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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154화 (154/271)

〈 154화 〉 153화

* * *

우리는 유일하게 통과가 가능한 동문을 통해서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검문소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은 신경이 곤두선 상태라서 지독할 정도로 꼼꼼하게 사람들을 검문했다.

하지만 명예기사인 나는 신분증만 확인하면 그만이었고, 내 일행들도 가벼운 몸수색만 받았다.

나는 워낙에 분위기가 삼엄해서 아이리스의 신원을 걸고넘어질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아마도 몸수색을 하는 병사들이 내 사랑들이 모두 노예이니 아이리스도 그냥 노예라고 생각하고 넘어간 것 같다.

나야 번거로운 일이 생기지 않아서 좋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보안에 공백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다.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이 노예로 위장하면 간단하게 검문을 통과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뭐, 그런 것까지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검문소를 통과한 우리는 곧장 도시의 북동쪽에 있는 콘라드의 집으로 향했다.

모험가길드에 보고해야할 일이 있지만 그것보다 말 많은 부길드장과 그의 가족들이 더 걱정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베풀었던 친절을 생각하면 모두 무사하기를 바랄뿐이다.

내가 떠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했던 카르디아의 북동쪽 시가지는 지금은 사실상 전쟁터나 마찬가지였다.

내 기억에 남아있던 평화로운 주거지역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온통 파괴와 죽음, 혼란만이 가득했다.

그래도 사람이나 마물의 시체는 모두 치워진 상태였고, 오염된 지역은 불로 소독된 상태였다.

이것은 곧 이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가 있다는 뜻이다.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말을 몰았고, 내 예상대로 인파가 몰린 곳이 나타났다.

“저긴... 콘라드 씨의 집이잖아? 다행이다.”

나는 익숙한 모습의 집을 보고서 안도했고, 거기서부터 솔솔 피어나는 갓 구운 빵의 구수한 냄새에 군침을 흘렸다.

만약 콘라드의 집마저 파괴되었더라면 계속 희망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근처에 말들을 묶어놓고는 인파를 헤치며 콘라드의 집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거기엔 분명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콘라드의 아내와 막내딸, 그러니까 이름이... 아! 그렇지. 탈리아와 그레타가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또 한 번 안도하게 되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건넸고, 두 사람 모두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바쁜 탈리아 대신에 그레타가 내 대화상대가 되어주었다.

“다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다른 가족들은 어떤가요?”

“명예기사님이 걱정해주신 덕분에 모두 무사하답니다.”

“정말 기쁜 소식이네요. 그나저나 빵을 무료로 나눠주고 있던데 재료는 충분한 가요?”

“네, 영주님께서 지원을 해주셔서 부담 없이 자원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굶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다행히 카르디아의 영주는 백성들의 위기를 외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재수 없는 제르디아의 영주였다면 분명 나 몰라라 했을 거야.

“그렇군요. 혹시 부족한 게 있으면 뭐든지 저한테 말하세요. 최대한 도움을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역시 아버지의 은인이세요.”

그레타는 고개를 몇 번이고 숙여가면서 고마워했다.

누군가에게 감사를 받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울 수 있으면 돕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아참, 콘라드 씨는 어디에 있나요?”

“아버지는 모험가길드의 임시지부에서 일하고 계세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그럼 저랑 같이 말을 타요.”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내 제안을 받은 그레타는 기다란 엘프귀를 붉게 물들인 채로 파닥거리며 수줍어했다.

나는 먼저 제하트에 올라탔고 내심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는 그레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레타는 말을 타본 경험이 있는지 능숙하게 등자를 밟고 올라와 내 뒤에 앉았다.

제하트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등 위에 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눈치였지만 내가 달래주니 금방 기분을 풀었다.

“어때요? 무섭지는 않아요?”

“그, 그, 그게 그러니까... 괜찮아요.”

“너무 긴장하지는 마세요. 그리고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꼭 잡아요.”

“꺄아!”

내가 그레타의 손을 잡고 내 허리를 감싸도록 하자 그녀는 제법 귀여운 소리를 냈다.

나는 그녀의 반응이 정말 재밌었지만 대놓고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하렘멤버를 늘리기 위한 진지한 만남이 아니면 쉽사리 용납하지 못하는 내 사랑들, 특히 라우라의 매서운 눈빛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면 될까요?”

“일단 여기서 쭉 직진하다가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돼요.”

나는 그레카의 안내에 따라서 말을 몰았다.

그레타는 길을 안내하면서도 은근슬쩍 나에게 몸 전체를 기대면서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난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라는 사람은 배가 불러서는 운명적인 만남이 아니면 끌리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체감상 10분 정도를 말을 타고 간 끝에 임시지부에 도착했다.

