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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134화 (134/271)

〈 134화 〉 133화

* * *

우리는 아침식사를 끝낸 이후에 콘라드와 함께 다시 모험가길드를 찾았다.

길드 주변은 모험가들의 노력 덕에 거의 다 정리가 되었고, 지금은 반쯤 무너진 길드건물에서 중요한 물건들을 빼내고 있었다.

아무리 1층은 멀쩡한 편이라도 위층이 거의 다 무너졌으니 그 안에서 일하고 싶지는 않겠지.

듣자하니 주변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E급과 D급 모험가들이다.

이 사람들은 동원령을 내린 기사단으로부터 직접 일당을 받고, 만약 사고가 나면 책임도 그쪽에서 진다고 한다.

E급과 D급 모험가들이 받는 일당은 그들이 평소에 받을 수 있는 의뢰비보다 더 많다.

그래서 그런지 강제로 동원 당했는데도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반면에 소수의 C급 모험가들과 한 손에 꼽을 정도의 B급 모험가들은 하급모험가들을 감독하면서 현장을 지휘했데, 이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하급모험가들보다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데도 한푼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게도 자신들의 격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C급 이상의 상급모험가들은 그 밑의 하급모험가들과 달리 돈뿐만 아니라 명예도 함께 챙기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와 닿는다.

나도 기회가 닿는다면 기꺼이 도와줄 수도 있지만 지금은 굳이 나설 필요가 없어 보인다.

“레베카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콘라드는 건물 근처에 있는 천막들 중에서 가장 큰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가장 크다고 해봤자 주변에 있는 것들보다 약간 더 큰 정도다.

보아하니 모험가길드는 어제는 중단되었던 행정업무를 오늘부터 이런 식으로 천막에서 해결하려는 것 같다.

길드건물이 새로 지어질 때까지 계속 천막생활을 하지는 않겠지만 당분간은 다들 고생하지 싶다.

“레베카님, 저희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너희들은 내 사람들이니까 누가 노예랍시고 일을 시켜도 응하지 않도록 해. 라우라, 네게 상황판단을 맡길게.”

“네, 레베카님.”

나는 내 사랑들을 천막 밖에 두고서 콘라드와 함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콘라드를 따라서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어제 만났던 드워프족 길드장이 진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길드장님, 분부하신대로 명예기사 레베카님을 모셔왔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레베카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콘라드, 레베카님을 모셔오느라 수고 많았네. 이제 가서 할 일을 하도록 하게나.”

길드장의 지시를 받은 콘라드는 내게 인사를 한 뒤에 바로 천막에서 나갔다.

나는 길드장이 빼주는 의자에 앉았고, 내 앞에 커피잔이 놓아졌다.

이리스가 타주는 커피에 비하면 뭔가 모자란 느낌이 들었지만, 향은 충분히 좋았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자기소개조차 잊고 말았습니다. 제 이름은 드미트리입니다. 카르디아 지부의 길드장을 맡고 있습니다.”

자신을 드미트리라고 소개한 드워프족 길드장은 내게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차렸다.

난 길드장은 프랑카의 사례처럼 모두 작위 없는 귀족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만나서 반가워요. 아침에 콘라드 씨에게서 들었는데, 길드장님이 제게 B급 승급시험을 칠 수 있게 해주신다더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부길드장인 콘라드를 구해준 일에 대한 보답을 해주고 싶기도 하고, 마침 본부에서 레베카님께 B급 승급시험을 드리라는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모험가길드에서 어떻게 제 움직임을 알고 여기로 그런 공문을 보낸 건가요?”

나는 의심과 불쾌함이 가득 담긴 눈초리를 드미트리에게 보냈다.

그가 하는 말은 모험가길드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모험가길드를 탈퇴해버릴 거다.

“본부길드장님이 곧 황제폐하이시니 어려울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모험가길드 자체에서 조합원을 추적하거나 감시하는 일은 절대로 없으니 믿어주십시오.”

“황제폐하께서 본부길드장님이시라고요? 그게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애초에 모험가길드는 황제폐하께서 28년 전에 개인적으로 설립하신 조합이니까요.”

“전 여태 그런 중요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네요.”

“그럴 수도 있지요. 보통 모험가길드에 가입하는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이지 길드의 역사를 알고 국가에 충성하고자 가입하는 경우가 없으니 말입니다.”

난 드미트리의 말을 듣고 나니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설마 황제가 모험가길드를 설립한 사람이자, 모험가길드의 총책임자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대체 내가 언제부터 황제의 손아귀에 올라가 있었던 걸까?

엘리자베스가 내게 말해줬던 것을 생각해보면 아마 내가 엘카힘과 싸운 이후부터겠지.

그리고 리제르카와 제르디아에서 내가 겪었던 일로 인해서 황제가 나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싶어진 모양이다.

