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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172화 (172/271)

〈 172화 〉 171화

* * *

우리는 마을을 떠난 지 나흘 만에 볼르디아에 도착했다.

이 도시로 말할 것 같으면 좋게 말해서 축제분위기로 가득했고, 좀 부정적으로 보자면 철없는 힙스터들의 낙서장처럼 느껴졌다.

도시를 둘러싼 성벽이나 건물의 벽, 지붕은 알록달록하게 칠해져있었고, 곳곳에 시대상과 한참 동떨어진 독특한 디자인의 그라피티나 그림들이 즐비했다.

거기다 주민들의 복장은 테마파크 직원들을 연상케 했고, 광대나 인형탈을 쓴 사람들도 많았다.

심지어 기사단원들의 복장까지 총천연색을 물들어 있어서 얼핏 보면 코스프레를 한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처럼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검투경기장에서 스포츠를 선보이는 사람이 나와 같은 이세계인이라서가 분명하다.

특별한 스킬을 보유한 게 아닌 이상에야 영주도 아닌 사람이 도시 전체를 이렇게 요란하게 꾸며둘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여기는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사람들도 다 이상하게 생긴 옷들만 입고 다니고 말이에요. 그리고 광대가 너무 많아서 싫어요.”

“라우라, 너 혹시 광대를 무서워하니?”

“무섭다기보다는 징그럽잖아요. 저 이상한 분장 좀 보세요.”

라우라는 사람들 앞에서 모여서 낄낄거리고 있는 광대를 향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녀가 질색을 해버리니 나도 괜히 광대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아졌다.

내 입장에선 그렇게까지 눈에 거슬리는 게 없는데도 말이다.

다행히 특수상점으로 가는 길에는 광대가 거의 없었다.

그 대신 노출이 많은 디자인의 제복을 입고서 검투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스포츠경기를 홍보하는 미녀들이 많았다.

그리고 부스를 마련하여 스포츠경기에 참가할 선수를 모집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볼르디아의 검투경기장에서는 소속된 노예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경기에 참가가 가능한 모양이다.

“어라? 사격경기도 있네요.”

“이리스, 네 실력이면 무조건 1등을 하고도 남을 거야. 참가하고 싶니?”

“아, 아니요! 아무리 그래도 검투경기장 자체가 거부감이 들어서 싫어요.”

“그래? 어쩔 수 없지.”

나는 이리스가 손사래를 치고 머리를 가로저으며 극구 부인하고 나서는 모습을 보고는 슬쩍 떠보는 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저렇게 싫어하는 사람의 등을 떠밀 수는 없지.

물론 나도 직접 경기에 참가하고 싶지는 않다.

애초부터 스포츠에 크게 관심이 없는데다 그냥 눈으로 보고 만족하는 성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선수를 모집하는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홍보에 열중하는 섹시한 미녀들을 구경하면서 길을 걸어갔다.

이윽고 도착한 특수상점이 있는 건물도 역시나 알록달록했지만 특수상점 자체는 지금까지 봤던 것과 똑같이 투박한 디자인이었다.

우리는 다소 소란스러운 바깥을 뒤로하고 특수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바로 전송실로 가서 기능을 활성화시켰다.

이걸로 프랑카와 리제르카, 제르디아와 카르디아에 이어서 5번째 대도시로 워프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전송실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한 뒤에 바로 특수상점에서 나가려고 했지만 갑자기 뜨는 알림에 걸음을 멈췄다.

알림의 내용은 바로 특수상점 지하에 자동화축사가 해금되었다는 것이었다.

굉장히 뜬금없었지만, 설명을 보니 전송지점을 5개 등록한 대가라고 한다.

단순히 돈을 투자하는 방식에서 끝이 아니라 지금처럼 다른 방식으로 특수상점의 새로운 기능을 해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자동화축사는 말 그대로 자동으로 동물을 돌봐주는 장소다.

각 동물에게 필요한 최적의 서비스를 제공해서 내가 장기간 자리를 비우더라도 동물들이 아무런 문제없이 잘 지낼 수 있는 것이다.

아쉬운 점은 자동화축사에 등록할 수 있는 동물은 내가 스킬로 길들여서 소환이 가능한 동물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즉, 지금으로선 내가 날개 길들이기 스킬을 써서 길들인 새들은 등록할 수 있지만 구입했을 뿐인 말들은 등록이 불가능하다.

일단 등록된 동물은 내가 필요할 때 소환했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회수기능을 이용하여 자동화축사로 돌려보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동화축사에 등록된 동물들은 서로를 죽이거나 잡아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테리제나를 맡길 곳을 찾아야 했는데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해결이 되니 정말 좋다.

자동화축사로 가는 길을 찾아보니 내가 늘 창고로 여겼던 빈 공간에 새롭게 들어선 마법승강기를 통해서 내려갈 수 있게 되어있었다.

