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15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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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한 겨울의 철새도래지에서 엄청난 규모의 철새무리를 봤었다.
어마어마한 수의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라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으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지금 하늘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끔찍하기 짝이 없는 마물들이었다.
도시 전체에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사람들은 잔뜩 겁에 질린 채 살기 위해서 도망쳤다.
비행마물무리가 도시의 성벽에 가까워지자 놈들을 이끄는 상급마물의 몸에 매달려있던 엄청난 수의 하급마물들이 성난 벌떼처럼 날아올랐다.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대공사격을 퍼부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중급마물에게 붙잡혀 공중에서 산 채로 찢기거나 전신에 달라붙은 하급마물에게 물어 뜯겨 순식간에 뼈만 남는 식으로 말이다.
성벽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고, 마물의 군세는 도시의 중심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밀고 들어왔다.
신전의 첨탑 꼭대기에 있는 이리스는 적들이 마력저격소총의 사정거리에 들어오자마자 사격을 개시하여 총성이 들리는 족족 중급마물들을 격추시켰다.
날개길이가 거의 5미터는 될 것 같은 중급마물들은 충분한 방어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이리스가 쏘는 대구경소총탄에는 버티지 못했다.
이리스의 저격에 자극을 받은 하급마물들이 첨탑을 향해서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지만 놈들도 모두 이리스의 신속하고 정확한 사격실력에 모조리 사살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물들은 아주 많이 남아있었고, 놈들의 무리는 내 사정거리까지 빠르게 다가왔다.
‘라우라, 에리카. 내가 있는 곳으로 올라와.’
나는 두 사람에게 명령을 내린 뒤에 마력소총을 공중의 적들을 향해서 조준했고, 아직은 미숙한 장거리저격 스킬에 의존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첫 발은 보기 좋게 빗나갔지만 두 번째 사격은 내가 조준하고 있던 중급마물의 몸통에 정확히 명중했다.
놈은 비틀거리면서 지상으로 추락하다가 다시 자세를 잡고 원래 고도로 날아올랐다.
이리스에 비해서 화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내 곁으로 온 라우라, 에리카와 함께 계속해서 하늘로 총알을 쏘아댔다.
세 명이서 화력을 집중하니 추락하는 놈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고,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지자 자동으로 약점조준 스킬이 발동되어 보다 수월하게 중급마물들을 격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떼를 지어서 달려드는 하급마물들은 마력산탄을 쏴서 한꺼번에 쓸어버렸다.
상대적으로 낮은 고도에서 추락한 놈들은 날개가 찢어진 상태에서 괴성을 지르며 우리에게 돌진했다.
라우라와 에리카가 마력총으로 대응하는 사이에 나는 그냥 발로 차거나 밟아서 터뜨려버렸다.
우리가 마물들을 상대로 교전을 벌이는 사이에, 도시 곳곳에서 대공사격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지도창을 보니 파란 이름들과 교전 중이던 빨간 이름들이 대부분 사라져서 아군이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마물들은 곳곳에서 쏟아지는 대공사격을 맞아가면서도 꾸역꾸역 도심의 상공으로 들어오더니 곧 제자리비행을 하기 시작했다.
“저것들이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어? 다들 피해!”
나는 뭔가 불길함을 느끼며 마물들을 올려다보다가 놈들의 움직임에서 변화를 감지하자마자 라우라와 에리카를 데리고 건물 밑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우리가 있던 지붕 위로 중급마물들이 폭격기에서 쏟아 붓는 폭탄처럼 내리 꼽혔다.
나는 놈들이 자폭이라도 한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중급마물들은 몸을 둥글게 말아서 최대한 방어력을 높인 상태에서 지붕처럼 무너뜨리는 것으로 충격을 분산시킬 수 있는 구조물을 향해서만 달려들었다.
놈들은 박살난 지붕에서 기어 나와서 몇 마리씩 짝을 지어서 주변으로 흩어졌다.
나는 놈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머리 위를 지나치는 커다란 그림자의 움직임에 서둘러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내 눈에 상급마물이 신전의 첨탑으로 돌진하여 그것을완전히 박살을 내는 모습이 보였고, 나는 즉시 이리스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이리스! 너 괜찮니? 대답해, 이리스!’
‘전 무사하니 걱정 마세요. 미리 대피했거든요.’
‘정말 다행이다... 우리가 그쪽으로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라우라와 에리카를 데리고서 신전으로 향했다.
난 가는 길에 엘카렌의 가면을 썼고, 무장드론을 새로 소환해서 각자에게 배정했다.
그리고 라우라와 에리카에게는 미안하지만 남는 구도자의 가면이 없으니 하급조직원의 가면이라도 씌워주었다.
우리가 신전으로 가는 동안, 사방에서 공포에 찬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그들의 생명이 꺼져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사람들을 모두 구해주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명을 듣고 가봤자 이미 희생당한 뒤니까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눈앞의 무고한 생명마저 무시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신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연히 마주친 울부짖는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호의를 베풀다보니 제법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짊어지게 되었다.
