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 16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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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자 마을의 중앙에 있는 큰 나무 앞 공터로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주민들의 손에는 냄비나 큰 접시 같은 것이 들려있었는데, 그 안에는 각자의 집에서 만든 요리가 잔뜩 담겨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도로테아에게 물어봤더니 우리를 위한 환영식을 열어주려고 다들 모인 것이라고 한다.
환영식을 열어주는 건 좋지만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는 건 좀 부담스럽다.
마을사람들은 아이들까지 다 합쳐서 50명가량이고 중년이나 노인들은 한명도 없었다.
원래부터 존재하던 마을이 아니라 특정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만 선별해서 만들어진 마을이니 그런 것이다.
도르테아의 말에 따르면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올해로 3년째라고 한다.
즉, 혼종실험은 최소한 3년 전부터 본궤도에 올랐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서 우리를 위해 준비된 자리로 향했다.
공터에는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마을주민들이 한데모여서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지금까지 흔히 만나봤던 야수족이나 마르코 같은 맹금족을 포함하여 여러 종류의 마수족들이 혼종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은 신비로울 정도였다.
털가죽, 비늘, 깃털 등 그 무엇이 자신들의 피부를 덮고 있더라도 거기에 개의치 않고 서로를 경계하거나 혐오하는 기색 없이 친근감을 드러냈다.
서로 언어체계가 너무 달라 말이 통하지 않아도 몸짓과 필담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의사소통을 이어가는 모습은 인상적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수족과 혼종이 부부를 이루고, 아이를 낳아서 화목하게 살아가는 걸 보고 있으니 약간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리스가 그토록 나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이유를 좀 알 것 같다.
우리를 위해서 준비된 자리는 마을사람들을 한 눈에 다 담을 수 있어서 상석이라고 불릴만한 곳이었다.
내가 중심에 앉자 라우라와 이리스가 각각 내 오른쪽과 왼쪽을 차지했고, 에리카는 이리스의 옆에 앉아서 그녀와 팔짱을 꼈다.
둘이서 같이 방목장에서 즐겁게 놀고 온 뒤로 전보다 더 친해진 것 같다.
도로테아와 마르코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았고, 마을사람들도 각자의 자리에 앉아서 우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여러분, 말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저희들을 이토록 정성스럽게 맞이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을이 언제나 풍요롭고 화목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나는 대표로 나서서 마을사람들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그러자 마을사람들은 나에게 박수를 쳐주었고,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마수족들은 식사예절이 부족해보이기는 했지만 수저를 쓰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수족들 사이에서 가장 우아하게 식사를 하는 것이다.
보통은 더러운 손으로 집어먹거나 대가리만 처박고 물어뜯으니 말이다.
나는 사람들이 식사를 즐기는 모습을 잠시 살펴보다가 도로테아에게서 음식을 덜어놓은 접시를 받았다.
“도로테아, 환영식치고는 너무 거창한 거 아니야?”
“여러분은 저희 마을이 처음으로 맞이하는 손님이니까 다들 의욕이 넘쳐버렸어요. 부담가지지 말고 마음껏 드세요.”
“혹시 술도 있니?”
“저희 마을은 음주금지라서 술은 없어요.”
“그래? 아쉽네.”
나는 술이 없다는 말에 무심코 치트가방에서 술을 꺼내려다가 말았다.
아무리 나를 위한 자리라고는 해도 남의 마을에서 만든 규정을 대놓고 어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특히 아이들의 정서와 교육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칠 게 분명하다.
그런데 아예 술을 못 마시도록 하는 건 참 특이하다.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술이 금지된 이유가 뭐야?”
“가장 큰 이유는 안전을 위해서예요. 체질상 술을 먹으면 죽는 종족들도 있는데다가 마수족의 신체능력으로 술주정을 심하게 부리면 위험하니까요.”
“누군가 몰래 만들어먹지 않을까?”
“그럼 당사자는 추방당할 수밖에 없어요. 저희 마을은 늘 평화를 추구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공동체의 안전을 깨뜨리는 행위에는 엄격하게 대처하기로 합의가 되어 있거든요.”
확실히 이 마을사람들에게 있어서 추방령만큼 무서운 처벌도 없을 것이다.
여기를 나가면 무지막지한 폭력이 그들을 짓누를 테니 말이다.
하지만 마을의 위치를 들키지 않으려면 아예 죽이는 게... 내가 이 마을사람도 아니고 그런 일까지 참견하지는 말자.
“나도 쫓겨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그런데 우리가 마을에 도움을 줄만한 일 없을까? 얻어먹기만 하면 미안해서 말이야.”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귀한 손님들에게 일을 시킬 수는 없잖아요. 그냥 편히 쉬다가세요.”
“뭐, 정 그렇게 말한다면야.”
“아참, 식사를 다 하시고 온천에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
“온천도 있어?”
“네, 저희들도 가끔씩 이용한답니다. 나중에 안내해드릴게요.”
