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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136화 (136/271)

〈 136화 〉 135화

* * *

좀비들은 해가 거의 다 진 뒤에야 모두 지하유적으로 돌아갔다.

아쿨타리의 뱀파이어족들은 마치 양치기처럼 좀비들을 폐허가 된 도시에서 벗어나지 않게 막으며 일정한 공간을 뱅글뱅글 돌게 만들었다.

대체 저 바글바글한 좀비들로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왜 마물의 흔적이 하필 이 숲까지 이어졌는지도 궁금하다.

결국 저 좀비목동들과 접촉을 해서 정보를 알아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밤에도 보초를 서는 사람들이 있네요. 가서 한두 명 정도 납치를 할까요?”

라우라는 언제나처럼 공격적인 해결방식을 들고 나왔다.

이렇게 어두컴컴한 밤에 눈표범족인 라우라의 은밀한 움직임이 더해진다면 저기 있는 보초들을 싹 정리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강경책을 보류하고 싶다.

“음... 우리 쪽에서 먼저 공격적으로 나가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 저 사람들이 에리카를 동족으로 인식한다면 대화가 가능할 거야.”

“만약 에리카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부족이라면 에리카에게 엄청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게 분명해요.”

라우라는 나보다 냉정하게 혹은 비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좀비목동들이 에리카의 동족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지만 라우라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저기... 내가 직접 가서 대화를 시도해보면 안 될까?”

“뭐?”

라우라는 에리카가 하는 말에 깜짝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에리카는 라우라의 손을 잡으며 진지한 눈빛을 보냈다.

“저 사람들은 내 동족이 확실해. 우리 종족은 부족 별로 맹세의 의식에 쓰이는 문양이 달라. 그러니까 저 사람들이 나랑 다른 부족일 수가 없어.”

“만약 아니라면 어떡하려고 그래? 너도 동족이고 싶지 않다면서? 왜 이제 와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야?”

“이게 가장 평화적이고 피를 덜 볼 수 있는 방법이니까.”

에리카는 라우라에게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그래도 라우라는 에리카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려했지만 옆에서 이리스가 에리카를 거들고 나서자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마안으로 상황을 보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저격으로 위협을 제거하면 돼. 지금은 보초들이 서로 멀찍이 떨어져있고, 좀비들도 다들 집으로 돌아가서 에리카가 도망칠 시간은 충분히 벌어줄 수 있어.”

“이리스, 너까지 그런 무모한 짓을 도우려고 나서면 어떡해? 에리카는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어째서 그런 위험한 일에 찬성할 수 있어?”

“에리카는 우리 집 막내가 아니야. 우리랑 동갑인 어엿한 성인이라고. 우리 멋대로 보호해준답시고 속박할 수는 없어.”

“우린 가족이잖아! 가족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서로를 지켜줘야 한다고! 난 가족을 잃기 싫어. 그래서 에리카를 보내기 싫단 말이야.”

“라우라...”

이리스는 소리를 지르며 울먹이는 라우라를 포옹해주었다.

라우라는 에리카를 얕보거나 못 믿어서가 아니라 소중한 가족을 어떤 이유에서이든 사지로 보내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에 극도로 두려움을 느끼는 라우라가 너무 안쓰러웠다.

하지만 에리카의 의지를 저버릴 수도 없었다.

지금 필요한 건 라우라를 설득하는 것이다.

“라우라, 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에리카가 맨 몸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마법갑옷을 입고 가는 거니까 너무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봐. 그리고 혼자서만 보낼 생각은 전혀 없어.”

“설마 레베카님도 같이 가실 건가요?”

“정확히는 주변에 숨어서 대기하고 있다가 위험한 일이 발생할 것 같으면 이리스가 저격으로 엄호를 하는 사이에 마법추진기를 이용해서 에리카를 확보하고 도망칠 작정이야. 급조한 계획이니까 부족한 점이 있으면 지적해줘.”

“네, 레베카님. 밤눈은 제가 밝고, 아직 레베카님은 은신에 익숙하지 않으시니 저랑 같이 움직이도록 해요. 그리고 에리카에게 드론을 배정해서 보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낯선 물건이 있으면 상대방의 경계심을 과도하게 높일 수 있어요.”

“알았어. 협조해줘서 고마워.”

“벌써 다들 의욕이 샘솟는데 저만 내뺄 수는 없잖아요.”

라우라는 내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약간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제대로 서비스를 해서 마음을 풀어줘야겠다.

“에리카, 갈 거면 얼굴에 문양 그리고 가.”

“응, 라우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막상 하려니 좀 긴장되네. 미안해.”

“미안할 거 없어. 긴장하지 않는 게 더 문제니까. 그리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도중에 못 하겠다고 돌아서면 나 진짜 화낼 거야.”

“알았어, 큰언니. 히힛.”

“으으... 너 그 표정 너무 반칙이야.”

라우라는 에리카가 활짝 웃으며 미소를 짓는 모습에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좋아했다.