급한 대로 천막을 쓰고 있던 모험가길드는 다시 제대로 된 건물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곳을 들락거리는 모험가나 길드직원들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아버지는 안에 계실 거예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기까지 안내해줘서 고마워요, 그레타.”

나는 그레타의 손등에 입을 맞춘 뒤에 그녀를 제하트의 등에서 내려주었다.

이건 흔한 인사 같은 거라서 내 사랑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레타는 보물이라도 찾은 사람처럼 엄청나게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레타가 자신의 손등을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멀어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임시지부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 곳곳에 환자들이 누워있었고, 의료진들이나 신전에서 파견된 약제사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말이 좋아서 임시지부이지 그냥 병원이었다.

나는 바쁜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서 겨우 접수대 앞에 설 수 있었다.

“지금은 의뢰를 받을 수 없다고 몇 번이나... 죄, 죄송합니다!”

극도로 피곤한 표정으로 서류를 보면서 짜증스럽게 대답하던 접수원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사과했다.

서비스직의 고충을 잘 아는 입장에선 그의 격한 반응이 부담스러웠다.

“진정해요. 충분히 그 심정 이해하니까요. 부길드장인 콘라드 씨를 찾아왔는데 지금 어디에 계시나요?”

“길드장님은 지금 2층의 응접실에서 손님과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다. 제가 가서 상황을 확인해보고 오겠습니다.”

“부탁할게요.”

접수원은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헐레벌떡 내 앞으로 다가왔다.

“마침 대화가 끝나셨습니다. 명예기사님에 대해서는 말씀드렸으니 바로 가시면 됩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물이라도 마시면서 숨 좀 돌리세요.”

나는 가방에서 시원한 물병을 꺼내서 접수원에게 주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응접실이 어딘지 물어볼 걸 그랬다는 생각을 품자마자 어느 방의 문이 열리더니 콘라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베카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기쁩니다.”

“저도 콘라드 씨와 가족들이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원래라면 마중을 나갔어야 했는데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괜찮아요. 그런데 언제 길드장이 되셨나요?”

“대략 일주일 전부터입니다. 전임 길드장님이 전투에 휘말려 돌아가시는 바람에 제가 갑자기 길드장이 되었지요. 정말 좋은 분이셨는데...”

콘라드는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 드워프족 길드장이 죽었다니, 한 번 만났을 뿐인 사람이지만 마음이 편치가 않다.

“제가 없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대략 2주 전부터 마물의 공격이 거의 매일 같이 일어났습니다. 대규모 공격은 아니었지만 상급마물이 포함된 경우가 대부분이라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래도 사흘 전에제국기사단이 도착한 뒤로는 공격이 잠잠해졌습니다.”

2주 전이면 인간마물 때문에 아쿨타리 부족의 마을이 초토화되고, 엘리사가 신성한 그릇을 탈취했을 때다.

반드시 엘리사가 관련된 일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타이밍이 예사롭지가 않다.

어쩌면 신성한 그릇을 마음대로 쓸 수 없어서 그 화풀이로 도시를 더 맹렬하게 공격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제국기사단이라는 말은 또 처음 들어보네.

“제국기사단이요?”

“네, 정확히는 엘리자베스 황녀님께서 이끄시는 제0기사단입니다. 언제나 가장 최신형 장비로 무장하고 있는 소수정예 기사단으로 유명하지요.”

난 엘리자베스를 연구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설마 독자적으로 기사단을 하나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른 황자나 황녀들도 기사단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국의 군사력에 핵심을 담당하고 있는 엘리자베스의 특권일 수도 있다.

“혹시 황녀님도 오셨나요?”

“아니요. 황녀님께서는 직접 오지 않으셨습니다. 제0기사단은 조만간 제국군에서 지원군이 파견되는 대로 철수할 예정이라 앞으로도 황녀님을 뵙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콘라드는 내가 엘리자베스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야 워프기능을 이용하면 간단하게 엘리자베스를 만날 수 있으니 지금 당장 아쉬울 게 없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지금 승급시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가능합니다. 의뢰서와 지도를 주시면 제가 알아서 처리를 해드리지요. 혹시 아쿨타리 부족은 만나셨습니까?”

“아니요. 좀비 말고는 움직이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애초에 그런 곳에서 사람이 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봐요. 그때 공격을 받았다던 사람은 어떻게 됐나요?”

“인간마물로 변해서 퇴치 당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괴물이 된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정말 유감이에요.”

