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180화 (180/271)

〈 180화 〉 179화

* * *

이틀 연속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금메달을 걸어주는 기분은 정말 끝내줬다.

수많은 사람들의 찬사가 내 사랑을 위해서 쏟아지다니, 내가 다 뿌듯하다.

이리스는 자신을 향하는 환호성에 수줍어하면서도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리스, 오늘 네 모습은 정말 멋있었어. 세상에 너보다 총을 더 잘 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거야.”

“헤헤헤,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실은 마지막 표적이 빗나갔을 때는 엄청 긴장했었는데 레베카님과 친구들 얼굴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어요.”

“그땐 나도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서 힘들었어. 라우라랑 에리카도 조마조마했다더라. 그래도 네가 1000m 표적을 명중시켰을 때의 그 짜릿함은 아직도 생생해. 아마 평생 잊기 어려울 거야.”

나는 이리스의 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관중석에서 어제처럼 키스를 하라는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여섯 명이었는데 나중에는 관중들 전체가 우리가 키스하기를 바랐다.

난 어차피 이리스에게 우승 기념으로 키스를 해줄 예정이라 상관없었지만 이리스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서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 어떡해요?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 보고 키스를 하라고 강요할 줄은 몰랐어요. 세상에...”

“이리스, 나랑 키스하는 게 부끄럽니?”

“아니요! 그게 아니라 으으...”

“걱정 말고 나에게 맡겨.”

나는 과감하게 양손으로 이리스의 얼굴을 잡고서 키스했다.

처음엔 버둥거리던 이리스도 결국엔 순순히 내 키스를 받아들었다.

우리가 키스를 하자 큰 환호성이 들렸고, 우리가 키스를 마무리 짓자 박수가 쏟아졌다.

어떻게든 나와의 키스를 마무리 지은 이리스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나머지 내 품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정말이지 너무 사랑스러워서 한 번 더 키스를 해주고 싶었지만 여기서 더 나가면 괴롭히는 게 되어버릴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이리스는 내 품에서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난 뒤에야 라우라와 에리카가 주는 꽃다발을 받을 수 있었다.

라우라와는 포옹을 하고, 에리카에게는 반강제로 볼을 비비며 즐거워했다.

우리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었고, 눈처럼 떨어져 내리는 꽃잎 아래에서 이리스의 우승을 몇 번이고 축하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관중들이 경기장에서 우르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루카스에게서 보너스를 챙기기 위해서 자리를 지켰다.

다른 후원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루카스는 그들을 돌려보낸 뒤에야 내게로 다가왔다.

“네 애인들 덕분에 관중들의 만족도가 크게 올랐어. 후원자들도 내가 추진하는 새로운 경기들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었고. 고맙다.”

“고맙기는 뭘. 서로 이득이 되는 일이니까 손을 잡은 것뿐이잖아.”

“냉정하게 말하는 것치고는 너도 충분히 즐거워 보이는 걸.”

“뭐, 그건 부정하지 못하겠네. 그런데 오늘은 어떤 정보를 알려줄 거야?”

내 질문에 루카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자칫 민감할 수 있는 정보들 중에서 보너스로 줄만한 정보를 찾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나보다.

“레베카, 지금 네 눈에 보이는 게임 UI 같은 것들 있지? 그것들의 정체는 우리 눈에 삽입된 특수렌즈로 보이는 증강현실이야. 동향출신들은 거의 다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여기가 게임 속 세상이라고 굳게 믿고 사고를 치는 경우가 많아.”

“어제 이 세상이 현실이 확실하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건 별로 놀랍지는 않네. 그런데 엄연한 현실에 그런 게임 같은 정보들을 굳이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지도창 같은 거라면 몰라도.”

“그야 누군가 능력치가 수치화되는 세상으로 설정했기 때문이야. 이 세상은 나를 포함해서 동향출신들의 영향력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곳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그 누군가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

나는 루카스가 하는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말하는 누군가는 바로 나인데, 루카스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것일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싶다.

“그건 그렇다 치고 레벨이나 스테이터스가 실제로 의미가 있는 거야?”

“내 경험상 레벨은 크게 의미가 없어. 레벨이 올라도 아무런 혜택이 없고 엄청 강해지는 것도 아니야. 아무리 레벨이 높아봤자 무기가 없으면 새끼 고블린을 상대로도 목숨 걸고 싸워야하는 게 사람이야.”

“결국 장비가 제일 중요한 거네?”

“그래. 그리고 타고난 스테이터스도 중요해. 네 애인들처럼 마력의 랭크가 높으면 마법도구들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더 빨리 강해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그 어떤 동향출신도 스테이터스를 상승시킬 수는 없었어.”

나는 루카스가 해준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는 씩 웃었다.

루카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레벨업으로 특수포인트를 얻고 그걸로 스테이터스를 올릴 수 있는 이세계인은 오직 나뿐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루카스가 나에게 접촉한 진짜 이유는 내가 동향출신이라서가 아니라 내 사랑들의 마력랭크가 유독 높아 이벤트경기에 써먹기 좋아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스킬은 어떤 식으로 구현되는 거야? 이건 단순한 증강현실이 아니잖아. 그리고 우리 눈에 특수렌즈를 삽입한 건 대체 누군데? 우리 눈에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은 이 세상을 관리하는 위치에 있다는 소리겠지? 혹시 창조신...”