신전에는 파란 이름들이 많으니 거기까지만 데려가면 분명 모두 안전해질 것이다.
“정지! 적이야! 다들 몸을 숨겨요!”
나는 코너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진 아가리가 달린 역겨운 대가리를 불쑥 내미는 중급마물 3마리를 보자마자 사람들을 피신시켰다.
기다란 목과 뒷다리보다 훨씬 긴 앞다리에 붙어있는 연결된 피막이 달린 날개, 4족 보행을 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익룡이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녀석들은 등에 붙어있는 촉수과 꼬리의 날카로운 촉수를 마구잡이로 흔들면서 달려들었고, 우리는 함께 마력소총으로 대응했다.
한 놈은 무장드론들이 쏘는 빙결탄에 발목이 잡혔고,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염탄에 얻어맞고 활활 불타오르며 무력화되었다.
그리고 다른 한 놈은 라우라를 목표로 정하고 그쪽으로 대가리를 향했는데, 우리 셋이서 놈에게 집중사격을 가하자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다.
라우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장검을 뽑아서 힘껏 휘둘러 놈의 목을 베어냈다.
우린 빠르게 두 놈들 처리했지만 아직 한 놈이 더 남아있었다.
녀석은 현란하게 공격을 회피하면서 무작정 앞으로 돌진하더니 갑자기 날아올라 우리 뒤쪽에 있는 무방비한 사람들을 죽이려고 들었다.
나는 황급히 마법추진기를 작동시켜서 마물을 공중에서 붙잡고 옆에 있는 건물에 놈을 처박았다.
그리고 놈의 촉수와 아가리가 내 마법갑옷을 마구 후려치고 물어뜯는 사이에 오른팔의 추진 장치를 작동시켜 주먹으로 놈의 몸통을 꿰뚫어버렸다.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면서 날 죽이려고 들던 중급마물은 내가 심장을 손으로 쥐고 뜯어버리자 맥없이 죽어버렸다.
마법갑옷이 좀 긁히고 생체물질이 묻기는 했지만 기능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엘리자베스가 준 마법갑옷이 내가 지금까지 입어봤던 어느 마법갑옷보다도 더 튼튼한 것 같다.
당장 최근에 날려먹은 마법갑옷도 중급마물의 공격에 투구가 박살이 났던 것을 생각하면 단순히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레베카님! 괜찮으세요?”
“응. 방금 마물을 처리했어. 그쪽은 어떠니?”
“지금은 주변에 적이 더 없는 것 같아요.”
“다행이네. 그럼 계속 이동하자.”
나는 라우라에게 대답을 한 뒤에 건물에서 가볍게 뛰어내렸고, 사람들을 다독이며 함께 신전을 향해 나아갔다.
신전 주변에는 카르디아 기사단과 마물들 사이에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 중에는 상급마물이 1마리 포함되어 있었다.
기사들은 하급이나 중급마물을 상대로는 우세를 점하고 있었지만 상급마물의 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마력대포 같은 강력한 무기가 없으면 아무리 마법갑옷을 입은 기사들이라도 상급마물을 상대로는 뾰족한 대응책이 없는 게 현실이다.
특수탄도 중급마물까지나 잘 먹히지 상급마물에게는 크게 효과적이지 못하다.
‘이리스, 상황은 어때?’
‘전 지금 기사님들과 함께 싸우고 있어요. 레베카님은요?’
‘신전 입구 근처까지는 왔는데 피난민들을 데리고 있어서 쉽사리 접근을 못하겠어. 네가 기사들에게 말을 좀 해줄래?’
‘네, 레베카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이리스가 다시 연락을 해주기를 기다리면서 조심스럽게 주변의 상황을 주시했다.
신전 앞에서 날뛰고 있는 상급마물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기껏 지켜낸 사람들이 모두 살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종종 하늘에서 습격해오는 하급마물들을 처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놈들은 우리처럼 마법갑옷을 입은 사람 입장에선 별 거 아니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굉장히 위험하니 신경을 바짝 쓸 수밖에 없었다.
‘레베카님, 곧 기사단 측에서마력대포로 상급마물을 공격한다고 해요. 상급마물을 처리한 뒤에 다른 마물들을 마저 쓸어버리면 그때 들어오라는 말도 전해달라고 했어요.’
‘알았어. 다른 특이사항은 없니?’
‘베로니카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신전의 후문 쪽으로 들어오셨어요. 혼자서 중급마물을 7마리나 죽이면서 오셨다고 해요.’
‘정말? 대단하네... 언니는 다친 곳 없어?’
‘네, 마법갑옷이 손상되기는 했지만 상처 하나 없으세요.’
‘그렇구나. 그럼 나중에 보자.’
‘조심하세요.’
나는 이리스와의 텔레파시를 끝내고, 마력대포가 발사되기만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신전 입구가 열렸고, 거기에 방렬된 마력대포 3대가 상급마물을 향해서 마력포탄을 한꺼번에 발사했다.
