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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187화 (187/271)

〈 187화 〉 186화

* * *

나는 분명 대장 오거의 손에 붙들려있던 젊은 엘프족 여자와 눈을 마주쳤었다.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녀의 간절한 눈빛에 나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오직 나만이 그녀가 살릴 수 있다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품고 무작정 앞으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내가 그녀가 뻗는 손을 잡아주기도 전에 대장 오거는 그녀의 발목을 놓아버렸다.

“안 돼!”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며 나를 공격하려는 오거를 강하게 밀쳐내고 곧장 구멍으로 뛰어내렸다.

대체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난 어떻게든 저 불쌍한 사람을 구해주고 싶었다.

나는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마법추진기까지 작동시키며 빠른 속도로 낙하했고 너무 두려운 나머지 기절해버린 여자를 가까스로 붙잡는데 성공했다.

난 바로 몸을 돌려서 마법추진기의 힘으로 다시 위로 날아갔지만 금방 한계시간에 다다르는 바람에 다시 떨어지고 말았다.

“씨발! 미치겠네!”

나는 욕을 내뱉기는 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오른팔의 마법추진기를 작동시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절벽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이걸로 속도가 충분히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마법갑옷이 워낙 무거운 탓인지 크게 달라질 게 없었다.

결국 마법갑옷의 무게와 떨어지는 속도를 버텨내지 못한 절벽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난 다시 허공으로 날려갔다.

이대로라면 결국 나와 이 사람 모두 슬라임의 먹이가 되거나 그 안에서 질식해서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 그걸 써보자!”

나는 치트가방을 아래쪽으로 열어서 이동식 본부를 꺼냈고, 나는 함께 떨어지기 시작하는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위로 점프하여 다시 벽에 주먹을 꽂아 넣어서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보려고 했다.

그 사이에 이동식 본부는 우리보다 더 빨리 밑으로 낙하했고, 곧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구멍에 꽉 끼어버렸다.

“좋았어!”

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일단 한쪽 팔에 끼고 있던 여자를 위로 던진 뒤에 마법갑옷에서 튀어나와 그녀에게로 점프해 다시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 내 등을 뒤로 한 채로 꼭 끌어안았다.

바디슈트의 마법방어막이라면 사람 두 명이 떨어지는 충격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나는 이동식 본부에 충돌했고, 그대로 외벽을 뚫고 들어가 내벽을 몇 개나 부순 뒤에 겨우 멈춰 섰다.

반면에 마법갑옷은 그대로 이동식 본부를 관통하여 슬라임에게 격돌하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내가 마법갑옷을 벗지 않았더라면 우리 둘 다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씨발, 죽는 줄 알았네. 내가 미쳤지, 진짜. 아하하...”

난 지금 상황 자체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왜 괜히 영웅놀이를 해서 이렇게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 걸까?

엘리자베스가 선물해준 귀중한 마법갑옷이 곧 태워버릴 슬라임의 뱃속으로 들어가 버리다니 말이다.

물론 이 사람을 구한 것 자체는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하지 못했더라면 지금보다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부정적인 감정에 지배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과장을 살짝 보태면 아예 평생을 후회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아까부터 계속해서 내게 쏟아지는 텔레파시 속 내 사랑들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레베카님! 레베카님! 제발 대답 좀 해주세요!’

‘미안, 얘들아. 너희들의 텔레파시를 들어도 대답할 틈이 없었어. 정말 미안해.’

나는 거의 울부짖으며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내 사랑들에게 너무 늦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사정이고, 내 사랑들에겐 너무 심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하신 거예요? 왜!’

‘나도 잘 모르겠어. 이런 정신 나간 일로 너희들을 울려서 면목이 없어.’

‘레베카님은 정말 바보에요! 이번엔 정말 나빴어요!’

‘미안, 라우라. 내가 다 잘못했어.’

‘레베카님, 진짜 미워요!’

나는 라우라에게 거듭 사과를 했지만 결국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지르고는 텔레파시를 끊어버렸다.

마지막에 소리를 지를 때는 우는 목소리가 섞여있어서 내 마음이 더욱 아팠다.

난 라우라를 몇 번 더 불러봤지만 그녀는 대답을 하질 않았고 대신 이리스가 상냥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주었다.

‘레베카님, 다친 곳은 없으세요?’

‘난 무사해, 이리스. 떨어졌던 사람도 구해냈고.’

‘정말 다행이에요. 방금 전에 라우라가 소리를 지른 건 그만큼 심하게 놀라서 그런 거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는 마세요.’

