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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156화 (156/271)

〈 156화 〉 155화

* * *

나는 아쉬운 이별을 뒤로하고 알리시아의 저택에서 나왔다.

엘레나와 아이리스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혀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서 저택을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미련을 가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얼른 털어냈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지도창을 보니, 내 사랑들이 특수상점에 모여 있었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생각보다 빨리 특수상점 앞에 도착했고, 곧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과 마주치고 말았다.

라우라와 이리스, 에리카가 모두 촉수에 붙들린 채로 공중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내 사랑들이 촉수에 몹쓸 짓을 당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옷이 축축하게 젖은 상태에서 끈적끈적한 점액이 몸에 잔뜩 묻어있으니 제법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나 참, 너희들 지금 뭐하고 있는 거니?”

“병뚜껑을 한 번 열어봤을 뿐인데 이런 사태가 벌어졌지 뭐에요.”

“병뚜껑? 아, 이거 말하는 거구나.”

나는 라우라의 근처에 떨어져있는 병을 들어서 분석스킬을 사용했다.

설명에 따르면 이 병 안에 들어있던 촉수는 애무용 촉수였다.

섬세한 움직임으로 성감대를 자극하지만 삽입은 하지 않는 종류다.

문제는 촉수를 통제할 수 있는 스킬을 보유한 사람의 명령에만 따르기 때문에 스킬이 없는 사람들은 일종의 공격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내 사랑들은 분석스킬을 사용하지 못하니 이런 상황에 직면해버린 거다.

“다들 얌전히 있어봐. 내가 어떻게든 꺼내줄게.”

나는 촉수에 분석스킬을 사용해서 위험성을 제대로 확인한 뒤에 군체의식통제(촉수) 스킬을 사용하여 녀석을 굴복시켰다.

다행히 촉수는 스킬이 발동되는 즉시 나에게 복종했고, 나는 녀석에게 붙잡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놓아줄 것을 명령했다.

촉수는 내 사랑들을 얌전히 내려놓았지만 내가 다른 명령을 내려 보기도 전에 갑자기 말라비틀어져서 죽어버렸다.

애초부터 일종의 유통기한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스킬과 호환이 맞지 않아서 결국 죽어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허무했다.

“감사합니다, 레베카님.”

“너희들이 전부 공중에 떠있어서 깜짝 놀랐어. 그런데 왜 하필이면 촉수를 건드린 거야? 설마 저걸 나한테 써먹을 생각이었니?”

“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저희들이 다 함께 써볼 생각이었거든요. 그래서 시험 삼아서 살펴보려다가 방금처럼 대롱대롱 매달려버렸어요. 히힛.”

라우라는 멋쩍게 웃으면서 애교 섞인 윙크를 했다.

그나저나 내 사랑들이 이제는 촉수에도 관심을 보이다니, 뭔가 무섭네.

플레이방식이 다양해지는 건 나쁘지 않지만 거기에 너무 빠져버리면 정상적인 섹스를 하지 않게 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든다.

이럴 땐 내가 주도권을 확실히 가져가는 게 좋겠지.

“얘들아. 다음부터는 촉수처럼 잠재적인 위험성이 있는 것들을 구입할 때는 반드시 내 허락을 먼저 받도록 해. 알아들었니?”

“네, 레베카님.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방금 전까지 장난스러운 태도를 보이던 내 사랑들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 숙여 사과했다.

난 딱히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그런 게 아닌데 말이다.

내 표정이 그렇게 심각했었나?

흐음... 거울을 보니 얼굴을 좀 펴야할 것 같긴 하다.

“자, 자. 다들 긴장 풀고 고개 들어. 이번 일이 그렇게 심각한 일도 아니니까. 일단 이걸로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도록 해.”

나는 가방에서 물수건과 물통을 꺼내서 내 사랑들에게 넘겨주었고, 마른 수건을 꺼내서 들고 있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하나씩 건네줬다.

보기에는 엄청 끈끈해 보이는 촉수의 점액은 흐르는 물에 쉽게 쓸려나갔고, 악취도 나지 않아서 목욕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깔끔해졌다.

다들 한시라도 빨리 제대로 씻고 싶어 하는 분위기였지만 당장 특수상점에는 샤워시설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다 끝났으면 프랑카로 넘어가자.”

나는 옷을 갈아입은 내 사랑들을 데리고 전송실로 들어가 프랑카로 워프했다.

프랑카에 온 목적은 베로니카 언니에게 엘레아노르에 대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다.

이건 오직 베로니카 언니를 위한 일이지 엘레아노르를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특수상점에서 나와 이제는 고향처럼 느껴지는 거리를 걸어서 베로니카 언니가 있는 프랑카 기사단 본부로 향했다.

기사단 본부로 들어가자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사람들이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넸고, 나는 그 친절한 인사들을 모두 다 받아주면서 베로니카 언니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내가 집무실로 가까이 다가가자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가 내게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오?”

“부단장님께 중요한 말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공적인 일이오? 아니면 사적인 일이오?”

