 차려졌다.
우리는 다함께 둘러앉아서 정성이 들어간 점심식사를 한껏 즐겼다.
나는 구조상 씹을 수 없어서 항상 삼키기만 하는 마르코가 음식의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지가 궁금했지만 왠지 실례되는 질문일 것 같아서 속으로만 생각하고 말았다.
“덕분에 잘 먹었어. 볼르디아로 간 뒤로 종종 이 맛이 그립더라.”
“정말요? 뭔가 보람차네요.”
“아, 그렇지. 내가 오면서 농기구랑 연장 같은 것들을 좀 챙겨왔어. 지금부터 마을사람들에게 나눠줄 생각인데 안내를 해줄래?”
“기꺼이 그렇게 해드려야지요. 안 그래도 낡은 것들이 대부분이라서 곤란하던 참이었거든요. 언제나 감사합니다, 레베카 씨.”
“이 정도 가지고 뭘. 다들 우리에게 친절해서 뭐라도 선물을 주고 싶었어. 사람들이 다시 일을 하러가기 전에 얼른 나눠주자.”
나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고, 도로테아가 따라서 일어났다.
마르코는 도로테아를 따라오지 않고 뒷정리를 했고, 에리카가 그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라우라와 이리스는 나를 따라오는 대신에 우리가 쓰는 총기를 정비하기로 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우리가 쓰는 마력총을 모두 넘겨준 뒤에 도로테아를 따라서 마을을 돌기 시작했다.
들르는 집마다 내가 주는 선물에 몹시 기뻐하면서 내가 사양하는데도 반강제로 신선한 식재료나 맛있는 음식으로 보답했다.
그래서 마을을 절반 정도 돌았을 때는 시장에 내다 팔아도 될 정도로 많은 식재료와 음식이 쌓였고, 난 선물을 나눠주는 것보다 그것들을 적절한 방법으로 보관하느라 더 바빴다.
사람들이 정이 너무 넘쳐서 곤란한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인사, 선물주기, 보답받기, 짧은 대화의 패턴이 계속해서 이어지다보니 마을을 한 바퀴 다 도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금 지치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많이 보고나니 기분이 너무 좋다.
“수고하셨어요, 레베카 씨. 마을사람들 모두가 오늘 일은 잊지 못할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 마법가방이 없었더라면 절대로 감당하지 못했을 거야.”
“저도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는 워낙에 사람들이 정이 많아서 당황스러울 정도였어요. 초면인데도 원래 알고 지냈던 것처럼 친절하고 없는 살림에도 뭐든지 베풀어줬거든요. 모두들 고마운 사람들이에요.”
“이 마을이 계속 이렇게 평화롭고 정이 넘치면 좋겠어.”
“그러게요.”
도로테아는 약간의 불안감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이 평화가 오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외부인은 절대로 쉽게 들어올 수 없는 마을이지만 가면쟁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어려울 것도 없으니 말이다.
흠... 기회가 되면 악마촉수를 이 근처에 남들 몰래 주둔시키는 게 좋겠다.
“이제 그 분이 돌아오실 시간이 되었네요. 서로 대화가 잘 통하기를 바랄게요.”
“나도 그러면 좋겠어. 그 사람 집은 따로 없지?”
“네, 마을에 들르면 항상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하세요.”
“얼굴이나 맨살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그런가보네.”
“그래서 저희들도 그 분의 사생활을 존중하기 위해서 개인공간에는 절대로 접근하지 않고, 아이들에게도 그것만큼은 아주 엄격하게 가르쳐요. 덕분에 아직 불상사가 일어난 적은 없어요.”
보아하니 황금가면과 마을사람들은 각자의 사정을 충분히 존중해주는 것 같다.
하긴, 그렇지 않으면 이런 강제적으로 고립된 사회가 무탈하게 돌아가기는 어렵겠지.
“우리도 그건 조심해야겠네.”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죠. 아, 저기 오시네요.”
도로테아는 하늘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커다란 와이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는데 마을을 향해서 빠른 속도로 하강했다.
난 경계심을 품었지만 도로테아는 열심히 손을 흔들면서 존재감을 어필했다.
그러자 와이번은 우리 바로 위를 선회하다가 근처의 공터에 착지했다.
와이번 위에는 황금가면이 타고 있었는데 그녀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와이번에서 내려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나와 키가 거의 똑같고 체형도 비슷한 그녀는 새카만 바디슈트를 입고 있었고, 그 위에 마찬가지로 까만 로브를 둘렀다.
전신을 온통 검은색으로 가린 와중에 황금색 가면만 둥둥 떠 있으니 뭔가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다.
“왠지 날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은데...”
“낯을 가리시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초면에는 그런 식으로 오해를 사기도 하세요.”
도로테아는 그녀가 낯을 가린다고 표현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낯을 가리는 게 아니라 일단 남을 의심하고 보는 사람인 것 같다.
남의 의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일단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제 이름은 레베카 카론이에요. 이미 알고 있겠지만요.”
나는 황금가면에게 악수를 청했고, 의외로 그녀는 내 악수를 기꺼이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변조된 목소리로 하는 말에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원본을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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