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 1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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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은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잤다.
방식이야 어쨌든 간에 사람들을 학살한 엘리사를 단죄했다는 만족감 덕분인 것 같다.
간밤에 엘리사는 내가 지정했던 대로 하급 악마촉수를 모두 낳았고 지금은 번식촉수의 ‘돌봄’을 받고 있다.
난 이제 성체인 하급 악마촉수 10마리를 휘하에 두게 되었고, 스킬레벨업을 위한 첫 번째 조건 또한 달성하게 되었다.
이제 악마촉수들로 적대적인 인간 20명이나 맹수 혹은 마족 100마리를 죽이면 된다.
하지만 그전에 이사를 먼저 해야 한다.
나는 어제 지도창을 뒤져보면서 그럴싸한 장소를 찾아봤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지금으로선 리제르카에 있는 별장을 쓰는 게 제일 편하겠지만 왠지 막시안의 뒤를 따르는 것 같아서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악마촉수들에게 동굴의 내부와 수로를 탐색할 것을 명령했다.
만약 수로를 통해서 도시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지금 쓰고 있는 동굴에서도 한동안 문제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탐색이 끝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오늘은 따로 알림이 뜨지 않는 이상에야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나저나 엘리사와 함께 카르디아를 습격했었던 구도자가 마음에 걸린다.
언제 다시 카르디아를 공격할지 모르고, 엘리사를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짜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엘레아노르가 이복동생에게 일어난 일을 알면 온건파고 나발이고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어쩌면 나는 괜히 적을 하나 더 늘려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여차하면 엘레아노르도 끝장내버리면 그만이야.
음... 내가 일종의 선을 살짝 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무튼 더는 카르디아에서 머무를 이유가 없으니 콘라드의 가족의 안위만 챙기고 얼른 다음 도시로 떠나야겠다.
물론 그전에 엘리자베스부터 만나야한다.
원래 어제 오후에 만나려고 했었는데 그녀가 바빠서 오늘 오전에 만나게 되었다.
나는 간단하게 외출을 준비했고, 바디슈트를 정갈한 디자인의 옷으로 변형시켰다.
바디슈트의 착용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어제는 무심코 그대로 잠을 자버렸는데, 문제될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청결유지기능 덕분에 자고 일어났을 때 상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러다 평범한 옷도 불편해서 못 입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외출 준비를 끝내자 이리스가 슬그머니 내 곁으로 다가왔다.
“레베카님, 지금 나가시는 건가요?”
“응. 오전 중에 아무데나 오라고는 했지만 너무 늦게 가면 안 좋을 것 같아서.”
“점심식사는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럴 거야. 딱히 식사약속을 잡은 건 아니니까. 먹고 싶은 거라도 있니?”
내 질문에 이리스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수줍은 듯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는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열을 식혔다.
엉큼한 생각을 품어놓고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다.
나는 다짜고짜 이리스에게 키스를 했고, 그녀는 양팔을 들어 내 목에 매달리듯 기대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부드러운 혀를 탐하고 타액을 교환하면서 야릇한 숨소리를 내던 우리는 약간의 아쉬움과 함께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돌아오면 날 먹게 해줄까?”
“그, 그게 아니라 오늘은 오랜만에 제가 식사를 만들어서 대접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질문 드렸던 건데, 어쩌다 보니 야한 생각이 들어서... 아, 아, 아무튼 식사를 하고 오실 것 같으면 텔레파시를 보내주세요.”
“알았어.”
나는 또 다시 얼굴이 새빨개진 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미 서로 섹스를 몇 번이고 한 사이인데 그걸 주제로 이렇게 쑥스러워할 줄이야.
좀 이르기는 하지만 내 사전에서 권태기라는 단어는 빼도 될 것 같다.
“레베카님, 저도 쓰다듬어주세요.”
내가 이리스를 귀여워해주는 사이에 어깨 위에 세르자를 얹고 있는 에리카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자그마한 머리를 내게 내밀면서 내 손길을 원했고, 나는 기꺼이 쓰다듬어주었다.
“에리카, 기분은 좀 괜찮아졌니?”
“네,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요.”
에리카는 어제 저녁부터 카르디아에 두고 온 말들이 걱정이라며 불안감을 드러냈었다.
친구들과 놀면서 걱정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젯밤에 특별히 에리카를 꼭 안고서 잠을 잤다.
지금 보니 다행히 효과가 좋았던 것 같다.
“오후에 말들을 보러가자. 다들 무사할 거라고 믿어.”
“저도 그럴 거라고 믿고 싶어요.”
에리카는 발뒤꿈치를 들면서 내게 키스를 했고, 나는 에리카를 포옹하며 그녀의 애정표현을 적극적으로 받아주었다.
내 사랑들 중에서 가장 가늘고 약한 몸을 가진 에리카를 안고 있다 보면 보호본능이 마구 샘솟았다.
에리카와의 키스를 끝낸 나는 라우라와도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멀찍이서 조깅을 하는 중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텔레파시로 내가 지금부터 외출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은 잊지 않았다.