난 그게 정말 달갑지 않다.

“죄송하지만 승급시험을 거부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공문에 본인의 의지를 존중하라는 내용이 확실히 담겨있으니까요.”

“휴우, 다행이네요. 전 이런 식으로 과도한 특혜를 받고 싶지 않아요.”

“그 마음 이해합니다. 정치를 하시는 분들의 눈에 띄면 꽤나 피곤해지니 말입니다.”

다행히도 승급시험에 강제성은 없었다.

만약 강제였더라면 난 모험가길드에 다시는 얼씬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가 나랑 친구나 하자고 호의를 베푸는 건 아닐 것이다.

황제가 베푸는 호의는 분명 큰 대가를 요구하는 사태로 되돌아올 것이다.

물론 황제의 의도대로 잘 따라준다면야 가면쟁이들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겠지.

그러나 만에 하나 황제가 가면쟁이라면 난 꼼짝없이 놈들의 의도대로 당하고 말 것이다.

“승급시험 말고는 따로 하실 말씀이 있나요?”

“그게 전부였습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어차피 오늘은 외출할 생각이라서 괜찮아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난 한 모금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 천막에 불쑥 들어와서는 다급한 표정으로 드미트리에게 달려갔다.

“길드장님! 지금 바로 나와 보셔야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가? 진정하고 말해보게.”

“추적 임무에 나갔던 모험가가 부상당한채로 혼자 돌아왔는데, 다른 동료들은 뱀파이어족의 공격을 받아서 죽었다고 합니다.”

드미트리는 길드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의 보고를 받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그냥 내 사랑들을 데리고 콘라드의 집으로 돌아가려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드미트리의 뒤를 따라갔다.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는 곳으로 가보니 무릎에 화살을 맞은 사람과 그를 치료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무릎을 부상당한 건 안타깝지만 어쨌든 살아남았으니 이젠 모험가가 아니라 경비병 일자리를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드미트리는 치료를 받고 있는 모험가에게 다가가 상황을 캐묻기 시작했다.

“다른 생존자는 없는가?”

“네, 길드장님. 다른 동료들은 모두 놈들에게 당했습니다.”

“대체 어느 부족이지? 분명 이 근방의 뱀파이어족들과는 평화협정을 맺었을 텐데.”

“제가 8년 동안 모험가로 활동하면서 처음 보는 부족이었습니다. 마물의 흔적을 쫓아서 지하유적 근처의 숲으로 들어갔다가 그들과 조우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희들의 말은 듣지도 않고 바로 공격을 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뱀파이어족 부족이라... 난 그 말을 듣자마자 에리카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 기회에 자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다짜고짜 공격을 해버리는 호전적인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내게는 적절한 대화수단들이 있으니 수틀리면 힘을 써서 대화를 시작하면 된다.

“자네는 당장 인근의 모든 지부에 내 이름으로 협조공문을 보내서 각 지역의 뱀파이어족 부족들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게. 그리고 부상자와 의료진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드미트리의 명령을 들은 길드직원과 모험가들은 현장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나는 떠나지 않고 자리에 남아서 방금 길드장에게 사정을 설명했던 모험가에게로 다가갔다.

“나는 명예기사 레베카에요. 그 정체모를 부족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아는 건 뭐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에리카, 그 쪽지를 잠깐 빌려줘.”

내 부탁을 들은 에리카는 눈치껏 자신이 고아원 앞에 맡겨졌을 때 함께 있었던 낡은 쪽지를 꺼내서 내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나는 쪽지를 조심스럽게 펼쳐서 모험가에게 보여주었다.

“얼굴에 이런 식의 문양을 그리고 있던 사람들은 없던가요?”

“비슷한 것 같기는 한데 확신을 못하겠습니다. 워낙에 정신이 없었던지라... 잠깐만요, 여기 아쿨타리라는 게 부족의 이름입니까?”

“어... 맞아요.”

“그 사람들이 아쿨타리의 영역에 발을 들이지 말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확실한 건가요? 정말로요?”

“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실하게 기억합니다.”

모험가는 확신에 찬 눈으로 내게 대답했다.

이 사람이 잘못 들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일단은 기대를 걸어볼만한 것 같다.

“자네 지금 아쿨타리라고 했나?”

“네, 길드장님.”

“그건 부족의 이름이 아니라 통일전쟁 이전에 카르디아 지방에 존재했던 도시국가의 이름일세. 드물게도 뱀파이어족이 다스리는 나라였었지.”

“저는 처음 듣는 나라로군요.”

“그야 이 지역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알기 힘든 작은 나라니 어쩔 수 없지.”

나는 드미트리가 하는 말을 듣고는 내 귀를 의심했다.

어째서 에리카의 쪽지에 멸망한 나라의 국명이 적혀있었던 걸까?

