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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157화 (157/271)

〈 157화 〉 156화

* * *

어젯밤에는 얌전히 술을 마셨다.

내가 술에 취하는 일이 없도록 다짐한데다 베로니카 언니가 자제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빌란드르 와인의 풍미는 내가 지금까지 마셔봤던 그 어떠한 와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다.

아마 그래서 더욱 과음을 자제했던 게 아닐까 싶다.

하루 만에 다 퍼마시기에는 너무 아까울 정도로 훌륭한 술이니 말이다.

덕분에 우리는 숙취에 시달리는 일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저택을 나섰다.

베로니카 언니는 갑작스러운 ‘출장’에 걱정이 앞선 남편 알론과 아직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아들 로베르트에게 입맞춤과 포옹을 해주고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베로니카 언니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좋지 않은 일로 가는 거라서 아쉬웠다.

언젠가 진짜 여행을 함께 떠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네 마법가방은 정말 편리하네. 마법갑옷처럼 엄청 큰 것도 간단하게 넣을 수 있잖아.”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것도 보관할 수 있어. 일단 이동이 가능한 물체는 다 가능한 것 같더라고.”

“정말 신기해. 그게 기사단에 널리 보급된다면 병참문제로 골머리를 썩일 일은 없을 거야. 안 그래도 요 며칠 동안 그것 때문에 미치는 줄 알았거든.”

“언니, 솔직히 말해봐. 그 골치 아픈 업무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날 따라온 거지?”

“얘가 못하는 말이 없네. 난 아무리 일이 힘들어도 도망치지 않아. 단지 휴식시간을 좀 가지고 싶은 뿐이야.”

“그게 그거잖아!”

“일에서 도망치는 것과 잠시 쉬는 건 차원이 다른 거란다. 후자는 어쨌든 결과를 낼 수 있거든.”

“알았어. 언니 말이 맞는다고 치지 뭐.”

나는 내 농담에 진지하게 받아치는 베로니카 언니의 태도에 두 손을 들었다.

그나저나 베로니카 언니가 오늘따라 되게 귀여워 보인다.

항상 기사단의 부단장 혹은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다가 마냥 자유로운 모습을 보아서 그런 것 같다.

“레베카, 너 뭔가 기분이 좋아 보이네?”

“그야 언니랑 같이 여행을 가는 게 처음이라서 그렇지.”

나는 베로니카 언니에게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난 내가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끼를 부리게 될 줄은 몰랐다.

내 사랑들에게도 이런 행동은 좀처럼 하질 않았는데 말이다.

“이번엔 여행이 아니라 출장이나 마찬가지인데도?”

“응. 그냥 언니가 곁에 있으니까 좋아.”

“내 동생은 참 귀엽기도 하지. 다음에 진짜 여행을 가면 같이 신나게 즐기도록 하자.”

“기대하고 있을 게.”

나는 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감촉을 만끽하며 대답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언니에게 기대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유부녀를 상대로 이런 애틋한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되는데...

정신 차리자. 베로니카 언니를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어.

이건 그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는 이기적인 감정일 뿐이야.

내가 해서는 안 될 짓에 대해서 진지하게 선을 긋는 사이에 특수상점에 도착했고, 곧장 전송실로 가서 카르디아로 워프했다.

“이거 정말 기분 이상하다. 갑자기 바깥 풍경이 바뀌다니 너무 신기해.”

“나도 처음엔 그랬어. 저번에도 말했었지만 이게 바로 내가 언니를 보고 싶으면 바로 보러갈 수 있는 이유야.”

“넌 정말 신기한 능력이 많은 사람이야.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베로니카 언니는 뭔가를 꿰뚫어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 시선을 회피했다.

여태까지 언니에게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한 게 괜히 마음에 걸렸다.

그건 딱히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만한 거짓말도 아닌데 말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말할 걸 그랬나싶기도 하다.

“사실 내가 좀 특별한 부분이 있긴 하지. 그만큼 이상한 놈들이 많이 달라붙는 것 같기도 하고.”

“언젠가 가면쟁이들은 너에게 관심을 보인 걸 후회할 날이 올 거야. 내 직감이 그래.”

“진짜 그러면 좋겠어. 일단 나가보자.”

우리는 특수상점을 나와서 카르디아의 무너지고 불탄 거리와 마주했다.

다행히 어제도 공격이 없었는지 내 기억과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말 끔찍한 상황이구나.”

언니는 눈앞에서 펼쳐진 전투와 학살의 흔적들을 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진짜배기 기사로서 백성들을 굉장히 소중히 여기는 언니 입장에선 정말 화가 나는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언니가 공식적으로 파병을 온 것이 아니라 출장을 빙자해서 사적인 이유로 온 것이라서 대놓고 도울 수가 없었다.

언니의 말에 따르면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하더라도 일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일종의 간섭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엘리사를 처치하면 더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거야.”

“네 말이 맞아.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야겠지. 우리 예상대로 구도자 엘리사가 내가 아는 엘리사라면 날 미끼로 쓰면 바로 반응이 올 거야.”

