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 129화
* * *
제르디아를 떠난 지 오늘로 딱 일주일이 지났다.
카르디아로 향하는 길은 소문대로 험한 산길이기는 했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말을 타고 지나갈 수 없는 길이 종종 나타나서 말에서 내려 끌고 가는 일이 번거로울 뿐이었다.
원래 이 길은 식수확보가 어려워서 사람보다 훨씬 물을 많이 먹는 말이나 소 같은 큰 가축들을 데리고 오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치트가방에 식수가 들어있는 물병을 잔뜩 집어넣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밀폐된 용기만 있다면 언제든지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신선한 식재료를 꺼낼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다.
한번은 멋지게 생긴 풍뎅이 몇 마리를 잡아다가 유리병에 넣고 치트가방에 보관해보려고 했었는데, 아예 들어가질 않았다.
무슨 짓을 해도 살아있는 동물은 넣을 수가 없었지만 채소나 과일, 버섯 같은 건 죽었다고 보기 어려운데도 적당한 상자에 넣으면 아무런 문제없이 쏙 들어갔다.
심지어 살아있는 게 분명한 꽃이 핀 화분도 들어갔다.
이럴 거면 식물이나 균류는 해당사항이 없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사실 내가 치트가방에게 모순을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언젠가 라우라가 치트가방에 파괴불가 기능이 있으니 급소를 방어하는 용도로 쓰면 좋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도 좋은 생각이라며 치트가방에다 총을 쐈었는데 마치 유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총알을 그냥 통과시켰다.
파괴불가 기능이 있는 다른 물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엄밀히 말해서 파괴불가가 아니라 파괴회피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튼 난 그 날 이후로 그런 물건들에 목숨을 맡길 생각을 전혀 하질 않고 있다.
“레베카님, 이제 야영을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시간 참 빠르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평평한 곳이 나오니까 거기서 텐트를 치자.”
나는 앞서가는 라우라가 하는 말에 즉시 지도창에서 야영할 장소를 찾아서 대답해주었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가 말했던 공터에 도달했고, 간단하게 텐트를 치고 불을 피웠다.
공간이 별로 넓지 않아서 말 4마리와 텐트 하나에 모닥불까지 피우자 꽉 들어찬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이 근방에서는 가장 넓은 장소니까 불만을 가지지 않도록 하자.
언제나처럼 나는 내일 이용할 길을 미리 확인하고, 이리스는 요리를 하고, 에리카는 말들을 관리해주고, 라우라는 주변의 안전을 확인했다.
이제는 완전히 정착된 역할분담이라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들 움직였다.
난 여행을 하는 동안엔 지금처럼 하루가 마무리되는 느낌이 들 때가 좋다.
하루치 과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기분이 들어서다.
“이리스, 오늘 메뉴는 뭐야?”
“오랜만에 카레라이스를 만들려고요.”
“오, 그거 좋네.”
“그렇죠? 마침 에리카가 매운 음식은 별로 안 좋아해도 카레는 잘 먹어서 다행이에요.”
이리스는 말들의 편자를 갈아주고 있는 에리카를 보면서 말했다.
그녀는 어쩔 때는 나보다도 에리카를 더 많이 신경써주는 것 같다.
처음부터 에리카를 엄청 귀여워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긴 하다.
“이리스, 항상 고마워.”
“저야말로 늘 레베카님께 고마워하고 있어요. 저희들의 생활을 혼자서 책임지고 계시잖아요. 그러니 이렇게라도 도움을 드려야지요.”
“넌 정말 좋은 아내가 될 것 같아.”
“헤헤헤. 기왕이면 좋은 엄마도 되고 싶어요.”
이리스는 잊을만하면 지금처럼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난 그게 싫은 건 아니지만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라 이번 기회에 이유를 들어봐야겠다.
“넌 왜 그렇게 엄마가 되고 싶은 거니? 아, 너한테 화내는 게 아니니까 편안하게 말해.”
“저희 엄마가 살아있을 때 저한테 엄청 잘해주셨거든요. 그래서 저도 그런 사랑을 제 아이에게 나누어주고 싶어요.”
“그렇구나. 미안, 내가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없는 사람이라서.”
“아니에요. 그냥 제가 욕심을 부리는 것뿐인 걸요.”
이리스는 감자를 깎다가 말고 내 볼에 입을 맞추며 나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난 언제나 내게 순한 태도를 보이는 이리스가 너무 좋다.
“언젠가 네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게 된다면, 그땐 너한테 먼저 말해줄게.”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저보다 라우라부터 찾아가세요. 라우라가 레베카님께는 그런 말을 잘 하질 않아서 그렇지 저만큼이나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친구에요.”
“정말? 난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네...”
나는 이리스가 하는 말에 조금 충격을 받고 말았다.
라우라에 대해서는 다른 애인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
혹시 나한테 쌓인 게 있지는 않을까하는 걱정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아무래도 라우라에게 가봐야 할 것 같아.”
“이거 가져가세요. 라우라는 먹을 것을 주면 얌전해지잖아요.”
“맞아. 처음 만났을 때도 날 경계하면서도 먹는 건 아주 잘 먹었었지.”
