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 16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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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어둡기만 했던 길의 끝에서 눈부시게 밝은 빛이 일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가 동굴을 빠져나오자 동화 속 세상처럼 아기자기한 농촌이 나타났다.
절벽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 잡은 마을에는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그 주변으로 논과 밭, 목초지가 넓게 펼쳐졌다.
다양한 혼종과 마수족들이 한데 어우러져 농사를 짓고, 어린 혼종들이 외형에 관계없이 함께 즐겁게 뛰노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금까지 죽이기만 했던 존재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은 쉽사리 적응되질 않았다.
나와 내 사랑들 모두가 마을의 아름다운 전경에서 쉽사리 눈을 떼질 못했다.
“레베카 씨, 소감이 어떠세요?”
“뭐랄까, 다들 행복해보여.”
“마을사람들은 모두 과거에 힘든 일을 겪은 만큼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저희 부부도 마찬가지고요.
“우리가 갑자기 나타나서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 마세요. 우리가 지나왔던 동굴은 아무나 지나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자, 그럼 저희 집으로 가요.”
도로테아는 짐마차를 끌고서 마을로 진입했고, 우리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주민들을 우리를 향해서 약간 두려워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지만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도 까르륵거리며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
특히 내 어깨에 앉아있는 세르자와 벨쿠레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맹금족 혼종인 아이들은 특유의 지저귐 소리를 내면서 교감을 나누려고 시도했다.
나는 두 녀석들에게 아이들과 놀아줄 것을 명령했고, 녀석들은 아이들 사이를 날아다니며 멋진 곡예비행을 선보였다.
갑자기 몰려든 아이들을 보면서 라우라는 불편한 기색, 에리카는 무서워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리스는 먼저 손을 흔들어주거나 먹을 것을 주면서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이리스는 제아무리 생긴 것이 이질적이라 하더라도 사람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대화를 통하는 상대를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대우를 해주었다.
그녀의 자애로운 태도에 감화를 받은 라우라와 에리카는 긴장을 풀고는 그녀를 따라서 아이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자 주민들도 우리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거두고 다시 하던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머리가 황소인 야수족이 모내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연속으로 고립된 마을을 방문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여긴 지하가 아니라서 그런지 갇혀있다는 느낌이 덜 들었다.
절벽을 타고 내려오는 신선한 공기를 듬뿍 마시고, 마찬가지로 절벽에서 쏟아지는 시원한 폭포를 눈에 담으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다함께 주변의 경치를 눈에 담거나 초가집과 담벼락을 구경하다보니 어느새 도로테아의 집 앞에 도착했다.
도로테아의 집은 다른 집들처럼 대문이 활짝 열려있었고, 마르코가 농기구를 손질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마르코는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반가운 기색을 물씬 풍기며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그는 우선 도로테아를 번쩍 들어서 짐마차에서 내려주더니 부리를 그녀의 볼에 비비며 진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이제 막 말에서 내린 나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마수족에게 있을 리가 없는 인간적인 인사법에 나는 조금 감동을 받고 말았다.
나는 적극적으로 마르코의 악수를 받아주었고, 그는 크게 기뻐하면서 시끄럽게 지저귀는 소리를 내더니 나를 와락 껴안고는 더욱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르코가 예전보다 더 건강해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사는 환경이 많이 좋아졌으니까요. 갈수록 몸에 근육이 멋지게 잡히고 깃털의 발색도 예뻐져서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라요.”
“그, 그래. 둘이 행복해보여서 다행이네. 마르코, 갑작스럽게 오늘 하루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괜찮을까?”
내가 묻는 말에 마르코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차피 서로 말이 통하질 않으니 몸으로 표현하는 게 훨씬 빨랐다.
“자기야, 얼마 전에 글 쓰는 법을 배웠잖아. 한 번 보여드려.”
도로테아의 제안에 마르코는 조금 쑥스러워하다가 나뭇가지를 들고 바닥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저희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집에서 편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마수족은 인간과 손 구조가 조금 달라서 시간이 좀 오래 걸리고 글씨체도 삐뚤삐뚤해서 엉망이었지만 그 안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그런데 내가 마수족의 지능을 낮게 설정한 것치고는 글에서 지적으로 모자라게 느껴지는 부분은 전혀 없었다.
마르코는 동족들 중에서 아주 똑똑한 편이니까 식인을 거부하고 도로테아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을 정도의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잘 부탁해, 마르코.’
나도 말 대신에 나뭇가지를 들고 바닥에 글을 써서 화답했다.
이제 보니 내 악필이나 마르코의 서툰 글씨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아무튼 마르코는 내 방식에 크게 즐거워했고, 특이한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저거 그냥 좋아서 웃는 거 맞겠지? 비웃는 거 아니겠지?
