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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142화 (142/271)

〈 142화 〉 141화

* * *

우리는 제법 오랜 시간동안 신성한 그릇 근처에서 머물렀다.

에리카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쉽게 눈을 때질 못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 상황이 지속되지는 않았다.

“레베카님, 이제 우리 여기서 떠나도록 해요.”

“미련은 없니?”

“네, 절 낳아주긴 했지만 결국은 기계일 뿐이니까요.”

에리카는 먼저 바깥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고, 나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우릴 방해하지 않고 혼자서 놀고 있던 아이리스는 눈치껏 따라왔다.

“아이리스, 이제 우릴 어디로 데려갈거니?”

“간단하게 마을을 둘러볼 계획인데, 족장님의 저택에는 못 들어가겠지만 다른 곳은 방문하는 건 별 문제가 없을 거야.”

“그렇구나. 그런데 족장님은 어떤 사람이니?”

“못된 사람.”

아이리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족장에 대한 노골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녀의 잔뜩 일그러진 표정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족장을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마을사람들과 두루 친하게 지내는 아이리스가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면 평판이 바닥을 치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어?”

“자기 혼자서 우리 마을을 지배하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이야. 원래 우리 마을은 대무녀, 경비대장, 족장 이렇게 셋이서 공동대표인데 툭하면 엄마랑 제이슨 아저씨를 깔보고 자기 아래로 두려고 해.”

“욕심이 많은 사람이네. 이번 기회에 내가 박살을 내줄까?”

나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말했다.

족장이 에리카를 빼돌려서 고아원에 내다버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놈에 대한 적대감이 들었었다.

거기다 족장가문이 권력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대대로 아쿨타리 왕실의 혈통들을 죽여 왔다는 심증까지 생겨버리니 죽여도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만약 족장이 에리카를 죽이려는 계획을 또 세우고 있다면 그땐 누가 막아서더라도 놈을 죽이고 추종자들도 끝장을 내버릴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받아들이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것 같아서 싫어.”

“넌 착한 사람이네. 하지만 난 에리카가 위협을 받는 상황이라면 참지 않을 거야.”

“설마 한 번 실패한 사람이 또 그런 짓을 하겠어? 엄마랑 제이슨 아저씨가 있으니까 그런 짓은 함부로 하지 못할 거야.”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

“엄마는 너희들 덕분에 우리 모두가 무사할 거라는 예언을 했어. 엄마의 예언은 빗나간 적이 없으니까 안심해도 돼.”

“넌 어제 너희 어머니가 하셨던 예언에 대해서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어?”

“예언의 내용은 엄마랑 원로무녀님들만 자세히 알고 있고 나 같은 보통 무녀들은 엄마가 너희들에게 말했던 수준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야.”

“예언을 그런 식으로 감추면 진짜로 예언이 맞는지 아닌지는 해석하기 나름이잖아.”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어. 그야 난 엄마를 믿으니까. 엄마는 살면서 나한테 거짓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야.”

아이리스는 세실리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드러냈다.

자식이 어머니를 신뢰하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아이리스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어머니에 대한 믿음이 대단해보인다.

그래서 난 아이리스를 상대로 예언에 진위여부에 대해서 논쟁을 할 필요성을 잃었다.

예언분야에 한해서는 아이리스에게서 쓸 만한 정보를 얻지 못할 것 같다.

“넌 어머니를 정말 좋아하는 구나?”

“응!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그 마음 평생 간직하고 살아. 그럼 이제 마을로 돌아가자.”

나는 아이리스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준 뒤에, 그녀를 안아들고서 에리카와 함께 왔던 길을 따라서 달려갔다.

이번에도 아이리스는 재미있다며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마법추진기를 사용해 에리카와 아이리스를 데리고 위쪽에 있는 문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마을로 들어가기 전에 마법갑옷을 벗고 무녀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이리스는 우리가 스스럼없이 알몸이 되는 걸 부담스럽게 여겼는지 한동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우리는 옷을 다 갈아입은 뒤에 아이리스를 앞세워서 마을로 들어갔다.

온통 무너진 건물과 악취로 가득했던 곳에서 생기가 넘치는 곳으로 돌아오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제부터는 우리 마을의 좋은 모습을 잔뜩 보여주도록 할게.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그냥 네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갈게.”

“좋아. 그럼 시장부터 가보자.”

우리는 잔뜩 들떠있는 아이리스를 따라서 마을 일주를 시작했다.

아쿨타리 부족이 살아가는 지하마을은 위치가 지하에 있을 뿐,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바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건축양식이나 문화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전체적인 모습은 비슷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고립되었다는 말이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가끔 정찰대를 내보내서 풍물을 수집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을 텐데 말이다.

뭐, 나는 인류학자 같은 사람은 아니니까 깊이 생각하지는 말자.

