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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152화 (152/271)

〈 152화 〉 151화

* * *

금고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낸 지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는 아쿨타리 부족의 마을에서 떠날 준비를 마쳤고,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는지 찾아보곤 했었다.

마을사람들은 사소한 도움은 고맙게 받아들였지만 마을의 미래와 관련된 일만큼은 스스로 해법을 찾아가겠다며 정중히 도움을 거절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받은 은혜를 제대로 갚지 못했다며 사과를 하기도 했다.

에리카의 말처럼 굳이 내가 앞장서서 도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마을사람들의 자주적인 자세를 직접 확인한 뒤에는 더 이상 마을의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미련이 남아서는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마을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었다.

바로 아이리스를 밖으로 데려가서 양질의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다.

왜 하필 아이리스냐면 그 사건 이후로 보여주었던 대중을 다루는 능력 때문이다.

사고뭉치로만 알고 있었던 소녀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에게 다시 삶의 희망을 주는 모습은 내 감정을 움직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어젯밤에 아이리스는 함께 바깥으로 나가자는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몸이 불편한 가족을 두고 떠날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미래에 펼쳐질 가능성을 대부분 배제해버린 것이다.

안타깝지만 아이리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되어서 더는 붙잡지 않았다.

‘아직은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이 많이 필요한 나이니까 강요할 수는 없겠지.’

나는 여전히 남아있는 아쉬움을 애써 참으며 내 사랑들과 숙소를 나섰다.

그리고 마을에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세실리아와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그녀의 가족은 원래부터 거주했던 별관으로 돌아간 상태라서 만나려면 본당을 빙 둘러서 가야했다.

나는 본당에 모셔진 희생당한 마을사람들의 위패를 멀찍이서 잠깐 바라본 뒤에 별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우리가 별관에 도착하자 아이리스가 반겨주었다.

아이리스는 이젠 날 보면 안겨드는 게 당연한 일이 되어버려서 너무 귀여웠다.

그녀를 따라서 별관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에 앉아있는 세실리아와 어제 겨우 깨어난 제이슨이 누워있는 모습이 보였다.

제이슨은 그저께 오전에 간신히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아직 몸을 가누기 힘들어해서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보냈다.

두 다리를 잃은 세실리아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는 제이슨을 돌보는 것은 지금으로선 오로지 아이리스의 몫이었다.

아이리스는 열심히 어머니와 새아버지를 돌봐주는 모습이 너무나도 기특했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보니 아이리스에게 바깥으로 가자는 제안을 하는 것 자체가 그녀를 힘들게 만드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안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세실리아와 마주앉은 상태에서도 내 곁에 바짝 붙어있는 아이리스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게 되었다.

세실리아는 우리 둘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아쿨타리 부족을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서, 다시 한 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저희들이 이렇게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세실리아는 우리 모두에게 고개를 숙여서 감사인사를 했고 곁에 있는 제이슨도 거들었다.

제이슨은 아직 발음을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그의 고마워하는 표정을 보니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있었다.

“저희들은 그저 뒷수습을 조금 도왔을 뿐이에요.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고개를 들어주세요.”

“아닙니다. 레베카 씨가 베풀어주신 약이 아니었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테지요. 저 역시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덕분에 이렇게 살아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여행이 끝나면 의족과 의수 같은 것들을 잔뜩 구해서 다시 이 마을로 찾아올게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때까지 꼭 희망을 가지고 살아주세요.”

나는 세실리아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말했다.

그러자 세실리아는 밝게 웃으면서 나와 손을 맞잡아주었다.

나는 제이슨의 손도 잡아주었는데, 그는 제대로 대답은 할 수 없어도 표정을 보면 부끄러워하는 게 분명했다.

“저희들 역시 여러분의 여행길이 안전하기를 항상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실례지만 가시기 전에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든 말씀해주세요.”

“제 딸, 아이리스를 마을 밖으로 데려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야 얼마든지 환영이지만 정작 아이리스 본인이 원치 않더라고요.”

나는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이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나 아이리스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세실리아에게 거부의사를 드러냈다.

“엄마, 나 저번에도 안 간다고 했었잖아. 내가 없으면 엄마랑 아빠는 어떻게 지내려고 그래? 나 아니면 도와줄 사람이 없단 말이야.”

“아이리스, 네 말처럼 네가 가버린다면 분명 우리가 힘들어지겠지. 하지만 우린 그것보다 네 미래가 더 중요하단다.”

“무슨 미래? 그냥 이 마을에서 다함께 행복하게 살면 되잖아.”

