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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171화 (171/271)

〈 171화 〉 170화

* * *

다음날 아침, 나는 기껏 차려둔 식사도 거른 채 이리스와 함께 방목장으로 달려갔다.

내가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이유는 단 하나, 심심해서 열어본 지도창에서 공포새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크게 의존할 일이 없었던 맹수추적스킬이 드디어 빛을 발한 것이다.

난 그냥 쉬어갈 것이라고만 여겼던 마을에서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에 굉장히 들떠버렸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 게 분명했다.

방목장은 어제처럼 가축들이 풀을 뜯고 있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공포새가 커다란 눈으로 주변을 주시하고 있었다.

가축들은 공포새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지 녀석이 있는 곳에서 가까운 울타리 쪽으로는 다가가지 않았다.

제하트는 다른 말들을 데리고 좀 더 멀리 이동해서는 풀을 뜯는 와중에도 수시로 고개를 들어 주변의 상황을 살폈다.

나는 정찰드론을 소환하고 시야공유를 쓴 상태로 공포새 가까이 날려 보냈다.

새하얀 깃털로 뒤덮인 녀석은 타조와 비슷한 체형이었지만 타조보다 다리가 굵고 발톱이 크고 날카로웠으며 목이 두꺼웠다.

그리고 생김새는 맹금류 중에서도 흰머리수리와 닮았는데, 머리 크기가 타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와중에 부리가 머리의 절반을 차지했다.

키가 거의 3미터는 될 것처럼 훤칠한 녀석은 드론을 슬쩍 쳐다보더니 무해하다고 인식했는지 그냥 무시해버렸다.

덕분에 나는 마음 놓고 녀석을 관찰하다가 뭔가 수척해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리스, 저 녀석 건강이 좀 안 좋아 보이지 않아?”

“음... 아마도 영양실조인 것 같아요. 최근에 제대로 된 먹이를 먹어본 적이 없나보네요.”

“그럼 먹을 것을 좀 주면 쉽게 꼬드길 수 있겠다.”

“우리를 먹이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굶주린 맹수는 개인적인 순위로는 3번째로 위험한 상대에요.”

“1위랑 2위는 뭐야?”

“2위는 다친 맹수이고 1위는 새끼를 보호하려는 맹수에요. 예전에 어미불곰에게 쫓겨본 적이 있는데 지금도 섬뜩할 정도로 무서운 경험이었어요.”

“왜 쫓겼어? 혹시 새끼를 귀엽다고 쓰다듬기라도 했니?”

“아니요. 그냥 지나가다가 새끼랑 눈만 마주쳤는데 어미가 저를 죽이려고 들더라고요.”

“지금이야 바디슈트가 있으니 무서울 것 없겠지. 이제 어떻게 할까?”

“공포새는 시력이 굉장히 좋으니 이미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거예요. 그러니 여기에 눈에 띄는 먹이를 놓고 기다려보도록 해요.”

나는 치트가방에서 장대와 고깃덩어리, 밧줄을 꺼내서 장대를 땅에 꽂고 밧줄로 고깃덩어리를 장대 끄트머리에 매달았다.

그리고 이리스의 지시에 따라서 장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고깃덩어리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척을 했다.

처음에는 우리 쪽을 주시하기만 하던 공포새는 숲속으로 몸을 숨기더니 우리와 가까운 곳에서 다시 불쑥 나타났다.

녀석은 거기서 한참동안 우리를 경계하더니 기다란 다리로 간단하게 울타리를 넘어왔다.

‘레베카님, 너무 긴장하면 공포새가 그냥 도망가 버릴 수도 있으니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태연한 척을 해주세요.’

‘알았어. 최대한 노력해볼게.’

나는 말을 그렇게 했지만 기대감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얼른 고기를 먹어! 빨리!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공포새는 먹이를 쉽사리 먹지 않고 자꾸만 우리를 쳐다보았다.

설마 살아있는 게 더 맛있어 보이는 건가?

