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 1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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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하게 실패한 영웅의 뒷모습만큼이나 처량한 것도 없지.”
나는 생전 처음 듣는 어느 여자의 기분 나쁜 목소리에 이를 악물고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날개가 달린 상급마물이 본당 앞에 착지했고, 놈을 타고 있는 흑백 체크무늬 가면을 쓰고 있는 구도자가 날 내려다보았다.
가면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아도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 나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동정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런데 상급마물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저 구도자는 어째서 미니맵이나 지도창에 아무 것도 감지되지 않는 걸까?
내가 의문을 품자마자 구도자는 기다렸다는 듯 설명에 나섰다.
“난 언데드라서 너의 그 지도창이라는 마법 같은 것에는 걸리지 않아.”
나는 지도창과 미니맵을 보는 능력을 가면쟁이들에게 들킨 것 자체는 별로 놀랍지 않다.
이미 막시안과 협력하고 있던 놈이니 그러한 기능들에 대해서는 훤히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내가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없는 언데드인 구도자를 보내서 대응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난 분명 내 앞에 선 구도자처럼 인간과 같은 수준의 사고능력을 가진 언데드는 설정하지 않았었다.
그렇다는 건 저 구도자 역시 나와 같은 이세계인이거나 불청객이 만든 설정 때문에 저렇게 변한 것이 분명하다.
“언데드 주제에 말을 한다고?”
“하아... 역시나 못 믿겠다는 표정이네. 설명하자면 복잡하니까 대충 리치 같은 거라고 생각해. 엄밀히 말하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말이야.”
“알겠으니 헛소리는 그만하고 얼른 덤벼. 어차피 날 끝장낼 생각으로 온 거잖아.”
나는 구도자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이면서 도발했다.
난 곧장 상급마물과 함께 공격할 줄 알았지만 구도자의 태도는 내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그녀는 아예 상급마물에서 내려와서는 놈의 머리 바로 옆에 섰다.
나와 싸울 생각은 없는 것 같았지만 여차하면 상급마물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곳에 서있는 것을 보면 나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역시나 베로니카가 눈독을 들일만한 사람이네. 그 친구는 언제나 우리처럼 당당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을 좋아한단 말이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어떻게 베로니카 언니를...”
“그야 내가 10년 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베로니카의 사관학교 동기니까. 혹시 엘레아노르라는 이름을 들어봤니?”
“아니. 그런 이상한 이름은 들어본 적 없어.”
“아쉽네. 베로니카가 내 이름 정도는 말해줬을 줄 알았는데. 뭐, 어쨌든 그건 내 본명이야. 마침 ‘엘’이 들어가서 다른 녀석들처럼 억지로 개명할 필요가 없었어. 난 그게 너무 좋더라. 후후후.”
“흥! 그런 거짓말에 내가 속을 줄 알고?”
“진실을 말하는데도 알아먹지를 못하다니... 어째서 그 분께서는 너처럼 꽉 막히고 고집 센 바보에게 그토록 관심이 많으신지 모르겠어.”
엘레아노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이 자리에 없는 자신들의 위대한 지도자 탓을 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날 만나는 여자 구도자들은 전부 자신들의 대장이 내게 관심을 가지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혹시 다들 질투하는 건가?
어쩌면 위대한 지도자라는 사람은 일종의 하렘왕일지도 모르겠는 걸.
나 참,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는 생각이나 품는 나도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네 말이 사실이라고 치고, 이거 하나만 물어보자. 왜 사관학교 출신이 카론의 아이들 같은 정신 나간 집단에 들어간 건데?”
“일단 카론의 아이들은 엘리사 쪽 파벌의 이름이야. 그리고 우리 조직은 네 생각처럼 완전히 미치지는 않았어. 우린 그저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움직일 뿐이야. 몇몇 파벌의 수단이 다소 과격해서 그렇지.”
나는 인류의 미래를 운운하는 엘레아노르의 말에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까지 가면쟁이 새끼들 때문에 죽거나 고통 받은 사람만 하더라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뭐, 인류의 미래?
이 세상으로 넘어와서 들은 개소리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좆같은 소리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너희들처럼 자기네 집단만 잘난 줄 알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이는 새끼들이 가장 끔찍한 개새끼들이야! 그리고 넌 뒈졌으면 곱게 저승으로 꺼질 것이지 왜 이승에 남아서 산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죽이는 건데?”
“누군 이런 끔찍한 몸이 되고 싶어서 된 줄 알아? 그 빌어먹을 유물의 저주 때문에 이런 몸이 되었다고! 몇 번이고 자살했지만 아무런... 하아, 내가 왜 너한테 사생활까지 말해주려고 하는지 모르겠네.”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둘 중에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워보자고.”
나는 엘레아노르에게 마력소총을 조준했고, 그 년의 뒤로 무장드론을 날려 보냈다.
그러자 상급마물이 으르렁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엘레아노르는 어이가 없게도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진정해! 난 싸울 생각으로 널 찾아온 게 아니야.”
“그러면 네가 죽인 사람들을 조롱하러 왔어?”