“부단장님께 지극히 중요한 사적인 일이라고나 할까요.”

“알겠소. 문을 열러드리리다.”

기사는 나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의외로 쉽게 문을 열어주었다.

공적인지 사적인지 물어볼 때만 하더라도 기다리라고 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아마도 내 진지한 태도가 통한 게 아닐까? 아니면 빼어난 미모라든가? 후후후.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서류더미와 씨름을 하고 있는 베로니카 언니의 안타까운 모습이 보였다.

안경을 쓰고 있는 언니는 며칠 밤을 샌 사람처럼 얼굴이 퀭했다.

부단장이니 신경써야할 게 많겠지만 충분히 쉬어가면서 했으면 좋겠다.

“레베카! 내 사랑하는 동생!”

베로니카 언니를 나를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보고 싶었어, 베로니카 언니.”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서 한껏 반가움을 표했다.

언니가 마법갑옷이 아니라 기사단 제복을 입고 있어서 마음껏 안길 수 있어서 좋았다.

“카르디아가 공격받았다는 소식을 듣고서 네 걱정을 엄청 많이 했었어.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난 모험가길드에서 받은 의뢰 때문에 어느 뱀파이어족 마을에서 머무르고 있었어. 의뢰를 끝내고 돌아오니까 도시가 난리가 났더라고.”

“그랬구나. 아무튼 다시 만나서 기뻐. 오늘은 우리 저택에서 자고 갈 수 있니?”

“응. 이번엔 하루만 신세를 질 게.”

“그래.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너랑 같이 저녁을 먹고 술도 마셔야겠어.”

“마침 나한테 빌란드르 가문의 한정판 와인이 있어.”

나는 치트가방에서 와인상자를 꺼내서 베로니카 언니 앞에서 열어보였다.

베로니카 언니는 와인병을 들어보면서 싱글벙글 웃었다.

벌써부터 나와의 술자리가 기대되는 모양이다.

“이 귀한 건 어디서 났다니?”

“이번에 새롭게 제르디아 기사단의 단장이 된 가르탱 빌란드르랑 친구가 됐거든. 그 친구한테서 선물로 받았어.”

“레베카, 넌 정말 인복이 많은 사람이야. 가는 곳마다 좋은 친구가 생기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언니가 말했던 콘라드도 좋은 사람이었어. 내친 김에 더 놀라운 사실 하나 가르쳐줄까?”

“뭔데?”

“엘리자베스 황녀님도 내 친구야. 황녀님께서 내게 맞춤형 마법갑옷도 만들어주셨지.”

베로니카 언니는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귀한 와인병을 손에서 놓을 뻔했다.

나는 언니가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게 느껴져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셔터소리에 정신을 차린 베로니카 언니는 헛웃음소리를 내더니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세상에, 네 인맥이 나보다 훨씬 더 대단해져버렸네. 이러다 네가 중앙정계에 진출해도 이상하지 않겠어.”

“으... 그건 싫어. 난 자유로운 삶이 훨씬 더 좋아.”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런데 저택이 아니라 내 집무실까지 찾아온 걸 보니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거니?”

나는 베로키나 언니가 묻는 말에 잠시 뜸을 들였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실은 카르디아 근처에서 언니의 친구인 엘레아노르를 만났어.”

“엘레아노르...”

내가 하는 말에 베로니카 언니는 한순간에 미소를 잃고 말았다.

엘레아노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슬프고 괴로워했다.

괜히 말을 꺼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 친구는 이미 죽은 지가 10년이나 됐어. 어떻게 네가 만났다는 거니?”

“엘레아노르는... 언데드가 되었어. 다행히 자아가 온전해서 대화가 가능했어.”

“언데드라고? 불쌍해서 어떡하면 좋아...”

베로니카 언니는 그대로 주저앉아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슬퍼하는 언니를 옆에서 안아주었고, 손수건으로 뜨거운 눈물을 닦아주었다.

언니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정말이지 익숙지가 않았다.

“진정해, 언니. 엘레아노르는 본인의 죽음은 자기 탓이라면서 언니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을 모두 털어내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어. 그러니까 울지 말아줘.”

“정말 엘레아노르가 그렇게 말했니? 그게 내 탓이 아니라고?”

“응. 그저 언니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랐어.”

“자기는 언데드가 되었으면서 나보고 행복하게 살아가라고? 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내가 엘레아노르를 구해주지 못하는 바람에 엘리사까지 망가졌는데...”

“잠깐만, 엘리사라고?”

나는 엘리사의 이름이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나오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심각하게 묻는 질문에 베로니카 언니는 눈물을 뚝 그치고 자기가 알고 있는 엘리사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엘레아노르의 이복동생이야. 사생아라서 어릴 때부터 가문사람들로부터 차별을 받았지만 엘레아노르만큼은 진짜 가족으로 대해주었어. 그래서 엘리사는 엘레아노르를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으로 여겼었지. 하지만 엘레아노르가 죽고 나서 엘리사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나에게 보복을 하려다 실패한 뒤로는 행방불명되고 말았어.”