나는 내 사랑들을 불러 모았고, 다함께 마법승강기를 타고서 자동화축사가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승강기의 문이 열렸고, 그 즉시 우리는 거의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자동화축사는 말이 좋아 축사이지 사실상 독립적인 생태계가 구축된 공간, 일명 바이오스피어나 마찬가지였다.

얼핏 보기에도 와이번이 날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넓은 공간에 잔디밭과 숲, 강과 호수, 언덕과 절벽까지 있었다.

적당한 장소에 먹이급여장치가 설치되어 있고, 시설을 관리하고 동물을 돌보는 드론들이 날아다니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자동화축사 전용 관리창으로는 등록된 동물의 현황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어서 편리했다.

이곳이라면 어느 동물이든 쾌적한 환경 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끔씩 공간의 제한이 없는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바람을 쐴 수 있도록 배려해줘야겠지.

“레베카님,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인가요?”

에리카는 이 장소에 대해서 누구보다 큰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서 주변을 살펴볼 뿐인 라우라, 이리스와는 달리 직접 흙을 만져보거나 냄새를 맡아보기까지 했다.

“여긴 동물들을 자동으로 돌봐주는 장소야.”

“어떤 마법을 쓰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신기해요.”

“사실 나도 엄청 신기해. 어쨌든 여기라면 내가 길들인 동물들이 어디보다도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나는 말이 나온 김에 내가 길들인 새들을 한꺼번에 소환했다.

그러자 자동으로 녀석들이 축사에 등록되었고, 녀석들의 건강상태와 허기, 스트레스 수치가 관리창에 나타났다.

세르자와 벨쿠레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테리제나는 역시나 종합적으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곧 테리제나에게 드론들이 달라붙어서 녀석에게 필요한 각종 서비스를 제공해주었다.

그러자 실시간으로 테리제나의 상태가 좋아지는 게 관리창에 보였다.

정보에 따르면 일주일 정도 집중적으로 보살핌을 받으면 최상의 상태가 된다고 한다.

“말들도 여기로 데려올 수 있으면 편하겠네요.”

“그건 안 돼!”

라우라가 하는 말에 에리카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라우라는 당혹감을 보이며 입을 꾹 다물었고, 에리카는 라우라의 눈치를 보면서 서둘러 사태수습에 나섰다.

“가, 갑자기 소리를 쳐서 미안해. 하지만 말들을 여기로 보내면 난 할 일이 없어진단 말이야. 그러니까 반대야.”

“편해지고 좋지 않아? 솔직히 너 혼자서 4마리를 돌보는 거 힘들어보였거든.”

“힘들어도 그만큼 보람찬 일이야. 거기다 말들을 돌봐주면서 함께 교감을 나누는 재미도 있고. 레베카님께서 여기로 말들을 보내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에리카는 말끝을 흐리면서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소중한 인형을 버리지 말아달라는 어린 아이의 촉촉한 눈망울을 보는 듯 했다.

“걱정 마. 여긴 내가 소환할 수 있는 동물만 맡길 수 있거든.”

“다행이에요. 앞으로 이곳의 마법에 지지 않을 만큼 말들을 더 잘 돌봐줄 거예요.”

“지금까지처럼만 하면 충분하니까 괜히 무리할 필요 없어.”

나는 의욕이 앞서는 에리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보통은 라우라가 말하면 곧이곧대로 듣는 경우가 많은 에리카가 이렇게까지 자기주장을 강하게 펼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말을 좋아해서 그런 거겠지.

“그런데 에리카, 나한테 소리를 지른 대가를 치러야하지 않겠어?”

“정말 미안해. 내 멋대로 흥분하는 바람에 널 기분 나쁘게 만들어버렸어.”

“그럼 내 멋대로 대가를 받아가도 되겠다. 그렇지?”

라우라는 에리카의 볼을 쓰다듬으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갑자기 에리카의 입술을 훔쳤다.

에리카는 처음에는 라우라를 밀어내려고 하다가 그녀와 눈을 마주치더니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이리스와 함께 두 사람의 입맞춤을 감상했고, 라우라는 실컷 에리카를 유린한 뒤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떼어냈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에리카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얼른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라우라에게 당하고 나니 엄청나게 부끄러워진 모양이다.

그리고 라우라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나에게 말을 걸었다.

“레베카님, 이제 바로 마을로 돌아가실 건가요?”

“기왕 새로운 도시에 왔으니 구경을 하고 싶어. 좀 이상한 곳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렇군요...”

“광대들이 부담스러우면 여기서 쉬고 있을래?”

“아니요. 고작 광대 때문에 혼자만 빠지고 싶지 않아요. 혹시나 제 검이 필요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요.”