그것보다는 아이리스가 맛있다고 추천하는 선짓국을 맛보는 일이 내겐 더 중요하다.

“어때? 맛있어?”

“응. 네 말대로 정말 맛있어. 여길 떠나도 종종 생각날 것 같은 맛이야.”

나는 거짓말이나 과장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예전 세상에서도 나름 좋아했던 음식이라서 만족스러웠다.

“에리카, 넌 어때?”

“말하자면 고향의 맛이네. 고아원에 살 때 원장님이 가끔 날 위해서 사주셨거든.”

“누군지는 모르지만 좋은 분인 것 같네.”

“맞아. 고아들을 돌봐주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드신데 종족에 따른 차이도 많이 신경 써주셨어. 음, 맛있다.”

에리카는 아이리스와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국물까지 깔끔하게 비우고는 당당하게 한 그릇 더 시켰다.

나는 에리카가 이렇게 많이 먹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인지라 흥미로웠다.

마치 라우라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점심식사를 끝낸 우리는 다시 아이리스를 따라서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사원이나 족장의 저택, 경비대 본부 같은 특별한 건물이 아니고서야 모두 단층이나 2층짜리 목조건물들이라서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서 사소한 것조차 자랑을 했다.

난 그녀가 하는 말을 대부분 흘려들었지만 자동화된 식량생산시설만큼은 내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지상은 내 설정에 따라서 식량이 풍족해서 굳이 이런 시설이 필요 없지만 지하는 일반적인 농사는 불가능하니 대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만약 에리카가 성공적으로 좀비들을 해방시키고, 그 대가로 이 시설의 설계도를 받는다 하더라도 과연 본격적으로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이리스, 경비대 본부로 가면 경비대장님을 만날 수 있을까?”

“지금은 가능할 거야. 얼른 가자.”

나는 아이리스를 따라서 경비대 본부로 향했고, 운 좋게도 입구 근처에서 제이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리스는 제이슨을 부르며 그에게 달려가서는 냅다 안겼다.

경비대원으로 활동할 때면 몰라도 지금은 그냥 옆집 아저씨를 대하듯 전혀 부담감이 없어보였다.

“아이리스, 근무시간에 이러면 곤란해.”

“그치만 난 아저씨가 좋은 걸.”

“흠흠, 너도 이제 아가씨가 다 됐으니 어린 아이 같은 행동에서 벗어나야지.”

제이슨은 기쁜 표정을 애써 숨기면서 아이리스를 타일렀지만 별로 소용이 없어보였다.

아이리스는 더욱 애교를 부려가면서 제이슨의 품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질 않았다.

“어차피 곧 우리 아빠가 될 사람인데 뭐 어때?”

“아이리스, 그건...”

“왜? 이제 엄마가 싫어졌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직 결론이 난 일도 아닌데 네가 그런 말을 하면 대무녀님이 곤란해지잖아.”

제이슨에 대한 내 첫인상은 매사에 엄격하고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부하들 앞에서 감정을 제대로 숨기지도 못하고 십대소녀에게 놀아나고 있는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이다.

그나저나 제이슨이 아이리스의 새 아빠가 될 예정이라니? 마을의 공동대표들이 가족이 되면 권력의 균형이 무너지겠네.

아직 얼굴도 모르는 족장이 대무녀와 경비대장을 싸잡아 아래로 두려는 이유가 대충 뭔지 알 것 같다.

“제이슨 아저씨, 오늘 저녁에는 우리 집에 올 거야?”

“그럼 꼭 가야지.”

“정말? 저번처럼 갑자기 못 오게 되면 엄마가 많이 섭섭해 할 거야.”

“오늘은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하렴.”

“다행이다. 아참, 레베카가 아저씨한테 물어볼 게 있다고 해.”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제이슨은 뒤늦게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당혹감을 보였다.

내가 아니라 에리카 때문에 그런 거겠지만 덩치가 크고 근육질인 사람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는 건 꽤나 재밌었다.

“에리카님, 경비대 본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간밤에는 편안하게 지내셨는지요?”

“다들 친절하게 대해주어서 편하게 잘 수 있었어. 신경써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당연히 신경을 써야하는 일이니까요.”

제이슨은 내게 말을 걸기에 앞서서 에리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에리카와 짧게 대화를 주고받은 뒤에야 나에게 시선을 두었다.

“자네는 정말 질문을 좋아하는 사람이군.”

“원래 호기심이 좀 많은 사람이라서 말이죠. 그런데 이건 경비대와 관련된 질문이라서 꼭 해야 할 것 같아요.”

“말해보게. 내 권한을 넘어서지 않는 질문이라면 얼마든지 답해주지.”

제이슨은 어제보다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덕분에 난 부담 없이 민감한 질문을 할 수 있었다.