나는 마르코와 몇 번 더 필담을 주고받은 뒤에야 그가 내 악필을 비웃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는 그저 나와 필담을 나누는 상황 자체를 즐기고 기뻐할 뿐이었다.
내가 마르코와 어울리는 사이에, 에리카는 말들의 고삐를 한꺼번에 잡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도로테아에게 말을 걸었다.
“도로테아 씨, 저희 말들을 둘만한 장소는 없을까요?”
“절 따라오세요. 저쪽에 방목장이 있거든요.”
도로테아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목초지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서는 제법 많은 수의 말과 소, 양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저기라면 우리의 말들도 안심하고 쉴 수 있을 것 같다.
혼자서 마안으로 방목장을 보고 있던 이리스는 갑자기 흥분을 해서는 에리카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에리카, 나도 같이 갈래!”
“괜찮아. 나 혼자서도 충분해.”
“그게 아니라 방목장에 아기동물들이 많아서...”
“아, 그런 거였구나. 그럼 얼른 가보자!”
에리카는 한껏 기대감에 부푼 이리스와 함께 도로테아를 따라서 방목장으로 향했다.
보아하니 둘이서 한참동안 방목장에서 시간을 보낼 것 같다.
“마르코 씨,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내가 두 사람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틈을 타서 라우라가 마르코와 대면했다.
그녀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지만 마르코는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우라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마르코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번에 당신과 도로테아 씨를 죽이려고 했던 일, 정말 죄송해요.”
라우라는 그 차디찬 탑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사과했다.
당시의 라우라는 도로테아와 마르코를 죽여야 후환이 없다고 줄곧 내게 주장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두 사람을 놓아주었다.
나는 라우라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해서 그 문제를 물고 늘어진 적이 없고, 그 뒤로는 줄곧 잊고 지냈었다.
하지만 라우라는 그 날의 일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보다.
그리고 이번에 혼종과 마수족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마을을 직접 보게 되면서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 같다.
마르코는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라우라의 어깨를 토닥여주었고, 바닥에 그녀를 원망하지 않고, 그런 적도 없었다고 적어주었다.
덕분에 라우라는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마르코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마르코는 라우라에게도 악수를 청했고, 라우라는 기꺼이 그의 악수를 받아주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인상적이라서 서둘러 사진을 찍었다.
곧 마르코는 우릴 위해서 차를 내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고, 나와 라우라는 마당에 있는 평상 위에 누워서 그늘이 주는 시원함을 즐겼다.
“라우라, 이제 마음이 편해졌니?”
“네, 나중에 도로테아 씨한테도 제대로 사과를 드릴 거예요.”
“좋은 생각이야. 그나저나 마족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이 상황 자체가 기적적으로 느껴지지 않니?”
“그러게요. 세상의 마족들이 다들 이 마을의 마족 같으면 정말 좋을 텐데 말이에요. 어쩌면 혼종을 만든 사람의 목적은 혼종을 이용해서 말이 통하는 마족을 선별하는 식으로 인류와 공존시키려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정말 그게 목적이라면 대의를 위해서라면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놈일 거야. 난 그런 건방진 놈들이 정말 싫더라.”
나는 혼종 제작자가 진심으로 이 마을처럼 목가적인 낙원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용서해줄 생각이 없다.
혼종을 만들기 위해서 죽어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처참한 시체가 다시금 떠올라서 날 괴롭게 만들었다.
라우라는 내 속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몸을 옆으로 돌려서 나를 꼭 안아주었다.
나는 라우라의 품속에서 갑자기 치솟은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렸다.
그녀의 향긋한 채취, 따뜻한 체온, 부드러운 피부 그리고 적당한 크기의 가슴이 주는 안락함이 나를 평온하게 만들었다.
라우라는 자신의 모든 것을 갈구하는 내게 키스를 해주었고, 나는 적극적으로 그녀가 주는 애정을 즐겼다.
우리가 키스를 끝내자 마침 도로테아가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 돌아온 것을 보니 역시나 이리스와 에리카는 방목장에 남아서 놀고 있는 모양이다.
“제가 방해를 한 걸까요?”
“아니. 타이밍이 맞아 떨어진 것뿐이야.”
“다행이네요. 저희 남편은 어디로 갔나요?”
“우리한테 차를 내준다면서 부엌으로 들어갔어.”
“귀한 손님이 오셔서 무척 기쁜 모양이네요. 짐을 옮길 생각도 하질 않다니 말이에요.”
“내가 도와줄까?”
“괜찮아요. 은인의 손을 빌릴 정도로 힘든 일도 아니니까요.”
