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 139화
* * *
나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햇살이 아니라 거대한 인공조명의 불빛이다.
수백 년 전에 이런 대규모 지하도시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나라라면 제국을 상대로 끝까지 항전을 해볼 만도 했을 텐데.
내 생각에는 기술력은 뛰어나도 무기를 만드는 능력은 그렇지 못했거나 물량 자체가 압도적이라 당해낼 방법이 없었던 게 아닐까싶다.
혹은 합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비이성적이고 광기에 가까운 이유가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진실은 그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이나 그들이 남긴 기록에 담겨있겠지만 죄다 좀비가 되어 버렸으니 인터뷰는 불가능하겠지.
“다들 먼저 일어난 모양이네.”
나는 방 한편에 개어져있는 이불들을 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리정돈을 하라고 강요한 적도 없는데 알아서들 잘 하는 걸 보면 기분이 좋다.
미니맵으로 보니 내 사랑들은 모두 본당 앞에 모여 있었다.
나는 하품을 크게 한 번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어제 입었던 무녀복이 아니라 방 안에 새로 준비된 무녀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나와 눈을 마주친 젊은 무녀들은 대부분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내가 인사를 받아주면 수줍게 웃으면서 종종 걸음으로 멀어지거나 헤벌쭉 미소를 지었다.
예쁘고 귀여운 사람들이 내 얼굴에 홀딱 반해버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거만해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함께 마당을 쓸고 있는 내 사랑들을 보니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라우라와 이리스, 에리카는 나를 보자마자 하던 일을 멈추고 내게 달려와 순서대로 아침키스를 해주었다.
우리의 과감한 애정표현을 본 무녀들은 자기들끼리 꺅꺅 소리를 내며 호들갑을 떨었고, 부러워하는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너희들 왜 아침부터 청소를 하고 있었니?”
“뭔가 사원이라서 그런지 마냥 놀고만 있을 수는 없더라고요.”
이리스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어제 이리스에게 대무녀와 가까워지라는 지시를 내렸으니 이런 식으로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연기가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라우라와 에리카도 함께하는 것을 보면 딱히 그것 때문에 청소를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이리스의 말처럼 순수하게 숙식을 제공받는 대가를 최소한으로나마 지불하려나보다.
난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하는 데 말이다.
“그렇구나. 그래도 각자 할 일이 있으니까 이런 일에 너무 힘을 쏟지는 마.”
“네, 레베카님.”
“아침은 먹었니?”
“아니요. 레베카님이 일어나시면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가 늦잠을 자진 않아서 다행이네. 그런데 밥은 어디서 먹으면 되는 거지?”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식당으로 보이는 건물을 찾아보았지만 좀처럼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지도창을 열어서 확인을 해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아이리스가 말을 걸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다들 안녕! 좋은 아침이야!”
아이리스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녀복을 입고 있었다.
어제는 어두워서 그런지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얼굴상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데다 사고를 몰고 다니는 걸 먼저 알아서 그런지 노출이 많은 무녀복을 입고 있어도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도 무녀야?”
“응! 얼마 전에 겨우 정식무녀로 인정받았어. 그래서 이렇게 머리장식을 달 수 있게 되었지. 어때 예쁘지?”
아이리스는 질끈 묶은 머리 뒤에 달려있는 작은 족두리처럼 생긴 울긋불긋한 장신구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확실히 주변에 이 장신구를 머리에 달고 있는 무녀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정식무녀가 될 수 있는 기준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수시로 사고를 일으키는 건 결격사유가 아닌가보다.
“정말 잘 어울리네. 솔직히 난 네가 대무녀님의 딸이라서 그냥 무녀복을 입고 다니는 줄 알았어.”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초면부터 영 못미더웠잖아. 자주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하고. 아참! 나 경비대에서 진짜로 짤렸어. 그래도 퇴직금은 챙겨주는 거 있지. 제이슨 아저씨는 참 좋은 사람이라니깐.”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네가 기사단이나 제국군 소속이었다면 총살당했을 정도로 심각한 일이었거든.”
“초, 총살? 히익! 역시 제국은 너무 무서운 곳이야.”
아이리스는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공포에 질려버렸다.
아쿨타리 부족 사이에선 인류연합제국이 말 그대로 악마임이 분명하다.
그런 것치고는 외부인인 우리들을 적대하지 않는 건 신기하다.
완전 고립된 게 아니라 가끔씩 바깥으로 정찰을 내보내 바깥의 상황을 알아보아서 그런 것 같다.
“그래. 네가 여기서 태어난 게 정말 다행이지. 그런데 너, 오늘은 바빠서 내일 보자고 했었잖아.”
“원래는 그랬는데 갑자기 엄마가 나한테 너희들을 안내해주라고 했어.”
역시 세실리아가 우리 멋대로 돌아다니게 놔둘 생각이 없는 걸까?