그건 이리스도 마찬가지라서 둘이서 좋다고 꺅꺅거리며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이런 식으로라도 라우라의 기분이 좋아져서 다행이다.

“에리카, 내가 도와줄 게 있니?”

“아니요. 제가 스스로 할 수 있어요.”

에리카는 내 도움을 거절하고 스스로 얼굴에 특유의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저번처럼 피를 쓰는 대신에 화장품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곳저곳에 화장을 해서 평소보다 인상을 강하게 만들었다.

내 경험상 협상을 시도할 때는 위협적으로 보여서 좋을 게 없지만 그렇다고 너무 만만하게 보이는 것도 좋지 않다.

에리카도 노예가 되고, 갱단에게서 탈출한 뒤로 한동안 힘들게 바깥에서 떠돌았으니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준비 다 끝났어요.”

“좋아, 그럼 출발하자. 이리스, 뒤를 부탁할게.”

우리는 이리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마법갑옷을 입고 곧장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목표는 도시의 성벽에서 돌출되어 있는 부분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라우라를 따라서 적당한 곳에 숨고, 이리스는 마법갑옷의 힘으로 어렵지 않게 성벽을 기어 올라갔다.

그동안 나는 이리스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이리스, 상황은 어때?’

‘방금 순찰하는 사람들이 목표를 지나쳤고, 목표는 자리를 지키고 있어요. 전문적으로 훈련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빈틈이 많아요.’

‘알았어. 계속 주시하면서 특이사항이 있으면 보고해줘.’

‘네, 레베카님.’

이리스와의 짧은 대화를 끝낸 나는 정찰드론을 띄워서 에리카와 목표의 대화를 엿들을 준비를 했다.

아직 야간투시 기능은 없어도 특정 지역의 소리 정도는 잡아낼 수 있다.

나는 정찰드론에 시야공유를 사용하고, 드론의 소리가 목표에게 들리지 않도록 충분히 고도를 높였다.

정찰드론으로 보는 시야는 횃불 옆에 사람이 서있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에리카와 목표 사이의 대화는 잘 들렸다.

“안녕하세요?”

“헉! 넌 누구냐? 제국군 주제에 감히 아쿨타리의 영역에 침범하다니!”

목표는 에리카가 살갑게 건네는 인사에 깜짝 놀라서는 겁에 질린 목소리를 냈다.

드론의 시야로는 잘 보이지 않아도 벌벌 떨면서 창을 겨누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에요! 전 당신과 같은 부족이에요. 동족이라고요!”

“뭐? 거기서 꼼짝 말고 있어. 문양을 확인할 테니까. 어? 이건...”

“제 말 맞죠?”

“그, 그렇기는 한데 외지인인 네가 어떻게 이 문양을 알고 있지? 너무 수상해.”

다행히 목표는 기대 이상으로 협조적이었다.

만약 에리카가 나쁜 마음을 먹은 상태였더라면 바로 살해당했을 정도로 순진한 보초였다.

아쿨타리를 지키는 사람들은 저런 사람을 보초로 내세울 정도로 인력난이 심한 모양이다.

“전 갓난아기일 때 프랑카의 고아원에 맡겨졌어요. 그래서 뿌리를 찾기 위해서 여행을 하다가 이곳까지 오게 된 거예요.”

“맙소사! 그런 슬픈 사정이 있었구나. 진짜 집으로 돌아온 걸 환영해! 이름이 뭐야?”

목표는 아예 에리카를 동정하면서 자신의 일인 것처럼 안타까워했다.

이 녀석 대체 뭐야? 왜 이렇게 착한데?

낮에 좀비를 풀어놓고 도시를 누비게 만든 사람들의 일원이 맞나 모르겠다.

지금까지 봐서는 납치작전을 쓰지 않기를 잘한 것 같다.

“에리카라고 해요.”

“에리카? 좋은 이름이네. 난 아이리스야.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당장 경비대장님 모셔올게.”

“네, 아이리스 씨.”

하하하,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상황에 갑자기 나타난 사람과 친근하게 대화를 한 것도 모자라서 그 사람을 두고 자리를 비워버렸다.

아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이 사람들 너무 대책이 없는데?

정말 모험가들을 한 명 빼고 몰살시킨 그 부족의 일원이 맞나 의심스럽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볼을 꼬집힌 채로 질질 끌려오다시피 하는 아이리스와 덩치가 크고 수염이 덥수룩한 무섭게 생긴 남자가 다른 사람들을 대동하고서 에리카 앞에 나타났다.

그는 아이리스에 비해서 훨씬 더 제대로 된 전사처럼 보였다.

“아이리스! 넌 대체 뭘 믿고 이 사람을 여기에 방치한 거냐? 이 사람이 우리 동족이 아니라 적이었다면 우린 모두 죽었을 거다! 지금 즉시 널 경비대에서 해임하겠다!”

“아, 안 돼요! 제발 자르지는 말아주세요. 제가 이 자리에서 보초를 서지 않으면 엄마가 절 죽일 거예요!”