‘라우라 탓을 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마. 그리고 너한테도 정말 미안해.’

‘전 괜찮아요. 전혀 화가 나지 않았거든요. 왜냐면 전 언제나 레베카님께서는 어떤 사태에 휘말려도 반드시 무사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으니까요.’

‘고마워, 이리스. 너라도 침착해서 다행이다. 미안하지만 라우라를 달래줄 수 있겠니?’

‘맡겨만 주세요.’

난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이리스 덕분에 그나마 마음이 진정되었다.

만약 이리스까지 라우라처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정말 곤란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리카는 이리스처럼 의연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고 아이처럼 훌쩍이는 목소리를 냈다.

‘레베카님, 저도 엄청 걱정했어요.’

‘너한테도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어. 많이 놀랐지?’

‘네... 이대로 돌아가시면 어쩌나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요. 그리고 라우라가 방금 그 오거를 난도질할 때도 정말 무서웠고요.’

나는 에리카가 힘겹게 하는 말에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라우라가 저번에 내가 다리우스 용병단에게 습격당했을 때처럼 광기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며 날뛰었다는 말에는 죄책감마저 들었다.

내 영웅놀이 때문에 내 사랑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레베카님, 그래도 전 레베카님이 그 사람을 구한 것 자체는 정말 잘하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이번 일을 후회하지는 말아주셨으면 해요.’

‘에리카, 너 방금 나 때문에 울었으면서도 그렇게 말해주는 구나?’

‘전 라우라와 이리스처럼 레베카님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나 감동받았어, 에리카. 올라가면 열심히 키스를 해줄게.’

‘그건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어떻게 올라오길 건가요? 방법이 있으시다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우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협조해드릴게요.’

‘너희들의 무장드론을 모두 아래로 내려 보내줘. 내 드론들과 힘을 합치면 날씬한 여자 둘 정도는 충분히 들어 올릴 수 있을 거야.’

‘라우라가 진정되는 대로 바로 일을 진행하도록 할게요.’

‘응. 부탁할게.’

나는 에리카와의 텔레파시도 끝내고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바깥으로 내밀어서 내 소중한 마법갑옷의 상태를 확인했다.

슬라임이 충격을 제대로 흡수해줬는지 눈으로 보기에는 손상된 부분이 전혀 없었고, 슬라임은 금속 같은 무기물은 소화시키지 못하니 녹아내리지도 않았다.

문제는 나중에 저걸 다시 확보했을 때, 내부에 남아있는 슬라임 찌꺼기를 어떻게 다 청소하느냐이다.

당장 엘리자베스를 만나러 갈 수도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하는데 내 전용으로 만들어진 마법갑옷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으으으...”

내가 마법갑옷을 걱정하는 사이에, 내가 구해준 젊은 엘프족 여성이 눈을 떴다.

그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갑자기 인상을 쓰면서 엄청 아파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녀의 상태를 살펴보았는데, 일단 눈에 띄는 부상은 없었다.

“저기요, 정신이 들어요? 어디가 아픈지 말해줄 수 있어요?”

“온 몸이 다 아파요...”

여자는 완전히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난 뒤늦게 그녀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몸에는 피멍이나 찢긴 상처가 가득했고, 사타구니 사이는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손상되어 있었다.

나는 서둘러 치트가방에서 고속회복캡슐과 항생제를 꺼내서 물과 함께 그녀에게 먹였다.

여자의 몸은 빠른 회복세를 보였고, 나는 따뜻한 물수건으로 그녀의 몸에 묻은 피와 오물을 닦아주었다.

몇 분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엘프족 여자는 스스로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되었고, 힘겹게 일어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저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을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난 이미 분석스킬을 써서 그녀의 이름이 마리 디베르라는 것과 24살의 연금술사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지만 굳이 또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마리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내가 씩 웃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황급히 눈물을 닦아냈다.

“제 이름은 마리 디베르입니다. 사테르디아에서 연금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전 명예기사인 레베카라고 해요. 이렇게 당신을 구하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명예기사님이 아니었다면 전 결국...”

“살아남았으니 그런 가정은 할 필요가 없어요. 이제 집에 가는 것만 기대하시면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마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녀를 위로해주었다.

그러자 마리는 수줍어하는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흠... 이거 나한테 좀 반한 것 같은데?

안 그래도 라우라의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이 상황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도록 하자.

“그런데 멀리 있는 사테르디아에서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건가요?”

“볼르디아 남쪽 마을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가다가 마족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제법 규모가 있는 상단과 함께 이동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적이 오거인 바람에 다들...”

