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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153화 (153/271)

〈 153화 〉 152화

* * *

우리는 숲에서 나오자마자 운 좋게 도로를 지나는 마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아이리스는 점점 멀어지는 숲에서 눈을 떼질 못하다가 미련을 버리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아이리스에게 신경이 많이 쓰여서 자주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그녀는 스스로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려고 노력했고, 내 사랑들도 잘 챙겨주어서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특히 동족인 에리카가 나보다도 아이리스에게 많은 관심을 주었다.

아이리스의 질문은 뭐든지 성의 있게 대답해주고,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바깥 세상에 대한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덕분에 나는 잠시 인연퀘스트를 살펴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에리카의 인연퀘스트 중에서 뿌리를 찾는다는 퀘스트는 마을에서 떠날 무렵이 되어서야 달성이 되었다.

단순히 에리카가 태어난 곳을 찾아간다고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에리카가 진심으로 그곳을 자신의 뿌리라고 여겨야 달성이 가능한 퀘스트였던 것으로 보인다.

인연퀘스트 보상은 에리카에게 무려 언데드정화 스킬이 주어진 것이다.

아마도 유물로 조상님들을 모조리 정화해버린 영향이 아닐까 싶다.

스킬설명에 따르면 에리카가 언데드를 쳐다보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만으로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지만 자아가 있는 언데드는 저항이 가능하다고 한다.

즉, 엘레아노르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언데드 한정 즉사치트라고 할 수 있다.

아직 에리카는 그걸 자각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으니 운 좋게 언데드를 구한다면 그녀에게 자신의 능력을 깨닫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연퀘스트의 또 다른 보상인 특수 포인트는 지구력에 투자해서 D랭크로 올렸다.

이렇게 지구력에 먼저 투자를 하면 나머지 힘과 민첩성을 올리는 훈련을 통해서 랭크를 올리는 일이 더 수월해질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매일 열심히 훈련을 하지는 않기 때문에 결국은 특수 포인트를 얻어서 랭크를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싶다.

“레베카님, 무슨 생각을 하세요?”

“아, 별 것 아니야.”

나는 내 옆에서 팔짱을 끼는 이리스의 볼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그러자 이리스는 생긋 웃더니 보답으로 내 손등에 뽀뽀를 해주었다.

“이리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니?”

“아이리스는 신분증이 없는데 도시에 들어갈 수 있을까 궁금해서요.”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아이리스의 신분을 보장하면 되니까. 신분증은 지인들 중 한 명에게 부탁하면 되고.”

“다행이네요. 전 아이리스가 수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까봐 걱정되더라고요.”

“어떤 일이 생기든 내가 처리할 테니 안심해.”

나는 출입이 거부되는 사태가 발생하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밤에 몰래 데리고 들어갈 작정이다.

엄연한 범죄이긴 하지만 CCTV가 있는 것도 아니니 바보처럼 남의 집 지붕에 착륙하지만 않는다면 들킬 일은 없을 거라고 본다.

“네, 레베카님. 그런데 지도는 다 그리셨어요?”

“좀 허접스럽긴 하지만 완성했어.”

“보여주세요.”

“그래. 잠깐만 있어봐.”

나는 가방에서 모험가길드에서 받았던 지하유적의 지도를 꺼내서 이리스에게 보여줬다.

이리스는 지도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겨우 이렇게만 보고하시게요? 승급심사를 통과하기에는 너무 양이 적지 않을까요?”

“지정된 장소의 지도는 거의 다 그렸으니까 문제될 것 없어. 요구하지도 않은 것까지 모조리 기록해봤자 마을이 들킬 확률만 올라갈 거야.”

“아! 제가 그 생각을 못했네요. 역시 레베카님은 생각이 깊으신 분이세요.”

“너무 그렇게 띄워주지는 마. 나도 어설플 때가 많으니까.”

“하긴 가끔 어이없는 실수를 하실 때면 정말 귀여워요.”

나는 이리스가 장난스럽게 하는 말에 뭐라고 대꾸를 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내 실수들을 귀엽게 봐준다니 정말 고맙다.

나는 내게 좋은 말을 해준 대가로 이리스에게 키스를 해줬다.

이리스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혀로 내 혀를 감싸면서 키스를 즐겼다.

우리가 제법 길게 이어진 키스를 끝내자, 라우라가 부러워하는 시선을 보내왔다.

나와 마주보고 앉아있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왼팔을 차지하고 있는 이리스의 반대편에 앉아서 내 오른팔을 꼭 잡았다.

이건 분명 자기에게도 관심을 달라는 신호겠지.

“라우라, 너도 키스를 해주길 원하니?”

“그럼요. 레베카님이 해주시는 키스는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하지만 키스를 하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아이리스에게도 사랑을 느끼시나요?”

