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143화 (143/271)

〈 143화 〉 142화

* * *

라우라가 보낸 텔레파시의 내용은 간단했다.

족장의 저택에서 잠입을 끝내고 사원으로 돌아오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목소리가 다급해지다가 아예 소식이 끊겨서 걱정이 앞섰다.

나는 얼른 지도창을 열고 라우라에게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살펴보았다.

라우라는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었는데, 다행히 추적자들을 능숙하게 뿌리치고 금방 내 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머리에 뱀파이어족의 뿔처럼 생긴 막대기를 붙이고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는 자연스러웠다.

“레베카님!”

“라우라, 너 괜찮니?”

“네, 조금 숨이 찬 것뿐이에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아이리스, 오늘은 안내해줘서 고마웠어.”

“응! 다음에 또 같이 놀자.”

나는 아이리스에게 손을 흔들어서 인사를 한 뒤에 숨을 고르고 있는 라우라를 데리고 숙소로 향했다.

라우라는 숙소로 들어오자마자 창문을 모조리 닫았고, 나는 미니맵과 지도창을 주시하며 주변의 안전을 확인했다.

그리고 에리카는 자신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다른 무녀들에게 당분간 숙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우린 일련의 조치를 거친 뒤에야 겨우 마음을 놓고 한데 모여 앉았다.

“라우라, 아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사람들이 널 쫓아가고 있던데.”

“텔레파시를 보내는 동안 들켜버렸어요. 죄송해요.”

“아니야. 난 네가 무사히 탈출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어쩌다 들켜버린 거니?”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지붕 안에 숨어있어서 도저히 들킬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빈틈 같은 것도 없었고요. 정말 납득이 되질 않아요.”

라우라는 자신이 잠입을 하다가 허무하게 들켰다는 사실 자체에 굉장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여태까지 내게 성공적이고 깔끔한 잠입능력을 선보였다가 딱 한 번 삐끗했을 뿐인데도 스스로가 용서가 되질 않는 듯 했다.

“그쪽에서 뭔가 수를 썼겠지. 그나저나 그 뿔 같은 건 어디서 난 거니?”

“아, 이건 시장에서 지팡이를 사다가 칼로 깎은 뒤에 천을 덮어서 만들었어요. 뿔이 없으면 우리 소행인 게 바로 들통이 나니까 아까처럼 들킬 상황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다행이죠.”

“맞아. 정말 좋은 선택이었어. 아무튼 고생 많았어.”

나는 라우라의 손을 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겨서 고마움이 담긴 키스를 해주었다.

그러자 라우라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양 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서 적극적으로 혀를 섞기 시작했다.

라우라는 한참동안 날 잡아먹을 기세로 키스를 하면서 내 가슴을 주물럭거리거나 발딱 서버린 젖꼭지를 어루만졌다.

나는 점점 고조되는 흥분감에 호흡이 가빠졌고, 온 몸이 열기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라우라는 내 보지가 촉촉하게 젖을 무렵에 키스를 끝냈고, 나는 아쉬운 마음에 탄식에 가까운 신음소리를 흘렸다.

“후후후, 지금은 이걸로 끝내도록 해요.”

“어째서?”

“그야 제가 수집한 정보가 나름 중요한 거니까요. 그러니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크윽... 알았어.”

나는 다리를 모으고 앉은 채로 몸을 비비꼬면서 아쉬움을 드러냈지만 라우라는 그냥 웃어넘겼다.

사람을 애타게 만들어놓고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다니 정말 치사하다.

나중에 꼭 갚아주고 말거야!

라우라는 내가 빌려줬던 스마트폰을 꺼내서 우리에게 사진으로 찍은 정보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우선 이건 시신을 거래한 장부인데, 마지막 페이지의 날짜가 카르디아의 모험가들이 아쿨타리 부족에게 습격을 받았던 날과 일치해요. 거기다 죽은 모험가들의 수와 판매한 시신의 수가 정확히 같아요. 그리고 이건 전리품 창고에서 발견한 모험가길드에서 발급한 펜던트에요. 즉, 이 사람들은 시체를 팔아먹기 위해서 모험가들을 공격했던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그 사건의 배후에 족장패거리 있을 거라는 추측을 하던 중이었어. 물증이 나와서 다행이긴 한데, 왜 이런 식으로 구체적으로 서류화 작업을 거쳤는지 모르겠네. 그것도 시체를 거래하는 일인데 말이야.”

“아, 그건 족장이 가면쟁이와 거래를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라우라가 두 번째로 보여주는 사진에는 어느 표독스럽게 생긴 노인과 젊은 여성 가면쟁이가 알몸으로 함께 찍은 흑백사진이 찍혀있었다.

노인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가면을 쓴 여자는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 지 궁금했다.

“노인은 족장이고 옆에는 엘리사라는 구도자에요. 둘 사이는 단순한 거래관계는 아닌 것으로 보여요. 그리고 이건 계약서에요.”