“며칠 전에 카르디아의 모험가들이 일방적으로 공격을 받았고, 한 명만 겨우 살아서 돌아왔어요. 이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나요?”

“최근 한 달 동안 외부인과 접촉한 사례는 자네뿐이야. 그리고 우린 선제공격을 받지 않는다면 조용히 상황을 지켜만 본다. 억지로 마을에 진입하려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렇군요. 모험가의 증언에 따르면 아쿨타리의 영역에 발을 들이지 말라는 말을 하면서 다짜고짜 공격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어요.”

“우리 경비대원들 중에서는 남의 목숨을 함부로 뺏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족장의 부하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역시 또 족장이 문제거리가 되는 구나.

아무래도 이번에는 가면쟁이가 아니라 족장을 상대로 끝장을 봐야할 것 같다.

“그 사람들도 바깥을 순찰하나요?”

“멋대로 나가서 놀다 오는 것에 가깝지. 아예 카르디아까지 나가서 놀다오는 주제에 굉장히 배타적이라 외부인이 근처의 숲을 돌아다니는 것조차 혐오하는 놈들이다. 경비대 입장에선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족장이 그들을 비호하니 한계가 있어.”

“혹시 그 사람들이 이런 가면을 쓴 사람들과 만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나는 제이슨에게 다시 한 번 가면쟁이들의 가면을 보여주면서 물었다.

그러자 제이슨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놈들이 술에 취해서 떠드는 소리를 엿들은 적이 있는데, 바깥에서 무슨 사업을 한다면서 가면을 쓴 사람에게 돈을 빌렸다는 말을 하더군. 일단 붙잡아서 취조를 했지만 술김에 한 말이라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잡아떼고, 족장이 직접 와서 데려가는 바람에 더 이상 정보를 얻지 못했지.”

“뭔가 구린 냄새가 나네요.”

“증거가 없으니 내 권한으로는 족장의 직속부하들을 잡아넣을 수가 없어.”

“반대로 증거가 있다면 무조건 체포할 수 있다는 건가요?”

“그래. 명백한 물증이 있다면 족장도 예외 없이 수사를 받게 되지.”

“만약 증거를 손에 넣으면 공유해드릴게요.”

내가 자신 있게 하는 말에 제이슨의 눈빛은 순식간에 의심으로 물들었다.

경비대장인 그의 입장에서 외부인인 내가 마을을 들쑤시고 다니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겠지.

하지만 난 제이슨이 하지 말라고 포기할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뒷조사까지 해버릴 사람이지.

“잠깐, 지금 우리 마을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걱정 마세요. 단순한 정보수집에 불과하니까요. 아, 이런. 제가 너무 시간을 많이 뺏었네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에리카를 데리고서 바로 현장을 벗어났다.

그러자 아이리스도 우리 곁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제이슨의 감시명령을 받은 경비대원들이 우리의 뒤를 따라왔지만 나는 미니맵과 지도창을 활용해 그들의 감시망을 간단하게 벗어났다.

그리고 경비대가 들어올 수 없는 사원 안으로 발을 들였다.

뒤늦게 우리를 다시 찾은 경비대원들은 허무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레베카, 제이슨 아저씨는 나쁜 사람 아니야. 그러니까...”

“걱정 마, 아이리스. 경비대장님이 적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부하들이 거짓보고를 올렸을 수도 있으니까 조사를 해봐야겠지.”

“넌 에리카를 지키려고 우리 마을을 조사하는 거지?”

“그래. 에리카는 물론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보호하기 위해서야. 난 빼앗기고 싶지 않거든.”

“나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나는 아이리스의 제안에 굉장히 망설여졌다.

대부분의 마을사람들이 우호적으로 대하는 아이리스라면 정보를 모으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그녀가 사고를 몰고다닌다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난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아이리스를 정보원으로 쓰고 싶지는 않다.

“일단 나랑 한 이야기는 무조건 비밀로 하고, 평소처럼 지내면서 누가 특별한 말을 하면 그땐 나한테 말해줘. 혼자 멋대로 남들 뒤를 캐지는 말고. 알았지?”

“응! 열심히 할게.”

“아니, 열심히 할 필요까지는 없고 쉬엄쉬엄해. 괜히 나 때문에 네가 피해를 보는 일은 원치 않아.”

“알았어. 조심할게. 레베카, 넌 정말 친절한 사람이야.”

“아니, 그건 아니고...”

나는 아이리스가 나를 선망하듯 바라보는 모습에 부담감이 느껴졌다.

단순히 아이리스가 선을 넘지 못하도록 목줄을 잡는 느낌으로 한 말에 저렇게 기뻐할 줄이야.

마침 라우라가 텔레파시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계속 이 문제로 고민했을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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