“부탁할게. 온천에 들어가는 건 오랜만이라서 정말 기대돼.”
“온천을 좋아하시나보네요?”
“응. 바깥 풍경이 보이는 뜨끈뜨끈한 노천온천에서 몸을 담그고 있다 보면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
“마침 노천온천이라서 다행이네요. 다른 분들은 어떠세요?”
도로테아의 질문에 내 사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다들 전혀 예상지 못했던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서 재잘거리는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다.
나중에 온천이 있는 곳에 근사한 별장을 지어야겠다.
식사가 끝나고, 식기를 치운 마을사람들은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놓고는 옹기종기 모여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수족인지라 인간의 문화에 전반적으로 서툰 모습을 보이는 남편들은 이번에도 스텝이 꼬여서 난리도 아니었지만 혼종인 아내들이 침착하게 춤을 이끌어주었다.
나는 알고 있는 춤이라고 해봤자 라우라와 이리스에게 속성으로 배웠던 어설픈 사교춤이 전부다.
그 마저도 귀족사회에서 폼을 잡을 때나 필요한 춤이라서 지금처럼 활기차고 요란한 분위기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라우라와 이리스도 사교춤을 제외하면 제대로 춤을 춰본 적이 없다고 하니 우린 그냥 구경만 하게 되었다.
하지만 에리카는 우리와 달리 마을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춤을 추었다.
현란한 춤사위와 빠르고 경쾌한 스텝을 선보이는 에리카의 새로운 매력에 나 뿐만 아니라 라우라와 이리스도 푹 빠져버렸다.
작고 약해보이는 체격에서 어떻게 저런 힘찬 춤동작이 나오는지 신기했다.
한참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추던 에리카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에리카, 너 정말 멋졌어.”
“정말요?”
“응. 네 새로운 매력을 발견해서 기쁜 걸.”
“헤헤헤.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리카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좋아했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 묻은 땀을 닦아주었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에리카를 품에 안고서 시원한 물을 주거나 과일을 먹여주었다.
내가 주는 대로 잘 받아먹는 게 꼭 병아리 같아서 너무너무 귀엽다.
“에리카, 그 춤은 어디서 배운 거야?”
“아, 예전에 임시주인님 밑에서 일했을 때 같이 일하는 사람한테서 배웠어. 원래 댄서였는데 몸 담았던 극단이 망해서 잠시 가축시장에서 일하게 된 사람이었어. 나한테 소질이 있다면서 교습소에 추천해주겠다고 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어.”
에리카는 이리스의 질문에 그녀가 묻지도 않은 말까지 길게 늘어놓았다.
그녀는 분명 춤을 가르쳐준 사람에 대해서 애증을 느끼는 게 분명했다.
희망을 불어넣어주고는 말도 없이 어디론가 가버렸으니 말이다.
“내가 보기엔 굳이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나중에 나도 가르쳐주라.”
“난 아직 누군가를 가르칠 실력은 안 되는데...”
“에리카, 부탁이야. 응?”
“으... 알았어. 가르쳐주면 되잖아.”
“야호! 사랑해, 에리카!”
“나 참, 겨우 춤 가지고 이렇게까지 좋아할 이유가 있나 모르겠네.”
에리카는 말은 그렇게 해도 표정을 보면 기뻐하는 티가 팍팍 났다.
그녀를 향한 이리스의 일방적인 구애가 이제는 완전히 끝이 난 것 같다.
“라우라, 넌 어때? 우리 같이 배워보자.”
“난 춤은 별로 관심 없어. 그래도 에리카의 실력은 확실히 뛰어나다고 생각해.”
라우라는 자신에게 안겨드는 이리스를 슬쩍 밀어내면서 말했다.
그녀는 대놓고 싫다는 말은 못해도 행동은 확실하게 보여서 이리스가 억지를 부리지 못하게 했다.
이리스는 라우라의 성격을 잘 알고 있으니 에리카에게 하는 것처럼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내면서 매달리지 않았다.
“라우라는 어쩔 수 없고. 레베카님은 어떠세요?”
“난 구경하는 게 더 좋아.”
“그럼 제가 에리카를 독점하게 되는 거네요. 우히히히.”
이리스는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실실 웃었다.
그러자 에리카는 일종의 위협을 느꼈는지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러다 춤을 가르쳐 준다는 것 자체가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마을사람들이 즐기는 모습을 조금 더 지켜보다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를 않자 그들의 양해를 구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도로테아와 마르코의 안내에 따라서 노천온천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습기가 높아지는 게 느껴지고, 희뿌연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온천은 폭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었고, 그 사이에는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오두막 안에는 탈의실과 샤워실, 휴게실이 있었다.
“저희들은 여기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마음껏 온천을 즐겨주세요.”
“마르코는 남자라서 어쩔 수 없다 쳐도 너는 같이 들어가도 되지 않을까?”
“저희 마을은 다른 종족과는 같이 물에 몸을 담그지 않도록 되어있어요. 서로 불쾌감을 조성하는 일이 생기거나 자칫 병을 옮길 수도 있거든요.”