“아니. 그냥 돌봐주고 싶은 동생 같은 느낌이야. 엘레나처럼 말이야.”

“정말요?”

“응. 일단 나이가 어리잖아. 최소한 20살은 되어야 그런 관심이 가지.”

“그렇다면 나중에 엘레나님이나 아이리스가 20살이 되면 손을 대실 건가요?”

“설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동생들한테는 그런 짓 하지 않을 거야.”

나는 이어지는 라우라의 난감한 질문에 손사래를 쳤다.

엘레나는 자신의 첫 경험을 내게 부탁했지만 난 그런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가 않다.

아직 어리니까 그런 당돌한 소리를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니?”

“아, 곤란하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갑자기 다음엔 누가 레베카님의 마음을 움직일 지 궁금해지더라고요.”

“글쎄. 너희들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내가 먼저 찾아다닐 생각은 없어. 운명이 날 이끌어준다면 몰라도 말이야.”

나는 하렘멤버가 한 명 더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급할 건 전혀 없었다.

물론 가능하다면 나보다 키가 큰 사람이기를 내심 바라고 있다.

생각해보니 난 역시 베로니카 언니 같은 사람을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베로니카 언니가 처음부터 유부녀가 아니었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아! 내가 미쳤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분명 레베카님에게는 좋은 인연이 찾아올 거라고 믿어요.”

“우연히 창문을 열었는데 널 발견한 것처럼 말이지?”

“그건 정말이지 명백한 운명이었다고 생각해요. 만약 그때 레베카님이 제게 한 눈에 반하지 않았더라면 제 인생은 그대로 끝이었겠죠.”

난 아직도 라우라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뜨거운 감정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땐 라우라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고, 그녀를 낙찰 받았을 때는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물론 나를 향한 라우라의 눈빛은 제법 적대적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라우라가 금방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첫 단추부터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더라면 하렘은커녕 단 둘이서도 평화롭게 지내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내가 잠시 예전 생각에 잠긴 사이에, 라우라가 먼저 다가와서 나에게 키스를 해주었다.

처음 라우라와 키스를 했을 때의 황홀함이 다시 재연되는 느낌이 들었다.

라우라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내 입술과 혀를 탐닉하는 모습이 마치 나를 지배하려는 것만 같았다.

내가 금고에서 얻은 교훈은 적어도 섹스를 할 때만큼은 라우라에게서 주도권을 완전히 가져오기 힘들 거라는 것이다.

나는 라우라가 나보다 앞서서 내 사랑들을 구슬려 작전을 짜놓았을 줄은 몰랐다.

분명 이번만큼은 확실한 승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라우라와 처음 섹스를 했을 때만 하더라도 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 그래. 처음 라우라가 스트랩온을 나한테 사용했을 때부터인 것 같아.

뭔가 패배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금고에서 라우라에게 격하게 당했을 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보지가 젖어버리는 게 나라는 사람이니 말이다.

“후... 레베카님의 입술은 항상 맛있어요. 어쩜 이렇게 부드러운지...”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나는 라우라의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러자 라우라는 배시시 웃으면서 나에게 기대었고, 이리스도 그녀를 따라했다.

나는 양손에 아리따운 꽃을 들고 있으니 너무 행복해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가 문득 라우라와 이리스가 동시에 잠이 들어버린 것을 깨달았다.

난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두 사람의 따스한 체온이 날 감싸며 행복을 선사하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에리카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는데, 아이리스가 그녀의 허벅지를 베개로 삼아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던 에리카는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씩 웃었다.

그걸 본 나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다.

어쩜 저리도 고혹적인 자태를 풍길 수 있을까?

역시 왕족의 혈통이 총집합되어서 그런지 타고난 카리스마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레베카님,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응. 물론이지.”

“노르헤임에 도착해서 그곳에서의 일을 끝내시면 뭘 하고 싶으신가요?”

“계속 여행을 다니고 싶어. 제국 전체를 여행하는 게 내 목표 중 하나거든. 지금까지는 말이 좋아서 여행이지 고생을 찾아다니는 기분이라서 진짜 여행을 해보고 싶어.”

“이상하리만치 사건이 레베카님을 쫓아다니는 것 같긴 해요. 마치 누군가가 만든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 처럼요.”

“그러게. 그래도 가는 곳마다 사건이 생기는 만큼 새로운 친구들이 생기는 건 좋다고 생각해.”

나는 자고 있는 아이리스를 보면서 말했다.

만약 사건에 휘말리기만 하고 친해지는 사람 하나도 없었더라면 여행이 우울하게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힘든 일을 당해도 단 한 명이라도 날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건 내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이번에도 아이리스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준 덕분에 그런 끔찍한 사건 이후로도 잘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레베카님은 매사에 긍정적이라서 부러워요.”