“아니. 이 사람들은 내가 죽이거나 죽게 만들지 않았어. 내가 속한 파벌인 질서의 추종자는 온건주의라서 인간마물 같은 건 절대로 안 써.”
“하! 온건주의는 무슨 얼어 죽을.”
나는 엘레아노르가 하는 말이 너무나도 기가 막혔다.
인신매매와 납치로 확보한 사람들로 생체실험을 일삼는 조직에서 온건주의라고? 지나가는 개가 비웃다가도 정색할 일이다.
“사람 말 좀 그만 끊어! 이건 전부 엘리사가 꾸민 일이라고!”
“그건 나도 이미 대충은 알고 있어.”
“그래? 생각보다 유능하네. 아무튼 지금 이 상황은 엘리사가 아쿨타리 부족과 협상해서 신성한 그릇을 확보하라는 그 분의 명령을 개떡같이 알아들어서 벌어진 비극이야.”
엘레아노르는 지금 이 상황을 굉장히 슬퍼하는 듯이 말했다.
난 그 역겨운 연기에 헛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꾹 참았다.
혹시나 진실을 말할 수도 있으니.
“그래서 넌 설마 이 사태를 막으려고 했던 거냐?”
“맞아. 좀 많이 늦기는 했지만... 마을이 멸망하는 건 그 분의 뜻이 아니야. 게다가 우리 파벌입장에선 앞으로 우리들이 이끌어야할 백성들이 사라지는 건 손해거든.”
“역시 좋은 뜻은 없을 줄 알았어. 그냥 널 죽이고...”
“적당히 좀 해! 내가 온건주의 파벌이라서 다행인 줄 알아. 안 그랬으면 넌 이미 이 녀석의 먹이가 되었을 테니까.”
엘레아노르가 살짝 공격적인 말투로 상급마물의 머리를 쓰다듬자 놈은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서 날 위협했다.
난 이미 겪어본 종류의 공포라서 나름 익숙했지만 내 옆에 있는 에리카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을 정도로 무서워했다.
“꼬마 아가씨, 너 만큼은 죽일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너무 무서워하지는 마.”
“에리카에게 관심 끄시지.”
나는 겁먹은 에리카 앞에 서서 그녀를 향한 엘레아노르의 기분 나쁜 시선을 가려버렸다.
누구든 간에 내 여자한테 더러운 수작을 부리는 건 질색이라고.
“자기 여자한테 말 걸었다고 질투하기는.”
“이제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시지. 언제까지고 너랑 실없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
“그래.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하나 전해줄게. 뭐부터 들을래?”
“나쁜 소식.”
“엘리사가 신성한 그릇을 확보해서 도망쳤어. 그걸 써먹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말이야.”
난 나쁜 소식을 듣자마자 속이 너무 쓰렸다.
결국은 그것마저 지켜내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뒤에서 에리카가 손을 잡아주질 않았더라면 난동을 부렸을 지도 몰랐다.
“좋은... 소식은?”
“적어도 너랑 친분이 있는 아이리스네 가족들을 포함해서 마을사람들 일부가 살아남았다는 거지.”
“뭐라고?”
“우리는 적게나마 마을사람들을 보호하는데 성공했어. 그 사람들 스스로 살아남기도 했고. 지금은 모두 지상에 있어서 네 지도창에는 보이지 않는 거야.”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가면쟁이인 엘레아노르가 하는 말에 크게 안도하고 말았다.
아이리스를 포함해서 모두 죽어버린 줄만 알았는데, 살아있다는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다 났다.
“왜 베로니카가 널 좋아하는지 알겠네. 고작 그런 일로 울다니 말이야.”
“닥쳐!”
“넌 네 생각보다 선한 인간이고, 뭐가 옳은 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래서 난 네가 절대로 우리 조직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엘레아노르는 자기 멋대로 내가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서 정의를 내렸다.
하지만 난 그녀의 주장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다.
만약 그녀의 생각이 옳다고 하더라도 가면쟁이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다.
“방금 전에 너희들 조직의 이상한 신념에 대해서 신나게 떠든 주제에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웃기네.”
“생전의 미련이 남아있는 지도 모르지. 어쨌든 너희들이 인간마물들을 모두 쓸어버렸으니 마을사람들을 다시 여기로 내려 보내도 되겠어.”
엘레아노르는 뭔가 슬픈 목소리로 말하더니 상급마물을 타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가면쟁이를 만나면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맹세했었지만 이번만큼은 은혜를 입었으니 그냥 보내주기로 했다.
내가 상급마물을 못 이겨서는 절대로 아니다! 아무튼 그건 아니야!
“레베카 카론. 행복하게 살고 싶으면 더 이상 우리 조직의 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 게 좋아. 온건파는 우리 질서의 추종자 밖에 없고 나머지는 전부 과격파 또라이들이니까.”
“난 그럴 생각이 없어도 너희 쪽에서 자꾸 날 건드리는데 어쩌겠어.”