나는 이리스가 주는 잘 익은 토마토를 받아들고 라우라를 찾아 나섰다.
미니맵을 보니 라우라는 마침 야영지로 돌아오고 있었고, 나는 발 빠르게 움직여 그녀의 앞에 섰다.
“레베카님,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세요?”
“급한 일이라기보다는 그냥 너랑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래.”
“그럼 저랑 잠깐 산책이라도 하실래요?”
“좋아.”
나는 라우라가 내미는 손을 잡고서 그녀를 따라 어스름이 내려앉은 산길을 걸었다.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라우라가 손을 잡아주고 있어서 든든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라우라에 대한 의존도가 더 커지는 것이 이러다 주종관계가 역전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내가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방치할 일은 없을 거다.
내 하렘이지, 라우라의 하렘이 아니니 말이다.
“레베카님, 그 토마토는 왜 가져오셨어요?”
“너 주려고 가져왔지.”
“고마워요. 음... 맛있어!”
라우라는 내가 주는 토마토를 받아들자마자 눈웃음을 지으면서 한입 베어 물고는 행복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라우라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언제나 복스럽게 잘 먹기 때문이다.
라우라는 순식간에 토마토를 흔적도 없이 먹어치우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 먹었다. 히힛. 레베카님, 오늘 저녁은 뭔가요?”
“이리스가 카레라이스를 준비하고 있어.”
“정말요? 이리스가 하는 건 뭐든지 다 맛있어서 이번에도 기대돼요.”
“나도 그래. 그나저나 우리가 이렇게 단 둘이서만 길을 걷는 것도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예전엔 이게 당연한 것이었는데 말이죠.”
라우라는 나와 팔짱을 끼면서 애교를 부렸다.
그녀에게서는 어떠한 후회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나에 대한 사랑만이 보였다.
“내가 최근에 너한테 너무 소홀했었던 것 같지 않니?”
“소홀한 게 아니라 저에게만 주던 사랑을 이리스와 에리카에게도 나눠주다 보니 시간상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네가 진심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고 지냈던 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아, 역시 이리스에게서 그 말을 듣고 왔군요?”
“맞아. 혹시 기분 나빴니?”
“아니요. 엄청 중요한 비밀도 아니고, 당장 알려져도 문제가 없는 일이니까요. 이리스한테도 언젠가는 레베카님이 알게 될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었어요.”
“난 너도 이리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곤 전혀 짐작하지 못했었어.”
“저도 사랑에 푹 빠져서 레베카님과 평생의 반려가 되기로 결심한 여자랍니다.”
라우라는 그 말과 함께 날 끌어당기더니 내게 진하게 키스를 해주었다.
나는 그녀의 입술과 혀를 감촉을 느끼며 그녀의 뜨거운 숨결을 탐닉했다.
그녀와 맞잡은 손에서 서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묻어나와 전신을 타고 흘렀다.
마치 처음 그녀와 키스를 했을 때처럼 짜릿한 감각이 나를 즐겁게 했다.
“사랑해요, 레베카님. 우리 사이에 아이가 없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그러니 이루어줄 수 없는 소원 때문에 고민하지는 마세요. 이리스도 그건 잘 알고 있어요. 단지, 그 친구는 어린 시절의 꿈을 쉽게 버릴 수 없는 것뿐이에요.”
“라우라, 난 언제나 너에게 조언을 듣기만 하고 도움을 주지는 못하는 구나.”
“에이. 그런 말씀마세요. 이렇게 제 곁에서 관심과 사랑을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응. 고마워. 사랑해.”
나는 다시 라우라에게 키스를 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것들 때문에 깜짝 놀라서 라우라와 함께 나무 밑으로 몸을 피했다.
난 눈치 없이 분위기를 망치는 상황 때문에 화가 치솟았지만 추락한 것들의 정체를 알고 나서는 충격을 받고 말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새들이 우리 주변에서 힘겹게 퍼덕거리다가 곧 피를 토하며 죽어버렸다.
그리고 이제 막 떠오른 달빛 아래로 집채만 한 비행생물이 두 쌍의 날개를 커다란 퍼덕이며 순식간에 우리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생물과는 거리가 멀게 생긴 놈이 내지르는 기분 나쁜 포효 때문에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레베카님, 하늘에 마물이 날아다니고 있어요!’
‘불은 껐어?’
‘네, 바로 조치를 취했고 지금은 에리카랑 같이 숨어있어요.’
‘잘했어. 마물이 멀어지면 다시 연락을 줘.’
‘네, 레베카님.’
나는 이리스의 텔레파시 덕분에 지금 우리 야영지 상공을 선회하고 있는 괴물의 정체가 마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 커다란 덩치를 봐서는 분명 상급마물일 것이다.
아마도 와이번을 숙주로 남은 악마기생충의 산물이겠지.
‘레베카님, 마물이 북동쪽으로 날아갔어요. 아마 이쪽으로 다시 돌아오진 않을 거예요.’
‘다행이네. 그쪽엔 문제없니?’
‘네, 아무런 문제없어요. 레베카님이랑 라우라는요?’