“뭐? 그건 너무 위험해. 그러다 저격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작전을 잘 짜야지. 게다가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면 충분히 날 보호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베로니카 언니는 나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난 그게 기쁘면서도 엄청 부담스러웠다.

내가 실수하면 언니의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소리니까.

“음... 미끼작전을 세우기에 앞서서 정찰부터 하도록 하자. 내가 지도창을 보는 동안, 이리스가 도시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마안으로 주변의 높은 건물들을 주시하고, 라우라와 에리카는 각자 맡은 곳에서 드론으로 정찰하는 거야.”

“드론? 그건 뭐니?”

“쉽게 말해서 날아다니는 마법도구 같은 거야. 정찰드론과 무장드론으로 구분돼. 시야를 공유할 수도 있지. 바로 보여줄게.”

나는 드론소환스킬로 정찰드론을 소환하여 베로니카 언니에게 보여주었다.

“아! 이거 저번에 꽃놀이를 할 때 네 주변에 날아다니던 그거구나? 난 그냥 마법으로 움직이는 장난감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대단한 기능을 가졌네. 나도 쓸 수 있어?”

“아쉽지만 나와 내 노예로 등록된 사람만 사용할 수 있어.”

“그래? 어쩔 수 없지.”

베로니카 언니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몹시 섭섭해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그래서 나는 세르자도 소환해서 베로니카 언니의 관심을 돌려보기로 했다.

“이 녀석은 내가 최근에 길들인 매야. 이름은 세르자라고 해.”

“어머나, 귀여운 친구... 히익! 날 물려고 하네.”

나는 베로니카 언니가 뻗는 손을 노리던 세르자를 통제했고, 언니를 거부하지 않게끔 명령했다.

그러자 세르자는 얌전한 태도로 베로니카 언니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말을 잘 듣는 것은 좋지만 이건 길들였다기보다는 세뇌를 한 것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미안, 얘가 좀 까칠한 성격이라서 말이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에리카 말고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을 정도야.”

“역시 에리카는 동물을 다루는 솜씨가 좋구나. 그런데 세르자는 이번 작전에 어떤 식으로 이용하려고 그러니?”

“드론처럼 시야공유를 할 수 있어. 드론보다는 훨씬 사람들에게 익숙한 동물이고 소음도 나질 않으니 경우에 따라서는 드론보다 훨씬 더 유용하다고 생각해.”

“확실히 이 드론이라는 건 좀 시끄럽긴 해.”

“나중에 스킬... 아니, 드론소환마법을 더 연마하면 조용한 드론을 소환할 수 있을 지도 몰라.”

“그땐 나한테 또 구경시켜줘. 자, 그럼 이제 마법갑옷으로 갈아입는 게 어떨까? 언제 위험해질지 모르잖아.”

“언니 말이 맞아. 특수상점 안으로 들어가서 갈아입자.

나는 일행들과 함께 특수상점의 창고로 향했다.

그리고 마법갑옷을 줄줄이 꺼내놓고 다함께 그것으로 갈아입었다.

“베로니카 언니. 언니는 우리가 정찰을 끝낼 때까지 여기서 대기해줘. 세르자랑 같이 있으면 심심하진 않을 거야.”

“알았어. 여기서 얌전히 네 말을 듣고 있을 게.”

베로니카 언니는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난 솔직히 언니가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내 말을 잘 들어줄 줄은 몰랐다.

모든 일에는 정보가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얘들아, 잠깐 주변의 상황을 살펴보고 나가도록 하자.”

나는 내 사랑들을 대기시킨 상태로 지도창을 펼치고 반경 500m 이내에 존재하는 적대적인 사람을 탐색했다.

하지만 빨간색으로 표기된 이름 중에서 ‘엘’로 시작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지금까지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구도자는 본명이 아니라 ‘엘’자 돌림을 쓰는 이름으로만 표기되니 굳이 다른 사람들을 일일이 의심할 필요는 없다.

“역시 이 주변에는 없어. 베로니카 언니, 그럼 우리 다녀올게.”

“응. 다들 조심해서 다녀와.”

우리는 베로니카 언니의 배웅을 받으며 특수상점에서 나왔다.

그리고 도시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신전의 첨탑이 있는 도시의 중심부로 향했다.

나는 이동하는 와중에도 계속 지도창을 펼쳐놓고 빨간 이름들을 주시했는데, 아직까지 구도자로 의심되는 이름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다 오늘 허탕을 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러자 라우라가 내 생각을 눈치 챘는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레베카님, 엘리사가 이미 카르디아에서 먼 곳으로 떠났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제0기사단이 지원을 온 뒤로 한 번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베로니카 언니와 우리 모두가 헛걸음을 하게 된 거겠지. 하지만 왠지 난 금방 엘리사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역시 직감이라는 건가요?”

“못 미덥게 들리겠지만 그게 맞아.”

“다른 건 몰라도 레베카님의 불길한 예감은 잘 맞아떨어지니 이번에도 믿어봐야겠어요.”