“내가? 에이, 설마.”

“적어도 저보다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해요. 절망해서 주저앉으실 때도 있지만 희망이 보이기만 하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는 멋진 분이세요.”

“아하하. 그렇게 칭찬을 해주니까 좀 부끄러운 걸.”

나는 에리카의 낯간지러운 칭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건 언제나 기분이 좋은 일이지만 그게 찬양에 가깝게 들리면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이런 소심한 태도를 보면 난 역시 영웅으로서의 자질은 부족한 것 같다.

“저는 레베카님처럼 멋진 분과 사랑에 빠져서 늘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그 날 레베카님이 말을 사러 오시지 않았더라면 이런 행복을 느낄 수 없었겠죠.”

“나도 널 만난 걸 행운이라고 생각해. 너 뿐만 아니라 라우라와 이리스도 마찬가지야.”

“앞으로 또 누군가 새로운 가족이 나타난다면 그땐 열심히 응원해드릴게요. 저도 라우라와 이리스가 응원해준 덕분에 레베카님과 더 빨리 가까워질 수 있었거든요.”

“아까 라우라도 그렇지만 너희들은 벌써부터 내게 새 여자가 생길 거라고 예상하고 있구나? 정작 난 급하지 않은데 말이야.”

“괜히 반지를 하나 더 산 게 아닐 테니까요. 후훗.”

“아, 그거...”

나는 나 혼자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을 이미 내 사랑들이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얼른 새로운 하렘멤버를 들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번에 얻은 재산을 생각하면 아예 미녀로만 이루어진 용병단을 차릴 수도 있겠지만 난 사람을 수집품으로 여기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미리 촉수소환스킬의 레벨을 올릴 수 있는 시설 정도는 갖추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새로 건물을 지으면 건물의 설계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 때문에 불필요한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막시안의 별장을 팔지 않고 그대로 이용해야겠다.

처음 별장을 받았을 땐 찝찝해서 쓰기 싫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니 아무런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도 참 기회주의적이고 간사한 것 같다.

내가 혼자만의 생각을 하는 동안, 마차는 카르디아 근처에 도착했지만 더 이상 접근을 하질 못했다.

나는 마부에게 상황을 물어보기 위해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카르디아를 둘러싼 성벽 곳곳이 무너졌고, 온갖 종류의 마물 시체들이 성벽 근처에 널브러져 있었다.

오염물질에 범벅이 되어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인 채로 태워지는 모습도 보였다.

거기다 도시의 내부 곳곳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고, 얼핏 보기에도 전소된 건물들이 많았다.

우리가 카르디아를 떠난 동안 많은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예기사님, 죄송하지만 더는 접근할 수 못할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죠. 여기까지라도 태워주셔서 고마워요.”

나는 마부에서 수고비를 준 뒤에 자고 있는 내 사랑들과 아이리스를 깨워서 마차에서 내렸다.

도시로 들어가는 길은 오염이 모두 정화되어서 그럭저럭 안전한 편이었지만 이미 두려움에 빠진 사람에게 억지로 가라고 떠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마차는 왔던 길을 돌아갔고, 우리는 마법갑옷으로 갈아입으려고 했다.

“어? 세상에! 레베카님, 우리의 말들이에요!”

“정말? 어떻게 걔네들이 바깥에 있지?”

나는 에리카가 하는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히 도시의 마구간에 맡겨놓았던 녀석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그것도 우리가 오는 걸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달려와 주다니 너무 신기하다.

“저도 잘 모르겠지만 다들 무사한 것 같아요. 정말 다행이다...”

“도시가 위험해졌을 때 알아서들 탈출한 모양이야.”

나는 앞장서서 달려오는 내 말, 제하트의 늠름한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말들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자마자 숨을 고를 틈도 없이 각자의 주인에게 머리를 들이밀면서 관심을 호소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녀석들을 쓰다듬어주거나 먹이와 물을 주면서 교감을 나누었다.

“다들 다친 곳은 없고, 영양상태도 양호해요. 도시가 위험해졌을 때 제하트가 다른 친구들을 이끌고 도망친 게 아닐까요?”

“아마 그렇겠지? 제하트, 정말 잘했어. 넌 역시 내가 고른 말이야.”

제하트는 내 칭찬을 알아들었는지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면서 거들먹거리기 시작했고, 녀석의 오른팔인 드라쿠스가 한심한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안장을 가방에 넣어두기를 잘했네. 일단 정비를 하고 도시 안으로 들어가자.”

“네, 레베카님.”

우리는 말들과 적당히 교감을 나눈 뒤에 안장을 올리고 혼란스러운 카르디아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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