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 16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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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르디아 지방을 벗어나는 동안 단 한 번도 실내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마주치는 모든 마을과 소도시들이 모조리 파괴되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곳들은 지도창에 모두 폐허라는 접미사가 붙어서 더욱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종종 폐허를 뒤지는 마족들도 있었지만 놈들도 마물에 대한 공포 때문에 오랫동안 머무르지는 않았다.
간혹 마주치는 제국군들은 불탄 마을을 보면서 전의를 다지거나 울분을 토해냈었다.
그래도 볼르디아 지방으로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서 다행이었다.
어디서도 불합리한 폭력과 파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곳곳에서 열심히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볼르디아 지방에서 처음 들른 디폴 마을에는 카르디아에서 도망친 피난민들이 머무르고 있었는데, 주민들이 그들을 따뜻하게 돌봐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옆 동네에서 뒤숭숭한 소문이 돌고, 안 좋은 일이 벌어지면 배타적인 태도를 보여도 이상할 게 없을 텐데도 손님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주었다.
아마 볼르디아 기사단이 직접 마을을 지켜주고 있으니 마음 놓고 도와줄 수 있는 거겠지.
내가 설정한 풍족한 식량사정도 자비를 베푸는데 한몫을 했을 테고 말이다.
마을은 굽이치는 강과 그 너머에 있는 높은 절벽으로 빙 둘러싸여있는 천혜의 요새라서 나무로 된 성벽이 세워져있는 것만으로 아주 든든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마을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이목이 나에게로 쏠렸다.
그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양쪽 어깨에 매와 부엉이를 동시에 얹고 다니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테니 말이다.
매는 이제 익숙해진 세르자이고, 부엉이는 며칠 전에 새로 길들인 녀석이다.
참고로 이름은 벨쿠레로 지었는데, 세르자 장군의 친구이자 마찬가지로 인류연합제국을 건국하는데 공을 세운 장군이라고 역사서에 기록된 사람이다.
벨쿠레는 내가 처음 발견한 게 아니라 사냥을 나섰던 이리스가 대뜸 잡아온 녀석이다.
이리스가 사냥한 토끼를 뺏으려고 했다나?
아무튼 벨쿠레는 절도를 시도한 죄로 이리스에게 붙들려왔고, 식재료가 되기 직전에 내가 막아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래서인지 벨쿠레는 처음부터 나에게 살갑게 굴었고, 날개 길들이기 스킬을 써도 별로 달라질 게 없었다.
스킬 때문에 사실상 정신을 개조당해서 다른 인격 아니, 조격을 가지게 된 세르자와는 확실히 다른 경우다.
물론 난 벨쿠레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날개 길들이기의 스킬레벨을 올리기 위해서 구해준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에리카는 그걸 보고서는 내게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순전히 내 이득을 위해서 살려준 건데도 말이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좋은 말을 듣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난 벨쿠레를 길들이는 것만으로 날개 길들이기의 스킬레벨이 3으로 올랐고, 이제 공포새를 길들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라우라에게서 공포새가 제국의 북부지역에서는 서식하지 정보를 듣고는 의욕이 확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드물게 가축시장에서 판매된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안도했다.
다음에 리제르카에 갈 일이 생기면 가축시장부터 들러야겠다.
그리고 지금은 벨쿠레를 길들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부엉이는 거의 무소음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니 벨쿠레의 시야를 공유하면 야간투시기능이 있는 정찰드론보다 훨씬 은밀하게 야간정찰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제 몰래 누군가를 감시하고 싶으면 낮에는 세르자, 밤에는 벨쿠레를 동원하면 된다.
드론과 달리 제한시간이 없고, 의심을 받을 만한 구석이 거의 없으니 웬만해서는 들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레베카님, 오늘은 오랜만에 방에서 잘 수 있겠죠?”
“글쎄. 여관에 남는 방이 있어야할 텐데 말이야.”
나는 라우라가 기대치가 낮은 목소리로 묻는 말에 함부로 희망을 주지 않았다.
빈방이 있을 거라고 큰소리를 쳤다가 결국 노숙을 하게 되면 정말 민망할 테니까.
“방을 구하지 못해도 목욕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레베카님이 주시는 물수건은 씻은 것처럼 깨끗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나도 너희들이랑 같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어.”
“이런 작은 마을에서도 워프를 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만약 그랬으면 내 성격상 마을이라는 마을은 무조건 다 들렀을지도 몰라. 그만큼 여행길이 많이 꼬일 테고. 그냥 지금처럼 대도시에만 있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해.”
“듣고 보니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같은 제약이 있는 게 나은 것 같네요. 여행의 목적이 단순히 전송실 등록이라는 건 별로 재미가 없을 테니까요.”
라우라는 내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전송실을 활성화하려는 목적의 여행이라면 마을에서 하루 이상 머무르는 법이 없을 테니 여행이 아니라 아예 일을 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래서 난 특수상점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충분히 먼 덕분에 우리가 함께 여행을 한다는 실감이 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레베카님, 아무래도 오늘도 노숙을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뭐? 어째서?”