나는 이리스와 에리카를 한꺼번에 포옹해준 뒤에 방을 나섰다.
그리고 호텔에서 제공하는 마차서비스를 이용해서 영주의 저택으로 향했다.
난 이젠 익숙해져버린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엘리자베스의 방으로 올라갔다.
엘리자베스는 언제나처럼 내가 도착하자마자 함께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그렇게도 나랑 대화하는 걸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걸까?
이유가 궁금하긴 하지만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어서와, 레베카! 보고 싶었어!”
엘리자베스는 나를 아주 반갑게 맞이하며 열렬하게 포옹을 해주었다.
그녀의 큰 가슴이 주는 기분 좋은 압박감에 나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잘 지냈어?”
“엄청 바쁘긴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았어.”
엘리자베스는 빠른 속도로 꼬리를 바닥에 툭툭 치면서 말했다.
용인족은 기분이 좋으면 저런 식으로 꼬리를 이용해서 소리를 낸다.
직접 보니까 제법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구나. 아참, 카르디아에서 네 기사단을 봤어.”
“아, 걔네들? 거기서 큰 일이 났다고 해서 급파했어. 조만간에 제국군에서 보낸 지원부대가 도착하면 다시 복귀시킬 거야.”
“난 네가 기사단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어. 다른 형제자매들도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는 거야?”
“아니. 나만의 특권이야.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제국에 지대한 공헌을 하질 못했거든. 마침 황위계승을 완전히 포기한 상태라 법적인 문제도 전혀 없었지.”
“어차피 네가 제일 잘났는데 아예 황제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난 지금처럼 연구개발에 몰두하는 게 좋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거든.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보자고한 거야? 설마 나랑 즐기고 싶어서?”
“엘리자베스, 그런 농담은 좀 무서워.”
“킥킥, 장난인데 뭘 그렇게 겁을 먹고 그래?”
“네가 황족이니까 그렇지. 어쨌든 널 찾아온 이유는 마법갑옷을 수리하고 구도자를 쓰러뜨리고 얻은 전리품을 보여주고 싶어서야.”
“오, 뭔데? 빨리 보여줘! 아니지, 일단 위로 올라가자.”
나는 엘리자베스와 함께 나선형 계단을 타고 공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의 지시에 따라서 넓은 공간에 마법갑옷을 꺼내서 줄을 세웠고, 작업대 위에 엘리사의 한손장검을 올려두었다.
구도자의 가면이 발생시키는 마법방어막조차도 간단하게 갈라버리는 검의 원리를 알아낸다면 비슷한 능력을 가진 마력탄도 분명 만들어낼 수 있을 거다.
물론 그건 문외한인 내가 아니라 전문가인 엘리자베스가 맡아서 할 일이다.
“수리는 오늘 오후쯤에는 다 끝날 거야. 그나저나 이 귀한 물건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정말 아름다워.”
엘리자베스 장갑을 끼고서 엘리자베스의 검을 양손으로 조심스레 들어 올려 눈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나를 향해서는 언제나 능글맞고 장난스러우며 유혹적인 눈빛을 보내는 사람이지만 마법무기를 다루는 눈빛은 굉장히 진지했다.
“황녀인 너도 본 적이 없다고?”
“이봐, 황족은 신이 아니야. 아무튼 이건 지금은 재현할 방법이 없는 잃어버린 기술을 기반으로 제작된 마법무기야. 사용자의 마력을 에너지형태로 변환하여 그 자체를 무기로 삼는 오래된 방식이지.”
“검기나 뭐 그런 걸 쏘는 무기인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근접무기야. 위력은 어땠어?”
“마법방어막은 그냥 관통하고 마법갑옷은 종잇장처럼 썰어버리더라.”
“대단하네.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위력이야.”
엘리자베스는 감탄을 하면서 검을 이상한 기계 같은 것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현미경 같은 것으로 기계 안을 들여다보더니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와! 이건 제국의 영토 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금속인 오리칼쿰으로 만들어졌어.”
“오리칼쿰?”
“그래, 오리칼쿰. 그 어떠한 금속보다도 단단하면서도 가벼운데다 가공이 어렵지 않고 녹이 전혀 슬지 않아. 마력과의 궁합도 제일 좋고.”
“그거 정말 대단하네.”
“아직 끝이 아니야. 오리칼쿰 무기는 가공된 뒤의 형상을 기억해서 구부러지거나 휘어도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가고, 만에 하나 부러지더라도 파편을 모아서 모양을 잡은 뒤에 오리칼쿰 주괴를 위에 얹어놓기만 해도 원상복구가 돼.”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당연하지!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과학적 사실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아!”
엘리자베스는 귀엽게도 발끈하고야 말았다.
자존심이 걸린 일이라서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는 모양이다.
“하하하! 알았어. 믿어줄게. 그럼 이걸 참고하면 비슷한 무기를 만들 수 있을까?”
“그건 장담할 수 없어. 이미 쓰지 않는 고대의 마법술식이 들어가서 분석하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뭐야, 이거? 인간의 마법술식이잖아! 이게 정말 작동을 하다니?”