다행히 공포새는 우릴 먹을 생각을 하질 않고 커다란 부리로 밧줄을 간단하게 끊어버린 뒤에 고깃덩어리를 한입에 꿀꺽 삼켜버렸다.

아쉬운 듯이 땅을 발로 긁거나 장대를 부리로 물어대던 공포새는 고개를 들어서 다시 우리에게 관심을 가졌다.

녀석은 성큼성큼 우리 쪽으로 다가왔고, 나는 긴장하며 권총집 위에 손을 올렸다.

‘레베카님, 고기를 바닥에 놓고 저를 따라서 천천히 뒤로 물러나도록 하세요.’

‘지금? 위험한 상황 아니야?’

‘괜찮아요. 우릴 먹이로 인지했다면 벌써 공격했을 거예요.’

‘고기가 많이 남아있어서 다행이네.’

나는 치트가방에서 고깃덩어리를 하나 더 꺼내서 바닥에 내려놓은 뒤에 이리스의 말대로 움직였다.

공포새는 내가 놓아둔 고깃덩어리를 냉큼 집어먹었고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직접 고기를 주셔도 될 것 같아요.’

‘생각보다 진행이 빠른 것 같네.’

‘네, 그동안 많이 배고팠던 모양이에요.’

나는 손에 고깃덩어리를 들고서 공포새에게 조심스레 내밀었다.

그러자 공포새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냉큼 고깃덩어리를 부리로 물어서 목구멍으로 넘겨버렸다.

녀석은 벌써 고깃덩어리를 3개나 먹었지만 아직도 모자란 지 내 손을 부리로 문지르며 더 달라고 보챘다.

내가 두 번 더 고깃덩어리를 먹여주자 공포새의 눈빛이 한결 더 부드러워졌다.

녀석은 부리를 내 가슴팍에 비비더니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버렸다.

나는 즉시 날개 길들이기 스킬을 사용했지만 신뢰도 부족이라는 알림이 뜨면서 스킬이 작동하지 않았다.

여태까지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세르자는 내가 목숨을 구해줬으니 나에 대한 태도와는 별개로 신뢰도는 충분히 높아서 아무런 제약 없이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벨쿠레는 굳이 말할 것도 없을 테고.

내가 곤란한 기색을 보이는 사이에 이리스가 텔레파시 대신에 직접 입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이제 쓰다듬어도 될 것 같아요. 눈과 가까운 곳은 민감하게 반응할 테니 목덜미를 쓰다듬어보세요.”

“이렇게?”

“네, 잘 하고 계세요.”

나는 공포새의 기다란 목을 쓰다듬으면서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처음에는 가만히 있던 녀석은 눈을 감고서 내게 커다란 머리를 기대었다.

방금했던 걱정과는 달리 나에 대한 신뢰도가 금방 높아져서 다행이다.

나는 아예 공포새 곁에 앉아서 녀석에게 무릎베개를 해주며 한참동안 정성스레 쓰다듬어주었다.

머리길이가 대략 50cm 정도로 커서 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적응이 되니 뭔가 쿠션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쫄쫄 굶은 탓에 먹이를 받아먹는 것만으로도 나를 신뢰하게 된 것이라 생각하니 뭔가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공포새는 내 손길을 받으며 마르코와 비슷한 울음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잠이 들어버렸다.

“이제 완전히 레베카님에게 마음을 열었네요. 귀엽기도 해라.”

“정말?”

“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처럼 잠이 들 수는 없어요. 제가 보기엔 사람의 손길이 익숙해서 레베카님께 금방 신뢰를 준 것 같아요.”

“원래 북부지방에는 공포새가 살지 않으니까 어디서 탈출한 게 아닐까?”

“아마도 그럴 거예요. 그러니 야생에서 먹이를 찾아먹을 줄을 몰라서 건강상태가 계속 안 좋아졌겠죠. 방금 전에 사냥감들 앞에서 대놓고 서있던 것도 경험이 없기 때문일 테고요.”