라우라는 엘리사를 제압한 뒤로 줄곤 들고 다니는 검을 내밀면서 말했다.

그녀는 일명 ‘암흑검’을 손에 넣은 뒤로 시간이 날 때면 검술을 연습하며 언제든지 구도자를 베어낼 준비를 했다.

어떻게 보면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가면쟁이를 쓰러드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분명 엘카힘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겠지.

“알았어. 그럼 모험가길드에 잠깐 들렀다가 숙소를 잡은 뒤에 구경하러 다니자.”

나는 내 사랑들을 데리고 지상으로 올라와 특수상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바깥에 매어두었던 말을 타고 숙소를 찾아 나섰다.

곳곳에서 공연이 펼쳐지고 홍보하는 사람과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수많은 행인들과 뒤엉켜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처럼 사람이 너무 많은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도시였다.

그래도 죽음의 기운이 넘치는 카르디아보다야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모험가길드에 도착하자마자 안으로 들어가서 B급 모험가승급시험 합격증서를 보여주고 새로운 펜던트를 받았다.

B급 모험가용 펜던트는 은으로 도금되어 있고 디자인도 화려해서 기존에 쓰든 것에 비해서 더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모험가길드를 나가기 전에 지도를 확인하고 볼르디아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호텔이 어디인지도 알아냈다.

우리는 곧장 그 호텔로 갔고, 그곳에서 제일 크고 고급스러운 방을 골라잡았다.

그리고 사용가능한 서비스 중에서 쓸 만 한 건 모조리 신청했다.

예전 세상에서는 꿈에서나 그리던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젠 쉽게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고급호텔의 장점은 방과 서비스가 좋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호텔 소유의 마구간이 있기 때문에 따로 마구간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자체적으로 주변의 치안을 관리해서 주변의 잠재적인 범죄자들은 물론이고 소란을 피우거나 불쾌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도 마음에 든다.

볼르디아의 요란함이 이런 고급호텔까지는 손을 뻗치지 못해서 다행이다.

우리는 방에 짐을 풀어놓고 잠시 쉬다가 호텔 밖으로 나갔다.

말들은 쉴 수 있도록 마구간에 맡겨두고 그냥 걸어서 도시를 구경하기로 했다.

호텔에서 가져온 관광안내책자에 따르면 볼르디아의 볼거리는 모두 검투경기장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엔 검투경기장을 보러갈 수밖에 없는 동선이 만들어지게끔 해둔 것 같다.

우리는 관광안내책자의 의도에 따라 움직여주었다.

알아서 구경거리를 찾아다니기에는 도시가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여유로운 관광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내 사랑들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핥아먹고 있는 내게 누군가가 갑자기 아는 척을 했기 때문이다.

“명예기사 레베카 카론님. 리제르카의 영웅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넌 누구지?”

“저는 볼르디아의 진정한 주인이신 루카스님을 모시는 미천한 노예일 뿐입니다.”

“혹시 검투경기장에서 스포츠경기를 주체하는 사람을 말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루카스님께서는 동향출신이신 레베카님을 간곡히 뵙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부디 저희들을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루카스의 노예라고 소개했던 휴먼족 남자노예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 있던 다른 노예들도 마찬가지로 내 앞에 엎드렸다.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자리를 피했고, 세상 두려울 것 없이 길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던 광대들도 황급히 자리를 비켜섰다.

루카스라는 이름이 가진 힘은 영주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강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나저나 동향출신이라는 말을 꺼내는 걸보니 루카스는 나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언제부터 나를 감시하고 있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그냥 겉으로 드러난 정보를 취합해서 그런 결론을 내렸을 지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 세상의 시스템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걸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굉장히 불리해질 수도 있다.

대책도 없이 잠재적인 위협이 가득한 소굴로 들어가는 건 발가벗고 강간범들 옆을 지나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가서 루카스에게 전해. 날 만나고 싶으면 본인이 직접 찾아오라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내 앞에 엎드린 노예는 의외로 쉽게 내 말을 받아들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자기 목숨이 달린 일이라면서 살려달라고 매달리지 않나?

하긴 루카스는 검투를 스포츠로 대체한 사람이니 노예의 목숨도 함부로 대하지 않겠지.

“적절한 때에 묵고 계신 호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땐 부디 만남을 거절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난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니 걱정 마. 아참, 이건 수고비니까 마음대로 써.”

나는 노예에게 적당한 금액의 돈을 던져주었다.

만약 루카스가 정말 노예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이걸 보면 긍정적으로 반응을 해주겠지.

노예는 내가 준 돈을 소중히 받아들고는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를 하더니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나는 세르자를 소환해서 그들의 뒤를 쫓아가도록 명령했다.

제발 여기서는 누군가와 목숨 걸고 싸울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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