라우라는 다음 사진을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걸 확대해서 유심히 읽어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노골적인 이름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카론의 아이들? 이게 가면쟁이들의 진짜 조직명이구나...”

“네, 공교롭게도 레베카님의 성씨와 같은 이름이더라고요. 물론 진짜 조직명이 아니라 가명이나 특정부서, 혹은 족장 측에서 일방적으로 부르는 이름일 수도 있어요.”

“최근에 내 성씨를 남들에게 말해준 적은 없지만 앞으로 절대로 입에 담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어.”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건 계약서의 내용에 비하면 별로 충격적인 것도 아니에요.”

나는 라우라가 하는 말에 서둘러 계약서를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말이 좋아서 계약서이지 동족을 팔아먹고 호의호식하겠다는 파렴치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음... 확실히 네 말이 맞아. 족장은 카론의 아이들에게 자기네 조상님들을 주기적으로 납품하고, 숲에 들어오는 외지인들을 수확해서 실험체로 제공하는 계약을 맺었어. 거기다 최종적으로는 놈들에게 마을의 지배권을 넘기고 자신과 부하들은 가면쟁이가 되어 영생을 누리겠다니, 정말 끔찍한 놈이야.”

“거기다 에리카를 죽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고, 가면쟁이들에게 신성한 그릇까지 넘겨주겠다고 해요. 놈들의 목적이 뭐든 간에 그런 대단한 물건을 손에 넣게 놔둘 수는 없어요.”

라우라는 흥분을 해가면서 말했다.

하지만 난 그녀처럼 흥분하지 않고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역사적으로 동료나 나라를 팔아먹는 놈들의 사례는 흔하니까 족장이 카론의 아이들과 결탁해서 동족을 모조리 카론의 아이들에게 팔아먹는 건 놀라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에리카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말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어도 화가 치밀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서 분을 삭였고, 에리카가 내 손을 잡아준 덕에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을 수 있었다.

“레베카님, 이 사진들은 에리카를 버린 경위가 담긴 편지와 족장의 명령을 받았던 사람들의 명단, 지금까지 족장의 가문이 죽여 왔던 아쿨타리 왕족 혈통인 사람들의 목록이에요.”

“이것만 있어도 족장을 끌어내릴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무슨 수를 쓰든 저항을 할 게 분명해. 족장의 병력은 얼마나 되는 지 파악했니?”

“제가 파악한 것만 따지면 117명이에요. 남들 몰래 마력총을 보유하고 있어서 경비대의 힘만으로는 제압할 수 없을 거예요.”

“결국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족장을 체포할 수 없겠구나.”

“우리가 경비대를 도와주더라도 힘들 수 있어요. 이걸 한 번 보세요.”

나는 라우라가 보여주는 동영상을 보자마자 머리가 아파왔다.

분명 상급마물 한 마리가 족장의 저택 지하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제이슨이 말했던, 황금색 가면쟁이가 처리했었던 상급마물들이 외부가 아니라 족장의 저택에서 풀려났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물의 흔적이 아쿨타리 왕국 지역으로 이어졌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다행인 점은 마물을 번식시키는 시설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여긴 카론의 아이들이 수작을 부린 곳이기는 해도 족장에게 일을 맡기고 간접적인 지원을 하는 하청 같은 곳이다.

“그나마 한 마리라서 다행이네. 하지만 라우라, 네 말대로 우리끼리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괴물이라는 게 문제야. 이걸 어쩌면 좋지...”

“제가 족장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의 시간표를 확인하고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시간표를 지킨다고 해요. 즉, 족장이 가장 취약한 시간에 기습하면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예요.”

“그때가 언제니?”

“매일 아침 10시에 화장실에서 큰일을 본다고 해요. 마침 족장만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은 마법추진기를 이용해서 넘어갈 수 있는 거리 안에 위치하고요.”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굴욕을 주기에는 딱 좋은 상황이네. 좋아, 당장 내일에라도 작전을 감행하자.”

“그전에 대무녀와 경비대장을 확실하게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적이 더 늘어나는 사태가 벌어질 지도 몰라요.”

“그건 이리스가 오는 대로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될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지도창에서 이리스를 찾아보았는데, 여전히 여러 무녀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솔직히 오늘 바로 예언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낼 것이라는 기대는 적은 편이지만 힌트라도 알아낸다면 세실리아를 떠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리스의 상황을 확인하는 사이에, 에리카가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레베카님, 제가 좀비들을 처리해주는 것만으로도 그 두 사람을 철저하게 아군으로 만들 수 있어요.”

“이리스, 어디까지나 최후의 방법이야.”

“상급마물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상황 자체만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그건...”

나는 에리카가 강한 어조로 묻는 말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상급마물이 마을에 풀려나면 우리야 도망치면 그만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몰살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바로 에리카에게 그 유물을 조작하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에리카, 이것도 이리스를 기다려보자. 이리스가 알아낸 예언이 확실하다면 네가 하는 일을 말리지 않을 게.”

“네, 레베카님. 제 억지를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에리카는 내 팔을 꼭 끌어안으며 기뻐했다.