아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이리스를 보낸 걸 보면 그냥 호의에 불과할 거야.
“아이리스, 우리가 다함께 널 따라다녀야 하니?”
“글쎄? 엄마가 그런 것까지 말해주진 않았어. 문제라도 있어?”
“딱히 문제라고 할 건 없고 라우라랑 이리스는 할 일이 있어서 나랑 에리카랑 너 이렇게 셋이서 같이 다녀야할 것 같아.”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그리고 조금 있다가 너희들 방으로 식사를 보내줄 테니까 가서 기다리고 있어. 청소는 나한테 맡기고 얼른 가.”
아이리스는 내 사랑들에게서 거의 뺏다시피 빗자루를 회수했다.
본의 아니게 사고를 몰고 다녀도 책임감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우리는 아이리스에게 뒷일을 맡기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여전히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드러누워서 등을 지졌다.
“으으으... 이거 기분 좋네.”
“그러게요. 계속 누워있고 싶을 정도에요.”
나랑 에리카는 나란히 누워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아예 다시 이불을 덮고 잠을 자고픈 생각이 들 정도였다.
“라우라, 이리스. 너희들도 누울래?”
“전 꼬리가 너무 더워져서 사양할게요. 이리스, 너는?”
“나는 맨바닥에 누워있을 때, 고개를 조금만 돌리고 있으면 바닥 열에 뿔이 달아올라서 영 별로더라. 베개를 쓰면 되지만 지금은 눕기 싫어서 그냥 앉아만 있으려고.”
두 사람은 각자의 종족특성 때문에 뜨뜻한 바닥을 별로 내켜하지 않아했다.
라우라가 꼬리의 털 때문에 더워할 거라는 건 예상했었지만 이리스의 뿔이 달궈진다는 건 상상도 못했었다.
여름엔 좀 고생을 하겠네. 햇살이 너무 뜨거워지면 뿔에 덮개라도 씌워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에리카, 넌 뿔 때문에 불편하지 않니?”
“우린 너희들이랑 다르게 뿔이 이마 위쪽에 나서 누웠을 때 불편한 건 없어. 대신에 겨울에 피부가 쉽게 건조해져서 피가 날 정도로 갈라질 때가 있긴 해. 여름엔 뿔 쪽의 피부만 새카맣게 타서 좀 웃기게 보이기도 하고.”
“그렇구나. 우린 뿔에 피부가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불편하진 않아. 고온에 좀 민감할 뿐이지. 아, 가끔 고개를 돌리다 옆에 부딪혀서 골이 울릴 때가 있긴 해.”
이리스와 에리카는 각자 뿔 때문에 겪는 고충을 서로에게 털어놓으며 묘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미안하지만 너희들의 고충은 다 내가 만든 설정 때문이란다.
자기만족으로 보기 좋게 만드는 것과 실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만드는 건 별개의 문제라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 같다.
“내 꼬리도 종종 불편할 때가 있어. 털갈이를 할 때면 사방에 털이 날려서 옷이 엉망이 되거든. 그리고 다른 사람이 꼬리를 밟거나 문틈에 꼬리가 끼이기라도 하면 엄청 아파서 눈물이 다 난다니깐.”
“그래서 네가 꼬리를 앞으로 돌려서 다리 위에 올려둘 때가 많구나?”
이리스는 내가 평소에 진지하게 보지 않았던 라우라의 특징을 언급했다.
난 그저 털이 복슬복슬해서 귀엽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나름의 고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줄은 몰랐다.
뭔가 라우라에게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응. 우리 눈표범족은 다른 수인족들보다 꼬리가 긴 편이라서 더 조심해야해. 그래서 난 스라소니족처럼 꼬리가 짧은 수인족들이 부럽더라고. 아니면 용인족들처럼 꼬리가 튼튼한 것도 부럽지.”
“아예 꼬리가 없는 선택지는 어때?”
에리카의 질문을 받은 라우라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곧 자신의 의견을 드러냈다.
“음... 아무래도 원래 있던 게 사라지는 건 좀 거부감이 드네.”
“나도 그래. 갑자기 뿔이 없어지면 정말 허전할 거야. 이리스, 너는?”
“너랑 같은 생각이야. 조금 불편한 게 있어도 내 소중한 신체의 일부분인 걸.”
이리스가 하는 말에 라우라와 에리카는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지만 나는 내 사랑들의 입장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나한테는 그런 특별한 부속물이 달려있지는 않으니 말이다.
아, 내 멋대로 만들었다 없앨 수 있는 주니어가 있긴 하지.
여태껏 잘 쓰다가 갑자기 사라지면 굉장히 섭섭할 것 같기는 하다.
“에리카님. 그리고 손님 여러분,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미닫이문 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하면서 말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들어와도 좋다고 말했고, 소반을 든 무녀들이 줄지어 들어와 우리 앞에 아침밥상을 놓아주었다.