“저길 보세요.”
나는 이리스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완전히 문을 닫아버린 여관을 발견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우리가 이 마을에 왔을 때 폐업이라니 정말 아쉽다.
내 사랑들은 나보다 훨씬 더 아쉬웠는지 라우라는 양손으로 머리를 싸매면서 고통스러워했고, 이리스는 한숨을 푹 쉬었고, 에리카는 물을 마시며 타는 속을 달랬다.
그걸 본 나는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마침 옆을 지나치는 휴먼족 아가씨를 붙잡고 질문을 던졌다.
“저기, 실례지만 이 마을에 영업 중인 여관은 없나요?”
“저게 유일한 여관이었다고 해요. 원래 여행객들이 별로 없는 마을이라서 결국 망해버렸다고 들었어요.”
“그것 참 아깝네요. 거의 일주일동안 노숙을 해서 침대가 그리웠는데 말이죠.”
“혹시 마음이 내키시면 저희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가실래요?”
“네?”
나는 예상지도 못했던 제안에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아무리 친절한 사람이라도 생판 모르는 무장한 사람들을 4명이나 재워준다고 나서다니 내가 다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초면에 초대를 해주실 줄은 몰라서요.”
“그야 초면이 아닌 걸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초면이 아니라고?
난 머릿속을 열심히 뒤져보았지만 이렇게 생긴 휴먼족 아가씨를 봤던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분석스킬을 써서 이름을 알아냈고, 너무 놀랍고 반가워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로테아?”
“네! 맞아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레베카 씨.”
“아니, 그 모습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쉿! 목소리가 너무 커요. 나중에 차차 설명을 드릴 테니까 우선 마을에서 나가요.”
“아, 알았어.”
우리는 앞장서는 도로테아를 따라갔다.
그녀는 자신이 타고 온 짐마차에 올라타서 우리를 마을 밖으로 안내했다.
짐마차에는 온갖 생필품들이 실려 있었는데, 그 중에는 공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로테아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인적 없는 산길로 접어들어서야 짐마차를 멈춰 세웠다.
“도로테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몸이 원래대로 돌아온 거야?”
“아니요. 이건 눈속임이에요.”
도로테아는 짐마차에서 내리더니 우리 앞에서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벗었다.
그러자 우리의 눈을 속이고 있던 환영마법이 사라지고 내가 알고 있는 도로테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제 모두 깃털로 대체되었고, 팔에 붙어있는 깃털과 꽁지깃이 전보다 더 길어졌다.
도로테아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던 나와 라우라, 이리스는 그녀에게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지만 전혀 사정을 모르는 에리카는 놀란 나머지 권총집에 손을 올리려다 말았다.
“에리카, 도로테아는 가면쟁이들 때문에 몸이 이렇게 변했어. 적이 아니니까 무서워할 필요 없어.”
“아, 네. 죄송합니다.”
에리카는 도로테아에게 먼저 사과를 했고, 그녀는 흔쾌히 사과를 받아주었다.
“익숙한 일이니까 괜찮아요. 그나저나 여러분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해봤어요. 여행을 하시는 건가요?”
“응. 라우라의 고향으로 가는 길이야. 그런데 넌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니?”
“처음에는 마르코랑 같이 프랑카 지방의 숲에서 살았어요. 하지만 위험해서 항상 거주지를 옮겨야만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에 황금색 가면을 쓴 사람이 우리가 마음 놓고 살 수 있
는 마을이 있다면서 이 팔찌를 주셨어요.”
황금색 가면이 여기서 또 나올 줄이야.
대체 그 인간이 원하는 것은 뭘까?
번번이 나보다 앞서서 성물을 가로채고, 나와 만났던 사람을 도와주다니 말이다.
혹시 지금도 나를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적은 아니지만 상당히 찝찝한 상대다.
“그 팔찌 덕분에 편지를 보낼 수 있었던 모양이네.”
“네, 적어도 이걸 차고 있으면 절 평범한 사람이라고 속일 수 있으니까요. 덕분에 부모님께 편지를 보낼 수 있어서 엄청 기뻤어요.”
“너희 부모님께서는 네가 보낸 편지를 보고 엄청 기뻐하셨어. 깃털장식도 항상 하고 다니시고. 언제나 네가 안전하기를 기도하고 계셔.”
“정말요? 다행이다... 저 때문에 힘들어하실까봐 늘 걱정이었거든요.”
도로테아는 눈물을 훔치며 안도했다.
졸지에 부모님과 생이별을 하게 된 그녀를 보고 있으니 동질감이 느껴진다.
“도로테아, 네가 사는 마을은 어떤 곳이야?”
“저처럼 혼종이 된 사람들과 마수족들이 함께 사는 곳이에요. 마수족들은 다들 내 남편처럼 부족에서 식인을 거부했다가 괴롭힘을 당한 사람들이고요.”
마수족에게 사람이라는 말을 쓰다니, 이미 한 번 들었던 적이 있지만 여전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만난 마수족들은 도로테아를 지켜줬던 마르코라는 맹금족을 제외하면 전부 반인반수의 괴물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그런 곳에 외부인인 우리가 가도 되는 걸까?”