“서로 특성이 많이 다르니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럼 네 말대로 마음껏 즐길게.”
우리는 탈의실로 들어가 바디슈트를 벗었고, 샤워실로 들어가서 몸을 깨끗하게 씻었다.
그리고 샤워실에서 노천온천으로 바로 연결된 문을 열고 나갔다.
노천온천까지 가는 길은 평평하고 까끌까끌한 돌이 징검다리처럼 놓여있었고, 주변에는 대나무로 만든 키 높은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울타리 너머에는 작은 간헐천이 이따금씩 뜨거운 물을 분수처럼 힘껏 뿜어냈다.
우리는 제법 잘 만들어진 노천온천에 몸을 담갔다.
“흐아아... 이거 너무 좋다.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야.”
나는 전신을 감도는 따끈따끈한 감각에 푹 빠져들었다.
내 사랑들도 노천온천에 몸을 담그자마자 다들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우연한 만남 덕분에 호강을 해서 정말 즐겁다.
내가 온천의 감미로움을 즐기는 사이에 라우라가 곁으로 다가왔고, 나는 그녀를 내 앞에 앉혀놓고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라우라는 내게 기대면서 목 아래를 물속으로 집어넣더니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씩 웃었다.
“레베카님, 내일 바로 떠나실 건가요?”
“아마도. 하루 정도는 더 머무를 수도 있고. 왜?”
“아, 그게 너무 마을이 예뻐서 하루 만에 떠나기는 아쉽더라고요.”
“그럼 하루 더 있다가 떠나자. 볼르디아가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저랑 같이 데이트하실래요?”
라우라는 이제야 본심을 드러냈다.
나랑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마을이 예쁘다는 핑계를 댄 것이다.
“좋지.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말해봐.”
“음...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같이 등산이 하고 싶어요. 저기 보이는 산꼭대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정말 멋질 것 같아요.”
“마침 경치가 좋은 곳이니까 그것도 괜찮겠다.”
라우라는 눈표범족 아니랄까봐 등산을 하고 싶어 했다.
등산과 데이트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일은 뭐든 데이트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라우라와의 약속을 잡고나자 이번엔 이리스가 나에게 다가와서 내 어깨에 몸을 기대었다.
“라우라랑 등산을 다녀오시면 저랑 낚시하실래요? 낮에 보니까 개울에 맛있는 물고기가 많더라고요.”
“이리스, 너 낚시도 할 줄 아니?”
“네, 아빠가 가르쳐주셨어요.”
“그럼 이번엔 네가 날 가르쳐주면 되겠다.”
“맡겨만 주세요. 분명 큰 물고기를 낚으실 수 있을 거예요.”
“잡은 건 어떻게 요리할 거니?”
“그냥 놓아줄 거예요. 왜냐면 마을의 재산이니까 멋대로 잡아먹으면 안 되잖아요.”
“내가 그 생각을 못했네.”
“어렸을 때 마음대로 낚시를 했다가 어른들한테 혼난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사냥이나 낚시를 할 때는 항상 신경 쓰게 되더라고요.”
“그렇구나. 뭐, 꼭 잡아먹지 않아도 잡는 재미라는 게 있으니까 기대되는 걸.”
“저도 낚시는 오래만이고 레베카님과 함께 하니까 정말 기대돼요.”
이리스는 내 팔을 끌어안으며 귀여운 미소를 지었고, 나는 그녀의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라우라에 이어서 이리스까지 데이트 약속을 잡았으니 에리카에게도 관심을 줘야겠다.
“에리카, 넌 나랑 같이 하고 싶은 거 없니?”
“등산에 낚시까지 하시면 저와 놀아주실 시간이 남을까요?”
“그건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자, 얼른 말해봐.”
“음... 조금 생각을 해볼게요.”
“알았어. 꼭 거창할 필요는 없으니까 부담가지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해.”
“네, 레베카님.”
에리카는 벌써부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부담을 가지지 말라고 말했어도 그게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에리카의 손을 잡고서 내 오른쪽으로 끌어당겨서 팔로 감싸주었고, 덕분에 에리카는 긴장을 풀고 내 품에 기대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품고서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전 세상에서는 본 적도 없는 무수히 빛나는 별들과 은하수가 마치 지상으로 쏟아질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대단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 자란 내 사랑들에게는 특별할 것도 없는 하늘이었지만 별빛이라고는 별로 찾아볼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았던 내게는 가슴이 벅찰 정도로 감동이 느껴졌다.
“얘들아, 새삼스럽지만 너희들과 함께해서 정말 행복해. 정말이지 복에 겨울 정도야. 난 너희들 덕분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애틋한지 알게 되었고, 가족의 정을 다시 느낄 수 있게 되었어. 다들 고마워.”
나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면서 라우라와 이리스, 에리카에게 차례대로 키스를 해주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평온이 나를 좀 더 감정적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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