쌀밥과 된장국에 각종 나물반찬들과 계란말이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무래도 지하에서 생활해서 그런지 수산물로 만든 요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양이 부족하시면 언제든지 이 종을 울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네, 무녀님들. 잘 먹을게요.”
우리는 무녀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뒤에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간은 적당했고, 맛도 좋아서 만족감이 점점 높아졌다.
만약 고추장에 참기름이 있었더라면 훌륭한 비빔밥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양이 적당했지만 라우라가 양이 많이 부족해보여서 종을 들고 흔들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녀가 한 명 들어와 내 주문을 받았고, 금방 준비를 해서 라우라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라우라는 밥을 3그릇은 먹은 뒤에야 만족했고, 후식으로 나온 녹차와 절편도 아주 잘 먹었다.
가끔은 라우라의 뱃속에 차원문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워진다.
“레베카님, 또 엉뚱한 생각하고 계시죠?”
“이런, 들켜버렸네. 난 너무 얼굴에 티가 많이 난다니깐.”
“그게 레베카님의 매력 중 하나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쉽게 알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것 같아요.”
“라우라, 너도 귀나 꼬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어.”
“그래서 우리 같은 수인족들은 감정을 숨기기가 참 어려워요. 그래서 거짓말하기도 어렵고요. 하지만 레베카님에 대한 제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여줄 수 있는 건 기뻐요.”
라우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잠입할 때 입는 몸에 딱 달라붙는 옷으로 갈아입고 각종 장비를 챙겼다.
그리고 그 위에 평범한 외투를 입어서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남들의 의심을 살 일이 없도록 했다.
하지만 아쿨타리 부족 밖에 없는 마을에서 다른 종족이 돌아다니는 것 자체만으로 눈길을 끌게 되니 잠입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레베카님, 저 먼저 가볼게요. 되도록이면 쓸 만한 정보를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 기대해주세요.”
“조심해서 다녀와. 무리하지는 말고. 나한테는 정보보다 네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네, 레베카님.”
라우라는 네게 달콤한 키스를 하고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방에서 나갔다.
난 그녀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저도 슬슬 나가볼게요. 아까 다른 무녀들에게 물어보니 오늘 대무녀님이 10시부터 액막이 의식을 치른다고 하시더라고요. 의식 준비를 돕다보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예요.”
“너를 향한 무녀들의 태도는 어떠니?”
“모두 가식 없이 우호적이에요. 옛날에 큐버스족과 함께 살았을 때가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중요한 의식을 준비하는 일에 제가 도움을 준다고 하니 기뻐했어요.”
“다행이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경계를 늦추지는 않도록 해.”
“네, 레베카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이리스도 나에게 키스를 해준 뒤에 방을 떠나버렸다.
나는 이리스 역시도 별 탈 없이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갑자기 둘 다 가버리니까 썰렁한 기분이드네요.”
“그러게. 이리와, 에리카.”
나는 에리카에게 손짓을 하여 그녀를 마주보는 형태로 내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를 꼭 끌어안고 볼을 비비거나 이마에 뽀뽀를 하면서 가볍게 애정표현을 하다가 진하게 키스를 했다.
에리카는 나에게서 더 많은 애정을 갈구하며 매달려왔다.
우리의 혀가 얽히고설켜 끈적끈적한 침이 길게 늘어지고, 뜨거운 숨결이 서로의 폐를 덥혔다.
나는 에리카의 민감한 젖꼭지에 달려있는 피어싱을 손으로 문지르면서 약하게 애무했고, 에리카의 숨소리에 신음이 섞여들었다.
워낙에 야릇한 신음소리에 내 보지가 젖어오는 느낌이 들었고, 에리카도 몸을 파르르 떨면서 점점 강해지는 쾌감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끝을 낼 수밖에 없었다.
애가 탄 에리카는 골반을 노골적으로 흔들면서 다음으로 넘어가자고 애원했지만 나는 받아주지 않았다.
내가 그만둔 이유는 심리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소반을 수거하러 온 무녀들이 언젠가부터 우릴 감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스가 깜빡하고 문을 닫지 않고 나갔는데, 난 그걸 인식하지 못하고 에리카를 내 품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에리카는 자신의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모르고 있으니 계속해서 음란한 몸짓을 하다가 뭔가 불길한 기분이 들었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꺄아악!”
에리카는 비명을 지르면서 허겁지겁 내 위에서 내려오더니 내 뒤로 꽁꽁 숨어버렸다.
난 에리카의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무녀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그러나 에리카는 얼마나 부끄러워하는지, 등 뒤로 뜨거운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그런 에리카를 달래주었고, 그러는 사이에 무녀들이 소반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이리스가 방으로 들어왔고, 내 품에 안겨서 칭얼거리다시피 하는 에리카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에리카가 부끄러움에서 해방된 이후에야 우린 아이리스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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