“예전 같으면 그래도 되지만 이젠 아니야. 우리는 오랜 의무에서 해방되었고, 언젠가 외부의 간섭을 받게 될 거란다. 그때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바깥에 대해서 잘 알고, 연줄이 있는 사람이 필요해. 우린 네가 그 역할을 맡아주면 좋겠어.”

세실리아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서 아이리스를 교육시키기를 원했다.

언젠가 아쿨타리 부족이 제국과 접촉했을 때, 아무것도 몰라서 제국에게 당했다는 변명은 비웃음을 살 뿐일 테니 말이다.

“왜 하필이면 나야? 난 항상 사고만 치고 다니잖아. 지금까지 계속...”

“분명 사고를 몰고 다닌 것은 맞지만, 저번 사태 이후로 네가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었던 모습은 네가 바깥에서 많은 것을 배우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었어. 재난상황에서 모두를 이끄는 힘을 가졌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란다.”

세실리아는 나와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리스에게 나와 똑같은 제안을 하는 것이다.

앞서 내 제안을 거절했었던 아이리스는 세실리아의 설득에는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는 듯 보였다.

“실은 나도 바깥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싶고, 그 지식으로 마을을 돕고 싶어. 하지만 지금은 내가 엄마 곁에 없으면...”

“아이리스, 엄마는 네가 나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걸 원치 않아. 내 다리를 잃은 것보다 그게 훨씬 더 마음 아픈 일이야. 그러니 엄마를 믿고 떠나도록 해.”

세실리아는 어떻게든 아이리스를 마을 밖으로 보내주고 싶어 했다.

자식에게 더 나은 환경에서 교육을 시켜주고 싶은 건 이 세계의 엄마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아이리스는 세실리아의 계속되는 설득에 내 팔을 꼭 잡으며 고민에 빠졌다.

만약 아이리스가 떠나기로 결심한다면, 난 얼마든지 교육비와 생활비를 전액 보장해줄 용의가 있다.

그리고 믿고 맡길 수 있는 지인들도 있으니 내가 여행을 하는 동안 아이리스가 힘들게 살아갈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

물론 주기적으로 제대로 공부를 하고 있는지 검사를 해야겠지.

“엄마,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가끔은 네가 너무 그리워서 후회할 지도 모르지. 하지만 널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럼... 엄마가 하는 말을 들을게. 내가 꼭 많은 걸 배워서 모두에게 도움을 주도록 할 게. 그러니까 내가 없는 동안 잘 지내야 해. 알았지?”

“그래. 혼자 지내면서 공부를 하다보면 힘들 때가 많겠지만 네 미래를 생각해서 꾹 참고 버텨주렴. 엄마는 여기서 네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할게.”

“응. 나도 엄마, 아빠랑 마을사람들 모두를 위해서 매일 기도할 거야. 그리고 꼭 마을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어서 돌아올게.”

아이리스는 세실리아를 포옹했고, 이제는 아저씨가 아니라 아빠라고 불러주는 제이슨도 안아주었다.

나는 갑작스럽게 결정된 이별에도 감정을 자제하는 아이리스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대무녀님, 제가 책임지고 아이리스를 뒷바라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이리스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심사숙고해서 머무를 곳을 정하고 교육시킬 사람을 찾겠습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저에게 맡겨주세요.”

“레베카 씨, 저의 염치없는 부탁을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레베카 씨에게 도움만 받아서 정말이지...”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마침 저도 아이리스를 마을 밖으로 데려가고 싶었으니까요. 오히려 설득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나는 세실리아를 포옹하며 그녀와 좋은 마음을 나누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다.

“그럼 지금 바로 내 방에 가서 짐을 챙겨야겠다.”

“아이리스, 옷이랑 생필품 같은 건 전부 내가 챙겨줄 테니까 진짜 필요한 것들만 챙겨.”

“잠깐만 기다려.”

아이리스는 거실을 나가 자신의 방으로 가더니 예상보다 훨씬 빨리 내려왔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그녀가 챙겨온 작은 배낭 안에는 속옷을 제외하면 무녀복을 비롯해서 마을의 전통이나 가족과 관련된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내 말대로 본인에게 정말 필요하다 싶은 것들만 챙긴 모양이다.

“이게 전부니?”

“응. 옷 같은 건 네가 준다고 해서 간단하게 챙겨봤어.”

“잘했어. 하지만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너무 눈에 띄니까 이걸로 갈아입어.”

나는 원래 에리카에게 주려고 샀다가 사이즈가 작아서 입지 못했던 블라우스와 바지를 아이리스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아이리스는 냉큼 옷을 받아서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다행히 사이즈는 딱 맞았고, 아이리스가 예쁘장하게 생겨서 그런지 참 잘 어울렸다.