“대무녀님의 손에 죽는 게 나한테 죽는 것보다는 덜 아플 거다.”

“히익! 누가 나 좀 살려줘요!”

아이리스는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크게 소리치면서 소란을 피웠다.

결국 질려버린 경비대장이 아이리스를 놓아주었고, 놀랍게도 그녀는 헐레벌떡 에리카의 뒤로 숨었다.

야! 아이리스, 너 진짜 미쳤어? 그 정신으로 어떻게 경비대에 들어간 거야?

그래, 계속 박살나는 상식을 찾느니 그냥 있는 그대로 지금 상황을 받아들여야겠다.

“저, 저기... 진짜로 죽이실 건가요?”

“난 동족은 죽이지 않아. 그런데 아이리스가 말하기를 네가 고아원에 맡겨졌지만 뿌리를 찾아서 왔다고 하던데 선뜻 믿기 어려워. 그래도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일이야.”

경비대장은 에리카에게는 그럭저럭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다짜고짜 공격하면 어쩌나 걱정스러웠지만 그렇게 막나가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네! 이게 바로 증거에요.”

“이건! 어떻게 이런 일이... 흠흠, 확실히 우리 부족에 대한 정보가 적혀있군요. 조작된 흔적도 전혀 없고요.”

경비대장은 에리카의 낡은 쪽지를 보더니 애써 놀라움을 감추더니 갑자기 존댓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거 에리카가 정말 공주님일지도 모르겠는 걸?

아, 내 목숨이 여러 의미에서 위태로워지는 순간이 점점 다가오는 것 같다.

이대로 도망칠까?

아니야, 아무리 내 목숨이 위험해도 에리카를 버리고 갈 수는 없어.

“그럼 이제 저를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주실 수 있는 건가요?”

“그건 대무녀님과 족장님의 뜻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도 제 권한으로 우리가 사는 마을까지 데려갈 수는 있습니다. 지금 바로 안내해드리지요.”

“자, 잠시 만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알겠습니다. 천천히 생각해보십시오.”

경비대장은 관대하게도 에리카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고, 에리카는 황급히 내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레베카님!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냥 혼자서 따라갈까요? 아니면 동료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할까요?’

‘일단 외부인은 어떻게 처리 하냐고 물어봐. 그럼 대충 눈치는 채겠지.’

‘네, 레베카님.’

내 지시를 받은 에리카는 경비대장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경비대장님? 혹시 여기에 우연히 발을 들인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하시나요?”

“보통은 아무도 없는 척 합니다. 그들이 선제공격을 한다면 죽이고요.”

“그, 그럼 만약에 제 친구들이 여기에 있으면 어쩌죠?”

“역시 혼자 온 게 아니군요.”

“네...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그래서 가능하다면 제 진짜 고향을 보여주고 싶어요.”

에리카는 경비대장에게 애원을 하듯 말했다.

아이리스의 애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에리카의 애원은 잘 통하는지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몇 명입니까?”

“저까지 합쳐서 4명이요.”

“예언이 무섭게도 맞아떨어지네...”

“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제 권한을 최대한으로 쓰면 어떻게든 함께 갈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에리카님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기꺼이 해드려야지요. 준비되시는 대로 이곳으로 오시면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네!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요.”

에리카는 경비대장과의 대화를 끝내고 성벽에서 내려와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그녀의 활짝 핀 미소를 보니까 내 마음이 다 뭉클해졌다.

“레베카님, 성공이에요!”

“그래, 그래. 정말 잘했어. 너희 부족 사람들이 호의적이라 다행이야.”

“네! 다들 좋은 사람들인 것 같아요.”

“숨어사는 사람들이 동족이 아닌 우리까지 받아주는 걸 보면 생각보다 덜 배타적인 사람들인 것 같아. 라우라, 넌 어떻게 생각하니?”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라우라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라우라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경비대장의 반응으로 봐서는 함정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경우에 따라 에리카를 우리에게서 떼어내려고 할 수 있으니 마법갑옷은 계속 입고 있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역시 드론은 숨기는 게 좋겠죠.”

“나도 너랑 같은 생각이야. 최대한 조심하자.”

“네, 레베카님!”

라우라는 나와 의견이 일치한다는 걸 알고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말 한 마디만으로도 별로 좋지 않았던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니 안심이 된다.

‘이리스, 짐을 다 챙겨서 우리가 있는 쪽으로 오도록 해. 혼자서 할 수 있지?’

‘네, 레베카님. 최대한 빨리 갈게요.’

나는 텔레파시를 통해 이리스에게 합류를 지시했고, 그녀가 오는 동안 지도창을 보면서 탈출로를 짰다.

아쿨타리 사람들의 무장상태를 봐서는 하나도 무서울 게 없지만 좀비들의 물량을 감당할 수는 없으니 도망치는 게 최선이다.

곧 이리스가 우리와 합류했고, 우리는 다함께 성벽 위로 올라가 낯선 부족과 마주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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