에리카의 혈통이 아쿨타리라는 나라를 다스리던 지배층과 관련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고귀한 공주님에게 온갖 변태적인 짓을 저질러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길드장님, 지하유적은 어디에 있나요?”

“북동쪽 숲의 깊은 곳에 있습니다. 혹시 그곳에 가실 생각입니까?”

“네, 그럴만한 이유가 있거든요.”

“그렇군요. 사실 B급 승급시험이 한 달 기한으로 지하유적의 일정구역을 탐사하고 지도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승급시험을 하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절차를 밟아드리겠습니다.”

이런, 어차피 황제의 의도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구나.

이 상황 자체가 황제의 연출은 아니겠지만 엘리자베스의 피를 좋아한다는 아버지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다.

가만히 있어도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일이 자신의 의도대로 돌아가니 말이다.

“어쩔 수 없죠. 그렇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서 머무르고 계신 곳으로 의뢰서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부탁할게요. 얘들아, 이만 가자.”

나는 내 사랑들을 데리고서 현장을 떠나 특수상점으로 향했다.

원래는 단순히 전송실을 활성화시키는 게 목표였지만 지금은 지하유적 탐사에 필요한 물품을 사는 것도 목표 중 하나가 되었다.

“레베카님, 정말 그곳으로 가실 건가요?”

“응. 네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하지만 그 사람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모험가들을 공격했잖아요. 저희도 공격을 받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도 위험하지만 그 사람들도 많이 죽어버리겠죠.”

에리카는 우리가 피해를 보는 건 물론이고 혹시나 자신이 속한 부족일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 원치 않았다.

공격을 한 자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 중에서 에리카의 가족이 있다면 정말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복을 선언하는 일은 없을 거다.

이런 세상에서 무장해제를 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도 없을 테니 말이다.

“걱정 마. 그 사람들이 네가 속한 부족이라면, 네 얼굴을 보자마자 환영해줄 거라고 생각해.”

“전 고아원에 버려진 사람인데 과연 반겨줄까요?”

“에리카, 그 쪽지는 네가 뿌리를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남겨둔 거라고 생각해. 정말 널 버린 거라면 번거롭게 그런 기록을 남겨두지 않겠지. 그러니 지금은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도록 해.”

“레베카님, 전 가족을 찾더라도 계속 레베카님을 따를 거예요. 그러니까 레베카님도 쭉 제 곁에 있어주세요.”

“물론이지. 우린 모두 평생 함께할 사람들이야.”

에리카는 양손으로 내 손을 꼭 잡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나는 에리카가 불안에 떠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진정되기를 기다려주었다.

“레베카님, 지하유적에 가기 전에 다른 스케쥴을 먼저 소화해야하지 않을까요? 로베르트 도련님의 생일이나 엠마 씨의 결혼식이 있잖아요.”

“좋은 지적이야, 이리스. 그렇지 않아도 내일 프랑카로 넘어가려고 했어. 어차피 승급시험의 시간제한은 한 달이니까 급할 것 없지.”

“날짜 상으론 로베르트 도련님의 생일이 먼저지요?”

“맞아. 내가 알기론 생일파티와 결혼식은 이틀 차이야. 여유롭게 소화할 수 있는 일정이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황녀님을 만나서 이번 승급시험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는지 물어봐야할 것 같아.”

“황제폐하께서 레베카님에게 관심을 가지신다니 왠지 무섭네요.”

“좀 그렇지? 가면쟁이들이 걱정이라면 권력을 총동원해서 솎아내면 될 텐데 말이야. 딱히 황권이 약한 것도 아니고. 뭔가 구린 냄새가 나.”

“아무런 일도 없으면 좋겠어요.”

이번에는 이리스가 내게 안겨들었다.

그녀는 나와 같은 불안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황제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서 날 이용하려는 것 같은 불길한 기분 말이다.

한 번 권력자에게 호되게 당해본 경험이 있는 이리스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 아무리 황제라도 레베카님께 위해를 가한다면 목숨을 버려서라도 응징하고 말 거예요. 레베카님은 저희들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분이니까요.”

라우라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녀 혼자서 황제에게 보복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래도 내 편을 들어주는 라우라가 고마웠다.

“고맙지만 목숨을 버린다는 말은 쉽게 하지 말아줘. 그런 말은 듣기만 해도 괴롭거든.”

“아! 죄송해요, 레베카님.”

“괜찮아. 그만큼 네가 날 많이 사랑해줘서 그런 거니까. 다들 걱정이 많겠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가 함께라면 극복할 수 있어. 그러니 웬만하면 밝은 얼굴로 지내자.”

나는 내 사랑들을 한꺼번에 포옹했고, 그녀들과 키스를 나누며 사기를 충전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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