“내가 이 녀석을 길들이더라도 방치하면 또 굶어버리겠네?”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직접 데려가시는 게 제일 좋겠지만 그게 곤란하시면 돌봐주실 곳을 찾아보셔야할 거예요.”

“제하트가 질투할 것 같으니 어디 맡겨야겠다. 이리스, 너도 여기 앉아서 쉬어.”

“네, 레베카님.”

이리스는 내 곁에 앉아서는 나와 팔짱을 끼고서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리고 공포새에게 날개 길들이기 스킬을 다시 사용했는데, 이번에는 아무런 문제없이 스킬이 활성화되었다.

덕분에 날개 길들이기의 스킬레벨이 4레벨로 올랐고, 이제 익룡을 길들일 수 있게 됐다.

공포새에 이어서 내가 만든 설정에선 존재하지도 않았던 익룡이 다음 목표인 것이다.

“이리스, 익룡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익룡이요? 작은 종류는 전부 신대륙에서만 볼 수 있고, 큰 종류는 여름이 되면 신대륙에서 구대륙으로 넘어왔다가 겨울이 되기 전에 다시 신대륙으로 돌아가요. 그러니 아직은 어디서도 볼 수 없어요.”

내 설정에 따르면 신대륙은 죽음의 땅이다.

그 어떠한 동식물도 살아남을 수 없는, 오로지 언데드만 배회하는 곳이다.

그런데 익룡들이 신대륙에서 살고 있다니? 누군지는 몰라도 꽤나 방대한 설정을 내 세상에 끼워 넣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익룡 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공룡이나 다른 고생물들도 신대륙에서 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유전자 조작으로 공룡 비슷한 키메라를 만들고 그걸로 돈 좀 벌어보려다가 사방에서 피를 보면서 쫓겨 다니는 영화가 생각하는 걸.

“익룡을 직접 본 적 있니?”

“네, 아빠를 따라서 사냥을 나갔다가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굳이 비유하자면 기린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보기보다 달리는 속도도 빨라서 사람은 그냥 따라잡혀요.”

“말로만 들어도 살벌하네. 그런데 뛰는 속도는 어떻게 알았어?”

“제가 다친 맹수를 위험순위 2위로 정하게 된 계기랍니다. 날개를 다쳤다고 만만하게 봤다가 죽어라고 도망쳐서 겨우 살았어요.”

“이리스, 너 동물에게 많이 쫓겼구나.”

“사냥을 하다보면 그런 일이 종종 생겨요. 지금이야 레베카님 덕분에 바디슈트와 마법갑옷을 입게 되었으니 별로 무서울 것도 없지만요.”

이리스는 그 말과 함께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곤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애교를 부렸다.

당장에라도 덮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이 친구의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

“음... 흰둥이?”

“푸흡! 안 돼. 그건 너무 강아지 이름 같잖아.”

나는 이리스의 제안에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수컷 말에게는 샤리라는 이름을 붙이더니 공포새에게는 흰둥이라니 너무 웃긴다.

“기껏 제안했는데 비웃으면 어떡해요?”

“미안, 미안. 뜬금없는 이름이라서 말이야. 하하하하!”

나는 결국 크게 소리 내어서 웃었고, 이리스는 내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이리스가 볼을 부풀리며 불평하는 게 너무나도 귀여워서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맞은 팔이 얼얼해질 때가 되어서야 겨우 웃음을 그쳤다.

이런 귀여운 폭력에는 바디슈트의 마법방어막이 작동하지 않나보다.

“저 다시는 레베카님에게 이름 같은 건 제시하지 않을 거예요. 흥!”

“정말로?”

“네, 절대로 그런 일 없을 거예요.”

“만약에 우리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도?”

“그, 그건 짐승한테 이름을 짓는 게 아니니까 논외에요! 그런데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아예 없는 일이잖아요.”

“혹시 모르지. 어느 날 갑자기 가능해질 수도 있잖아.”