엘리자베스는 갑자기 화들짝 놀라더니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마치 신세계를 발견한 탐험가처럼 극도로 흥분해서는 숨을 헐떡거렸다.
내가 너무 대단한 걸 가져와버린 것 같다.
“넌 정말이지 창조신께서 내게 내려주신 보물이야! 네 덕분에 나는 학계의 그 누구도 넘지 못했던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천사의 시대는 끝나고 인간의 시대가 오는 거지!”
“그건 너한테 주는 선물이니까 마음대로 뜯어보도록 해.”
“고마워! 꼭 멋진 무기를 만들어서 너한테 보답할게. 약속해!”
엘리자베스는 새끼손가락까지 걸어가면서 내게 다짐했다.
역시 한 자루는 엘리자베스에게 가져다주기를 잘한 것 같다.
“기대할게. 대신에 너무 무리하지는 마. 친구가 건강이 나빠지면 마음이 아프다고.”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대접을 받는 사람 중 하나니까.”
“그리고 인류를 더 높은 단계로 도약시킬 사람이기도 하고.”
“히히히, 너무 그렇게 띄워주지는 마. 부담스럽단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내 앞에서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내면서 아양을 떨었다.
분명 친구에게 보일 법한 행동은 아니다.
귀엽긴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받아줄 것도 아니니 너무 대놓고 좋아하지는 말자.
“레베카, 다음 여행지는 어디니?”
“볼르디아라는 백작령이야.”
“아, 거기? 작년 여름에 갔었는데 그럭저럭 괜찮은 도시였어. 그런데 노르헤임으로 가려면 볼르디아로 갈 게 아니라 바로 사테르디아 후작령으로 올라가는 게 더 빨라.”
“최대한 빨리 갈 필요는 없어서 큰 도시는 하나씩 들렀다 가려고 해.”
“그런 거였구나. 난 왜 비효율적인 선택을 하나 싶었어. 볼르디아에 가면 검투경기장에 들러봐. 북부지역에선 제일 큰 곳이라서 볼거리도 많아.”
“딱히 관심은 없지만 네가 추천하는 곳이니 한 번쯤 들러볼게. 그런데 너무 가학적이면 안 볼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너처럼 노예를 사람으로 취급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야.”
“확실히 그런 사람 별로 없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선 오히려 나 같은 사람들이 더 많았어.”
“넌 운이 좋은 거야. 아무튼 그 검투경기장은 네가 말하는 그런 식의 운영은 하지 않으니까 안심해. 주인장이 애들도 볼 수 있는 건전한 경기를 추구하거든.”
“검투경기와 건전함이 동시에 성립할 수가 있어?”
“뭐라더라? 아, 그래. 스포츠라고 하더라.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마음에 들더라고.”
나는 스포츠라는 말에 조금 놀라도 말았다.
사람 목숨이 가벼운 시대에 스포츠를 할 것을 주장하는 걸 보면 분명 나랑 같은 세상 출신이겠지.
제발 이번에는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면 좋겠다.
또 막시안이나 엘카렌처럼 엇나간 인간이라면 좀 우울해질 것 같다.
“너 혹시 스포츠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
“아, 아니. 처음 들어봐.”
“그렇지?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서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야. 그래도 최근에는 두각을 나타내는 음... 운동선수들이 등장했다고 해. 난 그 중에서 얘가 제일 좋더라.”
엘리자베스는 서랍에서 사진을 하나 꺼내서 내게 보여주었다.
거기엔 얼핏 보기에도 나보다 키가 큰 건강미 넘치는 젊은 여성이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어때? 멋지지 않아? 복근 핥아보고 싶어. 기왕이면 이 수박 같은 가슴도 빨고 싶어.”
“나 참, 그렇게 마음에 들면 구입하면 되잖아.”
“검투경기장의 규정상 운동선수로 등록된 노예는 팔지 못하게 되어있어. 노예가 진심으로 원한다면 몰라도.”
“너 생각보다 법을 잘 지키더라.”
“황족이라고 멋대로 행동했다가는 우리 무서운 아버지 손에 목이 날아가거든. 우리 둘째 언니랑 넷째 오빠가 그렇게 죽었어.”
엘리자베스는 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황제는 알면 알수록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단한 인간인 것 같다.
어쨌든 B급 승급의뢰를 받아들이고 완수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기, 미안한데 오늘의 만남은 여기까지하자. 이걸 연구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알았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아, 가기 전에 지금 머무르는 숙소의 주소 남겨두고 가. 마법갑옷 수리가 끝나면 바로 그쪽으로 보내줄게.”
나는 엘리자베스의 요청에 따라서 근처에 있는 쪽지에 내가 머무르는 호텔의 주소와 방의 호수를 적었다.
그리고 그걸 엘리자베스의 주머니에 쏙 집어넣으며 그녀를 뒤에서 포옹해주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또 보자.”
“응. 여행이 안전하기를 기도할게.”
나는 엘리자베스의 배웅을 받으며 공방에서 나왔고, 역시나 빠른 걸음으로 영주의 저택에서 나갔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이리스가 만들어 줄 요리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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