“나 이렇게 좋은 옷은 처음 입어봐. 고마워, 레베카!”

“그래, 그래. 도시로 가면 네가 마음에 들어 하는 옷은 다 사줄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응! 히히히.”

나는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는 아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나저나 누구에게 아이리스를 맡기면 좋을까?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베로니카 언니와 칼스란 부부다.

베로니카 언니는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귀족이니 교육도 잘 시켜줄 것이다.

칼스란 부부 역시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고 아이리스의 정서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수준 높은 교육은 좀 어렵지 싶다.

평민들이 다니는 학교는 기본적인 상식만 가르칠 뿐이니 말이다.

좀 더 생각해보니 알리시아와 가르탱에게도 맡겨도 좋을 것 같다.

알리시아에게 맡기면 엄격한 교육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엘레나와 아이리스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차기영주라는 뒷배가 있고, 앞으로 작위를 가질 귀족과 친구가 되는 것은 분명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가르탱에게 맡기면 저택 안에서만 하더라도 온갖 것들을 배울 수 있을 테고, 기회가 된다면 황족인 엘리자베스의 눈에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 내 정신 좀 봐. 아무한테도 물어본 적도 없는데 벌써부터 설레발이나 치고 있네.

아이리스를 위해서라도 그녀의 의견을 묻고, 신중하게 생각하도록 하자.

이 문제는 도시로 돌아가는 내내 고민하면 되겠지.

“대무녀님, 이제 슬슬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경비대장님도 얼른 쾌차하시길 바랄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실리아와 제이슨에게 인사를 건넸고, 두 사람도 각자 말과 눈빛으로 내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내 사랑들도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엄마, 아빠!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오렴.”

아이리스는 세실리아와 제이슨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우리보다 먼저 별관 밖으로 나갔다.

분명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세실리아는 아이리스의 뒷모습마저 사라지자 결국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아이리스가 우는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오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세실리아와 제이슨에게 진짜 마지막 인사말을 건네고는 아이리스의 뒤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나는 별관과 멀찍이 떨어져서 손으로 눈물을 닦고 있는 아이리스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러자 아이리스는 내 품에 기대어서 숨죽여 울었다.

아이리스도 우는 소리를 세실리아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아이리스, 괜찮니?”

“아니. 솔직히 말하면 엄마한테 너무 미안해. 너무 갑작스러워서 혼란스럽기도 하고. 하지만 모두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겠지. 이제 그만 울 거야. 나 힘낼게!”

“좋은 자세야. 그래야 내가 널 후원하는 보람이 있지.”

나는 기운을 차린 아이리스의 등을 토닥여준 뒤에 모두와 함께 마을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내가 아이리스의 손을 잡아주어도 내 사랑들은 질투를 하지 않고 오히려 너도나도 아이리스에게 응원의 말을 해주었다.

덕분에 아이리스는 언제 울었냐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라?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지?”

“다들 너희들을 배웅해주려고 나온 거야.”

아이리스의 말처럼 마을사람들은 우릴 배웅하기 위해서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서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우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미소를 짓거나 울먹거렸다.

“아이리스, 네가 떠난다는 사실도 알려야하지 않을까?”

“나한테 맡겨줘.”

아이리스는 마을사람들에게 자신이 마을을 떠나서 바깥 세상에 대해서 배우러 간다고 공표했다.

마을사람들은 동요했고, 아이리스의 친구들은 갑자기 떠나버린다는 말에 엉엉 울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이 떠나는 이유와 반드시 돌아와서 마을을 위해서 일하겠다는 말로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그녀는 친구들이나 어린 아이들을 한 명, 한 명씩 안아주면서 어른스러운 태도로 달래주기도 했다.

이제는 아이리스의 첫인상에 유머소재 이상의 의미를 둘 필요가 없어진 것 같다.

물론 아이리스가 사고를 친다면 바로 내 태도가 바뀌겠지만 말이다.

바라건대 세실리아처럼 아이리스 때문에 한숨을 달고 사는 일이 없기를.

걸을 수 있는 마을사람들은 마법승강기가 있는 곳까지 따라왔고, 우리가 승강기에 올라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레베카, 나처럼 특별한 것도 없는 사람을 후원해준다고 해줘서 고마워.”

“사람은 누구나 특별함을 안고 태어나. 단지 그걸 찾기 어려울 뿐이지. 앞으로 넓은 세상에 나가서 많은 것들을 배우면 너도 분명 너만의 특별함에 대해서 알게 될 거야.”

“응. 열심히 공부할게.”

나는 내 손을 잡고서 다짐하는 아이리스의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오랜만에 지상으로 올라와 따뜻한 햇살을 만끽하게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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