상급마물은 기둥이나 다름없는 마력포탄을 얻어맞더니 괴성을 내지르더니 황급히 날개를 펼치고 현장에서 이탈했다.
녀석은 다른 마물들처럼 소모품처럼 다룰 수가 없으니 저런 식으로 후퇴를 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상급마물이 도망가자 기사단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남아있는 마물들을 공격했다.
놈들은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려고 날뛰었지만 마법갑옷을 입은 기사단원들이 몸으로 놈들을 막아섰다.
결국 신전을 공격하던 마물들은 한 사람도 제대로 죽이지 못하고 전멸당하고 말았다.
“마력대포가 좋기는 좋네. 이제 다들 움직입시다.”
나는 전투가 마무리되자마자 사람들을 신전 앞으로 데려갔다.
잠시 승리에 취해있던 기사단원들은 내가 이끌고 온 사람들을 보자마자 재빨리 움직였다.
사람들은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한 명도 빠짐없이 내게 허리를 숙이며 고맙다는 말을 해주었다.
난 지하마을에서와는 달리 이번에는 내가 당장 살리고자 했던 사람들을 모두 지켜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고, 눈물이 다 날 정도였다.
투구를 쓰고 있지 않았더라면 내가 바보처럼 울어버리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말았을 것이다.
“레베카님! 얘들아!”
“이리스!”
나는 우리를 부르면서 달려오는 이리스를 포옹해주었다.
마법갑옷을 입은 상태라서 서로 체온을 나눌 수는 없었지만 행동만으로도 서로의 감정을 충분히 나눌 수 있었다.
잠시 떨어져있었을 뿐인데, 너무나도 반가웠다.
이리스는 나뿐만 아니라 라우라와 에리카도 차례대로 포옹하면서 진한 우정을 나누었다.
“아까 상급마물이 첨탑을 공격했을 땐 진짜 깜짝 놀랐지 뭐야.”
“아! 그땐 저도 식은땀이 막 나더라고요. 마안 덕분에 미리 위협을 알아차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죠.”
“아무튼 네가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그런데 베로니카 언니는?”
“방금 전에 생존자들을 찾겠다면서 다른 기사님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셨어요.”
“뭐? 환장하겠네.”
나는 이리스가 하는 말에 서둘러 지도창을 펼쳐서 언니의 행방을 찾아보았다.
베로니카 언니는 신전의 후문에서 북동쪽을 향해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바로 달려가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대한 빨리 베로니카 언니에게 가자. 우리가 없는 사이에 다른 구도자와 마주치면 언니가 너무 위험해져.”
나는 내 사랑들을 대동하고서 전속력으로 베로니카 언니에게로 뛰어갔다.
다행히 도중에 마주치는 마물은 없었고, 안타깝게도 생존자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보다 빨리 베로니카 언니와 합류할 수 있었다.
베로니카 언니 주변에는 세르자가 날고 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바로 내 어깨로 날아와 앉았다.
“베로니카 언니!”
“레베카, 그렇지 않아도 너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어.”
베로니카 언니는 갑자기 들리는 내 목소리에도 놀라지 않고 날 반겨주었다.
언니가 내가 자기를 찾아오길 기대하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언니, 지금은 이렇게 막 돌아다니면 안 돼. 언제 엘리사가 언니를 공격할지 모른다고.”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지옥 같은 곳에서 방치할 수는 없어. 모름지기 기사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무고한 백성을 한 명이라도 더 지켜내야 해.”
베로니카 언니는 언제나처럼 기사다운 자세를 강조했다.
난 차마 언니의 신념을 대놓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세상엔 목숨보다 신념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이 있고, 베로니카 언니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상대방의 신념을 꺾을 수 없다면 포기해버리든가 함께 손을 잡아주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
나는 당연히 베로니카 언니의 손을 잡아주었다.
베로니카 언니를 포기하는 건 나한테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알았어. 대신 무조건 나랑 같이 움직이자. 알았지?”
“물론이지 내가 곁에 있어주면 정말 든든할 거야.”
베로니카 언니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언니가 날 필요로 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기뻤다.
“그런데 어디로 갈 생각이야?”
“북동쪽의 주거지역으로 가려고 해. 거기에 제일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라고.”
“마침 콘라드 씨의 집이 그쪽에 있어.”
“그래? 그럼 겸사겸사 콘라드와 가족들의 안전도 확인해보자.”
베로니카 언니는 콘라드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반가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10년 전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콘라드에게 신세를 좀 진 게 아닐까 싶다.
“베로니카님, 이제 슬슬 이동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사로운 일로 시간을 끌어서 미안하군. 어서 가세나.”
베로니카 언니는 다른 기사가 하는 말에 바로 나와의 대화를 끝내고 움직였다.
나는 부디 콘라드의 가족들에겐 피해가 없기를 바라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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