“저 같은 괴물을 보고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분들이니까요.”
“그건... 솔직히 나도 네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결과적으로는 살려주셨잖아요. 걱정 마시고 절 따라오세요.”
“알았어. 너한테 맡길게.”
도로테아는 다시 짐마차에 올라탔고, 우리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숲은 더욱 깊어졌고, 워낙에 울창하게 자라난 나무들 때문에 한낮의 햇빛이 다 가려질 정도였다.
그렇게 밤처럼 어두운 숲길을 한참동안 나아간 끝에, 절벽으로 막혔고, 돌탑이 잔뜩 쌓여있는 막다른 길이 나왔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도로테아는 짐마차에서 내려서 절벽으로 다가가더니 돌탑들을 이리저리 조작했고, 곧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위처럼 생긴 문이 옆으로 비켜서서 마을로 통하는 동굴을 열어주었다.
“자, 그럼 다시 출발해요.”
도로테아는 마냥 신기해하는 우리들을 향해 방긋 웃더니 다시 앞장섰다.
동굴은 우리 모두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다시 굳게 닫혔다.
내부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흔적이 역력했고, 짐마차가 지나갈 정도로 폭이 넓었다.
습하고 퀴퀴한 공기가 날 불쾌하게 만들었지만, 그럭저럭 참을만했다.
“마르코는 잘 지내고 있어?”
“그럼요. 마을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인력으로 대우받고 있어요.”
“잘됐네. 마을에 아이들은 있니?”
“네, 여자애들만 태어나서 대를 잇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만요.”
“그러니까 혼종만 태어나는 거구나.”
나는 이미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정보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분명 도로테아가 불임이 될 정도로 억지로 많이 낳았던 알들에서는 모두 맹금족만 태어났었다.
그런데 이제와서는 혼종만 태어난다는 말을 들으니 이것도 그 황금가면이 수를 쓴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수족을 낳는 일은 전혀 없어요. 아직은 애들이 어려서 별 문제가 없지만 나중에 크면 짝을 찾아서 나설지도 모르니 다들 걱정이 많아요.”
“마을사람들은 자식들이 짝을 찾는 걸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네.”
“그야 저희의 수가 불어나면 인간과 마족 모두에게 토벌대상이 될 테니까요. 저야 그런 고민조차 할 수가 없지만 말이죠...”
도로테아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혼종과 별종인 자신들은 그 어느 집단에도 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테지.
그리고 도로테아는 개인적으로 불임이니 일부러 다른 사람들의 자식에 대해서는 되도록이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려고 하는 것 같다.
갑자기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나는 먼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가면쟁이들 때문에 평생에 걸쳐 피해를 봐야하는 도로테아를 보고 있으니 문득 모체로써 처벌을 받고 있는 엘리사가 떠올랐다.
혼종을 만든 장본인도 엘리사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화가 갑자기 끊겨버리고, 마침 엘리사에 대해서 떠오른 김에 그녀와 촉수들의 현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엘리사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박탈당하고 악마촉수의 모체가 된 지가 벌써 열흘째다.
그동안 하급 악마촉수의 수는 30마리로 불어났고, 제르디아 도심의 동굴을 떠나서 도시의 북서쪽으로 멀리 떨어져있는 산에 있는 더 큰 동굴로 본거지를 옮겼다.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지도창으로 봐서는 제법 괜찮은 곳으로 보였다.
주변에 개울이 흘러서 식수 구하기 쉽고, 숲이 우거져서 식량을 구하는 일도 수월하다.
또한 워낙 산세가 깊어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지역이니 누군가에게 들킬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은 장소다.
나는 하급 악마촉수들을 제르디아 주변의 물음표 지역들로 보내서 마족의 근거지를 발견하면 즉시 박살냈고, 그 과정에서 이사후보지역을 물색했었다.
그 과정에서 20마리의 하급 악마촉수들이 죽었지만, 마족은 5배가 넘게 죽어서 스킬레벨업을 위한 모든 조건을 달성했다.
촉수소환스킬이 3레벨이 되면서 번식촉수가 숙주를 통해서 중급 악마촉수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하급 악마촉수는 최대레벨인 상태로 생산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번식촉수의 영양액은 이제 숙주의 노화와 질병을 방지할 뿐만 아니라 숙주의 건강상태를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만들어 더 강한 악마촉수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바로 악마촉수의 본거지로 워프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편도라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제르디아의 특수상점 전송실을 이용하면 된다.
물론 본거지에서 도시까지 가려면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점이 있긴 하지만 나중에 날개 길들이기 스킬을 통해서 공포새를 길들이면 해결될 문제다.
나는 당장에라도 중급 악마촉수를 생산하고 싶었지만 첫 생산은 무조건 직접 봐야한다는 제약이 걸려있다.
그런 귀찮은 제약 때문에 내가 아쉬움을 느끼는 사이에 우리는 동굴의 끝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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