베로니카 언니의 말만 들어서는 이 엘리사가 그 엘리사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웠다.

세상에 엘리사라는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은 제법 많고, 구도자들은 대부분 가명을 쓰니 말이다.

하지만 내 직감은 이미 같은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려버렸다.

타이밍이 너무나도 공교롭단 말이지.

“레베카, 엘리사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니?”

“카르디아를 공격한 배후로 의심되는 가면쟁이의 이름이 엘리사야. 내가 방문했던 뱀파이어족 마을의 주민들을 학살하고 보물을 뺏어간 장본인이기도 하고.”

“만약 내가 아는 엘리사와 같은 사람이라면 카르디아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거야. 어릴 때부터 무언가 일을 꾸미면 늘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성향을 보였거든. 특히 날 골탕 먹일 땐 어김없이 근처의 나무 위에서 모든 걸 내려다보고 있었지.”

“내일 카르디아로 돌아가면 도시를 제대로 뒤져봐야겠어. 엘리사를 막지 않으면 카르디아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는 마을들도 전멸할 거야.”

나는 또 괜한 정의감을 불태우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당한 게 있고, 그 년이 저지른 짓을 봤는데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번 기회에 엘리사를 죽일 수만 있다면 꼭 그렇게 해주고야 말겠어.

“나도 같이 가자.”

“뭐? 부단장인데 갑자기 그렇게 떠나도 돼?”

“제국의 안보와 관련된 일이니 출장명목으로 며칠 동안은 자리를 비울 수 있어.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바로 단장님께 허락을 받아올게.”

베로니카 언니는 나를 소파에 반강제로 앉히더니 순식간에 집무실에서 나가버렸다.

언니를 카르디아에 데려가는 건 문제될 건 없지만 거기서 엘레아노르와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걱정이다.

아무래도 엘레아노르가 가면쟁이라는 사실을 베로니카 언니에게 미리 말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베로니카 언니는 생각보다 금방 돌아와서는 날 뒤에서 껴안았다.

“레베카, 허락받고 왔어. 역시 단장님은 말이 잘 통해서 좋아.”

“언니, 엘레아노르 말이야. 사실...”

“가면쟁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응. 질서의 추종자라는 온건파벌에 속해있고, 엘리사 때문에 죽어가던 마을사람들을 구해줬어.”

“듣기엔 엘레아노르답게 좋은 일을 한 것 같지만 가면쟁이들의 특성상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살려줬겠지.”

“맞아. 본인 입으로 그런 식으로 말하더라.”

“내 친구 엘레아노르와 가면쟁이 엘레아노르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 내가 사고를 치고 말테니까.”

“언니, 너무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마. 언니와 대화를 하다보면 다시 이쪽으로 전향할 수도 있잖아.”

나는 베로니카 언니가 입술을 깨물면서 하는 말에 희망적인 말을 해보았다.

하지만 언니는 고개를 저으며 내 생각에 회의적인 대답을 했다.

“레베카, 사람은 말이야. 한 번 정한 신념을 바꾸는 게 굉장히 힘들어. 그 신념이 극단적이고 광신적일수록 더욱 그러하지. 그건 친구는 물론이고 연인과 가족들의 사이도 손쉽게 갈라놓아. 그러니 엘레아노르가 다시 예전처럼 내 친구가 되어주는 건 불가능해.”

“그래도 대화를 시도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혹시 모르잖아.”

“그건... 네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은 없으니 한 번 정도는 대화를 해봐도 괜찮겠지. 하지만 엘리사는 아마 대화가 성립하지 않을 거야. 애초에 날 죽이려다 실패한 사람이니까.”

“나도 그 녀석과의 대화는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어. 그런데 언니는 언니가 아는 엘리사가 구도자 엘리사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네.”

“기사로서의 직감이야. 세상에 단순한 우연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보아하니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맞아. 언니 말대로 이쯤 되면 필연이지.”

나는 베로니카 언니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기뻐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공통점이 있다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레베카, 엘리사를 잡으면 죽일 거니?”

“응. 그 녀석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가 갈려. 잡기만 한다면 엄청나게 고통스럽게 죽일 거야.”

“그렇구나... 레베카, 난 네 분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악한 자들에게 살해당한 무고한 백성들을 볼 때면 너와 같은 생각을 했거든. 하지만 정의감으로 포장된 분노에 사로잡히면 안 돼. 그건 타락의 지름길이야.”

베로니카 언니는 내 양쪽 어깨에 손을 올리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는 내 눈동자 너머에서 도사리는 끓어오르는 증오를 보았고, 그것이 날 집어삼키지 않기를 바랐다.

난 언니의 진심어린 조언을 귀담아 들었지만 과연 그 조언에 제대로 따를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지금도 엘리사를 죽여서 얻을 이익을 기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베로니카 언니를 비롯한 내 지인들은 물론이고 내 사랑들은 날 정의감 넘치는 선한 사람으로 여기지만 난 분명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이며 변태적인 인간일 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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