“정말 운이 좋지 않았군요. 그런데 혹시 이 밑에 있는 슬라임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요?”

내 질문을 받은 마리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뭔가 기억이 떠오르자마자 바로 내게 대답을 해주었다.

“여기로 잡혀오기 전에 들렀던 마을에서 근처에 있는 동굴에 갑자기 지하유적이 나타나서 조사를 떠났던 모험가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모험가들이 조사를 했을 때는 언제인가요?”

“음... 대략 반년전의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마리의 말이 사실이라면 슬라임이 이곳에 갇힌 것은 대략 6개월 전의 일이고, 늘 자기 일에 바쁜 루카스 입장에선 몰랐을 수도 있겠다.

루카스가 여전히 영주라면 왜 몰랐냐고 따졌겠지만 은퇴한지 10년이 넘은 사람에게 6개월 전의 일을 따지기엔 좀 애매하지.

그래도 화풀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적어도 마법갑옷 수리비 정도는 받아내야겠다.

“아무튼 우리 둘 다 저 녀석의 먹이가 되질 않아서 다행이네요. 그런데 함께 있던 생존자들은 일행인가요?”

“모두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상단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잡아먹히거나 겁탈당하다가 죽었습니다. 저만 살아남았지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서 차라리 자살을 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오늘 일을 생각하면 버텨내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버텨주셔서 고마워요. 곧 제 애인들이 위쪽의 상황을 정리하면 우리가 여기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네, 명예기사님.”

마리는 싱긋 웃으며 대답하더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움츠렸다.

나는 치트가방에서 담요를 꺼내서 마리에게 덮어주었고, 그녀의 옆에 나란히 앉아서 내 사랑들이 드론을 보내주기를 기다렸다.

대략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무장드론 3대가 줄줄이 우리 근처로 내려왔다.

나는 마리를 데리고 부서진 이동식 본부의 맨 위로 이동한 뒤에 무장드론을 추가로 3대 더 소환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꺼낸 튼튼한 밧줄로 모든 무장드론들을 연결한 뒤에 우리의 몸도 단단하게 묶어서 고정시켰다.

곧 무장드론들은 연결된 순서대로 위로 떠올랐고, 출력을 최대로 올려서 나와 마리를 하늘로 들어올렸다.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았지만 꾸준히 위로 올라갔고, 제법 시간이 지난 뒤에 우리는 구멍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레베카님!”

라우라는 내가 밧줄을 다 풀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달려와서 격하게 안겼다.

그녀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날 꼭 껴안았다.

마치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아까는 소리 질러서 죄송해요. 나쁜 말을 해서 죄송해요. 레베카님께 마음에도 없는 말로 화풀이를 해버려서 정말...”

“괜찮아. 다 괜찮으니까 죄송하다는 말은 이제 그만해도 돼.”

“레베카님... 흑, 흐윽... 우으으... 으아아아앙!”

라우라는 결국 귀가 아래로 축 처지며 내 품에서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리스와 에리카도 훌쩍거렸고, 나도 눈가가 촉촉해졌다.

“라우라, 너 아까 그렇게 울고도 또 울면 어떡해? 나까지 눈물이 나잖아.”

이리스는 라우라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그녀와 나를 함께 끌어안았다.

그리고 에리카는 애써 울음소리를 참으며 말없이 내 곁으로 다가와 안겼다.

나는 내 사랑들을 사랑으로 안아주면서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을 계속 되풀이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내 사랑들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지만 라우라는 나한테 매달려서는 내려올 생각을 하질 않았다.

난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매달려있는 상태로 생존자들에게 고속회복캡슐과 항생제, 담요, 물과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저... 다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명예기사님이 목숨을 거는 일이 발생해서...”

마리는 내 사랑들에게 고개를 숙여가면서 사과를 했다.

내 사랑들이 우는 모습을 보니 죄책감이라도 들었던 모양이다.

“아니에요. 레베카님은 원래 사람을 구하는 일에 진심이신 분이거든요.”

“맞아요. 아마 그때 저희가 말렸어도 끝까지 당신을 구하러 가겼을 거예요.”

이리스와 에리카는 마리를 일으켜 세우며 미소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라우라는 마치 한 마리의 화가 난 고양이처럼 귀를 잔뜩 뒤로 젖히며 하악질을 해댔다.

아무래도 라우라와 마리 두 사람 모두를 위해서라도 서로 격리를 시켜야할 것 같다.

결국 난 라우라를 데리고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서 그녀를 열심히 토닥여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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