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1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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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을 돕기 위해 마을에서 머무른 지 벌써 열흘이나 지났다.
시신은 모두 수습했고, 인간마물의 시체들도 모조리 불태웠다.
그리고 사원을 중심으로 생존자들이 살아갈 집들을 청소하고 보수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일을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난 쉽사리 안심할 수가 없었다.
이제 좀비들이 모두 사라졌으니 제국 권력자들의 손길이 마을에 닿는 것은 시간문제다.
마을사람들이 통합이나 이주 같은 제국의 ‘합법적 요구’를 거절한다면 좋지 않은 일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수백 년 동안 자치를 누려왔던 사람들 입장에선 갑자기 누군지도 모르는 권력자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면 그 반발심은 적지 않을 게 분명하다.
난 어떻게든 도울 방법을 고민해봤지만 그럴싸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명예기사라고 해봤자 아쿨타리 부족에게 자치권을 보장해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다.
‘엘리자베스라면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역시 힘들겠지.’
나는 지인들 중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엘리자베스가 문득 떠오르긴 했지만 황녀라도 제국의 법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거다.
그렇다면 내가 거짓보고를 올리면 어떨까?
너무 위험해서 수십 년은 접근할 수 없을 정도라고 보고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사정이 좋지 않은 카르디아 기사단이나 모험가길드 지부에서 관심을 끊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호기심이나 욕심은 절대로 얕볼 수가 없는 강력한 감정이다.
단 한 사람의 입에서라도 유적이 안전하다는 소문이 퍼지면 아쿨타리 부족 사람들은 평화를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아, 정말 머리가 아프네. 그냥 좀비를 방치할 걸 그랬나? 아니야. 통제수단을 잃은 마을사람들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복잡한 머리를 달래보려 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 가지고 있는 것을 죄다 동원해서 머리를 열심히 굴려도 해답이 나오질 않는다.
그러던 내 눈에 들어오는 스킬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촉수소환이다.
확실히 악마촉수라면 충분히 무시무시한 소문을 퍼뜨리기에 충분하겠지.
문제는 충분한 양의 시간과 숙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간은 둘째 치고 숙주로 쓸 만한 놈들을 확보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거다.
물론 끔찍한 꼴을 당해도 싼 놈들, 그러니까 극악한 범죄자나 가면쟁이 같은 쓰레기들을 잡아오면 해결될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작은 마을에서 영웅행세를 좀 하겠답시고 명백히 악한 일에 발을 들이는 건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런 괴물들을 풀어놓으면 결국엔 누구든 병력을 이끌고서 밀고 들어올 것이다.
“으아아아! 짜증나!”
난 결국 육성으로 내 기분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내 사랑들이 다들 화들짝 놀라서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아, 실수했네.
“레베카님, 고민이 있으시면 저희들에게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별 거 아니야.”
“그럼 많이 쌓이신 모양이네요. 하긴 우리가 제법 오랫동안 즐기지 못했죠.”
라우라는 내 가랑이 사이에 손을 쓱 집어넣으며 도발적인 눈빛을 보내왔다.
날 성적으로 잡아먹을 기세를 보이는 그녀 탓에 이리스와 에리카의 눈빛도 변했다.
난 당장에라도 섹스를 하고 싶기는 했지만 바로 여기서는 할 생각이 없다.
나름대로 계획하고 있는 게 있으니 지금은 말을 돌리는 게 좋겠지.
“얘들아, 외부인들이 이 마을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싶은데 좋은 방법 없을까?”
“저라면 몇 명을 본보기로 삼아서 충분한 공포와 고통을 주겠어요.”
“기각! 라우라, 그런 방법은 당장은 효과적일지는 몰라도 결국은 기사단을 불러올 거야.”
라우라는 내가 바로 제안을 거절해버리자 내심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끔은 라우라가 내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초반부터 라우라한테 강압적이고 못되게 굴었더라면 끔찍한 꼴을 당하고도 남았을 게 분명해.
뭐, 지금은 달콤살벌한 내 사랑이라서 그럴 걱정이 전혀 없어서 다행이다.
“무서운 소문을 퍼뜨리는 게 어떨까요? 예를 들자면 무시무시한 저주 때문에 죽는다는 식으로요. 그게 아니라면 드론으로 유령행세를 하는 방법도 있고요.”
“글쎄. 그런 일이 있으면 오히려 조사하겠다고 나올 것 같은데.”
“아참, 생각해보니 퇴마와 관련된 일이니 신전에서 사람들을 잔뜩 보내겠네요.”
“응. 그러니 사람들의 근본적인 감정을 자극하지 않고 의무와는 관계없으면서 기피하게 만들 방법이 필요해.”
내가 하는 말을 들은 라우라와 이리스는 더욱 깊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둘 다 나처럼 쉽게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에리카는 이미 해답은 나와 있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굳이 레베카님이 그런 일까지 신경쓰셔야하나요?”
“에리카, 그게 무슨 말이니?”