루카스는 내가 쏟아내는 질문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창조신이라는 말을 꺼내자마다 당혹감을 보이며 황급히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아마도 창조신이라는 존재가 어떤 식으로든 실존하고 루카스는 그것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다.

“그것에 관해서는 내일 경기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이후에 알려줄게.”

“하아, 역시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아무튼 요약하자면 내 눈에 보이는 각종 정보는 특수렌즈가 증강현실로 구현해주는 것이고, 레벨은 크게 의미가 없지만 스테이터스는 중요하다는 거 맞지? 그걸 상승시키는 건 불가능하고.”

“그래. 그러니까 게임하는 기분으로 이 세상을 살다가는 요절할 거야.”

“걱정 마. 난 이 세상으로 넘어와서 몇 시간 만에 그런 생각을 버렸거든.”

“난 거의 20년이나 걸렸어. 영주의 아들로 태어나는 바람에 그런 가벼운 기분을 하고 살아도 아무런 문제도 없었어. 하지만 암살위협에서 겨우 벗어난 이후로는 완전히 생각을 바꿨지.”

루카스는 옅은 미소 너머로 슬픈 눈빛을 품었다.

혹시 저번에 그가 말했던 억울하게 죽었다던 동향출신이 암살위협을 받았을 때 죽은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뭐, 진실은 루카스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알 수 없겠지만 말이야.

“나도 죽을 뻔한 경험을 하질 않았더라면 너처럼 오래 걸렸을 거라고 봐.”

“그럴 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너는 아무리 오래 걸려도 한 달 이상 걸리진 않았을 거다.”

“날 너무 높이 쳐주는 거 아니야? 난 그냥 욕망에 충실한 평범한 사람일 뿐이야. 딱히 선하거나 올바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적어도 무고한 사람의 죽음에 분노할 줄 알고 노예도 같은 인간으로 대우해주는 사람이잖아. 이 세상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선한 인간이라고 볼 수 있어. 이런, 내가 말이 너무 길어져버렸네. 내일도 네 애인이 좋은 성적을 얻기를 기대할게.”

루카스는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리더니 멀찍이서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들과 함께 경기장에서 나갔다.

그의 뒷모습은 왠지 모르게 외로워보여서 조금은 동정심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도 없으니 그냥 보내주고 말았다.

“자, 그럼 우리도 가볼까?”

“오늘은 어떤 식당으로 가실 건가요?”

“호텔 근처에 있는 유명한 레스토랑에 예약을 해뒀어. 라우라, 너도 알다시피 이리스는 식사를 우아하게 하니까 그런 곳이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

“제가 생각해도 정말 탁월한 선택이에요.”

“그렇지? 넌 어떻게 생각하니, 이리스?”

나는 금메달을 목에 걸고 꽃다발을 손에 든 채로 에리카를 껴안고 놓아주질 않는 이리스에게 물었다.

그러자 이리스는 즉시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저를 위해서 그런 곳을 예약해주시다니 정말 기뻐요.”

“어제도 말했듯이 날 위해서 고생한 보답을 확실히 해주고 싶어서 말이야. 네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네. 에리카, 너는... 그래,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에리카는 내가 제대로 물어보기도 전에 양팔을 들어 동그라미를 만들어보였다.

내 사랑들이 다들 내 선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주니 기분이 좋다.

우리는 경기장에서 나가면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빵이 담긴 종이봉투를 받았는데 오늘은 누구도 빵에 먼저 입을 대질 않았다.

“너희들은 내가 루카스와 어떤 대화를 했는지 묻지 않는 구나?”

“알아듣기 어려운 말들이 많아서요. 몰라도 딱히 문제는 없을 것 같고요. 그래도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뭔데? 얼른 말해봐.”

“만약에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실 수 있다면 가실 건가요?”

라우라는 불안감으로 가득한 눈빛을 품으며 물어보았다.

이리스와 에리카도 말은 하지 않아도 라우라와 같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세 사람의 머리를 차례대로 쓰다듬어주었다.

“내가 너희들을 두고 어디를 가겠니? 난 처음부터 그쪽에 대해선 미련이 없었어. 게다가 그쪽엔 더는 가족이 없지만 여기엔 가족이 있는데 더더욱 돌아갈 이유가 없지.”

“만약에 가실 일이 생긴다면 꼭 저희들을 데려가주세요.”

“원래 살던 곳뿐만 아니라 어느 세상이든 너희들이랑 함께할 거야. 이건 내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약속이니까 믿어도 돼.”

내가 하는 말에 내 사랑들은 한꺼번에 나를 포옹했다.

나랑 루카스가 세상의 비밀이니 뭐니 하면서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계속 하니까 다들 불안했던 모양이다.

이제 내일이면 루카스가 뜸을 들이는 이야기를 모두 알 수 있을 테니 내 사랑들을 불안하게 만들 일은 없을 것이다.

분위기를 봐서는 엄청나게 심각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말이다.