“레베카님은 갈수록 신기한 능력이 늘어나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전 과도한 기대는 가지지 않으려고요. 기대가 너무 크면 그만큼 실망도 큰 법이니까요.”

“나랑 생각이 비슷하구나.”

“사랑하면 닮아간다고 하잖아요.”

대놓고 삐친 기색을 보이던 이리스는 금방 다시 평소대로 돌아왔다.

라우라 같으면 하루 정도는 차가운 태도를 보일 텐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떠드는 소리가 너무 컸던 걸까? 공포새가 잠에서 깨어났다.

녀석은 부리를 크게 벌리며 하품을 하더니 고개를 들어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오늘부터 네 이름은 테리제나야. 아름다운 황녀님의 이름인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내가 하는 말에 공포새, 테리제나는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더니 내게 머리를 들이댔다.

이거 마음에 든다는 뜻이겠지? 앞으로 쭉 테리제나라고 불러줘야지.

“이 애가 암컷이었나요?”

“아, 응. 그래서 제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웠다는 테리제나 황녀님의 이름을 지어줬어. 지금은 좀 말랐지만 깃털의 색이나 생김새를 보면 충분히 어울리지 않아?”

“그렇긴 한데 별로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랄까요. 역시 흰둥이가 좋은데...”

“강아지를 키울 일이 생기면 그때 흰둥이라고 이름 짓자. 어때?”

“정말요? 진짜 강아지 키울 거예요?”

“나중에 정착하면 몇 마리 키워볼까 생각중이야.”

“그럼 제가 강아지들 이름을 다 지어도 될까요?”

“물론이지. 그땐 절대로 웃지 않을게.”

“우리 약속해요.”

나는 이리스와 새끼손가락을 걸고서 언제 일어날지도 모를 일을 미리 약속해주었다.

문득 사랑스러운 아내들과 귀여운 자식들, 마당을 뛰어노는 개들과 함께하는 이상적인 삶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가면쟁이들의 위협에서 해방되고, 충분히 여행을 한 뒤에는 그땐 평생 동안 여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면서 살고 싶다.

“이제 돌아가자. 떠나는 마당에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나는 이리스와 테리제나 그리고 말들을 모두 데리고 도로테아의 집으로 돌아갔다.

처음엔 다들 테리제나를 경계했지만 내가 길들였다는 사실을 증명하자 다들 안심했다.

우리는 꺼내두었던 짐을 모두 챙겼고, 바디슈트도 외출에 어울리는 복장으로 변신시켰다.

살기 좋은 마을에서 떠나려니 아쉬움이 앞섰지만 어차피 볼르디아에 들렀다가 다시 돌아올 예정이니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레베카 씨, 실례가 아니라면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뭐든 말해봐.”

“볼르디아에 가시면 이걸 저희 부모님께 우편으로 보내주세요.”

도로테아는 내게 작은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나는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기꺼이 상자를 받아서 치트가방에 넣었다.

“내가 책임지고 전달할게. 다른 부탁은 없니?”

“아니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답니다.”

“마르코, 넌 부탁할 거 없어?”

테리제나와 교감을 하고 있던 마르코는 내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마르코는 아는 사람에게 편지 같은 걸 보낼 일이 없으니 굳이 떠나는 사람에게 뭔가를 부탁할 필요가 없겠지.

“도로테아, 혹시나 내가 없는 동안 황금색 가면을 쓴 사람이 마을에 방문하면 떠나지 않도록 붙잡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나에 대해서 물어봐줄래?”

“네, 맡겨만 주세요. 그 분은 웬만하면 마을사람들의 말을 들어주시니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분명 제 부탁도 들어주실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내가 볼르디아에서 얼마나 머무를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마르코랑 같이 잘 지내도록 해.”

“레베카 씨도 즐거운 여행되시기를 바랄게요.”

우리는 도로테아 부부와 한 번씩 포옹을 했고, 지나가는 길에 마을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벌써 정이 들어버린 마을을 떠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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