“레베카님은 이미 마을을 위해선 많은 봉사를 하셨어요. 마을사람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주셨어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하지만 이대로 바깥에 마을이 노출되면...”
“이제 마을의 일은 여기서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맡기세요. 레베카님이 사람들은 도운 건 순수한 의도였지 앞으로의 정치를 위한 게 아니었잖아요.”
“그건 네 말이 맞아. 그래도 사람들이 걱정되는 걸 어떡해.”
“레베카님, 우리는 이 마을의 손님이지 주민이 아니에요. 여기서 평생 동안 살면서 사람들을 통치할 생각이 아니라면 차라리 박수를 받으면서 떠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는 에리카가 진지한 태도로 또박또박하는 말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녀의 말처럼 내가 너무 주제를 넘은 생각을 한 걸지도 모르겠다.
마을사람들과 같이 땀을 흘리며 일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내가 그들의 일원이라는 착각을 해버린 것 같다.
그래, 난 가야할 곳이 있고 여기서 마냥 시간을 보낼 수는 없어.
그리고 내가 원하는 새로운 인생은 충분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목적이지, 어딘가에 정착해서 사람들의 위에 군림하는 게 아니잖아.
난 에리카 덕분에 삶의 목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 이만큼 도와줬으면 충분해.
모험가길드에 보고서를 올릴 때, 이곳에서 겪은 일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내 멋대로의 자원봉사를 끝내도록 하자.
“에리카, 덕분에 머리가 맑아졌어. 내가 너무 과하게 몰입을 했었나봐.”
“레베카님은 착한 분이라서 자꾸만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착한 건지 호구 같은 건지는 모르겠네. 하하하.”
“에이, 그런 식으로 자기비하를 할 필요는 없어요.”
에리카는 애교가 잔뜩 섞인 목소리를 내면서 나에게 안겼고,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라우라와 이리스도 질 수 없다는 듯 귀여운 행동을 하면서 내 품으로 들어왔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데 안고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섹스로 쾌락을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모두의 체온을 느끼며 행복을 만끽하는 것도 정말 좋다.
“그럼 조만간에 마을을 떠나도록 하자. 오늘 바로 나가버리면 너무 갑작스러우니까 내일이나 모레에 출발하도록 준비를 하는 게 좋겠어.”
“레베카님, 가기 전에 보상은 챙겨 가셔야죠.”
“보상? 아, 맞다. 좀비들을 해방시켜주면 보상을 해준다고 했었지. 깜빡하고 있었네.”
나는 이리스가 하는 말에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상황이 좀 많이 꼬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요구사항을 들어줬으니 세실리아가 약속했던 보상을 받을 자격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그동안 많이 피곤하셨던 것 같네요. 다른 건 몰라도 보상은 잘 챙기시는 분이 그걸 잊다니 말이에요.”
“그러게 말이야. 대무녀님한테 말이나 꺼내봐야겠다.”
“지금 가시게요?”
“응. 생각난 김에 바로 행동으로 옮기려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하는 말에 내 사랑들도 덩달아 일어났다.
난 혼자 갈 생각이었는데 결국은 세 사람을 데리고 가니 뭔가 수금하러 가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실컷 좋은 일을 해놓고 갑자기 나쁜 일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다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곧장 세실리아가 머무르고 있는 방으로 향했지만 그녀가 본당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한 때 사원을 대피소로 삼았던 사람들은 이제 대부분 사원을 떠나서 새로운 보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사원에 왔을 때보다 더 썰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제법 많았던 무녀들이 대부분 죽어버리는 바람에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본당 안으로 들어가니, 세실리아가 아이리스를 포함하여 살아남은 소수의 무녀들과 함께 방석 위에 앉아서 이번에 죽은 사람들의 위패 앞에서 위령제를 진행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하는 일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본당 뒤쪽에 앉아서 기다렸다.
제법 오랫동안 진행된 위령제는 라우라와 이리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무렵에야 겨우 끝이 났다.
나는 위령제를 끝내고 본당 밖으로 나오는 무녀들과 인사를 주고받은 뒤에 미리 눈치를 채고 기다리고 있는 세실리아 앞에 앉았다.
“레베카님,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실은... 그게, 그러니까...”
“후훗, 보상에 대해서 묻고 싶으신 거지요?”
“아, 네. 막상 말하려니 어렵네요. 하하하.”
“며칠 전에 여러분이 곧 떠나신다는 예언을 보고서 미리 준비를 해두었답니다. 아이리스, 그 상자를 가져오렴.”
세실리아의 말을 들은 아이리스는 제단 옆에 있는 작은 나무상자를 가져왔다.
그리고 세실리아와 내 사이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이건 약속드렸던 지하도시의 지도와 마을에 존재하는 자동화시설들의 설계도 그리고 유산이 보관된 금고로 들어가는데 필요한 열쇠들입니다.”
세실리아는 상자를 열고 그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꺼내서 내게 보여주었다.
내가 지도를 보자마자 지도창이 자동으로 업데이트되어서 지하도시 전체가 정확하게 표시되었다.