‘새떼가 추락해서 죽은 것 말고는 괜찮아. 지금 바로 합류할게.’
나는 이리스와의 텔레파시를 끝내고 라우라와 함께 야영지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내 옆에 있던 라우라가 갑자기 앞으로 뛰쳐나가서는 새 한 마리를 주워왔다.
“얘는 아직 살아있어요. 마물에게 직접 당한 게 아니라 다른 새들 때문에 같이 떨어진 것 같아요.”
라우라의 손에는 매 한마리가 들려있었다.
날개는 기형적으로 꺾여있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걸 보니 방치하면 곧 죽어버릴 게 분명했다.
녀석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나와 라우라를 번갈아 눈에 담았다.
저건 분명 도움을 청하는 눈빛이다.
“회복캡슐을 먹이면 살릴 수 있을 거야. 아마도.”
나는 라우라에게서 조심스럽게 매를 받은 뒤에 녀석의 날개를 올바른 각도로 돌려주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고속회복캡슐을 꺼내서 매에게 먹였다.
난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면서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시도한 일인데, 다행히 효과가 좋아서 매가 금방 기운을 차렸다.
하지만 날개를 완전히 치유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한 마리라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죽은 새들이 불쌍하네.”
“마물은 살아있는 거라면 다 죽이려고 드니까 어쩔 수 없지요. 얘들은 정말 운이 없었던 거예요.”
“그러게. 전부 모아서 불태우자. 오염을 방치할 수는 없어.”
“네, 레베카님.”
나는 매를 안전한 곳에 내려놓고 라우라와 함께 안전을 위해 마법갑옷을 입고서 새들의 시체를 한데 모은 뒤에 화염탄으로 불태웠다.
굉장히 역한 냄새가 났지만 부정한 오염을 치워냈다고 생각하니 뿌듯했다.
일을 마친 우리는 마법갑옷을 벗은 뒤에 매를 데리고서 야영지로 돌아갔다.
다행히 야영지에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고, 완성된 카레의 향이 물씬 풍겼다.
이리스와 에리카는 우리를 보자마자 달려와서 포옹을 해주었다.
짧은 시간 동안 굉장히 불안했던 모양이다.
“마물이 우릴 공격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런데 이리스, 아까 그게 북동쪽으로 날아갔다고 했었지?”
“네, 레베카님. 하필이면 우리가 가는 방향이랑 똑같아요.”
“그러게... 잠깐, 설마 마을을 공격하러 간 건가?”
“그럴지도 몰라요. 애초부터 공격목표가 따로 있었는데 우리 모닥불에 잠시 관심을 보였을 가능성이 높아요.”
“큰일이네. 저런 괴물은 기사단도 감당하기 힘든데... 우리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니 일단 오늘 밤은 조용히 보내도록 하자.”
보통 영웅적인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이라면 상급마물의 뒤를 쫓겠지만, 난 그런 용사님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날짐승을 추적하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고, 따라간다 하더라도 우리 4명이서 날아다니는 상급마물을 물리치는 건 불가능하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내 사랑들의 안전을 지키는 게 최선의 선택이다.
“레베카님, 그 친구는 뭔가요? 먹으려고 잡아온 건 아니죠?”
“에리카, 얘는 식량이 아니라 추락한 새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녀석이야.”
“아하! 쟤가 돌봐줘도 될까요? 예전에 둥지에서 떨어진 새들을 키워준 적이 몇 번 있거든요.”
“그래? 그럼 믿고 맡길게.”
나는 에리카에게 매를 넘겨주었고, 에리카는 기쁜 마음으로 매를 받아들고 녀석을 귀여워해주었다.
에리카가 매를 다 나을 때까지 돌봐주고 나면 녀석에게 날개 길들이기 스킬을 사용해봐야겠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앞으로 함께 지내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상급마물이 나타났다는 건 이번에도 가면쟁이들이 일을 저지른 걸까?”
“글쎄요. 마물이 놈들의 전유물은 아니니까 속단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만약 통제를 받는 상태였다면 방금처럼 무의미한 학살은 하지 않았을 것 같고요.”
나는 라우라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통제를 받는 마물은 무의미한 파괴활동은 하지 않는다.
통제하는 사람의 성격이 맛이 간 사람이라면 보이는 대로 다 죽이라고 명령하겠지만...
“만약에 카르디아에 가서도 가면쟁이들이랑 엮이게 된다면 정말 화가 날 것 같네.”
“그렇게 된다면 이번에도 엘 어쩌고 하는 놈들을 처리하고 새로운 힘을 손에 넣으세요. 저희들이 적극적으로 도와드릴게요.”
“라우라, 난 새로운 능력도 좋지만 너희들이랑 그냥 마음 놓고 여행을 다니고 싶은 걸.”
“뭐든지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게 인생이라고들 하지요.”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이렇게 이리스의 맛있는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것만 하더라도 마음대로 풀리는 일이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해. 잘 먹을 게, 이리스.”
나와 라우라, 에리카는 저마다 이리스에게 인사를 하고 맛있는 저녁식사를 즐겼다.
* * *