나는 겉으로는 안타까워했지만 속으로는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족장 패거리에게 봉변을 당했던 사람이 살아있으면 계속 그 문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테고 결국은 도시유적 주변을 수색하고 다닐 테니 말이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이중적인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숙소는 저번처럼 저희 집을 쓰시겠습니까?”

“오늘은 아마 다른 곳에서 잘 것 같으니 내일이나 신세를 지도록 할게요.”

“알겠습니다. 미리 준비를 해놓도록 하지요.”

콘라드는 우리가 자신의 집에 다시 머무른다는 말을 들으니 표정이 환해지면서 기뻐하는 기색을 숨기질 못했다.

음... 아무래도 그레타가 아빠를 많이 닮은 것 같다.

아무튼 카르디아에서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으니 하루나 이틀 정도만 신세를 지고 바로 다음 여행지로 떠나야겠다.

“잘 부탁할게요. 아참, 엘리사라는 사람을 아세요?”

“흐음... 적어도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없습니다. 모험가입니까?”

“아마도 모험가길드와 관계가 있는 사람일 거예요. 명단을 뒤져볼 수는 없을까요?”

“죄송하지만 저희가 보유하고 있던 문서가 전부 소실되었습니다. 하필이면 문서를 옮기고 있을 때 공격을 받는 바람에 그만... 전임 길드장님도 그때 돌아가셨습니다.”

아, 씨발. 엘리사가 이걸 노리고 도시를 계속 공격한 건가?

자신이 카르디아에서 머물렀다는 증거를 없애려고?

그런 것치고는 너무 거창하게 일을 벌이기는 했지만 통제 가능한 마물의 실전테스트를 겸한다면 이상할 것도 없다.

그나저나 결국 이대로 포기해야하는 건가...

“그런데 엘리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실은 그 가면쟁이가 이번 사건의 배후일 가능성이 높아요. 모험가길드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작자라서 문서를 옮길 때를 노려서 공격했을 테고요.”

“일단 카르디아 기사단과 관료들에게 협조를 구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길드본부에는 거의 모든 모험가와 길드직원들의 인적사항이 보관되어 있으니, 공문을 보내서 자료를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이 정도는 레베카님이 제게 베푸신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요. 고향을 지키기 위한 일이기도 하고요.”

“저도 단서를 알아내면 바로 알려드릴게요. 바쁘실 텐데 너무 오래 붙잡아버렸네요. 내일 봬요.”

나는 콘라드와 헤어진 뒤에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접수원에게 맹금조련사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불행히도 그녀는 목숨을 잃었지만, 그녀가 지키려고 애썼던 새들은 길드에서 보살펴주고 있다고 한다.

나는 바로 새들을 돌보고 있다는 장소로 가서 세르자를 찾으려고 했지만 매들이 다 똑같이 생긴 것 같아서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최소한 새장에 이름표라도 붙어있었더라면 금방 찾았을 텐데 말이다.

“레베카님, 여기에 세르자가 있어요.”

나는 에리카가 하는 말에 곧장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에리카는 다짜고짜 새장을 열어서 세르자를 꺼내주었다.

나는 저게 진짜 세르자가 맞나 싶었지만, 에리카를 엄청 반가워하는 걸보니 확신이 섰다.

문제는 녀석이 나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었는지 엄청나게 경계를 해댔다.

‘어쩔 수 없지. 강제로라도 복종을 시키는 수밖에.’

나는 세르자를 상대로 날개 길들이기 스킬을 발동시켰고, 세르자는 나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풀어버렸다.

하지만 에리카를 대하는 것처럼 살가운 태도는 없었고, 애교도 부리지 않았다.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내가 팔을 뻗자 자연스럽게 그 위로 올라타는 모습을 보니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세르자는 내가 손가락을 뻗어도 물려고 하지 않았고 머리를 쓰다듬자 얌전히 받아들였다.

조금 반칙을 쓰긴 했지만 이런 멋진 생물을 부릴 수 있게 되니 너무 기분이 좋다.

“갑자기 이렇게 말을 잘 듣다니 신기하네요.”

“그, 그러게. 하하하!”

“역시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건가 봐요.”

나는 에리카가 순수하게 하는 말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실망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세르자를 쓰다듬는 일에 집중하며 에리카의 시선을 피했다.

‘응? 스킬레벨이 올랐네. 단순히 스킬을 써서 길들이는 것만으로 간단하게 스킬레벨이 오를 줄이야. 생각보다 훨씬 빨리 와이번을 탈 수 있겠는 걸.’

나는 날개 길들이기 스킬의 스킬레벨이 2로 오른 것을 확인하고는 더욱 기쁜 마음으로 세르자를 쓰다듬으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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