이 지도를 통째로 모험가길드에 제출하면 승급시험을 가볍게 통과하고도 남겠지만, 난 원래 탐사하기로 했던 구역의 일부만 따로 지도를 그려서 제출할 생각이다.
“지도는 한 번 보는 것으로 충분하니 다시 가져가세요.”
“세상에, 그걸 전부 다 외우셨나요?”
“아니요.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마법 덕분이에요.”
나는 세실리아에게 지도를 돌려준 뒤에 설계도를 살펴보았다.
솔직히 봐도 어떻게 지어야할 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갑자기 눈앞에 건설 가능한 설계도가 등록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하지만 정작 건설과 관련된 스킬이나 인터페이스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하우징이나 빌리징 기능이 해금되지 않아도 설계도 자체는 미리 등록이 가능한 것 같다.
나는 자동화된 농장과 축사, 양식장 그리고 정수 및 정화장치의 설계도를 등록했고, 역시나 세실리아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지도를 돌려둘 때는 잠자코 있던 내 사랑들이 살짝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래서 나는 텔레파시로 설계도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 이제 남은 건 3개가 한 세트로 구성된 열쇠뿐이다.
“금고는 족장의 저택 지하에 위치해있습니다. 원래 대무녀와 경비대장, 족장이 하나씩 나눠서 보관해서 다시 되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정말 금고에 들어있는 유산을 저희들이 다 가져가도 되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애초부터 아쿨타리 왕조의 소유물이고 에리카님은 마지막 후손이니까요.”
“신성한 그릇을 훔쳐간 쪽에서 새로운 후손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건 정해진 구역을 떠나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미 왕실의 피가 모두 오염되어서 다시는 왕실의 혈통을 가진 사람이 태어나지 못하는 상태이겠지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네, 불행 중 다행이지요. 금고까지는 이번에도 아이리스가 안내를 해드릴 겁니다.”
우리는 유물을 찾아갔을 때처럼 아이리스를 따라서 금고로 향했다.
금고는 그 기도실과 정반대쪽에 위치해있었고, 문도 훨씬 컸다.
아이리스가 큼지막한 열쇠들을 이용해서 금고의 자물쇠 3개를 열고, 문 앞에 있는 다이얼 3개를 몇 바퀴씩 돌리더니 우렁찬 소리와 함께 금고의 문에 열렸다.
“와... 생각보다 대단하네.”
난 눈앞에 펼쳐진, 금은보화로 이루어진 동산을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내가 다리우스 용병단을 처리하고 손에 넣었던 금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레베카, 이거 다 가져갈 수 있어?”
“시간만 있으면 어떻게든 가져갈 수 있으니 걱정 마.”
“엄마가 그러는데, 이렇게 많은 보물은 우리를 더 위험하게 만들 수 있으니 너희들에게 다 넘겨주는 게 좋다고 했어.”
“그렇구나.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여기 말고 마을공동재산이 있는 금고가 따로 있으니 걱정 마.”
“그럼 부담가지지 않고 가져가도록 할게.”
“응. 난 이제 가봐야 하니까 다들 느긋하게 뜨거운 시간 보내도록 해.”
아이리스는 나를 향해서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냉큼 금고의 문을 닫아버렸다.
내가 얼마 전에 그녀에게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를 부탁했었는데, 마침 여기가 그 장소로 낙점이 된 모양이다.
여기라면 아무리 크게 소리를 질러도 다른 사람의 귀에는 절대로 들리지 않겠지.
거기다 공기가 깨끗하고, 습도도 적당해서 상쾌한 기분으로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레베카님, 아이리스의 배려를 생각해서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에게 가장 먼저 유혹적으로 안겨든 사람은 역시나 라우라였다.
라우라는 내 몸에 자신의 섹시한 몸을 노골적으로 비비면서 섹스를 하자고 졸라댔다.
난 순간적으로 참지 못하고 그녀를 덮칠 뻔했지만 그 전에 할 일이 남아있었다.
나는 치트가방에서 삽을 4자루 꺼냈고, 내 사랑들에게 하나씩 쥐어주었다.
“지금부터 금화와 보석을 동전주머니에 담도록 할 거야.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중요한 일이니 열심히 해보자!”
“아, 아니 섹스는 어쩌고요?”
“라우라,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란다.”
“네? 어째서...”
내 말을 들은 라우라는 욕정을 풀지를 못해서 안달이 난 표정을 지었다.
온 몸을 비비꼬고 나에게 달라붙어서 애교를 잔뜩 부렸지만 나는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라우라는 허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삽을 들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뒷모습을 본 이리스와 에리카는 조용히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씩 웃었다.
내가 유독 라우라를 애태우는 이유는 며칠 전부터 이리스, 에리카와 함께 라우라를 상대로 꾸미고 있는 어느 작전 때문이다.
언제까지고 내가 라우라에게 당하기만 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
그러니 이번 기회에 적절한 방법으로 라우라를 교육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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