내가 의견을 들어준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아하다니, 나도 뭔가 기분이 좋아져서 에리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리스가 방으로 들어왔다.

땀을 조금 흘리고, 옷이 잔뜩 흐트러진 것을 보니 뛰어온 것으로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스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주었다.

“이리스, 좋은 소식이라도 있니?”

“네! 방금 원로무녀님들이랑 대화를 했었는데, 예언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주셨어요.”

“정말? 그렇게 간단하게 알려줬단 말이야?”

“그 분들은 대무녀님이 어제 마음이 급해서 제대로 예언을 알려주지 않았다면서 가르쳐주시더라고요.”

“좋아, 일이 잘 풀리고 있어.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자.”

나는 이리스와 함께 자리에 앉았고, 라우라와 에리카가 가까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리스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이거 뭔가 부담스럽네요. 흠흠, 우선 에리카의 탄생에 대한 예언은 그게 전부에요. 아쿨타리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신성한 그릇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예언이 복잡하지 않다고 해요.”

“그건 아이리스 덕분에 우리도 알게 되었어. 걔가 그걸 직접 보여줬거든.”

“그렇군요. 에리카, 넌 기분이 괜찮아?”

“응. 거기서 다 털고 왔어.”

“다행이다. 난 네가 우울할까봐 걱정했어.”

이리스는 에리카를 부둥켜안으며 말했다.

여느 때 같으면 에리카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겠지만 지금은 순순히 이리스의 포옹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부족의 미래가 걸린 혈통을 가진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예언은 조금 더 살이 붙어있었어요. 아쿨타리 부족의 미래가 걸린 왕족의 혈통을 가진 사람이 사랑하는 이의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에요.”

“그냥 듣기에는 에리카를 지목하는 말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사랑하는 이의 고향이라는 부분은 좀 이상하네.”

“벰파이어족은 뿌리와 혈통을 중시하는 종족이니 동족이 사는 곳을 사랑하는 이의 고향이라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우리 중에 아쿨타리 부족과 관련된 왕족의 혈통은 에리카뿐이니까 에리카가 예언의 당사자가 맞는 것 같아요.”

“하긴 괜히 대무녀님이 에리카를 지목한 건 아니겠지. 그런데 내가 진짜 카론 왕조의 먼 후손이라면 나도 그 예언에 해당되는 사람일 수도 있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카론 왕족의 혈통을 가진 내가 사랑하는 에리카의 고향으로... 아, 돌아왔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구나.”

난 괜히 아는 척을 하다가 말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본 내 사랑들은 다들 씩 웃으면서 내 손을 잡아주거나 볼을 쓰다듬거나 팔짱을 꼈다.

위로를 받는 건 좋지만 뭔가 아이취급을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레베카님이 지금 잠시 바깥으로 나갔다가 다시 마을로 오는 것만으로도 조건을 충족시킬 수는 있긴 해요. 기한에 대한 말은 없으니까요.”

“뭔가 이것저것 끼워 맞춰서 말이 되게 만들면 그만인 느낌이네.”

“예언 같은 비합리적인 개념은 다 그런 식이긴 해요. 하지만 예언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이루어진다는 게 무서운 것이지요.”

나는 이리스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하는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우리가 이것저것 예언에 대해서 떠들어봤자, 결국은 정해진 운명대로 움직이게 된다니 말이다.

“레베카님, 아무래도 제가 나서는 게 정답인 것 같아요. 만약 레베카님이 예언의 당사자라고 하더라도 결국 유물을 조작할 수 있는 것은 아쿨타리 왕족의 피가 흐르는 저 뿐이니까요.”

“네 말이 맞아. 결국 네 말을 듣게 될 일인데 괜히 내가 시간만 끌어버렸네. 그래도 그건 족장을 제압한 뒤에 하도록 하자.”

“저도 제 목숨을 노리는 사람을 놔두고서 그런 큰일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족장이 정말 에리카를 죽이려고 하나요?”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리스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녀는 우리가 족장을 제압한다는 말보다 놈이 에리카를 죽이려고 든다는 사실 자체에 치를 떠는 것처럼 보였다.

“그 녀석의 가문은 대대로 에리카와 같은 사람들을 죽여 왔어. 그리고 이번에는 아예 카론의 아이들, 그러니까 가면쟁이들과 손을 잡고서 부족 전체를 팔아먹을 기세야. 그래서 우리가 족장을 막으려고 해. 물론 그 전에 대무녀님과 경비대장에게 협조를 구해야겠지.”

“제가 지금 당장 저격으로 그 쓰레기의 머리통을 날려버릴게요.”

“진정해. 라우라의 말에 따르면 보통 겁쟁이가 아니라서 얼굴 보기도 힘들 거야. 그래서 내일 아침 10시에 놈을 습격해서 본때를 보여줄 작정이야.”

내가 하는 말에 이리스는 물론이고 라우라와 에리카도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고, 난 그 기대에 반드시 부응하리라 다짐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