“네가 불의를 참고 넘어가면 될 일이야. 그리고 참고로 팁을 하나 주자면, 네가 가지고 있는 구도자 가면을 쓰고 있으면 구도자보다 계급이 낮은 조직원들의 방어막은 깔끔하게 무시할 수 있으니 참고하도록 해.”
엘레아노르는 참 친절하게도 가면의 사용법을 알려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난 그녀가 원하는 것과는 달리 가면쟁이들에게 관여되지 않는 게 어려울 것 같다.
마치 운명이 날 그렇게 이끄는 것 같단 말이야.
“잠깐! 베로니카 언니에게 전할 말은 없어?”
“내 죽음은 오직 내 탓이니까, 아직도 그 일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면 다 털어버리고 편하게 살아달라고 전해줘. 내가 가면쟁이라는 말은 하지 말고.”
“네 스스로 가면쟁이라니, 자존심도 없나보네?”
“그 분의 걸어두신 제약 때문에 진짜 조직이름을 말해줄 수가 없으니 네가 만든 멸칭이라도 써야지 어쩌겠어. 엘리사의 위치에 대한 정보도 같은 이유로 알려줄 방법이 없고.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싫어!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거야!”
나는 괜히 친한 척을 하는 엘레아노르에게 제대로 된 작별인사까지 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파벌에게 도움을 받긴 했어도 가면쟁이들에게 우호적으로 다가가는 건 미친 짓이라고 본다.
내가 떠나려던 엘레아노르를 붙잡고 베로니카 언니에게 전하고 싶은 말에 대해서 물었던 것은 오직 언니를 위해서이지 그 여자를 위한 게 절대로 아니다.
“레베카님, 정말 저 사람을 믿어도 괜찮은 걸까요?”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래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난 내가 생각해도 정말 어설픈 사람인 것 같아.”
“그런 말씀마세요. 레베카님은 그저 악한 마음을 쉽게 품지 못하시는 분일뿐이에요.”
나는 에리카가 하는 말에 적잖은 위로를 받았다.
이번 사태로 죽은 사람들이 전부 내 탓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 힘들었는데, 그나마 아이리스의 가족들이 살아있고 에리카가 편을 들어주어서 마음이 점점 편해졌다.
‘얘들아, 마을 입구로 오도록 해.’
‘레베카님... 사람들이...’
‘진정해, 이리스. 생존자들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을 맞이하러 가면 돼.’
나는 텔레파시 너머로 울먹이고 있는 이리스를 안심시켰다.
생존자들이 있다는 말에 이리스는 더 이상 우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레베카님, 생존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아셨나요?’
‘자칭 온건주의 파벌이라는 가면쟁이가 가르쳐줬어.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야.’
‘네, 저야 당연히 레베카님을 믿지요. 우리의 적들을 못 믿을 뿐이죠. 지금 바로 이리스를 데리고 갈게요.’
라우라는 이리스와 달리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유혈사태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사람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나보다도 더 상태가 좋은 것 같았다.
나는 텔레파시를 끝내자마자 에리카와 함께 마을의 입구로 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라우라와 이리스가 우리와 합류했다.
난 내 사랑들이 얼마나 반가운지 마법갑옷을 입은 채로 세 사람을 한꺼번에 껴안았다.
서로의 체온이나 숨결이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충분히 공유되었다고 생각한다.
“레베카님, 마법승강기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려요.”
“나도 들었어. 생존자들이겠지만 혹시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하자.”
나는 엘레아노르에게 뒤통수를 맞을 태세를 갖추고서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체감하기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마법승강기가 지하마을에 도착했고,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아쿨타리 부족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 아이들이었고, 어른들은 모두 부상자나 장애인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죽음의 기운이 흐르는 마을을 보자마자 모두 통곡하고야 말았다.
“아이리스!”
우리는 혼자서 울지 않고 있는 아이리스에게 서둘러 다가갔다.
그녀의 곁에는 두 다리가 절단된 채로 겨우 숨만 붙어있는 세실리아와 몸 전체에 피가 흥건하게 묻은 붕대를 감고 있는 제이슨이 있었다.
세실리아의 손에는 여전히 마법수정구가 들려있었고, 제이슨 역시 부러진 창을 쥐고서 놓아줄 생각을 하질 않았다.
난 단지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이 마을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얘들아... 너희들은 무사해서 다행이야.”
아이리스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난 실컷 울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유일하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 아이리스가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울컥하고야 말았다.
“아이리스, 내가 다친 사람들을 죽지 않게 할 테니까 걱정 마.”
내 말에 아이리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질서의 추종자들이 응급처리를 해둔 부상자들을 위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의약품을들 꺼냈다.
난 내 사랑들과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부상자들을 치료했고, 아이리스는 기특하게도 마음을 다친 아이들의 상처를 보듬어주었다.
모든 일을 다 끝낸 나는, 한숨을 돌린다는 핑계를 대고서 혼자 멀찍이 떨어져서는 남들 몰래 눈물을 훔쳤다.
난 원래 웬만해선 울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여자가 된 이후로는 자꾸만 눈물이 쉽게 나서 짜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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