도로테아는 내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는 짐마차에 실려 있는 각종 생필품들을 집 안으로 날랐다.
나는 보고만 있기는 심심해서 결국은 라우라와 함께 도로테아를 도와줬다.
겸사겸사 그녀와 대화도 하면서 말이다.
“도로테아, 이 마을을 대표하는 사람은 누구니?”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그게 아니라 그 사람한테 인사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보통은 마을사람들이 다함께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책을 찾아서 대표를 두고 있지는 않아요. 굳이 따지자면 황금색 가면을 쓰신 분이랄까요. ”
“혹시 이 마을을 그 사람이 세운 거야?”
“네, 저희 부부 같은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직접 만드셨다고 들었어요.”
나는 도로테아의 말을 듣고 나니 황금색 가면이 정말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내 주변에서 행한 일을 보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내게 노르헤임 마을의 좌표를 남기고 간 것도 어쩌면 우리를 위해서가 아닐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녀가 성물을 모으고 있는 것이 우리와 관계가 깊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떻게 내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고 움직일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
항상 날 감시하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일종의 예언이라도 보는 걸까?
방법이 뭐든 간에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일 것이다.
“내가 여기서 머무르다보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한 달에 한 번 정도 마을에 들러서 도움을 주고 가시는데, 겨우 이틀 전에 들르셨으니까 제법 오랫동안 기다리셔야할 것 같아요.”
“또 한 발 늦었네!”
나는 주먹을 꽉 쥐면서 말했다.
왜 항상 그 녀석은 나보다 발이 빠른 거냐고!
“그 분과 아는 사이세요?
“내가 가는 여행길마다 앞서서 나타나서 사라지는 사람이야. 날 도와주는 것 같기는 한데 의도가 뭔지 모르겠어.”
“그 분은 언제나 과묵하신 분이라서 길게 대화를 나눠본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이야기를 잘 해주시더라고요.”
과묵하다는 사람이 정작 가장 시끄러운 존재들인 아이들과는 잘 놀아준다니 참 특이한 사람이다.
아이들에게 친절한 사람치고는 나쁜 사람 없다는데 황금색 가면도 과연 그 말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기왕이면 내 기대에서 벗어나지 않는 좋은 사람이기를 바란다.
“난 그 사람이 여자라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모르는데 다른 특징 같은 거 없을까?”
“저희들도 성별 말고는 아는 게 없어요. 늘 변조된 목소리로 말하고 맨살을 밖으로 드러내는 법이 없으시거든요. 음... 이제 보니 레베카 씨와 키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네요.”
“정말 조심성이 많은 사람인 것 같네.”
“분명 착하고 좋은 분이신데 사람들과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시는 것 같아요. 저희가 드리는 선물도 전부 정중하게 거절하시더라고요.”
보아하니 황금색 가면은 마음에 상처가 큰 사람이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가 실컷 구해준 사람들이 정성스레 준비한 선물까지 한사코 거절하면서 선을 긋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와 내 사랑들처럼 황금색 가면도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경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동정심마저 들었다.
그 사람의 정체와 목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 분을 만나고 싶으시면 저희 집에서 느긋하게 쉬면서 기다리시는 건 어떠세요?”
“볼르디아에 들렀다가 다시 와도 될까?”
“물론이죠. 편하신 대로 하세요. 저희 집은 언제나 레베카 씨를 위해서 열려있으니까요.”
도로테아는 깃털이 달린 팔을 활짝 벌리면서 말했다.
누군가에게 한없이 깊은 신뢰를 받는다는 건 아주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렇게까지 나를 환영해주다니 정말 고마운 걸.”
“그야 저희 부부는 레베카 씨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까요. 이런 식으로라도 작게나마 은혜를 갚아나가고 싶어요.”
“난 너희들이 이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나는 한 치의 거짓도 담겨있지 않은 말을 하면서 도로테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돈이나 다른 보상을 바라고 도로테아와 마르코를 살려줬다면 이런 식으로 큰 보람을 느끼지는 못했을 거다.
“레베카 씨, 그 날 당신을 만났던 건 제 인생에서 손꼽을 정도로 큰 행운이었어요. 당신의 자비 덕분에 저희 부부가 행복하게 살게 되었으니까요.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을 보니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어쩌면 운명이 그렇게 정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야.”
한 번은 우연이라도 두 번은 우연이 아니지.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마지막 짐을 집으로 나르자 마침 마르코가 잘 차려진 다과상을 부엌에서 들고 나왔다.
마르코가 글씨를 쓰는 일은 서툴러도 차를 끓이는 솜씨는 일품이었고, 우리는 그윽하게 우러난 향에 심취해서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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