“너 지금 나 놀리는 거 맞지?”

“설마요. 그저 레베카님을 신뢰해서 그런 거랍니다. 후후후.”

라우라는 장난스럽게 웃더니 자신의 임무로 돌아갔다.

그녀는 우리가 엘리사와 대면하는 걸 별로 내켜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내가 반쯤은 베로니카 언니를 위해서 움직이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 거겠지.

우리는 금방 신전 앞에 도착했고, 사제들에게 협조를 구해서 이리스를 첨탑 위로 보냈다.

나는 이리스에게 구도자의 가면을 씌워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엘레아노르의 말이 사실이라면 구도자의 가면을 쓰고 있으면 하급 조직원들의 방어막은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 각자에게 정찰드론을 배정해서 함께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정찰드론의 시야가 닿는 곳은 반경 500m 밖이라도 인류추적스킬이 작동하기 때문에 지도창에 보다 폭 넓은 정보가 들어왔다.

도시 곳곳에 빨간 이름들이 뭉쳐있는 곳이 몇 군데 있었고, 그 붉은 군집은 교묘하게 파란 이름들을 피해 다니는 모습을 보였다.

아마 이 녀석들이 가면쟁이일 확률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레베카님, 남서쪽 급수탑 위에 가면쟁이가 하나 있어요. 지도창에 뜨나요?’

‘구도자는 아니야. 처리해버려.’

‘네, 레베카님.’

이리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총성이 울렸고, 지도창에서 빨간 이름이 하나 지워졌다.

조직원이 저격을 당하면 그쪽에서도 반응을 보이겠지.

‘레베카님, 주변의 높은 건물들에서 가면쟁이 저격수들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어요. 모두 처리할까요?’

‘적은 네 위치를 확인했니?’

‘아니요. 아직은 모르고 있어요.’

‘안전에 유의하면서 침착하게 처리하도록 해. 저격수 중에 구도자가 있으면 네가 위험해질 수 있어.’

‘네, 조심할게요.’

나는 이리스의 대답을 듣고는 그녀가 방아쇠를 당겨서 내는 총성을 들으며 지도창을 주시했다.

곳곳의 빨간 이름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다가 이리스가 재장전을 하는 사이에 첨탑 쪽으로 대응사격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리스는 전혀 피격당하지 않고 가면쟁이 저격수들을 모두 처리했다.

한동안 울려 퍼지던 총성은 멎었고, 지상에서는 불안감에 떠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지만 적의 움직임은 없었다.

‘레베카님, 적 저격수들을 모두 처리했어요. 더는 높은 곳으로 올라오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요.’

‘잘 했어! 역시 이리스 넌 대단한 사람이야.’

‘칭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히힛.’

‘혹시 모르니까 하늘을 좀 봐줄래? 적들이 상급마물을 바로 투입할 지도 몰라.’

‘네, 레베카님.’

나는 이리스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린 뒤에 아직 지상에 남아있는 빨간 이름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저격수들이 솎아내진 뒤로 몇몇 빨간 이름 군집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파란 이름들도 총성을 들었는지 속도가 빨라졌다.

곧 서로 다른 색을 가진 이름들이 대로와 골목길 같은 곳에서 마주쳤고, 사방에서 총성이 들리며 교전의 시작을 알렸다.

본의 아니게 도시를 전장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가면쟁이들이 수세에 몰리면 엘리사나 다른 구도자가 구경만 할 수는 없게 될 것이다.

‘레베카님! 서쪽에서 상급마물들이 날아오고 있어요!’

‘몇 마리야?’

‘다섯, 아니 일곱이에요! 중급마물은 거의 1백 마리는 넘을 것 같아요.’

나는 이리스의 보고를 듣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상급마물은 하나만 하더라도 엄청 벅찬 상대인데 무려 7마리가 몰려오다니 말이다.

거기다 중급마물까지 떼로 몰려오는 것을 봐서는 도시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것이다.

아직 아군들이 도심에서 가면쟁이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마물들이 몰려오고 있는 건 좋지 않은 상황이다.

내가 보는 것보다 아군의 병력이 훨씬 더 많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마어마하네. 혹시 상급마물에 누가 타고 있지는 않니?’

‘두 명이 타고 있어요. 하나는 하얀색 가면이고 다른 하나는 하얀색과 검은색 줄무늬가 대각선으로 그려진 가면을 쓰고 있어요.’

‘둘이나 된다고? 골치 아프네. 일단 거기서 저격으로 중급마물의 수를 최대한 줄이다가 마물들이 널 발견하면 바로 첨탑에서 내려와.’

‘네, 레베카님.’

나는 이리스에게 명령을 내린 뒤에 마법추진기를 사용해 근처의 건물 지붕 위로 올라가서 쌍안경으로 서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리스의 말대로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상급마물들과 그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 흐릿하게 보였다.

내가 과연 둘이나 되는 구도자를 상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다.

여기서 도망치면 지하마을처럼 많은 사람이 죽어버릴 테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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