나는 라우라와 이리스, 에리카의 손을 번갈아 잡으면서 길을 걸으며 세 사람의 애교를 받아주었다.

우리가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는 예약시간보다 조금 이르긴 했지만 마침 빈자리가 있어서 바로 안내를 받았다.

이 레스토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볼르디아는 물론이고 인근의 다른 지방에서도 유명세가 대단한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현지 사람들뿐만 아니라 타지에서도 많은 손님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게 위험하고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모되는 세상에서 굳이 고생을 하면서까지 방문하려는 식당이니 분명 훌륭한 맛을 자랑할 것이다.

우리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식당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앉았다.

탁자는 굉장히 비싸보였고, 식기는 물론이고 냅킨까지 여간 돈을 들인 게 아니었다.

“레베카님, 여기는 메뉴판이 비치되어있지 않네요? 달라고 할까요?”

“여긴 그날 입수하는 재료에 맞춰서 날마다 다른 종류의 코스요리를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방식이라서 메뉴판이 없다고 해.”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메뉴판을 찾는 이리스에게 이 레스토랑의 특징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내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여기는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장사를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주인장이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면서 메뉴판을 없애고 자기 멋대로 코스요리를 내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하게는 되었다지만 주인장이 계시를 받았다는 부분이 좀 이상하게 여겨지기는 한다.

그도 혹시 스킬을 습득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아닐까?

아니야. 그건 너무 비약이야.

무슨 길거리 비둘기들도 아니고 동향출신들이 그렇게 흔하게 존재할 리가 없잖아.

내가 얼굴도 모르는 주인장에 대해서 생각하는 동안, 예쁘장한 종업원 한 명이 내게로 다가왔다.

“손님, 실례지만 일행 분들 중에서 술을 못 마시는 분이 계십니까?”

“네, 한 명이 있어요.”

“그럼 식사 중에 드리는 와인을 어떤 음료로 바꿔드릴까요?”

“에리카, 네가 마시고 싶은 걸 말해봐.”

“탄산수로 부탁드릴게요.”

“그거면 충분하겠어?”

“네, 너무 달고 자극적인 음료는 음식의 맛을 저해하니까요.”

나는 에리카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고, 종업원은 변경사항을 메모한 뒤에 주방 쪽으로 향했다.

난 종업원이 뒤태를 무심코 감상하다가 내 사랑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 말았다.

사귈 상대가 아니라면 쳐다보지 말라는 압박감이 강하게 느껴져서 무섭다.

그래서 나는 내 사랑들의 손등에 일일이 입을 맞추면서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식전음료로 화이트와인과 탄산수가 나왔고, 전채 요리로 카나페가 서빙 되었다.

우리는 함께 짠하고 유리잔을 부딪치며 건배한 뒤에 음료와 카나페를 맛보았고 곧 이어서 나오는 야채스프를 음미했다.

유명세만큼이나 훌륭한 맛에 메인요리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커졌다.

첫 번째로 나오는 메인 디시는 가자미 버터구이였는데 보기에는 평범해도 피어오르는 고소한 향과 부드럽고 촉촉한 식감이 일품이었다.

우리가 버터구이를 다 먹고 나니 화이트와인이 치워지고 레드와인이 대신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미리 예약했던 대로 각자의 취향에 맞게끔 익혀진 안심 스테이크와 각종 익힌 채소가 곁들여진 접시가 나왔다.

참고로 라우라는 레어를 좋아하고, 이리스는 미디엄, 에리카는 웰던 마지막으로 나는 미디엄 레어를 선호한다.

솔직히 어제 소고기를 실컷 먹은 뒤라서 크게 감흥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막상 적당한 크기로 잘라 입에 넣으니 그 맛이 환상적이었다.

나와 라우라, 에리카는 몇 번 잘라 먹는 것만으로 접시가 텅 비어버렸는데 이리스는 정확히 한입 크기로 잘라서 입술에 기름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우아하게 입 안에 넣어서 오물오물 씹어 먹었다.

아무래도 이런 고급 레스토랑의 코스요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우리 중에서 이리스뿐인 것 같다.

스테이크에 이어서는 칠면조 구이가 나왔고 그 뒤로 샐러드와 아이스크림, 각종 열대과일이 순서대로 밀려들어왔다.

처음에는 전체적으로 양이 적은 것 같았지만 과일을 먹을 대쯤에는 배가 터질 것 같았다.

그건 이리스와 에리카도 마찬가지였지만 라우라는 아직 모자라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에 걸친 식사를 끝내고서 커피와 홍차를 마시며 여유를 부렸다.

사실대로 말하면 당장은 배가 너무 불러서 일어나기 힘드니까 어느 정도 소화가 될 때까지 계속 앉아있을 생각이다.

“레베카님, 덕분에 오늘도 호강했어요. 감사합니다.”

“내가 아니라 이리스, 네 덕분이지. 내일도 기대해도 좋아.”

나는 에리카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러자 에리카는 부담감을 가지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감으로 가득한 눈빛을 보내왔다.

마지막 경기가 열리는 내일도 내 사랑이 1위를 하는 걸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